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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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그리고 창조론. 물과 기름 같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지만, 어찌보면 또 엄마 아빠 같이 함께 해야만 완벽한 존재. 이처럼 모순적인 개념이 또 있을까.

 

두 이론은 저마다의 논리와 증거를 내세워 인류의 역사 내내 논쟁을 이어왔다. 인간 이전의 세계를 다루다보니 누가 옳고 그르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가운데, 결국엔 개인의 관점과 신념이 개입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해묵은 다툼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와 같다.

 

여기 대놓고 진화론의 입장에서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에 비유한 책이 있다. 창조론자 및 일부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만무했음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털 없는 원숭이>가 판매 금지되었고, 교회는 이 책을 몰수해 불태웠다. 인간 진화론은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이 책은 소름 끼치는 악취미의 농담으로 여겨졌다.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종교적 선전물이 홍수처럼 저자에게 쏟아져 들어왔다.'는 책소개가 이상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화론을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왜 종교인들은 창조론을 목숨 같이 여길까.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진화론도 모자라 인간을 원숭이 및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자연스레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고, 답은 찾지 못했지만 고개는 계속 주억거리게 만들었다.

 

짝짓기,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손질 모두 인간이 여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하는 것들이며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짝짓기는 자손의 번성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육체적 흥분을 위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해서 나은 아이를 기르는 것도 동물적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모험심(네오필리아)과 싸움은 인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 되었고, 영장류의 입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몸손질은 털손질을 대신하는 원시적 욕구 표현이라는 점이 참 인상적이다.

 

게다가 책은 진화론과 창조론을 넘나든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 속 예를 들면서 나오는 것들이 창조론에서 주장하는 에덴 동산, 무화과 따먹기, 수치심을 느껴 옷으로 성기 가리기 등인 것이다. 이 무슨 막돼먹은 장난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으로써 창조론자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매력을 잘 살린다. 위트도 있고.

 

50여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 현대와는 맞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이 더러 있기는 하다. 동성애를 유전적으로 보거나 생물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한다거나, 출산율을 줄여야 사회문제가 해결된다는 단순한 발상, 인간은 정해진 식사 횟수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섭취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으나 점점 늘어나는 채식주의자/반식주의자들, 인류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영장류인 침팬지/원숭이라는 조사 결과(지금은 분명 개,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일 것이다.) 등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또한 사실과 추론의 나열 속에 정작 필자가 하고 싶은 결론은 마지막에야 나온다는 부분이 조금은 맥 빠진다.

 

그래도 주장은 명확하다.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인정하자'고. (대부분 창조론자들이 더 그런 것 같지만)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위에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동물학대, 유린, 멸종 위기 동물 포획 및 식용/장식용으로 사용하는 등의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창조론으로 봤을 때도 신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우주 만물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역할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가장 위약하지만 가장 위험한 동물, 인간은 그래도 좀 더 현명하게 진화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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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2014-04-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화론이 거짓인 과학적 이유입니다.

http://gospel79.tistory.com/12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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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소유냐 존재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삶에 포함된 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을 당연히 소유한다. 그뿐이랴, 사물을 즐기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p.33)

 

그렇다. 우선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유의 반대말은 '무소유'이고, 존재와 대비되는 단어는 '비존재'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대 인간에게 있어서 두 가지 개념이 대립각에 있다고 선을 긋는다. 거기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진다는 비판까지.

 

이에 대한 반박을 하기 전에, 자신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본인을 소개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되돌아보자.

 

집은 어디이구요 / 결혼은 언제 했구요 / 아들·딸은 몇명이구요 /

얼마 모았어요 / 그거 되게 신기하다 / 나도 니가 가진거 갖고 싶어

 

이런 게 바로 보통 사람의 자기 소개와 대화 형태 아닐는지. 자기 존재에 대한 특성보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 드러내고, 자기 삶에 만족하기보다 더 가진 자의 삶을 따라가려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시대 자화상이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그의 활기가 전염되어 대화의 상대방도 흔히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p.59)

 

자,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상대방에게,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인간시장"에 진열된 상품으로서 자신의 인품과 인맥을 활용하여 그것을 돈과 명예로 바꾸고 싶은가? (p.210~212) 아니면 베풀고 나누고 희생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좀 더 나은 삶을 함께 누리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가? (p.155) 선택은 자기 몫이지만, 한번쯤은 정말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편 필자의 견해나 바람과는 어긋나게, 40여년이 지난 지금 현대인은 폐해를 목격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실상을 뼈저리 체험하고 있다. 그 누구도 병든 인간을 제물로 하고서 그 건강을 부지하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 지금(p.253), 오히려 경제는 '민주주의'라는 날개를 달고 정치와 엮이며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세계 경제 위기를 예상했겠는가. 극심한 빈부 격차, 민영화 가속화, 지속적인 FTA체결 등은 결국 '너 죽고 나 살자. 너보다 내가 더 많이 가지자'는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건전한 인간을 위한 건전한 사회는 그렇게 계속 멀어져만 간다. 그렇다고 계속 우리는 우리 탓만 할 수 없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자. 나서자. 행동하자. 존재를 보여주자. 언론을 장악하고 사찰을 일삼는 정부, 그릇된 이익을 위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정치인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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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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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어느날,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자신을 무기수라고 소개한 그는, 나의 글이 실린 책을 보고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펜을 들었노라고, 어디에도 말할길 없는 답답함을 알리고 싶어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그 편지를 읽고서, 나는 반가움과 함께 희망을 발견하였다. 누군가가 고이 엮어낸 삶의 이야기가,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잔잔한 파동으로 다가가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에.

 

그/녀의 이야기, 곧 나/우리의 이야기

 

작품 속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그네들 삶의 자락을 펼쳐내는 이야기는 곧 나/우리의 그것과 연결된다. 그것은 곧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대변되는데, 이야기속 인물들처럼 한 사람의 본질이자 가치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 정체성이 주류와 다를때, 그/녀는 본의 아니게도 곧 소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인생은 다수가 쳐놓은 울타리 밖에서 맴돌게 되고,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더욱 단단해지거나 무참히 꺾여버린다.  

 

일반적으로 평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느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좌절하거나 소외된 마음에 슬퍼하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하는 이들도 있고, 그 누구의 말보다도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친구들도 찾을 수 있었다. 결국에는 주어진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며 정진하는 장면들이, 굳이 활자를 갖다붙이지 않더라도 생생한 그림으로 벅차게 다가온 것이다.

 

차별은 남의 일이 아니다

 

비단 책에서 접한 힘겨운 상황이나 소외되어 서글픈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차별은 우리 삶 곳곳에 담겨있다. 가까이는 타고난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차별부터 멀리보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관계에 의한 을의 반란까지, 차별의 모습과 폐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 군상 속에서, 내가 먼저 차별하지 않으면 되레 차별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에 우리는 어떤 덧칠을 입혀 더 나은 삶을 꿈꿀 것인가. 먼저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애정, 그에 따른 부단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다음은 그것이 나만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도록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이며, 나아가 한 목소리로 반차별을 노래할 수 있도록 뜻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지 상관없는 상대방의 정체성, 나와는 별개의 문제로 본질을 마주하기보다는, 그/녀의 간절함이 헛된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관심과 지지가 이어질 때 비로소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귀 기울이기. 응답하기. 연대하기.

 

본인에게는 뚜벅뚜벅 자욱을 남기는 이번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깊숙이 뇌리에 박혔다. 내가 보기에는 특이할 것도 없고 유별날 것도 없음에도, 그토록 다양한 삶에서 베어나온 차별들이 그려낸 풍경은 참 아찔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그 전에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나/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최선의 행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 갈길은 아직 멀다. 차별금지법은 몇년째 표류 중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들도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는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결코 지치지 말고 응원하자. 더 많은 이야기가 울려퍼지고 더 깊은 신뢰가 쌓일수록 더 큰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지 않는가, 헌법 제10조와 제11조 1항에 명시된 것처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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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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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속해 있는 어떤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건, 사회 속의 개인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무척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래 살던 곳을 탈출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하고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지내게 된 꼴이라니. 진짜 오마이갓 그 자체.

 

'난민'이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렇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 많은 어려운 사람들 중 難民이라는 단어 의미가 그렇게 됐을까.) 쫓기듯이 왔으니 당연히 먹고살 돈을 벌 일자리도, 그 나라에 대한 이해도, 새로운 삶을 살려는 마음가짐도 준비하지 못했을 터.

 

그런데 더 가관인게 우리나라는 그들을 지원해줄 정책도 부실하고, 난민으로 인정해주는 기준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올해 7월부터 '난민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난민신청 후 5년간 생계지원은 커녕 합법적으로 일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불법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졸지에 미등록근로자로 몰리는 처지에 이르고 만다는게 어이가 없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늑장 행태는 또 어떠한가. 또 다른 난민인 버마에서 온 '마웅저'씨도 8년만에 난민 인정을 받았고, 주인공 욤비씨도 6년만에 받았다.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린단 말인가. 한 사람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게 그렇게도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 한단 말인가. 그래봤자 행정절차일텐데. 이해할 수 없다.

 

인정 기준은 제멋대로여서 2009년 졸속판정으로 급격히 줄어든 난민 수가 이후 다시 올라가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통역도 당연히 필요한데 전문 통역은 협조가 어렵다니.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솔직히 부끄럽다. 유엔난민기구(UNHCR) 회원국이라는 이름은 그저 허울 뿐인가.

 

욤비씨의 고백은 그래서 더 적나라하게 빛을 발한다. 소수인 난민 신분, 게다가 아프리카 사람이어서 특히 소외감을 느꼈을텐데,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서히 적응해나가는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다. 다만 외국인근로자가 일하는 모습과 일부 겹치는 내용은 아쉽다. 보통처럼 공장에서 몸 쓰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살 수 있어야 할텐데.

 

결국에는 답은 평화다. 평화 가운데 난민이 발생하지 않는게 제일 좋고, 발생하더래도 인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장치가 먼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앞장서서 서로 '글로벌'을 외치는 이 시대에, 난민을 위한 따뜻한 시선이 더 간절하다.

 

+ 구로에 위치한 '난민인권센터', 집과도 가까우니 꼭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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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도서관 - 세계 오지에 3천 개의 도서관, 백만 권의 희망을 전한 한 사나이 이야기
존 우드 지음, 이명혜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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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 운을 떼야할지 모르겠다. 3개월 만에 쓰는 서평인데, 그만큼 오래 붙잡은 책이고, 너무나도 읽히지 않아 괴로웠던 기억이 더 남아있어서 그런지 참.

 

분명 좋은 취지로 선한 뜻을 가지고 행한 저자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 호감이 갔는데, 어찌 이리 된 것일까. 내용이 너무 뻔해서인지. 감동이 없어서 그런건지. 아님 더 놀라운 무언가를 원해서 그런걸까.

 

<내 이름, 쁘리띠 뻐허리>가 생각났다. 둘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작품이지만, <히말라야 도서관>이 자본주의의 힘을 덧입어 선행을 베푸는 이야기라면, <내 이름, 쁘리띠 뻐허리>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마음으로 다가가며 어루만지는 이야기인 점이 다르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게 마음이 간다.

 

또한 두 작품 모두 본인이 체험한 경험담을 쓴 에세이지만, <내 이름, 쁘리띠 뻐허리>의 주인공이 아이들인데 반해, <히말라야 도서관>은 너무나도 본인 위주다. 본인이 잘난 직업 엄청난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왜 도서관 짓기에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기금을 모아 도서관 확장을 해나갔는지 등이 주 내용인데, 처음이면 족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듯 듣는 기분이랄까.

 

결국에 드는 생각은 '좋은 일도 돈이 있어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어서 별로다. 원한 것은 어떤 기금파티에서 얼마를 모아 몇개의 도서관을 지었나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 도서관에 어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재미를 느끼며 행복해하는지 였는데.

 

최소한 어느 나라에 몇 개의 도서관이 있고 몇 권의 책을 몇 명이나 이용하는지 설명이라도 친절히 나와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니면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진이라도 좀 많이.

 

꽤나 아쉽다. 선한 취지는 분명 인정하지만, 책을 통해서는 그저 그렇구나 이상은 느끼지 못한. 할수 없이 내가 직접 가서 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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