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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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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아왔다. 이 독재가 결국, 개인의 어느 바닥에서 발현되는지부터, 인류의 어디까지 침몰시킬 수 있는지 <염소의 축제>는 매우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소설기법으로 펼쳐낸다. 

 

이 소설은 독재가 한참전에 끝난 시대, 우라니아가 모국 도미니카로 돌아와 노쇠한 아버지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두번째는 수십년 전, 견고한 독재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처럼 트루히요의 군더더기 없는 모습에서 시작하고, 세번째는 안토니오 임베르트 무리가 독재자 트루히요를 암살하려는 날로 시작한다. 여기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까지 합쳐져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하는 자들'의 특성과 심리를 바닥부터 관찰하며, 각 시대를 온전히 담아내는 이 세개의 하루는 30년이 넘는 시간을 간결한 글에 압축하여 펼쳐낸다.

 

트루히요의 예처럼, 으레 독재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재자를 도움으로써 보장받을 수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 그 지배층 뿐만 아니라 피지배층 모두가 갖고 있는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그로인해 발생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만족, 하나뿐인 목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밥그릇 뒤에 놓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함, 언론의 결탁 등등. 하지만 작가는 독재의 지속성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고, 통찰력 있는 근거들을 그려낸다. 독재자에게는 잘못된 아버지 상을, 피지배자에게는 고통을 행복의 과정이라고 보는 잘못된 인식과 두려움을 통한 수긍-길들여짐에서 찾아낸다.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트루히요는 스스로 시민들의 진정한 아버지, 아버지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온갖 더러운 욕망을 가진 ‘의붓아버지’ 다. 더러움을 속으로 흐르게 해야할 하수도에서 넘쳐나온 오물에 그가 그렇게도 신경이 곤두섰던 것은, 자신과 하등 다를바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우라니아의 아버지가 가족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딸의 처녀성을 멋대로 희생시킨 것은, 트루히요의 모습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가족에서 국가로 넘어가면서 희생의 범위와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은 자명한 것. 권위적인 부모의 폭력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독재자의 무분별하고, 국민을 향하지 않은 국가운영에 대해 국민은, ‘우리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 이라고 믿었던 것은 얼마나 끔찍한 오해인가.

 

그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비록 총통이 몸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이 계속해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오랜시간 세포하나까지 지배당했던 로만 장군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 길들여진 개가 목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을 지배했던 독재자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사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독재자의 아우라를 끔찍하게 뒤집어쓴 것은 과연, 로만 장군 뿐일까?

 

이 나라는 짧은 시간동안 남부럽지 않은 독재자들을 배출했다. 트루히요를 찬양했던 많은 도미니카 시민들은 억압뒤에 따라오는 경제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독재시대를 더 살기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법 및 기간에 대한 간섭과 제재가 거의 없는 독재가 경제적 성장마져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독재자 스스로의 수치아니겠는가. 독재 뒤의 콩고물과 같은 경제혜택을 좇는다면, 언제어디서 또 다른 독재자가 탄생해도 이상할 게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가치이고 평등이다. 어떤 통치도 독재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밥한그릇은 우리 노동의 대가이다. 자유대신 주어진 밥 한그릇에 만족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가 받았던 고통에 대한 침묵의 대가이기도 했으니깐.

 

그럼에도 우라니아가 제 가슴속에 꼭꼭 감춰둬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사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대답없는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우리가 용기있게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자신, 사회,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유/무형의 독재자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한명에게 다수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권리를 쥐어주는 것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리스크 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봐야한다. 독재에 저항하기를 머뭇거리거나 포기함은, 서로의 비극을 방관하는 것이며, 그것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건너편 동료의 고통을 외면하고, 바로 앞의 밥그릇을 핧을때 머지않아 우리는 건너편의 위치에 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로 세련되게 치장된 독재의 목줄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우라니아가 무표정으로 고백한 과거의 진실이 그 사촌들을 무너뜨렸듯, 무표정의 글에서 독재는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모습들은, 예상보다 큰 분노의 감흥이 없었다. 문득 스스로에게 놀라며, 허탈해졌다. 비극에 길들여지는 비극, 이 얼마나 끔찍한가. 자유의 훼손을 방관했던 시민들은 독재자의 가장 큰 피해자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건, 그 지난한 싸움에서 결코 길들여져서는 안된다.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점철된 시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시대의 저항방식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바꾸려는 물결에 함께했었다. 그리고 결과에 좌절했고, 나또한 내 밥그릇 찾아 자연스레 뒤돌아 가는 것을 보며 스스로에게 좌절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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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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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대한, 우주에 대한 동경은 먼 옛날부터 끊임없이 있어왔던 인간의 욕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신에 대한 존재 혹은 거처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하늘로 상징되어왔고, 온갖 자연현상 또한 하늘의 뜻으로 통했고, 천체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의 앞날을 내다보려는 시도 또한 쭉 있어왔다. 그러므로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결국 하늘 아래 땅 위에 존재함에도 대부분 가 닿을 수 없는 하늘은 늘 어떤 기쁨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중력을 거스를 수 없었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 지식의 발현을 통해서 우주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현대에도 여전히 하늘과 우주는 동경의 대상이고, 수많은 감성의 원천이다. 하늘과 우주를 떼어 구분할 수 없었던 시대를 지나, 항공기를 통해 하늘을 가로지를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관심은 우주라는 명칭을 향해 더 높게 뻗어나간다.


크건 작건 인간이라면 굳이 우주비행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밤하늘을 통해서 우주를 꿈꾸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나 수많은 꿈을 꾸고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것들을 상상'하던 유년시절에 특히 그렇다.  어릴적에 항상 공상과학그림을 그리거나 하면 일순위가 우주이고 두번째가 바닷속이지 않을까? 그때의 기억이 남들과 특별날게 없는 것 같으니 차치해도, 이 <오몬 라>를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것들은 (비교적) 최근의 기억들 이었다. (희안하게도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쪽이 강하게 기억에 남는데, 현재까지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작품들이 모두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 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실사와 비교해서 지금보다 더 크게 우주를 동경했던 유년시절의 감성이 더 맞아떨어져서인지. 우주에서 벌어지는 2시간 내외의 이야기 (혹은 스타워즈 같은 시리즈 물과 같은 실사) 보다 그 태생부터 가공되어있는 애니메이션이 더 긴 시간, 큰 공간의 우주를 이야기 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그쪽 매체에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몇해전엔 우주비행사였던 고산씨가 했던 짧은 강의를 들으며 우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것은 무엇이든, 내가 깊히 기억하는 것들은 모두가 인간이 펼치는 이야기를 하며, 개인의 내면을 농밀하게 묘사해낸 작품들 이었다. 하지만 그것들과 별개로 이 <오몬 라>가 무척 인상깊었던 이유는 단순히 매체의 형태의 차이가 주는 다른 느낌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무엇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에 따른 차이였다. 이 작품은 무척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사이를 몽환적으로 풀어내고 있었고, 우리가 아는 우주에 관한 시대적인 부분과 개인의 본질적인 부분을 동시에 그려내면서,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더 높은 주제의식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하늘을 동경했던 오몬 은 유년시절에 미쪽 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우주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고, 둘은 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비행을 위한 시험에 들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미쪽을 제외한 오몬 과 다른 동료들 만이 꿈꿔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비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오몬 라>를 쉽게 표현해보면 외면과 내면의 우주비행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선 오몬을 둘러싼 외면을 보면, 그는 미소간의 냉전시대에서 우주비행사의 꿈을 꾸었다. 꿈이란 것은 마치 개인의 전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았기도 했을 시대이다. 오몬과 미쪽, 혹은 그들과 같은 꿈을 꾸던 많은 이들은, 순수한 우주탐험의 목적보다는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외적 위협으로 사용되었던 우주에 대한 선전활동에 충분히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상과 꿈이 아닌, 마치 그 둘이 유년시절에 모형우주선안의 사람을 빼냈다가 받은 벌-방독면을 쓰고선 산소와 공포에 의한 눈물로 자욱한 렌즈너머로 바라본 듯한 모습이었다.


항공학교에 들어간 그들은 전혀 꿈꾸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의 우주비행을 목격한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우주개발은 곧 미국과의 긴장관계와 연결된다. 그들은 그곳에 들어가 우주인이 아닌 군인으로써의 대우와 사상검증을 받으며, 우주를 위한 헌신이 아닌, 국가를 위한 헌신을 강요받는다. 이름을 남길수도 없는 비밀요원인 그들은 발들인 그곳에서 빠져나갈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최고 높이까지 날아가서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요원과 다를 바 없던 것이다. 그 시대의 소련은 그것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어떤 협약을 위해서 곰의 탈을 쓴 인물을 사냥감으로 둔갑시키고, 또 그의 희생을 통해서 그 협약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기도 할 정도다. 우주뿐만이 아니라 많은 곳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증명과 실천, 나아가 국가를 위해서 모든 이들이 어둠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밖에 없던 시대였던 것.


무엇보다 흥미롭고, 실제적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지금까지도 음모론으로 늘 떠오르는 미국의 달착륙 과도 견줄만한, 오몬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수동성'이다. 그것은 각각 분리되는 로켓면과 달에 착륙해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탐사기계에 모두 사람이 탑승하고선 그것들을 수동으로 조작하는, 곧 탑승자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잔인한 일이었다. 그것을 아는 최소한의 인원들을 제외한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그것들의 겉모양을 보고선, 소련의 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임또한 분명한 일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사실관계의 증명은 나로서는 아직 요원하다. 더 많은 정보의 검색을 요하기도 하고, 해설을 읽어보았지만 뾰족한 설명이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그도 당연한 것이 그것의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극비의 사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것의 사실관계증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니, 작가가, 사상과 체제를 존속시켜야하는 국가와 그 속의 소수 대중들의 희생의 관계를 그려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떨어져나갈 부품속에 존재하는 죽음을 뒤집어쓴 대원들처럼 말이다.


마지막 부분인, 우주에서 오몬이 루노호뜨를 벗어나 마지막에 보게되는 환상 혹은 반대로 실제와도 같은, 조작된 것 같은 우주비행선과 발사 중계장면같은 경우를 보면 마치 그런 거짓과 같은 우주 비행을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도록 오몬과 같은 비행사들을 세뇌시킨 것 같은 추측까지 해보게 만든다. 그런 세뇌에 현혹되서 실제 우주를 유영한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이전에 오몬이 보았던 그들의 관을 준비하듯 말이다. 나아가 그것은 사상의 허구, 더 나아가 그런 사상속에서 똬리를 틀 수밖에 없던 한 개인의 가련한 꿈의 허구와 껍데기, 거짓을 위한 일련의 규제와 현상과 희생이 대중이 믿는 진실을 만들어가는 시대적 현상에 대한 비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우주비행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진실인줄 알았던 자동기계가 실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런 일련의 진실처럼 포장된 사회의 전망이나 이데올로기또한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겉껍데기에 불과함을, 그리고 그 안의 사람과 그 사람의 꿈또한 껍데기처럼 전락할 수 있음을 암시하지만, 그런 가련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꿈을 자신의 우주를 탐험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길고긴 사상의 허상위의 선로를 벗어났을때 진정 자신의 우주로 뻗어나갈 수 있는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오몬 라>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 시대와 국가, 사상에 대한 테두리를 구축하지만 그 속에서 한 개인이 유년에서부터 가져온 꿈을 통한 존재에 대한 질문, 밖과 안의 충돌과 혼란으로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사회주의국가 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과 국가에서의 역할과 꿈에 대한 일정한 합의와 어긋남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우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안에서 결국 외적으로는 승복한 듯 보이지만, 그 영혼은 결코 무릎꿇지않고 나아가 현실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의 그의 마지막 몸부림은, 끝끝내 그가 자신의 이상을 지배하려햇던 사상을 벗어나 영혼이 정말로 원했던, (그 사상의 지배에 있건 아니건 그 속에서 꿈꾸었던) 순수의 꿈을 계속 이어가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꿈에 대한 열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작가는, 한 시대와 사상, 국가가 어떻게 개인을 침범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꿈꾸는 개인이 어떻게 다시 자신안의 우주로 뻗어나가게 되는지 그려낸다. (사실상 오몬의 외적, 내적 성공에 대한 여부를 결말에 이르러서도 가타부타 하긴 어렵지만) 이 작품은 확실히, 촘촘하게 시대를 그려내며, 유연하고 몽환적으로 개인을 들여다보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모두의 우주에서 시작해 자신의 우주로 이야기를 뻗어나가며 결국 한 개인적 우주의 팽창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이 다시한번 우주와 인간에 대한 동시다발적 탐구열을 가져왔다. 문득,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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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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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봤다.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큰 붓의 궤적처럼, 꼬아진 줄처럼도 보이는 그것은 분명 이 단편들이 그러하듯, 어느 꼭대기에서 매듭지어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보편적으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편집자와 옮긴이의 재량껏 선택/배열되었다. 표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이 제 죽음과 마주한다면, ‘인디언 마을’은 타인의 죽음과 마주한다. ‘알게되는 순간’이, ‘알았다고 생각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가는 과정이다. 최후의 죽음에서 최초의 죽음을 더듬어가던 인물처럼, 배열은 죽음으로 연결된 최전방과 최후방의 꼭짓점 사이에서 의식의 흐름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양쪽 세계의 죽음 사이에서, 살아있던 만물들의 우직한 ‘어떤 순간들’은 필연적이며 역설적으로 삶을 이야기한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처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본 삶은 마치 신기루 같다. 살아갈 날에 대한 맹목적 확신은 죽음을 거짓말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그 경계 앞에 서는 순간, 흉내 낼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을 지난 삶이 거짓말이 되고 오로지 남아있는 것, 죽음만이 참말이 된다. 

 

하지만 내가 느낀, 그(헤밍웨이)가 그려낸 죽음들은 여성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와 다시 여성의 세계로 들어가고야 마는 (대부분) 남성의 운명과, (거의)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의 세계를 파괴하는 태도에 대한 대조로 확장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와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이하 ‘프랜시스..’)의 머콤버는, 진작에 한 (자궁의) 세계를 빠져나오며 태아였던 자신과 죽음을 선언하지만 결국 같은 (여성의 품인) 세계로 돌아가고야 마는 (대부분의) 남성들이었다. 자신을 극복하거나 상대를 부정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 세계의 균형을 깨트리고자 하는 그들은 결코 정복한 적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세계를 벗어날 뿐이다. 이야기 사이의 공백을 재량껏 메우며 좀 더 되짚어 봤다. ‘인디언 마을’에서 최초와 최후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어떤 일의 끝’에서 여성의 품에 들었다 벗어나지만 ‘사흘간의 바람’에서 결국 그것이 실패했음을 은연중 알고, ‘살인자들’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이를 보고 ‘가지 못할 길’을 통해 다시금 떠나,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 결혼이 모든 것을 고쳐줄 것이라고 믿는 이를 약간은 측은히 바라보며 ‘심장이 둘인 큰 강 1,2부’선 낚시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으리라 확신하지만 ‘온 땅의 눈’속에서 아내의 임신으로 인해 그런 날들을 약속할 수 없음을 알고 (닉 애덤스의 시리즈는 끝인듯 하지만 흐름을 이어가자면) ‘하얀 코끼리 같은 산’에서 위태로운 감정들을 건너기도 하며,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처럼 타인의 허무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결국은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에서 처럼, 마지막 세계의 죽음을 지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알 수 없을 자유로 향한다. 가장 멀리 왔을때, 가장 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의 울타리를 원하면서도 또 벗어나고자 함은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생명의 본능인걸까.

 

‘프랜시스..’를 다시 ‘심장이 두개인 큰 강’과 연결해보면, 끝과 끝의 연결을 통해 서로를 근사치의 힘으로 잡아당기는 낚시와 달리, 필연적으로 손을 벗어나 폭발적인 힘으로 찰나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사냥의 차이를 본다. 사냥은 낚시처럼, 죽음 앞에서 서로의 생이 최대로 응축되어 발현될 순간이 생략되며 한 생이 한 생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낄 틈조차 없다. 죽음 바로 직전, 생명이 가장 강하게 빛을 발하는 그 순간이 부재한다. 낚시는 ‘당김’으로써 죽음을 만들지만, 사냥은 ‘밀어냄’으로써 죽음을 만든다. 거짓 같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삶을 느끼는 방식과 삽시간에 삶과 죽음 모두 거짓 같은 일이 되어버리는 방식은 죽음과 자유의 연계를 생각게 한다.


생(生)이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 어떻게 자유 혹은 파괴로 넘어가는가. 밀어내는 죽음은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서로의 생 간의 연결과 긴장이 없는 죽음은 그저 파괴로 전락할 뿐. 해리는 아내가 계속해서 그의 생을 바라고 당김으로써 평온한 자유로의 과정을 거쳤지만 머콤버의 삶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해리가 [신의 집]에 도달하는 그 과정은, 거짓의 계단을 올라 이윽고 진실이라는 꼭대기에 닿고자하는, 헤밍웨이 자신처럼 거짓을 보태 진실을 그려나가는 창작자의 운명을 대변하는 걸까. 정말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킬리만자로의 평평한 꼭대기’는, 온갖 의미의 끝에서 무의미의 ‘낙원’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곳은 아닐까. 무엇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끄는지, 얼어붙은 표범 시체를 보듯, 타자인 우리는 그저 올려다 볼 뿐이다. 해리의 죽음과 동시에 울먹이던 하이에나의 소리가 그녀를 깨웠음에도 이내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 때문에 더 듣지 못하듯, 인간 또한 타자의 죽음으로 잠시 깨지만 이내 잊고 살아간다. 살아있는 자의 숙명이기라도 한 듯.

 

인간은 늘 단편의 죽음과 마주하고 언젠가 한번 장편의 죽음과 마주한다. 늘 한 순간의 소멸과 한 순간의 탄생으로 이루어진다. 수면이라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행위 전 하루를 돌아보듯 최후의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인가 소멸인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갖는 많은 것들은 찰나의 빛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가 진정 발현되는 순간은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찰나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놓여진 것은 자유뿐인 그 죽음 직전의 순간, 지난 삶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그 순간이 진정 자유의 순간아닐까. 죽음 후의 삶을 결국 우리의 거짓말이 증명할 수 있다면 죽음 직전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진실이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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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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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타 지역에 살던 여학생을 속여서 불러와, 일년동안 구타 및 집단 성폭행, 학대 등.. 인간이 입에 담는것이 민망할 정도일때 머뭇거리는 일들을 자행해왔다. 무려 41명이나 되는 이들이 이 사건의 가해자였지만, 모두 적당한 처벌은 커녕, 길가다 싸움 붙은 것에 대한 것만도 못한 처벌을 받고 풀려났고, 오히려 피해자는 신원을 보호받지 못하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가까스로 전학간 곳에서까지 가해자 부모에게 시달리다가, 현재 실종상태다. 대략적으로 이렇게 간추린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아 나는, 정말 이 시대와 이 세계가 절망스럽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2004년, 지금보다 더 머리가 비어있을 때다. 생각이 없었다기 보단,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허세를 크게 떨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그러지만) 정치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정치는 사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현정권이 잘 가르쳐줬고) 남을 대하는 태도도 지금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때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가!? 2004년 12월...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복잡했을 시기다. 아무튼 그 당시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은 별 충격을 주지 못했거나.

 

그러니깐, 이 <41>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정확히 알게되었다. '그런 일'에 대해서. 가해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수사를 했던 경찰의 태도, 가해자 부모들의 태도 등... 정말로 끔찍하고 철저하게 그 아이를 짓밟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함께 쓰는 이의 글 이라서 그런지, 그의 글이 더욱 궁금했다. 우선,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밌다. 순수문학을 읽을 때의 그런 언어로부터의 사색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적당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읽는 내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는 심플하다. 밀양 사건이 터지고 몇년 후,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의 공통점은 밀양 사건 가해자들 중 핵심멤버 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용의주도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행으로 인해 합동수사본부, 형사인 정태와 제훈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범죄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시윤은 우연히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슬슬 일을 마무리 해간다. 이윽고 쫓는자는 포기하고 쫓기는 자는 일을 끝마쳤을 즈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책은, 실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있는,(그러니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혹시나 당신이 지지리도 운이 없어서 그 귀한 시간에 내 글을 읽는 이 시간에도 말이다! 멀리 있다는 보장도 없다.) 41명에게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이제는 그들을 다시 처벌할 수 없기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상상속 처벌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어떠한 마음으로 썼을지 몰라도,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불타오르는 복수심 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형사들이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문제 - 불규칙하고 위험한 생활로 인한 불만의 폭발이나, 범행을 저지르는 시윤이 겨우 찾아낸 사랑앞에서 자신의 거취를 고민한다던가 하는 경우를 통해, 비단 피해자나 가해자의 관계자들이 아니더라도, 아니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일과의 우선순위에서 머뭇거리는 모습 처럼, 우리네가 살면서 어떤 흉악범죄나 사건, 혹은 정치적 문제와 맞닥뜨렸을때, 우리를 직접적으로 둘러싼 문제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과정은 당연히 우리의 망각과도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해자를 법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도 끝끝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적절한 심판을 받지 못한채로, 그러니깐 아무런 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아니하고, 사회에 내놓게 된다.

 

'모든 사건의 수사에 있어서 시간은 가장 큰 적이다. 증거는 흐릿해지고 용의자의 혐의는 희석되고 수사진의 의욕도 떨어진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미스터리의 문이 닫히고 만다.' (158)

 

이렇다할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며 범죄가 더이상 늘어나질 않자 수사본부가 축소될 위기에 처한 모습을 그린 이 대목은, 우리의 관심과 망각의 과정을 잘 드러내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우리는 인정하되, 극복하고자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 옆에 범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단 한발짝의 생각도 나아가지 않은 사람이 우리 옆에서 우리의 소중한 누군가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예의 바르게 만드는 힘은 관용이 아니라 공포야. 죄의식 역시 충분한 벌을 받아야만 생기는 일종의 공포야. 함부로 행동하다간 혼난다는 공포. 너희들은 그 공포가 결여된 놈들이지.' (240)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법원, 병원 같이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앉혀놓고도, 신처럼 모셔놓은 어떤 체제에 대한 반성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바라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소불위 와 같은 권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이미 위험천만한 선을 넘었다. 그래서 그런 곳은 일반인이라면 대부분 약자가 되는 곳이다. 대부분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지못하는 것은 당연히 두렵고, 또 그런 것들이 겹쳐셔 우리는 법을 잘 아는 이들에게 항상 약자의 위치가 되어버린다. 이번에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배우 안성기가 맡은 역할이 왜 그렇게 통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법은 이미 어떤 의무나 책임보다는, 아는 자들, 소유한 자들이 갖는 하나의 '권위'와 '권력'으로 파생되어있다. 권리를 주는 것과 권위를 주는 것은 다르다. 사실상, 자신있게 '법대로 해라'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안지은 사람이 아니라, 막 살거나 혹은 법을 아주 잘 알거나, 돈이 많아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일 뿐아닐까? 우리는 착각한다. 우리가 법에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물론 보호받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지금의 생활은 불가능할 테니깐.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것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당연 조건이지, 우리를 위한 조건은 아니다. 본래 유지되기 위해 그런 위치를 만들어 놓았다고 보는 셈이다.

 

상위 몇 퍼센트를 위한 정당을, 그런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찍는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잘 살겠지, 혹은 그렇게 잘 살게 해주겠지, 하며 미래를 기약하며 투표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인 것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법은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이 변하고 사건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법은 언제까지 고정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에 만들어진 법은 그 사람들이 신이기에 완벽한 법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법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만들었던, 그 시대의 룰 일 뿐이다. '법이 이러니깐 안돼' 라는 것은 때론, 어릴 적 옷을 입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범죄들중에서 아직 법이 없어서 제대로 된 단속이나 처벌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현재에서 머무른다면 안정적이긴 하나, 그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마치 '악법도 법이다'라고 우길 것이라면 나는 묻고싶다. 그저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정말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법은 완벽하고, 판사는 완벽한지. 만약 아니라면 그 완벽하지 않은 것들은 대체 언제 바로잡아야 하는지. 우리는 항상 법을 감시하고, 개선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꼬마비, 노마비 작가의 <살인자ㅇ난감>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여러가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이들을 보면서도,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법의 판단'에 맡기고, 우리가 그 법이 올바르게 집행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본적인 생각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실화가 모티브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범죄가 그토록 끔찍하고 울분터지기에 그런 것일까? 잔인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결국 당해도 싸다 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깐, 여기서 또 한가지 웃기는 점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법이 똑바로 집행되지 못했을때, 우리는 뒤틀린 심판을 옹호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우리의 뒤툴린 심성은 곧 삐뚤어진 법이 만들고 있기도 한 셈이다. 새삼 결론은 같은 듯 하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인간을 데려다놓고 신처럼 떠받드는 그곳의 권위를 밀어내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높이에서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감시하고, 개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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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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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너는 아니? 그것들은 곧 사라지게 돼 있어. 언제나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버리는 것만큼 우주는 광활하단 표현만으로도 부족하다. 그 공간속에 우리는 결국 지구라는 공간에 사는 아주 작은 미물일 뿐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더불어,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김연수 작가는 일련의 논리와 비논리로 우리 인간이, 세계가, 나아가 인류가 어떻게 성장해왔고, 어떻게 더 성장해야만 하는지 한 소년의 지난한 삶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살았던, 죽고 다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하늘의 별이 아니라, BH에 있는 별을 보고 고통보다 더 큰 두려움에 침묵했던 80년대. 그때의 밤의 어둠은 더욱 짙었고, 우리 가슴속의 어둠도 더욱 짙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 소년의 이야기이면서, 시대의 관한 이야기이고, 나아가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분 나이를 먹어가며 어느 시점에서 외부와의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땐, 태초에 가졌던, 외부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찰의 능력을 잃어버린 후다. 잃고, 잊었던 그 능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고독에 함몰되어 고단한 삶을 버텨내며 중요한 그 어떤 능력을 이제는 초능력이라 부른채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왔던 인류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약간은 다르게(결국은 같게) 겪은 한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타인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게 아닌, 대부분을 스쳐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별이 나를 위해 멈추고, 비추는 것처럼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번쯤 있었음직 함에도, 인류는 그동안 너무나 고독해왔다. 

 

결국 인류의 유전자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의 눈물로 시작해서, 자신의 눈물로 끝나는 과정은 그렇다.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지금껏 존재해왔던 인류에 비한 자신의 비율만큼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가기 때문이다. 먼지같은 시간, 때로는 그것조차도 공유할게 없어보이는 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얼핏보기엔 비극이다. 거기에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류가 여태껏 병처럼 끌어안고 살아왔던 고독뿐 이다. 하지만, 그 고독과 더불어 그렇게 서로에게 비어있는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여백을 공유하다보면, 그것이 어느덧 사회가 되고 시대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비극으로 남은 한 시대는 부족했던 그것들의 합이었던게 아닐까.

 

“어느 쪽이든 나의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인류를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그 살아온 시간의 양과 비례한 시간을 요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을때,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 타자와 나란히 생을 걷게 되는 것 아닐까. 소년이 자신의 아빠를, 엄마를, 희선, 무공/재진아저씨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어 가는 것이었듯 말이다. 마치 기어이 소주를 두병째 따고서야 그 안에서 슬픔이 새어나오듯, 늦었지만 또 늦지 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시대나 밤은 어두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외롭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바 일 것이다. 어둠으로 인해, 우리는 어딘가를 건너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하고, 맞잡은 손의 체온을 느끼고,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이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결국, 소년이 깨닫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 중요한 것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들이는 것이었으니깐.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경계를 넘어가며 성장하니깐.

 

“...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소년의 짧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엮어나간 이 이야기 자체가 바로 ‘이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갔던 것 아닐까.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으니깐. 이해라는 단어를 이해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이 이야기가 바로 이해 그 자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내면의 우주, 타자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비행사와 다름없다. 인류는 나름의 이해를 통해 지금껏 살아왔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다. 자신의 집을 등지고 서있는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동상 뒤로 숨겨진 그의 왼손엔 꽃 한송이가 쥐어져있다. 멀고 먼, 크고 큰 우주를 유영한 우주비행사가 인류에게서 가장 먼곳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를 바라본 인류가 우주라는 먹먹한 고독앞에서 알게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쩌면 우리의 답은 그 작은 손 안에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연약해서 사라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라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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