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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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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화에는 항상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대중의 이목과 관심을 끌며 호흥받는 것을 주류, 대중에게 외면받고 특정 층에서만 호흥받는 것을 비주류 라고 한다면, 우리네 삶은 항상 주류와 가까이 가려고 애쓴다. 이 주류란 무엇인가, 길고 지난한 교육과 자본의 산물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미술교육과 좋은 화구들을 통해 그려진 많은 그림들이 우리가 알고있고, 만나려 하는 미술의 모습이다. 이것은 책, 영화, 음악 어느것에도 통용되는 것들이다. 대중은 항상, 우리 대중이 만들지 않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만든 작품들에 열광하고 탐닉한다. 실질적으로 그들보다 더 많은 이들의 대중이 '스스로' 이야기와 작품을 만듦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들은, 앞서말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좋은 환경에서 실제로 높은 퀄리티의 작품들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반면에 그런 것들에 길들여진 인식이, 그런 형식의 것들을 높은 퀄리티라고 인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길가에 핀 꽃 한송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 산천에 핀 수놓은 꽃들을 더욱 아름답다고 인지하기가 쉽듯이 말이다. 또한, 보통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작품들과 다르게 소위 배운 이들이 만드는 희소성에도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문학작품과 음악에 한해서는 왜인지 이런 예는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 것은 거의 성장과정에서의 본능적인 한 코스와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짓는것과 음악을 만드는 일은 그에 비해선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라서도 말이다. (이것은 표면에서 비롯된 상대성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모든 인간이 예술적 기질을 가질수는 있지만, 모든 이들이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거나, 만들지는 않는다. 또한 많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역사에 남거나, 어떤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거나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항상 우리의 인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먼, 기성화가, 기성작가, 기성감독, 기성가수 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라고 일컬어 지기도 하는 것들. 미술관에 가서 유명한 한장의 그림에는 온갖 정성과 정신력을 쏟아부음에도, 실제로 많은 이름없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실제로 접하기도 힘들고, 그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비난, 비판의 의도가 없는) 현실이다.  

물론, 대중들이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고 만드는 일이 이제 낯선 일은 아니다. 이 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글, 만화, 영상,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지금은 인터넷이란 창구를 통해 접하고, 또 생산해간다. 이런 각각의 부분에 두터운 매니아 층이 있음도 사실이다. 사실 소수가 많든 문화에 반하는 문화는 항상 있어왔겠지만, 그 표현의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헌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 수많은 것들을 얼마나 대중들이 기억하고 인식하느냐다. 매니아나 인지도가 얼마나 늘어나든, 결국 수많은 대중들을 움직이는 것은 주류 문화니깐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민화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곧, 지금껏 있어왔지만, 그 수만큼 조망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숱한 문화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항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대표 미술들이 아닌, 음지 아니, 평지에서 그려지던 자유 분방한 민화를 담는다. 김홍도나 신윤복등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만을 접하기 쉽고, 그보다 더 다빈치나, 고흐,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만 접하기 쉬운 우리의 미술세계를 벗어나, 마치 액자(틀)를 거부하고, 그 틀 바깥에서 끝없는 자유와 불규칙을 즐겼을 민화들을 말이다. 

집안의 재정 상태와 신분, 환경, 그에 따른 정형화되고 집단적인 교육은 의도하든 아니든 어떤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묘사나, 비율과 배치, 혹은 원근법이나 투시법 등 방법적인 접근부터, 좋은 작품의 기준이라는 것 까지, 그들이 정한 틀 안에서 그것들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했을 것이다. 굳이 이 틀을 나쁜것이라 부를 필요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분명, 좋은 교육이나 환경은, 그만큼의 학습을 거두지 않고서는 따라할 수 없는 예술적 경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관이 있으면 무관이 있듯, 유무형의 틀 밖에서 그려졌던 많은 그림들도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 서양에서는 환경과 상관없이 비교적 다양한 화가들이 알려진 반면에, 실제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우리화가 들은 그 수가 손꼽을 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화는 그 특성상 작가를 알기가 거의 어려워 보인다. 이 책 또한 화가가 아닌 그림을 다룬다) 

틀 바깥, 그러니깐 좋은 교육과 환경에서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 '민화'의 가장 큰 특징을 작가는 '자유로움'으로 꼽는다. 신분에 의해 사상과 활동의 제약이 많이 따랐을 화가, 혹은 사대부 들과 다르게 먹고사는 보편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그들은 어떤 사상과 활동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다고 해서 귀향을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방안에서 주경야독 해야만 하는 이들과 다르게 일상에서 항상 자연과 부대끼며, 상대적으로 제약이 없었을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 책을 펼치자 마자, 민화가 보여주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생소한 그림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상상력은 가히 '충격'으로 느껴졌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 민화가 대담함은 물론이거니와,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풍속화', '수묵화' 등을 우리 옛 조상들의 상징과 같이 생각해온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지와 무관심이 참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될 정도로 말이다.  

자연을 담은 민화들은, 그 형태와 배치, 비율등이 기존의 통념을 벗어난다. 보이는 그대로, 혹은 '보여져야 할' 그대로의 모습을 벗어나,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과, 상상한것, 혹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은 것에 대해 거침없는 그림들을 표현해낸다. 문자도와 같은 경우는, 그 형태와 상상력또한 놀랍거니와, 실제로도 주술적 성향을 띄었다고 하니, 마치 이우혁의 '치우천왕기'에서 문자를 하나의 주술적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 절로 떠올랐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두려움의 대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극복하는 민중들의 의식또한 엿볼 수 있었다. 용에 관한 그림은 신화 혹은, 유행과 연결되있는 모습들도 보여준다. 

여러 민화들을 만나는 동안,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삶과 애환, 나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어떤 미신과 신앙을 더듬어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배층이 그린 그림들과의 비교를 통해 민화가 어떻게 틀에서 벗어나 있는지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길상과 벽사를 위한 것임이 아닌 풍자와 해학을 위한 목적까지 엿봄으로써 고통받는 민초들이 삶을 견디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상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 한편 한편의 민화를 통해,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알아보고, 그 시대의 문화의 흐름, (즉 사상이나 문화, 도구의 유입) 뿐만 아니라 생활의 변화에 따른 (극단적으론 전쟁과 같은) 인식과 관심사, 그리고 그에 따른 작품의 변화 또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민화에 대해서 우리나라보다 실제로 해외에서 더 알아보는 가치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말이다. 이런 민화들이 적잖이 해외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아쉬움이자, 아픔이기도 했다.

 

<닭과 모란>, <신구도> 에서 보여주는, 그간의 인식을 깨버리는 대담하교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력에서부터 시작하여, 불로장생/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십장생도>같은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여정은, 민화에 대한 작가의 애착, 나아가 민화에서 뻗어나간 이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대범함이 존재하고 또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염원을 이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게는 민화의 생명이 꺼지지 않고 우리 후손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과, 크게는 이런, 자유로운 정신이 끊임없이 우리의 세계의 곳곳에 또 존재하기를 바라는 염원 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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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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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란 것은 적어도, 아니 정말로 우리 일상과는 때어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닐까. 불을 끄고 컴컴한 곳에 있다면 오로지 형태만을 감지하겠지만, 자연빛이든 인공빛이든 그 아래에 있는 한, 우리는 늘 매일같이, 아니 어쩌면 항상 색을 만나고, 색과 함께한다. 하다못해 우리의 머릿결, 눈동자, 우리의 살갗에도 '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깐 말이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항상 우리와 만나는 것이기 때문인지, 혹은 항상 어떤 일정한 형태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인지, 색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워서 그것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옷을 고르거나, 무언가를 살때도 색은 분명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지해왔기 때문이다. 색이 갖는 어떤 일정한 상징에 대해 개괄적으로,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것 이상으로 색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항상 색을 선택하고, 색에 감탄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수많은 색들을 생각하며.. 

기억에서 색의 문제에 대해 편파적이 되는 것은 비교적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 88 

하지만 이런 내 기대와 다르게 이 책은 색에 대한 개괄서는 아니다. 이 책을 고르려는 이들은, 이 책의 제목 <우리 기억 속의 색> 에 조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색에 관한 개론이나 연구서보다는 기억속의 색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색을 더듬어가는 '에세이'다. 다만, 우리네 삶의 요소요소들을 따뜻하게 다뤄보는 여타의 에세이들과는 조금 다른, '색'에 관한 에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에세이와 같이 쉽게 읽히지만, (저자의 직업과 관련한) 역사적, 과학적으로 접근한 색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어떤 치밀한 분석적 방법으로의 색의 접근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색에 관한 연구보다, '기억 속의 색' 그러니깐, 사람과 색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이런 형식 때문일까, 처음에는 예상과 달라 다소 당황했다. 색에 관한 어떤.. 과학적인 접근만을 예상해온 내게, 미셸 파스투로는 너무 쉽게 색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 혹은 누군가의 기억속의 색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하고 인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색에 관련한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토대로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온화하고, 때로는 세심하다. 또 틈틈히 깊이있고, 무엇보다도 개인적 인식이 만나는 색과 더불어, 충분히 역사적,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개인이 만나게 되는 색에 대한 경험, 기쁨, 두려움, 미신, 그리고 그 개인 주변의 인물들의 색에 대한 선입견이 끼치는 영향, 시대의 변화와 색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사회가 생산하는 색에 대한 정의, 개념의 변화, 적용, 대륙별 색에 대한 접근 태도.. 그리고 색에 대한 선택에 관한 문제를 다각도로 풀어나간다. 그것도 아주 꽤 잘 읽히게끔 풀어나간다.  

단어는 색에 무한한 힘을 행사한다. 색과 관련된 단어들은 그 색에 특별한 색조를 부여하며, 그 색을 학문이나 산업 분야의 색견본들보다 훨씬 더 몽환적인 색으로 만든다. 우리들 각자도 시인의 상상력과 화가의 감수성을 결합해 새로운 색을 창조할 수 있다. - 294

그래서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이나 분석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분명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정리된 개념이라고 하긴 힘들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색에 관한 개인적, 사회적, 과학적, 역사적 담론이 충분히 녹아있다. 에세이 형식속에 녹아든 전문적 지식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어 실제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다만, 이런 쉽게 읽히는 내용이기에 전문적 지식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주의할 점이랄까. 

책날개에 적힌 아래 글이 이것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기에 적어본다. 

미셸 파스투로가 60여 년을 사는 동안 보아온 색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몽상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주의 깊게 증언한다. 그는 인간들의 '색에 관한 변덕'을, 색들에 관한 선호를, 시대와 나라, 개인에 따른 색에 관한 미신을, 색들에 관한 기피를 이야기 한다. 어린시절의 느낌들, 소소한 즐거움, 색에 대해 느낀 반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늘 경쾌하고 정확하게 색의 복잡한 유희들을 해독해내며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의 책 덕분에 우리는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색을 생각하게 된다. (라 캥젠 리테레르) 

생각해보니 색에 대한 굉장히 종합적인 접근을 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특히 어째서 우리가 선호하거나 꺼려하는 색이, 시대별, 지역별로 다른지, 색에 관해서 우리의 시각이 우선하는지 혹은 의식과 정의가 우선하는지 등등.. 워낙 종합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또 그것이 전문적이 지식이라 길게 풀어놓기는 그렇지만, 확실히,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쉽게 접한 기분이 든다. 아마 진짜로 내가 색에 관한 개론서를 접했다면 머리터지게 책을 읽어야만 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 했듯이, 전문적인 접근(사실 과학적이라고 하기보단 용어적, 언어적으로 전문적이었던 적이 있다)을 너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천천히 기억속의, 일상속의 색을 음미하며 읽다보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리라 생각한다. (단, 색에 대한 선호도와 기준또한 개인, 국가마다 차이는 있는지라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도 더러 있다. 우리나란 최근까지도 약국에서 여전히 녹색 십자가를 쓴다던가, 하는 것들?)

어쨌든, 부담스럽지 않게, 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의하고 생각하는, 그저 심미적, 상징적 색의 의미를 넘어, 몽환적인 동시에 정교한 색의 세계를.  

나에게 색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 (......) 우주의 진정한 주민이다. 선은 지나가기만, 화폭을 가로질러 이동하기만 할 뿐이다. 선은 그저 통과만 할 뿐이다. - 177 (이브 클랭의 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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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쫓는 아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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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게으르고 중심이 없는 편이라, 한 작가(모든 문화 예술분야의 창작자를 총칭)의 작품을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다. 어느 카테고리를 구분해놓고 '최고의 작가' 혹은 '평생 기억할 작가' 를 정해버려도,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봐버리고 말거야!' 라는 다짐에서 멈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거 아냐? 라고 말하면 뭐라 대꾸할 말은 없다만) 줏대없는 성격과 팔랑거리는 귀가 한몫 할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폭넓게 접하기엔 좋은 습관이었지만) 그럼에도, 걔중에, 어물쩡 거리며 어쩌다보니, 한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을 90% 이상 봐버린 경우가 있다. (라디오 드라마, 뮤직비디오,.. 더불어 책도빼면 좀 뺄게 많긴 한데..뭐 대충 이렇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어쩌다가 그의 작품 <별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길로 그가 만드는 빛의 향연, 색채의 마술(샤갈님 죄송;)에 푹 빠져버렸다. 어디 그것뿐이었는가, '별의 목소리'는 단편임에도, 거대한 세계관을 갖고, 또 단편답게 과감하게 많은 것들을 생략했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SF와 로맨스 장르를 아주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생략된 것들이 만드는 구멍을 메운다. 어디 그뿐인가, 소년/소녀의 성장과 더불어, 타인과 맺는 관계, 외로움에 대한 고찰이 스토리 속에, 시적인 대사들 속에 녹아내린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단은, '별의 목소리'부터 함께 작업한 텐몬이 만들어내는 음악 또한 작품의 적재적소에 투입된다. 또한 일본 작품들 특유의 일상의 발견들까지 합쳐지니, 가히 감탄스러울 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가장 돋보이게 했던, 그가 뽐낼수 있는 여러 빛과 그에 따른 색의 묘사는 그의 작품 어디에서건 찾아볼 수 있지만, 항상 일정한 퀄리티와 정성을 보여주며 모든이를 감동으로 밀어넣었다. (약간은 어색한 캐릭터 디자인도 좋다. 나는 인디음악인이 방송에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며 올드팬들이 아쉬워하는 것들을 보곤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별을 쫓는 아이'를 보며 이해하겠더라)

 

만약 이런 퀄리티가 상업애니메이션에서 나온다면, 그저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되겠지만, 이것은 한 개인이 만든 애니메이션 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1인 애니메이션'(실제로 음악이나 성우들은 따로 있지만 제작에 있어서는 혼자다) 제작에 몰입하면서 내놓은 작품이 바로 '별의 목소리'인 것이다. 마치 홀로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몽땅 연주하는 것 같은 기적적인 능숙함을 보여준 신카이 마코토라는 존재는 거의 신격화되며,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빛과 색의 향연, 나아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헛되지 않게 하는 감수성에 여린 스토리와 대사는 그의 매니아들을 양산시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별의 목소리를 본 것이야, 이미 DVD 로 제작되어 나온 후의 일이라 극장에서 보진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구입한 첫 DVD 타이틀 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청각 자료로 봤음에도, 구매를 결정한 것을 보면 그때 정말 푹 빠져있었던 것 같다. 학생 신분에 30분 DVD 를 이만원 가량의 가격을 주고 사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그후로 짧은 러닝 타임의 이점과, 눈을 돌릴 수 없는 영상미, 감수성을 울리는 주옥같은 대사,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들을 보기 위해 가끔씩 그것을 틀어보곤 했다. 뭐 대충 그런 와중에 군대를 간것 같다.

 

물론 별의 목소리에 같이 수록되어있던, 그 전작 '그와 그녀의 고양이' 또한 매우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5분 가량되는 러닝타임에, 실연당한 여인의 아픔과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고양이의 모습을 매우 감성적으로 그려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쥐뿔도 몰랐기 때문에 좋다는 생각이상으로는 안했던 것 같지만, 지금 다시 본다면... 그러고보니 이제 조금은 와닿는 작품이 되어있을 것 같다. (글 쓰고 봐야지)

 

어쨌든, 그 이후에 개봉한 <초속 5센티미터> 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는 그저 그랬다. 헌데 <별의 목소리> 부터 어차피 다 컴퓨터로 시청했는데, 왜인지 점점 초기작들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번에 개봉한 <별을 쫓는 아이>를 보게 된다.

 

아 이 애니메이션도 참, 할말이 많다...

 

들어가기에 앞서, 솔직히 캐릭터와 빛&색은 차라리 전작들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지브리의 그것들이 떠오르는, 조금 둥글둥글 해진 캐릭터 디자인서부터, '샤쿠나 비마나' 등... 빛&색감또한 전작들의 화사하고, 아련하고, 밀도있던 것들이 고의적으로 배제된 것 아닌가 할 정도였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빛&색감 퀄리티는 여전하지만, 또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들이 튀지 않고 캐릭터 앞에 서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눌러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는 것. 아무래도 좀 더 빛과 색의 묘사를 밝고 눈부시게 하며, 캐릭터들을 조금 날카롭게 그려대던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더 맘에 드는 것 같다. 확실히 지브리의 느낌을 받은 관객들이 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지브리와 다른 점들 또한 뚜렷하다. 결국 다시 생각해보면, 감독 특유의 성질들이 좀 배제되긴 했지만, 결국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였다. 그가 이 작품에서 변화를 시도한 것인지, 실험을 한것인진 모르겠지만, 인물간의 감정선을 애틋하게 묘사할 줄 아는 그 특유의 감수성과 연출력, 그리고 환상적인 빛의 조절과 색감은 어디 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덜어냈다고는 하나, 영상만으로도 봐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진중하게 바라보면.. 이런저런 아쉬운 부분을 상쇄시킬만한 이야기가 존재하니깐. 신카이 마코토 & 텐몬 콤비 또한 건재하다.




줄거리  

소녀 아스나는 아버지의 유품인 광석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된 신비한 음악에 매료된다. 다시 그 음악을 듣기 위해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향하던 길에 이 세상에는 없는 괴물에게 습격을 받게 되고, 슌이라는 소년이 나타나 아스나를 구해준다. 아가르타라는 먼 곳에서 왔다는 슌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갖게 된 아스나 이튿날 다시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다시 가지만 슌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망감으로 슬퍼하던 아스나는 신임 교사 모리사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화에 대해 듣게 되고 그것이 슌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다. 슌과 꼭 닮은 신과 그를 쫓는 비밀 조직 아크엔젤의 추격 전에 휘말리게 된 아스나는 지하세계로 가는 문 앞까지 이끌려오게 되고 아크엔젤의 요원이 바로 신임교사 모리사키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소년 신은 아스나를 뒤로 하고 지하세계로 자취를 감추고 아스나는 모리사키에게 아가르타로의 모험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는데!!…   


 


감상

슌과 아스나가 괴물에게 습격받는 것을 계기로, 아크엔젤 소속의 모리사키는 계획적으로 임시 교사로 아스나의 학교에 잠입한다. 모리사키는 수업시간에 의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려는 시도를 담은 여러 신화들을 이야기하며 아가르타의 이야기를 흘린다. 여기서 이 만화의 기본 모토가 설명된다. 몇 가지 신화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저승의 신 하데스를 하프 솜씨로 설득해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것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실제로 아가르타는, 스리랑카의 지하성도 아가르타 전설(아틀란티스와 비슷한 맥락의)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데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여기서는 그런 신화를 조금 바꾸어, '별이 뜨지 않는 지구' 로서의 지하세계를 일컫는다. 이하, 만화의 설정으로 계속 이야기 하자면, 모리사키는 이 아가르타 내의 '피니시 테라' 라는 곳에 이르면, 그 어떤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은 자(아내)를 다시 소생시키려 한다. 사실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아가르타로 통하는 크라비스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고, 쫓는 아크엔젤에 몸담고 있으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아가르타 전설에 대해 정확히 찾아보진 못했지만, 오르페우스 신화와 아가르타의 전설이 합쳐진 듯 보인다.) 그 아가르타의 문이 열리면서 이 <별을 쫓는 아이>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주목할 것은, 초기작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아가르타' 의 의미가 사실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별의 목소리' 에서 '아가르타'는 지구보다 월등히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으로 설명된다. 지구인들은, 아가르타 혹성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적에서 기술을 얻어 문명의 진일보를 기록하지만, 그 기술은 곧 우주 함대와 로봇병기를 만드는 등 거의 아가르타 성인들을 뒤쫓기 위한 혹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을 위한 '무기'로써 제작된다. 그리고 이윽고, 워프 항법을 이용하여 아가르타 성인들의 흔적을 뒤쫓다, 만나게 되자 당연하다는 듯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사실상 인류에게 아주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아가르타 성인과의 싸움이지만, <별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것이 진지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노보루(남주인공)와 미카코(여주인공) 의 애틋한 감정선과 서로의 부재속에서 성장하는 드라마가 전면에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여기 <별을 쫓는 아이> 에서는 그것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성찰이 드러난다. 이것은 곧, 인류의 전쟁역사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부분이라고도 보여진다.

 

인류는, '케찰코아틀'이라는 고대 신에 의해 여러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끝없는 전쟁을 일으키며 살육과 파괴를 반복함으로 인해 결국 '케찰코아틀'이나 선인들마저 지하(아가르타)로 내쫓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아가르타인이 지구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별의 목소리>는 <별을 쫓는 아이>보다 한참이나 후의 일이지만, 결국 아가르타 라는 전설속 미지의 존재에 의해 문명의 진일보를 이룩하고, 그것으로 인해 또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계속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마치 모든것을 다 가지기라도 할 것 처럼,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지구를 파괴한 인간은, 결국 '생명의 부활'이라는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것이다. (마치 아가르타에게 상실의 아픔마저 보상받으려는 듯) 이보다 큰 주제의식으로 인해 이런 모습들은 크게 부각될만큼 언급되진 않지만, 충분히 그 비판성을 드러낸다. 아가르타든, 케찰코아틀이든, 문명의 발달을 오로지 폭력과 전쟁을 위한 것으로, 혹은 폭력과 전쟁을 위한 문명의 발달을 이룩한, 나아가 이제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 하는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주제는 아니라 보여진다. '아가르타',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인류문명에 대한 판타지, 문명의 발전이 야기한, 혹은 폭력과 잔학함으로 인해 발달된 문명에 대한 성찰은 나아가, 조금 다른, 제멋대로 파괴하고 소멸에 이르게 함과 동시에 탄생까지 손을 뻗으려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부질없는 욕심이란 맥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어쩌면 모리사키는 그런 인간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아스나와 함께 별이 하나도 없는 아가르타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없기 때문에 더 외롭게 느껴진다며 (혹은;; 별 하나 없는 하늘의 모습이 인간의 외로움 같다고) 인간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대중적인 연예인들을 스타라고 표현하고, 옛 이야기에서 별이 지는 것을 보고 먼곳에 있는 사람의 운명을 짐작했듯, 별은 종종 사람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으레 말하는 스타처럼) 별은 바라볼 수만 있을 뿐 가 닿을 수 없다. 이미 저물어버린 관계나 실제로 혹은 기억속에서 소멸된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별이 없는 하늘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리워하고 기억할 사람조차 없는 것이 외려 더 쓸쓸한 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모리사키)는, 그리워 할 수 있는 누군가(아내)가 있었기에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으레 '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나이가 된 이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아픔의 형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모리사키는 실제로,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 등장하는 인물도 중년은 아니니깐)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 뚜렷하게 등장하지 않은 중년의 인물이다. 15년 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어딘가로 흘려보내지 못한 채, 안에서 계속해서 고여놓았던 모리사키는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는 (신화의)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자신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아이같은 감성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온전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대변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아픔을 견뎌내고, 나아가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을지 찾지 못한 어른(모리사키)와는 다르게 아스나는 차곡차곡 상실과 이별이 주는 감정을, 그 아픔들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과정을 배워간다.

 

모리사키처럼 분명한 목적은 아니지만, 아스나 또한 분명 슌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모호한 희망으로 아가르타에 들어섰었다. (혹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가르타 인 이었기에 느끼는 일종의 회귀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스나 또한 모리사키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슌과 닮은 신을, 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정의 과정속에서 자연스레, 슌과 다른 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지상위에서 자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고양이(실은 보통 고양이가 아니지만)를 두고 떠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이별이 주는 강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 존재의 소멸은, 또 곧 다른 형태의 탄생으로 혹은 탄생의 일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 통곡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릴적에는 몰랐던, 하지만 결국 깨달아야만 하는 가슴 시린 인생의 한 과정을 말이다.

 

결국, 죽은 아내를 되살리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피니시 테라에 도착한 모리사키는, 신들이 타고 있다고 알려진 아가르타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 '샤쿠나 비마나'와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아내를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소원을 빈다. 하지만 샤쿠나 비마나(곧 신-GOD)은 영혼을 담을 그릇을 요구하고 광기의 모리사키는 아스나를 그 그릇으로 바치지만, 신은 또 다른 것을 원한다. 마치 (어느 리뷰어의 말처럼) 인간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그 어느것을 계속해서 바친다고 해도 신의 요구는 충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의지와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덧없고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었으니깐.. 신이 크라비스(열쇠)를 파괴함으로 인해, 잠시 아스나란 그릇에 담겨있던 모리사키의 아내의 영혼은 이내 다시 사라져버리지만, 모리사키는 잠시나마 아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샤쿠나 비마나-신(GOD)) 상실에 대해 오롯이 깨닫게 된다. 라틴어로 열쇠를 뜻하는 크라비스의 파괴는, 세계의 법칙을 넘으려는 열쇠는 애초에 존재해서도 안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다는 뜻으로 보여졌다.

 

한 인간은 다른 어떠한 인간도 대신 할 수 없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고유의,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잊지 못했을 것이고, 신은 아스나를 아스나로 있게 하기 위해서 크라비스를 부쉈을 것이다. 모리사키가 찾는 아내도, 죽어버린 슌도, 아무도 돌아올 수 없고,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또 다른 희망이 된다.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와 만나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잃어버린 어떤 존재가 가지고 간, 나의 한 부분은 마치 어떤 일정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상실감으로, 결국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상실된 존재를 대신해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또 다른 가치를 지니니깐 말이다. 신이 아스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아스나란 존재가 갖는 고유한 가치를 알게되었기 때문 아닐까.



모리사키가 아내의 상실을 그제서야 마음속에서 흐르게 할 수 있게 되고, 신이 자신의 형인 슌의 상실을 이겨내며 아스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아스나는, 슌의 죽음을 점차 받아들이며, 죽은 아버지의 묘지에서 통곡할 수 밖에 없던 어머니의 감정을, 곧 이별과 사별의 저릿한 아픔을 배워나간다. 이 모든 인물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한뼘 성장하는 모습이야 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 아닐까.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사람을 인정하는, 가슴 아프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인생의 한 단면 말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그래서 더욱 외롭다. 마치 저주처럼 외롭다. 이별을 결국 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이것을 인류의 저주라고 까지도 표현했다.) 엔딩곡 'hello goodbye, hello' 처럼, 인생은 헤어짐의 인사 후에 또 다른 만남의 인사를 한다. 그 어느것도 거스를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한 사람이 빈 자리는, 결국 다른 이가 다른 모습으로 채운다. 그것이 관계이고 삶이다. 그리고 삶은,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고, 사라져간 자들의 바람이다.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서의 관계의 단절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별의 목소리>의 불가항력적인 이별, <초속 5센티미터> 에서 여전한 그리움의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었으며, 이제는 한뼘 성장해 <별을 쫓는 아이>에서는 이별, 사별, 죽음, 곧 모든 상실을 어떻게 삶이 감싸안아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상실은 곧, 도망칠 수 없는 삶의 일부니깐. 모리사키라는 중년인물은 마치 그런 감독 자신의 성장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들은, 별을 쫓으려 달리지 않을 것이다. 때론,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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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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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출현한 이래, 기술의 발달로 점점 그 보급이 확대되어 핸드폰의 카메라도, 카메라의 범주에 넣는다면 거의 1인 1카메라 시대에 도달한 지금, 사진을 찍는 행위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분명, 카메라의 보급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일반인들도 '예술'의 영역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터치가 아닌, 프레임 수백만장 쌓이는 영화필름이 아닌, 단 한순간의 손짓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분명 가장 보편화된, 그리고 큰 파급력과 필요성을 지닌 예술적, 기록적 재료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DSLR의 보급은 '장비로써의' 전문가와의 차이를 거의 없게 만들었다. 사실상 전문가가 사용하는 물감과 붓을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고, 35mm (영화용)필름카메라나 RED ONE(추노, 국가대표 등을 촬영한 디지털 영상 카메라) 같은 카메라를 쥐어준 것이나 다름 없다. 게다가 이제 DSLR로도 영화촬영이 가능한 시대다. 렌즈군과 기타 장비가 보편화되진 않았다고 해도, 기본적인 렌즈군으로도 심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DSLR 같은 경우는 전문가의 흉내를 내기 딱 좋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전문가로 부르진 않는다. DSLR 의 보급은, 기술적인 사진의 수준이 향상되는 길을 좀더 넓혀놨지만, 그렇다고 기술적 수준의 향상이, 질적, 미적으로 향상된 사진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가능성이 조금 향상되었다고 해서 그 길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사진의 미덕중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다른 매체보다 두드러지긴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결국, 장비가 다가 아니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다. 하지만, 솔직히 좋은 장비들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때로는 그 차이가 클 때도 있고, 미묘할 때도 있다. 사실 장비의 가치에 대한 허상, 허울 같은 얘기는, 필요성과 투자비용을 고려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만약 동급 수준의 예술가들이 (사실 이런 가정은 터무니없긴 하지만) 큰 차이의 장비를 사용한다면, 결과 또한 다르지 않겠는가? 좀 바보같은 예이지만, 결국 하고싶은 얘기는, 더 좋은 장비는, 그 장비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만큼의 가치를 발휘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가의 장비를 사용해서 잘찍는 사람과 못찍는 사람은 나뉠 수 있지만, 출중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가의 장비를 쓰던 고가의 장비를 쓰던 분명 다른이들보다 뛰어난, 제 실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깐. 

카메라 매커니즘의 이해는 사실 좋은 실력이 아니라, 일반적인 실력을 쌓기위한 코스일 뿐이다. 결국 좋은 실력,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매커니즘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진철학의 풍경들>의 저자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다. 

"사진은 인접 시각매체들과 달리 이중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성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영원히 변함없을 양면성이다. (35p)  

저자인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 사진의 매커니즘, 혹은 기술적 스킬의 향상과는 직접적인 큰 관계가 없다고 보기에 무방할 정도다. 없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만큼 언급을 삼가한다. 아니, 그런 기술적 설명이 끼어들 틈이 없다. 기껏해야 빛, 어둠, 프레임, 구도 정도? 하지만 사진작가인 그에게 사진의 매커니즘, 스킬에 대한 지식을 의심할 정도로 심심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살짝 뒤로 감쳐놨을 지라도 일련의 사유들 사이에서의 카메라 및 사진과 관련한 역사, 일화 등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많진 않다. 배경설명에 필요할때 언급하는 경우니깐). 분명한 것은, 이미 그것을 뛰어넘은 사진가가 하는, '결과물로서의 우수한 사진' 이 아닌, 피사체에 대한 인지부터, 찍는다는 행위에 대한 사유, 그리고 다시 또 인화된 사진을 바라보는 법에 이르기까지의 긴 호흡이 담겨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매커니즘이 가진 규칙과 틀을 넘어서는, '정말로' 좋은 사진을 만들기위한 방법들을 '철학'을 통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사진은 만연한 사회적 실천이고 유희다. 철학이 없어도, 미학이 없어도,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무언가를 찾고 간구하고 묻는다면 진리의 문 앞에 선 것이다." (234p) 

개인적으로는 사실, 저자의 사유에  푹 빠져서 페이지를 넘기느라 (실은 그냥 내 실력이 이정도이기에) 크게 인지하거나 신경쓰고 읽지는 않았지만, 순서를 보면, /인식의 풍경/ 사유의 풍경/ 표현의 풍경/ 감상의 풍경/ 마음의 풍경 에 이르른다. 크게 보자면, 어떤 사물을, 어떻게 인지할 것이지에 대한 판단에서 부터, 결과물이 된 사진을 넘어, 가장 이상적인 사진을 꿈꾸기 위한 사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으로 보여진다. 분명 저자 또한 어느 행위의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유가 필요함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순서를 정해놨을 테지만, 사실 그 순서라는 것이 '전원을 켜려면 / 전원 스위치를 돌려라' 처럼 A를 하기 위해 B라는 사유를 해야한다는 것이 '반드시'는 아니기에, 사진이라는 것의 시작과 끝에 전반적으로 모두 닿아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의 철학적 지식을 보면, 그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또 사진을 향해 던졌을 질문들의 질량이 어마어마 했었을 것이란게 자명해보인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부터, 사진작가부터, 조금은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까지, 현재의 그를 존재케하는 사진에 관한 온갖 철학들이, 그저 허투루 나온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온갖 철학자와 사진작가의 말과 행동이 인용되고, 그에 따른 그의 생각들이 합쳐지며 사진에 관한 철학이 하나씩 만들어질때마다 저자의 통찰력에 놀랄 따름이다. 게다가 물론 아주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철학자, 사진작가들의 이론이나 사유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사유들을 심플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고 하는 것은 감각의 작용이다. 모든 사진가들이 항상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지 갈등한다. 그러면서 이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진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된다. 갈등을 해결해줄 구세주가 사진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30p) 

실제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진이기에 필수적인 '인식'에서부터 저자는 미술과 미학, 철학, 문학, 인문에 이르기까지 사진에 관한 사유가 과연 거기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싶은 부분까지 사진을 위한 철학으로 차용한다. 오히려 사진을 위한 말들 보다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시간에 대한 사유처럼 으레 사람들에게 사진과는 바로 연결되지 않았을법한 철학적 개념들도 모두 이곳에서 사진철학으로 탄생한다. 사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지배해온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 가장 닮은 '재현' 의 영역의 탄생은 어쩌면 회화보다 더 복잡한 사유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사진은 피사체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하는 '발견된' 오브제 미학이다. 창조된 오브제 미학이 아니다."(62p)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상투적으로 칭찬하진 않는다. 겸허히 돌아본다. 얕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애정과 확신, 의지는 어디에서건 느껴진다. 기록의 도구로써, 진실의 대변자이기도 한 반면에, 오히려 더 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했던 사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빚진' 사진 등 이런저런 사진의 한계성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더불어 그 한계의 극복 가능성과, 또 그 한계의 이면이 지닌 다른 매체와 차별화된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 행위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가 서로 한데 뒤엉켜 각 순서의 말미엔 결국 한가지씩 사유를 내놓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법."(328p) 

이책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진을 중심으로한 철학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곧 삶과 연관되어 있기도 일쑤고, 문체 또한 부담없이 읽기 좋게 되어있다. 사진을 바라보는 전방위 적인 태도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태도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정교하고 끈질기다. 어쩌면, 너무 단(맛이 나는) 약이다. 그래서 오히려 에세이 같은 분야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앞으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는 전과 다른 어떤 중압감이 실릴 것이고' 두번째는 '더이상 사진에 대한 어떤 사유를 하더라도 이 책에서 읽고 느낀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같은 걱정 아닌 걱정 이랄까. 물론 나는 이 책의 내용 또한 결국 망각속으로 던져버릴테지만, 작가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부딪혔던,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넓고 깊은 사유의 느낌은 쉬이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예술과, 삶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실재와 가장 '닮은' 매체의 특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갖가지 사유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맞닿는 지점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표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모호한 문제들도 있었고, 그만큼 계속해서 밀고나간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자신의 일이 되지 않는 이상, 한장의 사진을 찍는데 이와 같은 사유들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읽은 한가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다행일거다. 취미로 하는 사진찍는 행위가 이와 같은 사유를 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앞으로 또다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 그러니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닌 가치가. 

"보고 새기고 마주하고 돌아보는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몫이다.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은 사진가의 모든 것이다. 지나온 삶의 시선이면서 그 순간 세상과 호흡했던 생의 감정, 세상을 바라본 거울과 창이다. (3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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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에 들어와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파와 양식과 언어를 갖게 됐다. 예전에는 하나의 양식이 종종 수세기 동안 유지되곤 했지만, '모던'시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의 양식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17)

 
'들어가기'에 적힌 이 말처럼, 몇일 밤이 지나면 우리를 유혹하는 새 상품들이 즐비하게 출시되듯, 20세기에 이르러서 실로 다양하고 복잡한 유파와 운동이 일어났다. 제 각각의 운동과 유파, 양식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가졌지만, 서로 영향을 주며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면서 지금의 현대미술에 이르렀다. 특히, 그동안의 실제적인 표현과 원근법을 사용하던, 오래된 고전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다시피 하며,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순수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그 재현의 디테일함으로 인해, '재현도'를 제일로 치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방가르드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이야기 하는것이 좋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한번 읽은것으론 이것들을 완전히 습득했다고는 하기 어렵고, 또 그것들을 표현할 깜냥이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흐름의 경계나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는데 하물며 이런 일반인이 설명해봤자 혼란만 부추길 뿐이니깐.


19세기 초부터 그리 길지않은 주기로 등장한 복잡하고 다양한, 일련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어느 한 운동이 전의 운동을 대체하거나, 계승하거나 혹은 공존해왔다. 이 운동들을 기록한 순서를 보면 기본적으로는 연대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몇가지는 시대적 순서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다. 한번 읽은 것만 으로는 이런 일련의 운동들의 개념과 특성에 대해서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다 소진해 버렸으므로, 뚜렷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열거할 순 없지만, 아마 한 운동이 다른 운동을 계승하는 미학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데 정확히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한두가지 운동의 배열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이 연대기적으로 이어져있고 각 운동과 유파를 설명하면서 전/후 운동 혹은 동시대의 운동의 흐름과 영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기 때문에 특별히 난해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운동과 유파의 경계가 칼로 베듯 갈라지는게 아니기에, 큰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안목 또한 중요할 듯 보인다. 차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소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장에서 4장까지는 '순수성의 추구', 즉 추상으로 향하는 운동을 살펴보게 된다. 5장과 6장은 '근원을 향한 열망', 즉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예술의 비합리주의적 흐름, 특히 광기와 부조리에 대한 현대예술의 관심을 다루게 된다. (후략 / 지은이의 말)"

"야수주의와 더불어 최초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이 시작된다 (...) 야수주의가 일으킨 이 색채의 해방이야말로 20세기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35p)

 
실로 의미심장하고, 위대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던 야수주의의 도입부분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어느정도 용어적으로 친숙한, 보편적인 운동들이 있는 반면, 중간에 '신즉물주의' 처럼 조금은 생소한 일반인에게 보편적이지 않은 운동 또한 존재한다. 각 운동은 기본적으로 탄생의 배경과 멤버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더불어, 그 운동이 지향하는 점, 한계, 전/후 혹은 동시대의 다른 운동에 준 영향과 대표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용어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운동들은 그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계기로, 생소한 운동은 또 발견의 계기로 각각의 흥미를 준다. 사실 이런 여타의 예술저서들은 (인문학에는 못 미치얼지언정)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나, 평소 애매하게 알고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게 특징(이라면 특징) 인데 어느정도 일반을 넘어선 단어들이 없진 않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각 운동들의 특징과 더불어 그 한계와, 서로간의 영향들이 상세하고 잘 기술되어 있어서 흐름과 흥미를 쉽게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각 운동의 시작이나 전성기 때에 주요 멤버들의 포부나 선언문을 보면 으레 진취적으로 보이기 쉽다. 헌데, 내가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 편에서 느껴진 시선은, 그들의 운동들을 어떻게든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시선이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의 차례는 결과적으로 제들마이어의 분류와 대략 일치하게 됐다. (지은이의 말)


제들마이어를 여러차례 인용하고, 순서 또한 제들마이어와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진중권의 견해는 어느정도 그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유파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 창시자들의 선언과 실제 흐름과 성과들을 분석하며 중립적인 시선을 취한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였던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역사를 다룬다."(지은이의 말) 고 시작부분에서 말하며 일련의 시대의 가치를 지은이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한계와 가능성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제들마이어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의 말이 언급되고, 또 특정운동이나 사상, 시대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의 대화가 진중권의 날카로운 해석과 맞물려서 말이다. 이런 시선들은, 항상 미술전시장 벽에 적힌 작가와 시대에 대한 칭찬일색인 글이 주는 좁은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작품과 작가,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지식의 부족함을 꽁꽁 숨기며 칭찬에 급급했던 나날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엔 그만큼의 공부가 '훨씬' 더 필요하겠지만)


"현대미술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것에 우호적인 이들보다 외려 그것을 더 잘 이해한다는 역설.(중략)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예술운동의 본질은 외려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17)
 

진취적으로, 위대하게 탄생했든 아니든, 모든 운동과 유파는 대부분 그 모순 혹은 한계를 지니거나, 한계에 다다랐다. 어떤 미학적 판단에 있어 절대불변의 법칙이란 없기때문아닐까. 대중의 인식과 수용은 느리면서 오래가지만, 신념이 곧 삶 자체가 되기도 하는 여타의 예술가들에게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소용돌이가 일며 그들의 의식을 뒤집고 또 뒤집기도 한다. 그로인해 타인을, 다른 정신을 부정하면서 때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도 부정하기도 해왔으니깐. 

 
책을 덮었을 당시엔, 유파와 양식의 흐름을 좇다보니, 정작 미학으로서의 본질에 대해 소홀히 읽은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미학은 결국 이 아방가르드 시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이며, 우리가 미학에 대해 인지했든 아니든, 우리는 그 창을 통해서 이 혼돈의 시대를 '잘' 짚어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안일함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한 유파나 양식 혹은 운동의 기원을 살피고 들어가면 곧, 그것에 대한 특성을 끈질기게 분석함과 동시에 자료사진들을 보고,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그 유파, 양식, 운동의 가치를 살폈으니, 그 끈질긴 집중의 통로가, (비록 언어로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갖가지 시각과 진행, 충돌들이 바로 미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미학은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에요. (후략) "


다만, 한때 거금을 들여샀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온데간데 사라진 지금 비교할 대상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다. 그것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이 다른 서양미술사와의 차별성, 혹은 공통성을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을텐데. 아마, 미학에 대해 더 나은 개념의식을 갖추고, '고전예술'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보며, 다른 서양예술사 책까지 몇권 더 읽어본다면, 혹은 그랬었다면 좀 더 분명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까진 완벽하게 '그래 이래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야!' 라는 생각까지 드는것은 아니니깐.


어쨌든, 소설만큼 술술 읽혔다고 할순 없지만, 유별나게 어렵게 표현되지도 않은 책이었다. 많은 서양미술사 들의 책이 있겠지만, 이후에 출간될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3권과 이전에 출시된 1권에 대한 기대가 생긴것도 사실이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던, 혹은 항상 헷갈리던 아방가르드 시대의 양식에 관련한 용어들이 이제 (나름) 조금은 가까워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절히, 흥미를 잃지 않으며 읽어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학에 대한 좀 더 깊은 안목을 갖고 언젠가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날이 쉽게 오진, 그런책이 한두권도 아니긴 하지만..)


"현대예술은 사회와 소통을 거부하기 위해 끝없는 혁신 속에서 한없이 난해해진다. 하지만 이는 사회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외려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와 다시 화해하기 위한 제스처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 (3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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