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정황과 외신을 종합하면..

 

데이빗 보위는 3년 전 비교적 초기 간암 진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암과 용감하게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수술과 항암 치료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8 개월 전쯤에 전이가 생겼고,

 

이때 완치가 불가능 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보위는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죽음 자체는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삶에만 치열하게 집중하는 방식이다.

 

,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투병에 대한 사실을 거의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충격으로 받아드렸으며,

일부는 사기라고 까지 할 정도로..

 

대신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활동을 전혀 미루지 않았다.

불과 2 개월 전 서둘러 신곡 비디오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인사를 담았고, (Lazarus : Look up I’,m in heaven)

 

죽기 바로 이틀 전에 마지막 앨범 (Blackstar) 을 내놓았고,

역시 마지막 메시지를 담았다. ( 자신의 사진대신 검은 별)

 

삶의 마지막 순간까치 치열하게 활동하였던 반면..

 

죽음 자체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장례식도 추모식도 없음은 물론이고..

 

죽고 난 후 즉시, 친구나 가족까지도 참석하지 않은 채,

비밀 장소에서 화장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고자 하는 보위 자신의 뜻 이었다고 한다.

 

“The iconic singer told his loved ones he wanted to “go without any fuss” and not have a funeral service or public memorial“ (Mirror : 14 JAN2016)

 

 

마지막 까지 삶에 집중하고,

죽음을 철저히 무시하는 보위의 방식은,

항상 실험 정신에 충만하고, 기존질서를뛰어넘었던 보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디언 지는전하고 있다.

 

“He always did what he wanted to do, and he wanted to do it his way and to do it the best way. His death was no different from his life- a work of art. (The Gurdian , 11 Ja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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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역 곡절 끝에 “존엄사법” 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제 암 환자들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신문지상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죽음을, 죽음의 방식이든, 혹은 시기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 인가 ?

에 대한 의문도 생각할 만한 일이다.

먼저,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태어난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출생은, 시기와 방법 , 장소까지도 거의 완전한 선택의 결과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선택이 아니다. 다만 태어나게되었을 뿐, 장소나,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든 그반대이든, 부모, 우월한 용모와 건강한 유전인자를 갖고 로 태어나든, 혹은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나든, 혹은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나든, 수학 재능이 부족하여 대입시험에서 대책없는 상황이 벌어질 애로 태어나든, 가을에 태어나든 혹은 겨울이든, 정상분만이건 제왕절개이든, 어쨋든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어떤 것 하나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에서 태어나지게 될 뿐이다.

당연히 태어나고 나서야, 밥달라고 울 수도 있고, 주는 밥을 안먹겠다고 도리질을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출생 자체는 자신의 의지도, 선택도 완벽하게 외면당한체, 그야말로, 완벽한 수동적인 행위, 혹은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나름대로 선택이 가능한 것인가 ?

우선 죽음 자체는 출생과 마찬 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전혀없다. 죽음을 피할 수있는 방법은 현시점에서는 없으며, 냉동인간이나 뇌의 복사를 통한 삶은 아직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인정한다면, 현실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 다는 것은, 최소한 현재로서는 피할 수없는 정해진 숙명으로 받아드려야 할 듯하다. 즉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는 방법이나 시간은 최소한 선택할 수있는가 ?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암과, 심장병 등은 발병 자체를 현실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렵다. 담배를 피우는사람은 폐암에 걸려 죽고, 혈압이 높으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중에서도 폐암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고혈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누가 어떤 병으로 언제쯤 사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아직은 과학과 논리,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최소한 죽음 자체는 거부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어서 선택이 불가능하고, 누구에게나 이미 선택된 일이다. 즉 죽음은 이미 주어진 상황이고, 거부할 방법이 없다.

한편 사람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문병사회에서 노화와 질병, 비행기나 자동차 등의 사고등에 의하여 , 예기치 않게 예기치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전쟁 상황이라면, 지금도 전쟁을 하는 곳이 있다, 급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폭탄과 총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물론 예정된 죽음도있다.

예를 든다면, 사형수라면, 사실상 예정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예정된 죽음일라고 할 수있다. 나찌가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도 사실상 예정된 죽음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죽음도 있다.

이시간에도 매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정한 장소와 시간에 자신이 결정한 방법으로 생을 마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오랜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이미, 지구상의 여러곳에서, 네덜란드가 2002년에 합법화한 이후로,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형태로,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가능하도록 하고있다. 앞으로 좋든 싫든, 안락사와 의사조력 자살은 점차 확산되는 추세이다. 안락사의 합법화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죽음은 미루어 질 수 있는가 ?

종합병원의, 중 환자실에는 ,  의식이 없는 상태로 수개월에서 수년간혹은 수십년까지도, 인공 영양과 의료진의 도움으로 살아있는 환자들을 보게된다. 이들 중 일부는 뇌사 혹은 식물 상태이다. 이들은 뇌의 기능 상태에 따라서, 뇌사라고 판정되기도하고, 식물 상태로 판정 받기도 한다 .

이들은 죽음이 미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있는가 ?

생물학적으로는, 혹은 법적으로는, 이들은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기를 미룬 것으로 볼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삶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소위 “ 살았어도 죽은거나 다름없는 삶”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탄생이, 비교적 명확하게, 엄마로 부터 분리된 순간, 규정되는 것과 달리,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뇌사의 경우에는 뇌의 기능이 정지된것을 기준으로 판정하기도하고, 혹은 심장의 기능 정지를 기준으로 판정하기도 한다, 물론  여러 장기중에[서 유독 뇌와 심장을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라는 말은 없지만, “죽은 거나 다름 없다”는 말은 일상생황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결국 죽음이란 것은 절대적으로는 피할 수없는 숙명이지만, 실제로 실생활에서 쓰이는 죽음에 대한 정의 조차도, 대단히 가변적이며, 아마도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혹은 의학과 과학이 더 발달 할 수록, 더 죽음의 의미와 기준을 포함하여 방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죽음은 미리 예견된 것이다. 즉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숙명을 갗고 태어난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죽음은 시기나 방법도 피할 수없다.
비행기사고로 죽기도 하고, 전쟁에서 총탄에 쓰러지기도 하고, 암과 질명으로 죽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죽음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선택이 불가능하다. 


죽음을 선택 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죽음은 삶의영역 바깥이다. 즉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할 수있는 성질의것이 아니다. 인간이 직접 선택한 죽음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상당한 사회적 논란과 과오,실수를 피할 수도 없다.

통과된 존엄사법은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기 위하여 만들어지 법이 아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존엄사법에 따라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존엄사 법에 따른다면, 본인의 명시적인 의사표시와 함께, 2인 이상의 의사와 가족이 찬성해야 존엄사가 실시될 수있다. 물론 이법에 의하여 존엄사를 시행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는 있을 것이나, 결코 많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이 법에 의하여 시행된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한것이아니라, 사실상 매우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행위은 언제나, 예외없이 치명적인 오류를 법할 가능성이, 매우 많을 수도 있다,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선택이 불가능한 영역이고,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선택이 불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들었을때 ,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있다고 믿어버리면, 고통스럽다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해결책이 있을 것으로 무조건 믿어버리면, 인간 의지는 무슨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느 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걱정스럽다.

죽음에 임박하여,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라면, 어떤방법으로든지 해결을 하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렇나 좋은 해결책이 없다고해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존엄사법은 존엄한 죽음을 담보하는 해결책은 전혀 아니다. 존엄사법은 지켜야 하는 법도아니고, 그렇다고 지키지못했을 때 벌을 가할 수있는 법도 아니다. 누가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엄사법에 미덕이 있다면, 선언적인 의미이다.

이제 마냥 죽음을 억지도 미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것이 존엄사법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그냥 법적으로 혹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으로 받아드려져야 한다.

가을에 낙엽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할 수도없고 피해서도 안되고, 미루거나 연기할 수도, 또 연기해서도 안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간의 탄생과 마찮가지로 죽음도 선택할 수없으며, 선택할 필요도 없다.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방법, 시기, 장소도 피할 수없다고, 또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필요할 듯 하다.


달나라에 쉽게 갈 수있는 방법이 없는데도, 갈 수있을 것이라고 ,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 믿어버리면, 결국은 주술과 미신에 의지하게된다. 두렵고 어두운 세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 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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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검사를 할 것인가 ? 말 것인가 ?

 

월스트리트 저널- 경제 전문지 아닌가!,- 에서 흥미로운 장문의 기사를 보았다.

 

제목은 전립선 암 검사를 많이 처방하는 의사에게 징벌이 가해질 수 있다.”

 

 (Docotors could be penalized for odering prostate test. WSJ NOV 19, 2015)

 

제목대로 전립선 암 검사를 처방하는 의사에게, 벌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선 건강 검진에 절대 빠지지 않는 전립선 암 검사 (PSA )이지만, 미국에서의 예이지만, 오히려 검사를 했다고 의사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과거 10 여 년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인 전립선 검사의 효용성을 밝히기 위한 임상 시험에서 효과 (암 검사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에 비하여,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작용의 예를 든다면, 위양성 (암이 아닌데 암으로 나와서 불필요하게 위험한 추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 혹은 과잉 진단 ( 그냥 뇌두어도 되는 상황에서 괜히 검사해서 아는 것이 병이다.”를 만드는 상황) 등이 있고, 추가로 검사비용과, 불필요한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 발생위험의 증가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2012년 미국 질병 예방위원회 (USPTF)는 전립선 검사를 암 검진 항목에서 제외시키기로 했으나, 여전히 환자들과-그렇다 환자들이 암 검사를 원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의사들은 수많은 전립선 암 검사를 처방하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전립선 조직검사를 해야 하고-이거 굉장히 괴로운 검사이다-결과적으로 전립선암으로 진단되어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역시 상당히 괴로운 치료다. 부작용이 바로 남성 기능 상실 이다.

 

물론 암 검사로 환자들이 덜 죽으면,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상쇄되련만, 암으로 죽는 숫자는 거의 같으니, 환자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죽을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 죽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아직도 전립선 암 검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 밀고 당기기를 그야말로 지루하게 하는 형국이고, WSJ 같은 경제지까지도 특집 기사를 내는 것이다.

 

그런대, 어제 NY TIMES에는 여기에 대한 DR. Gilbert Welch 교수의 기고가 실렸다.

 

Welch 교수는 자신이 전립선 암 검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잉진단 : Overdiagnosis  책의 저자이자, 암 뿐 아니라, 모든 의학 분야에서 과잉 진단을 반대하는 연구자 이다. 그런대도, 그는 오히려 전립선 암 처방을 내는 의사를 처벌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다.

(Why doctors shouldn't be punished for giving Prostate Test? NYTIMES Jan 7, 2016)

 

Welch 교수는 기고문에서, 전립선 암 검사가, 치료할 필요도 없는 소위 거북이 암만 잡아내기 때문에 효과가 없으니 중단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처방을 내는 의사를 처벌하는 것은 반대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시 의학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효과가 없다고, 혹은 위험하도고 해도, 그 위험을 알고도 환자가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의사들이 충분히 환자에게 전립선암 검사의 장단점을 설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자, 즉 상담료를 주자는 것이다.

 

전립서 선 검사를 줄기차게 반대해온 Welch 교수가,  이런 말을 하는 대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고,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이 복잡한 암 검사법의 득실을 누가 이해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사 자신도 이해 못하는 것을 환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암 검진을 포함한 예방적 치료는, 기본적으로 20세기 후반의 발명품이다. 수천 년간의 의학역사에서는 항상 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해왔다. 심장병이 생기기전에 약을 주고, 암의 증상이 있기 전에 검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신 20 세기 후반 의학이다. 아직 검증이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 암 검진에 대한 수수께끼는 이해하기도, 설득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리스 허무주의 철학자 고르기우스 명제, “진실은 없다, 있다 해도 알 수 없고, 알 수 있다 해도 설명할 수 없다.”가 가장 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다.

 

전립선 암 검사 뿐 아니라, 암 검진에 대한 논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설명하기 어렵다. 누구도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생각하면, 암 검진과 예방의학은,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철학이나, 혹은 윤리의 문제, 혹은 예술의 영역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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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죽을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니냐?”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자는 의미로 웰 다잉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이므로,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호스피스 창시자 시실리 손더스 박사  (1918-2005)

 

 

그러나 사실 호스피스는 죽으로 가는 곳도 아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웰 다잉운동도 아닙니다. 우선 어떻게 죽는 것이 존엄한 죽음인지 , 혹은 웰 다잉이 무엇인지도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 없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흔히 오랫동안 항암 치료를 받은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도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서, 가족과 친지도 없이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비방 약을 찾아서 재산을 낭비하고, 가족과 친지들과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도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 편안하고 존엄한 죽음이 삶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진통제를 충분히 써서 통증이 없고, 가족과 친지들이 가까이 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임종 실에서 존엄한 임종을 맞이했다한 들, 하고 싶은 여행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고, 친구와 가족과 서로 대화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웰 다잉일지는 몰라도, 호스피스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물론 호스피스가 누구나 존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죽음 자체가, 혹은 존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이라 해도, 죽음 자체가 호스피스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암 환자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을 보고 싶어서, 무리하게라도 차를 타고 보러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갑작스럽게 고통을 받으면서 가까운 가족도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것은 웰 다잉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까요 ?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안중근 의사이순신 장군의 처절한 죽음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구하고, 수 십,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의 혼을 깨우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좋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인지 대해서는 너무 따질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이렇게 혹은 저렇게 주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유서쓰기 운동까지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떻게 죽어야 한다는 좋은 죽음의 정해진 틀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죽음은 그저 찾아오는 대로 맞이할 뿐이지, 미리 걱정하고 고려할 대상의 성질이 아닙니다.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물론 현재 웰 다잉이니 좋은 죽음을 위한 사회운동이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호스피스 운동을 웰 다잉운동으로 혼동하는 바람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호스피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오히려 존엄한 죽음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당연히 죽고 싶지도 않지요. 누군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철부지이거나, 거짓말 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며, 호스피스 환자는 더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호스피스 정신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됩니다. 더구나 존엄한 죽음이나 혹은 죽음을 받아드릴 것을 누구에게라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유서 쓰기나, “웰 다잉등은 하고 싶은 사람은 개인적인 소망으로 해도 되겠지만, 대다수 호스피스 환자에게는 권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호스피스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론 선호가 있다면, 미리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굳이 미리 정해놓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해도 되는대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미리 정하라고 환자들에 권하거나, 가족에게 정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음에 대하여 구태여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각 개인의 생각과 각자가 지내온 삶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호스피스의 창시자인 시실리 손더스 박사의 말씀대로 삶의 방식이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지,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손더스 박사가 설림한 호스피스 기관 : St Christopher Hospice 1957  

 

호스피스 환자라고 해서 죽음을 받아드려야 한다거나, 아니면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호스피스 팀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준비하고,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몫이 아닙니다. 가족의 몫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호스피스는 좋은 죽음이나 웰 다잉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호스피스는 무엇일까요 ?

 

현대의 호스피스 정신을 창시한 시실리 손더스 (Dame Cicily Sanders)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You matter to the last moment of your life, and we will do all we can not only to help you die peacefully, but also to live until you die.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이 마지막까지 살 수 있도록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호스피스는 잘 죽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잘살기 운동입니다. 의료진, 가족, 친지를 포함한 모든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모든 자원을 모으고 투자하여, 누구나에게, 가난하든 부자이든, 유명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최소한 마지막 6개월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는 , 자신의 뜻을 최대한 존중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호스피스입니다. 그러니 호스피스는 죽음과는 관련 없고, 오로지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하여”, 삶을 고민하는 의학이자 사회운동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가 된다면 아래 몇 가지를 유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 죽음이니, 임종이니 하는 말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주십시오.

환자나 가족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든지 하는 말조차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스피스는 웰 다잉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명심해주십시오.

 

2. 환자가 무슨 병인지, 언제까지 살 것 인지도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오늘이 바로 마지막 시간이라고, “오늘, 이번 주, 이번 달을 어떻게 잘~ 살 것인지만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 먼 미래나 한 달 후보다 지금 이순간이 가장 소중합니다.

미래에 어떻게 하자든지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에게나 우리에게나 오늘,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이 가장 중요한 시간임을 항상 명심해 주십시오.

 

4. 무엇보다도 환자의 의견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주십시오.

먹고 싶은 것은 먹을 수 있도록 가고 싶은 곳은 가도록,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능력이 닿는 한 도와주십시오. 의사, 간호사, 병원 관계자의 지시나, 권유는 무시해도 됩니다. 호스피스에서는 환자의 의견만이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5. 환자가 싫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환자를 위한 일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사나, 검사, 치료도 환자가 싫어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누구라도 환자가 싫어하는 것은 누구라도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6. 환자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가 가장 소중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보고, 같이 웃고 같이, 울어주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고, 가장 소중한 호스피스 활동임을 명심합시다.

 

 

호스피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생각하기보다는 남아있는 생을 활기차고,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에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신입니다.

 

하루를 활기차게 보내야 편안하게 잠이 오듯이, 충실하고 활기찬 인생을 살면 죽음도 편안하게 올 것입니다.

 

호스피스의 정신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음을 알고 항상 어떠한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호스피스 회 자원 봉사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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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재직 중에 적격을 당해 수술 방으로 들어가면서 의사들에게  농담을 하였다. “ 다들 공화당원이시죠?” 이것은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간적인 부탁이다. 물론 의사들은 우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답했다.

 

의사와 환자는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물론 환자의 직업이 의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대통령이거나, 대기업의 회장님이라 해도, 의사와의 인간적인 관계없이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관계로 서로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어쩌면 환자는 자동차를 사는 것처럼 신중하게 의사를 선택해야 하며, 또 자동차를 운전하듯이 의사의 성질을 파악하고 신중하고 안전하게 운전 해야만,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기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몇 가지 실용적인 팁이라면 .

 

1. 의사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물론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신뢰가 가야 신뢰할 수 있고, 존중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지, 환자 자신이 의사를 신뢰하고 존중할 수 없다면, 의사도 당연히 그것을 알게 되고, 의사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 모험을 해야 할 순간에 최선의 치료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 이나 검사가 치료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의학은 불확실성의 과학이자, 가능성의 예술 (Medicine is science of uncertainty and an art of probability)이다. 간단히 이렇게 하면 치료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의사-환자간의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명한 의사라거나, TV에 자주 나온다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느끼는 인간적인 신뢰가 있어야 만 한다. 환자가 보여주는 신뢰를 바탕으로 의사는 최선을 치료를 감히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2. 너무 화려한 복장/화장은 피하라.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거나 지위가 높다고 더 잘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자 착각이다. 오히려 나중에 시비를 걸어올 것에 대비하여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강력한 상대를 만나면 수비 자세를 취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위를 과시하거나, 명함을 주거나, 하는 것은 최소한 의료 행위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불필요한 긴장보다는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

 

3. 한번쯤은 적당한 선물을 주어라.

 

의사는 단순하다. 초보 의류 디자이너 환자가 직접 만든 상의를 선물 받았지만 너무 작아서 입을 수 없었지만, 벽에 걸어두고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직접 재배한 고춧가루를 한 봉지 들고 온 환자도 오래 기억된다.

 

매번 선물을 줄 필요는 없지만, 한번쯤은 자신을 기억하고 걱정하게 만들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의사는 완벽한 인간이 절대로 ,,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소위 촌지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변별력 없어서 환자를 기억하게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는 방어기전이 작동하게 하여, 둘 사이의관계도 별로 좋아지지 않게 된다.

 

4. 너무 자신을 내세우지 마라.

 

의사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야한다, 거나, 혹은 요구할 건 요구해야한다고 느끼는 환자도 있다. 그러나 의사 환자는 대결 구도가 아니다. 의사는 환자 편이어야 한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이런 태도를 만나면 의사는 환자 걱정보다 자기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 아이쿠 이거 이거 조심해야 할 환자로군 라고 생각하고 대담한 치료를 포기 할 수도 있다.

 

5.자신의 숙제도 하는 우등생이 더 대접 받는다.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으면 의사도 긴장하고,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이 생긴다. 마치 공부 잘하는 학생을 바라보는 선생님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의사를 신뢰하되 자신의 숙제도 한다는 기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인터넷과 책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 등등으로.. 다만 너무 과하여 의사와 대결 양상으로 가는 것은 .. 그런 환자도 꽤.. 물론 좋지 않다.

 

6. 인간적인 친밀감을 표시하라.

 

최근 이사했다든지.. 혹은 자녀에 대한 이야기, 혹은 자신의 직장등 사적인 대화가 최소한은 있어야 한다. 어쨌든 인간적이 관계가 되어야지, 오로지 병에 대해서만 말하는 관계는 위험하다. 유럽 의학 회에서 만난, 네덜란드 의사는, 중요한 치료 결정을 내리기전에 최소 10 분간은 인사, 즉 사적이 대화를 한다고 한다. 이런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한 두 마디 정도라도, 환자와 의사의 병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 인간 대 인간으로써의 대화가 최소한은 필요하다.

 

7. 부탁을 들어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

 

의사는 진찰 시에 청진기를 꼭 사용해달라는 부탁을 듣고 기분 좋을 수도 있다. 혹은 자기 아들에 대 한 건강 상담 등, 무슨 부탁이라도 좋으니, 가벼운 부탁 정도는 해볼 수 있다. 들어 주고 말고가 아니라, 보다 더 인간적인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 병에만 관심 같지 말고 환자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 달라는 시그널인 샘이다.

 

8. 중요한 결정은 한 번에 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갑작스런 골절상이나 출혈 등 응급 상황아 아니라면, 서둘러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 중요한 수술이나 항암 치료 결등은 한 번에 결정하지 말고, 번거롭고 불편하다고 해도, 다음 번 진료에서 결정하도록 미루는 것도 필요하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한 번 더 심사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9. 다른 의사 찾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라.

 

암 진단이나 수술 항암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의사의 의견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병원을 찾아가고 기다리고 하는 일이 번거롭고, 물론 같은 결과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더욱 결정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궁극적으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 의사-환자간의 신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특히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는 어떤 형식으로든 소위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하는 것은 필수이다.

 

10. 이런 모든 절차가 귀찮기만 하다면.. 당신은 필시 병원과 의사가 필요치 않은 심각하지 않은 병을 갖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모든 것은 환자에게 어렵게 되어있으나, 단하나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는 것은 의사는 환자를 선택할 수 없으나, 환자는 자신의 의사를 선택한다.” 라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당사자인 환자의 나름대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대한민국의 의료 제도 하에서는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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