내가 사는 동네 아파트 길 건너 맞은편에 OO 문화센터가 하나 있다. 동네 문화센터라는 곳은 그렇게 유심하게 처다보지도 않았고 간혹 집으로 배달되는 광고홍보 전단지 또한 상세하게 본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동네 문화센터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배울 것은 고사하고 사진 찍기도 바쁘고 더욱이 다른 것에 눈 돌릴 시간도 없으니 무심코 그러려니 했었다. 와이프가 광고 전단지를 보더니," 여기는 사진 강좌가 없네?"라고 한마디 건넸다. "뭐 없을 수도 있지. 문화센터라고 다 있을 이유도 없잖아," 사진은 일반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질 정도로 수요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익히 경험해온 터라 시큰둥 했었다.
여기도 사진 강좌 하나 개설했으면 좋겠네. 요즘 그래도 모두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고 하잖아.라며 와이프가 언급을 했다."물론 나쁠 것도 없지만 수강생이 있을까?" "당신 여기에 사진 강좌 하나 개설 요청을 하면 어떻까?"
아. 물론 근사한 제안이고 문화센터에서 사진 강좌라도 있으면 그동안의 사진에 대한 썰을 풀어 내는데 좋은 역할을 할 자신도 있고, 따지고 보면 내가 처음 사진을 접하고 시작했을 때의 시행착오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동네에 그런 강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헤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초보가 배울 수 있는 곳은 접근성을 높여주고 실수를 줄여 준다는 의미를 새삼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다. 사진을 좋아해서 했던 활동을 가지고 강좌 개설 요청을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고 그래서 이력서를 적게 되었다.
사진 때문에 이력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물며 이력서라는 게 어디 입사 지원용도 아니었던 터라서 사진으로 살아온 시간의 경력을 표시한 대차대조표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경제적 수익적 측면에서 나의 사진 이력은 늘 마이너스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기야 사진으로 나는 돈을 벌어 본 적도 없고 찍은 사진을 팔아 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대차대조표의 순이익은 사진에 있어서 시작하고부터 늘 마이너스였다. 돈벌이만 생각했더라면 차라리 주식 투자가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취업용 이력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사진 생활에 경력과 추억의 복기용 이력서가 된 셈이다. 가슴 한편에 늘 사진은 자리 잡고서 십수 년 동안 카메라를 들고 나돌아 다니며 살았던 그동안의 시간이 주마간산처럼 돌아간다. 처음 카메라를 사고 두근거렸던 날의 밤. 처음 사진 동호회에 가입하고 출사 갔던 날. 몇 번인지는 따져 보지는 않았으나, 아침에 일출 사진을 찍으려 새벽길을 달리고 밤길에 라면을 먹으며 바다로 향하던 그런 시간들. 일요일 아침이면 배낭을 메고 국립공원의 산을 걷고 땀을 흘리고 산꾼처럼 카메라를 맸던 날들. 사진 블로그에서 포스팅했던 무수한 사진들과 사진 글. 이 글과 사진이 재료가 되어 책을 냈고 전시회에 사진을 출품시키고 각종 행사에 무급으로 사진을 찍었던 그 시간이 떠올렸다. 이력서를 쓰면서 경력 하나하나에 근거가 되는 책과 팸플릿, 그리고 사이트 주소를 적었다.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진 경력 이력서를 적었고 자료를 첨부시켰다. 그리고 강좌가 개설되면 진행할 강의계획서를 수립하고 정리를 했다. 사진 초보에서 알아야 할 사진의 기초를 떠올리며 내가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오류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마침 최근에 읽고 있는 사진 책 두 권은 사진 강좌에 있어서 좋은 교재가 되어 줄 것으로 보였다. "부르스 반비움"의 "사진의 본질", "사진 예술". 카메라 들고 다니며 작가 행세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런 책을 보는 사진가는 적다. 두권 합쳐서 6만 원이나 넘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사진학을 전공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 책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 사진을 찍는 것 이상으로 다른 작가의 사진에 대해 보고 읽어야 사진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찍는 사진이 단순히 기분 풀이용의 사진이 될 수는 있으나 의도에 대해 인식의 고리를 가지고 찍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사진 강좌가 개설되지 않을 수 있다. 문화센터도 어차피 하나의 사업인데 돈벌이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강좌를 개설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아무나와 누구나의 차이는 분명 있다. 평생을 살면서 돈벌이를 제외하고 자신이 좋아할 만한 분야가 꼭 한가지 있으면 되는 것이고 그게 사진이라면 그런 누구에게 알기 쉬운 사진 썰을 풀고 사진으로 즐기는 모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와 예술의 황무지 같은 동네에서 이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있다.
내가 사는 지역 동네의 인구가 일개 지방자치단체 지역구 기준으로 60만이 넘는다. 지방의 중소도시보다 더 많은 인구이다. 그러나 60만이나 되는 지역구에서 사진 갤러리가 하나도 없다. 화랑도 없고 무슨 전시공간조차 몇개 되지 않는다. 전시공간은 그저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설립한 곳 한두 군데를 제외하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누군 그럴지도 모른다. 먹고살기도 버거운 마당에 예술 따위가 뭐라고 할 것이다. 그래 상당히 자조적으로, 먹고살기도 어려운 마당에 밥 먹고 술 먹고 오줌 싸고 똥만 싸고 숨 쉬면 그게 사는 건지 묻고 싶다. 살기야 다 산다만은, 살아가는 게 일하고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인가. 이건 생물학적으로 "살아지는" 거지 어떻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살아지는 삶보다 살아가는 삶이라야 한다. 우리는 99개의 불행을 겪으면서도 딱 한개의 행복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 살아지는 것은 지렁이도 개구리도 다 살아지는 거다.
좀비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존재의 이유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행이고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