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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물의길 : 아트북 아바타 3
타라 베넷 지음, 이솔 옮김 / 아트앤아트피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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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물의길 아트북의 첫 인상은 무척 고급지다. 두꺼운 양장커버에, 그 사이즈를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그 자체로도 왠지 아바타의 한 조각을 가진 느낌이다. 내용은 어떤가하면, 영화 [아바타 물의길] 에 관한 미학적 자료와 그 성취를 향한 여정의 기록이다.


아트북 이라는 그 이름답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아바타:물의길]의 미술자료와 설정들을 방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그 미술적 자료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적절한 종이를 사용했음이 짐작된다. 이 미술적 자료들은 단순히 디자인 뿐만 아니라 세계관, 캐릭터, 의상, 장신구, 장비 등 아바타에 등장하는 모든 미술적인 것들을 총 망라한다. 영화에서는 이야기에 쫓아가며 바빴기에 지나쳤던 많은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면 정말 제임스카메론과, 그의 스태프들이 이뤄낸 성취는 단순히 영화에만 그치는게 아닌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이 아트북은 아바타:물의길 의 미학적인 요소의 시각적 전시뿐만 아니라 그 발전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서문에서 로드리게즈 감독이 밝힌 이책에 대한 정의 -시각적 로드맵- 는 책장을 얼마 채 넘기지 않았을때에 이미 완전히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은 정말로 아바타:물의길 에 대해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수많은 그림들로 구성되어있다. 단순히 아바타:물의길에 관한 시각적 자료였더라도 이 책은 굉장했겠지만, 이 아트북은 아바타의 이런 미학적 성취를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뤄왔는지를 제임스카메론의 발자취 뿐만 아니라 여러 팀의 노력의 과정이 텍스트로 담겨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미술적으로 감탄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민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미학적인 자료들을 보며 더욱 감탄하게 된다.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물론 전문 인터뷰집은 아니겠지만) 그 이야기를 많은 컨셉디자인과 설정자료들과 잘 분표시켜서 [아바타:물의길] 에 대한 미학적 자료를 원하는 독자 뿐만 아니라 그 발전과정을 흥미로워할 모든 독자들까지 만족시킬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디테일하게 소개된 디벨럽 과정들이 시각적인 자료들 못지않게 정말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일련의 미학적인 발전과정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바타:물의길 에 대한 컨셉과 설정 자료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어서 아바타:물의길 이라는 영화의 미학적 발전 과정뿐만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세계관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까지 만족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미술자료에 감탄하고, 그 과정과 치밀하고 깊은 고찰에 대해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끊임없이 감탄을 자아내는 이 책 아바타 물의길 아트북 은 판도라 행성에 대한, 나비족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거대한 아바타:물의길 세계에 대한 가장 미학적인 안내서 일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단점이라는 가격인데.. 이 책을 사기전까지는 그럴지 모르나, 이 책을 사고난 후에는 돈에 대한 미련은 안남지 않을까.



이 리뷰는 #네영카 를 통해 출판사로 부터 책을 제공 받았으며, 가이드 없이 주관적으로 리뷰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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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쿠엔틴 타란티노 지음, 조동섭 옮김 / 세계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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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기 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다시 봤습니다. 어쩌면 감독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들과 배우, 그리고 산업에 대한 애정과 때로는 냉철한 시선이 거침없이 녹아든 영화는, 보통의 상업영화에서 기대하는 서사의 재미보다는 캐릭터와 그 배경, 그리고 영화와 배우라는 것 자체를 흥미롭게 곱씹으며 따라가는 재미를 주었습니다. 헐리우드의 고전영화들이나 감독들은 꿰뚫고 있진 않아서 한귀로 듣고 흘린 부분도 많긴 하지만 어쨌든 과거 할리우드, 배우, 감독 그리고 (자신의 감독한 것을 포함한?) 영화에 대한 타란티노 자신의 시선을 릭과 클리프를 통해 따라가는 재미는 쏠쏠했죠. 그렇지만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 비하면 한물 간 배우로 취급받던 릭과 그의 스턴트맨인 클리프에 대해 실제로 드러난 것은 많진 않았습니다. 어떤 인물이냐는 알 수 있었어도 뭘 어떻게 했던 인물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 책 #원스어폰어타임인할리우드 는 그 아쉬운? 부분을 잘 채워줍니다.

처음엔 그저 영화를 소설의 형태로 바꾸고 약간 수정정도 한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에 비교해 훨씬 더 풍부하게 캐릭터를 묘사하며 마치 NG 컷이나, 영화에선 다 못담은 장면들을 확장판으로 보여주듯 이야기를 훨씬 더 확장되게 보여줍니다. 사실상 영화의 스토리를 베이스로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릭(디카프리오)이 에이젼시와 이야기 하는 것은 장소, 분위기, 디테일은 완전 새롭게 쓰여진 수준이고, 거기에 비서에게 작업거는 클리프(브래드 피트)까지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소설처럼 시나리오 써놓고 영화는 여러 제약에 의해 다르게 찍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볼 정도입니다. 물론 아니겠지만요. 소설을 보니 그런 생각까지 든 단 말이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또한 소설에서는 더 확장되고 다릅니다. 

영화 장면, 캐릭터의 디테일이 소설에서 더욱 풍성한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타란티노의 문체를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어딘지 모르게 그의 스타일이 묻어 납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나, 그 당시 (혹은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브랜드들을 언급하고 (물론 가상의 브랜드들도 있지요) 거리낌없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다른 여러 작품들에서는 시원하게 못 보는 것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타란티노 스타일이 소설에도 영락없이 보인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세상엔 수많은 소설이 있기에 이것을 타란티노의 것이다 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고, 그것을 소설로 본다는 것은 충분히 그렇게 타란티노만의 화끈한 영화스타일-소설스타일로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영화도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영화들은 사실 안본 작품들이 더 많기에 초반에는 그런 부분에서 읽는 속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거침없는 묘사나, 흥미로운 디테일들을 통해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단점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릭 달튼 이나 브래드 피트의 클리프를 볼 수 없다는 것 뿐 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역으로 소설이 가진 디테일한 묘사와 무한한 확장성을 통해 독자에게,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추측정도 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죠. 그래서 단점은 역설적이게도 장점으로 승화됩니다. 이 타란티노의 첫 소설 <원스어폰어타임인헐리우드>은 영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찰진 묘사와 풍부한 디테일을 쌓아 놓는, 소설만의 고유한 매력을 지닌 영화의 확장 그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네영카 서평단을 통해 감상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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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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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행하지 않은 살인, 아슬아슬하게 피한 살육,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파괴적 증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한번은 들어봄직한 학교괴담. 만년 2등에 머무르는 학생이 1등을 살해한 이야기. 이것이 그렇게 보편화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야기의 단순성 때문일까? 그 2등을 했던 학생의 감정에 대하여 우리가 최소한의 수긍을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회가 발달할 수록, 모두가 다 원하는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포장되기 싶다. 인간이 희소한 것에 가치를 두는지, 우연찮게 가치를 둔것이 희소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2등을 하는 학생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을까. 아니면 1등을 하는 학생 때문일까. 둘 다 라고 생각되어진다. 한 사람의 삶이 바뀌는데에 타인의 존재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니깐. 우린 결국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을 준 타자에 대한 대응이 없어질 순 없다. 만약 그것이 마찰과 파괴라면, 우리는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으레 거기서 멈추며 살아간다. 하지만 증오의 감정이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면, 영향이 컸다면, 혹은 그렇게 느꼈다면...? 자신의 삶이 지녀온 그림자의 발단은 타인에게서 찾은 존재, 에드워드가 니콜라에게 행하는 복수, 추리, 그 심리의 묘사가 바로 이 <편집된 죽음>의 이야기다.

 

사교능력이 좋진 않았지만, 절친한 친구 둘과 뜻을 모아 문학잡지를 펴냈던 에드워드는 재정적 어려움을 니콜라에게 의존함으로 인해 니콜라의 글을 싣게 되며 절친했던 친구 둘을 잃는다. 또한 니콜라를 위한 잡지가 되어가며 결국 발간은 중지된다. 애초부터 잡지에 대한 권한을 쥐고싶던 니콜라는 당연히 에드워드가 기댈 곳이 되지 못했고, 에드워드는 지하묘지에서 만나게 된 야스미나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했지만, 얼마 후 그녀는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자책과 절망으로 어긋나 살아온 30년의 세월, 하지만 콩쿠르 수상이 확정된 니콜라의 소설이 그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이제 남은 니콜라의 삶을 편집할 것이다. 그 죽음 까지도.

 

그동안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한, 에드워드의 복수는 유년시절에서부터, 그 현재까지의 심리, 그리고 책의 제작과정을 이용한 범행으로 '비블리오 미스테리'에 대한 놀라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현대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전 책의 제작과정을 잘 모르는 이에게, 책을 활용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를 끌지만, 그것보다 더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열등감과 배신감, 복수와 열등의식, 그리고 그럼에도 차분히 범행의 장치를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에드워드의 심리에 대한 것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정말 한 사람에 의서 좌우되는 것일까? 삶에, 편집의 개념을 대입해본다면, 우리가 주어진 삶이 어떻게 편집 되는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기만한 것일까? 에드워드는 문학잡지에서 니콜라의 글을 편집함으로써 니콜라가 니콜라가 아닌 것으로 편집 하였다. 그리고 니콜라는 야스미나를 사지로 내몰면서 에드워드의 삶을 편집한 것에 다름없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 이것은 분명 편집의 개념과도 멀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책임의 여부를 떠나, 적어도 수긍의 여부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편집, 감정의 편집, 결국, 삶의 중요한,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는 것에 대한 편집. 하나의, 한명의, 삶은 어쩌면 수많은 편집자를 거쳐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가장 큰 권한을 갖고 있지만, 때론 누군가에 의해서 방향이 바뀌기도 하듯 말이다. 잘 아는 분야긴 하지만 일단 책의 마케팅을 예로 들기만 해봐도, 출간된 책의 판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이지, 그 방향으로 안내한 이에게 책임을 돌릴지, 아니면 그 방향으로 진행시킨 이에게 돌릴지 판단은 제각각이 될 수 있다.

 

한 개인의 삶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쉽다. 누가 그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니깐.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리 삶의 편집자는 바로 우리 각자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삶의 가장 큰 특성중에 하나일,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불변의 사실때문에, 결국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을 책임지지만, 그 사실이 그 주변을 지나쳤던 타인들의 면책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모두 책임질 필요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코 누구의, 혹은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적어도 문명사회에 이르러서는) 삶의 책임은 결코 거울속에 비친 존재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방향을 침범한, 그런 무례한 외부의 편집자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혹은 적어도 자신만을 탓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스스로를 강하게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덕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런 괴로움이 자신의 하루를 더디게 한다면, 조금은 그 짊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울지도 모르니깐.

 

어쩌다보니 에드워드를 옹호하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살인을 어떻게든 옹호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 책임에 대한 '실행'이 없다고 해도, 그 원래의 몫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것처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한 개인의 탓으로 여길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우선시되야 할 것은 '구분'이진 않을까.

 

한 사람의, 한번의 삶은 그 자신이라는 책임편집자와 더불어 사는동안 만나는 수많은 편집자들과 함께 한다. 에드워드와 니콜라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편집해왔다. 그것이 그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재미와 동시에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만나고 헤어지는 타인의 존재를 얼마만큼, 어떻게 인식할지에 따라 삶은 매 순간 방향을 달리할 것이다. 에드워드의 인식이 달랐다면 이야기도 분명 달랐을 테니깐.

 

자신에 대한 인식, 자존감, 나 자신의 삶에는 어떤 수많은 편집자들이 거쳐갔을까. 진심으로 고마운 이도, 미웠던 이의 이름도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편집자로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물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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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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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던 책, 중에 이 책 또한 포함되었으리라 싶다. 평소 책좀 읽는분들을 보면, 대략 다 학창시절에 접했던 듯 싶은데, 난 도통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학창시절에 그토록 책하고 친하지 않았던 나날들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들은 이전에 다 접했고, 이제 또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읽는 책을 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었다. 하지만 아마, 내가 중고등학교때 이 책을 읽었던듯 무슨 감흥을 받았을까 싶다. 학창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친구에게 선물 받아서 겨우겨우 '읽어내고서' 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걸 읽고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대학다닐 땐?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좋은 고전들 다 미뤄두고 뭐 읽었나 싶다. 물론 독서량이 바닥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에서야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건 고작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었었던게 전부겠다. 어쨌든, 이런 책들을 접할때마다, 진작에 책좀 읽고 정서를 함양할껄 싶지만, 이제와서 후회해서 뭣하리. 더 안늦게 만나기를 다행으로 여길뿐이다. 그리고 지금이 딱,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말이다.

 

테스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특별난 것은 아니었다. 요즘같은 시대엔 워낙 고전 이야기들이 여러 형태로 각색되고 짜집기 되다보니 그리 느껴지는 듯 싶다.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여러 담론거리들과 동일한 질량의 정서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었고,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느 농촌마을의 더버벌가(家)의 맏딸 테스에 관한 이야기다. 과음해서 못일어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을 나간다는 것이, 사고로 수레를 끄는 말을 잃게 되고, 그렇잖아도 그 아버지가 마을의 한 성직자에게 자신 가문의 뿌리를 들은터라, 밥벌이의 핵심수단인 말을 잃게됨으로써 겪는 여러 재정적인 문제들을, 부유한 더버빌가문을 테스가 방문함으로써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의 시초였고, 아직 바깥의 여러 위험들에 대해 교육받지못하고, 배우지못한 테스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종교적 관점의 순수를 뺏겨버린다. 하지만 후에 진정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만, 그때의 사고가 계속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위대한 많은 고전들이 그렇듯, 한세기가 넘게 지났음에도 이 책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들은 여전하다. 물론 그때와 동일한 만큼은 아닐지언정, 여전히 의식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들 말이다. 대표적으로 그것은 종교와 계급, 순결에 집착들 일 것이다.

 

더버빌가는 몰락한 가문의 향수를 안고있다. 그는 그것을 복원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덕을 입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헛된, 아니 심각한 오판이었다. 자신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 마을의 성직자에게 들은 후, 그 테스의 아버지가 보이는 미묘한 태도의 변화는,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은 허황된 계급의식에 겉멋든 인물을 상징시켜 보여준다. 정작 본질은 빼놓은, 이름과 허례의식에만 집착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고, 또 그것으로 덕을 입으려 하는 모습 말이다. 또한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어떤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교리에 따라서 서로를 경계한다. 사실 서양 종교의 역사에선 기독교가 갖는 위치는 매우 견고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이의 기준에 부합된것은 아니었으며, 그만큼 열린 사고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비극을 가져온 가장 큰 사회적 편견은, 남성이 여성에게 기대하는 순결에 관한 것이다. 테스의 경우 자의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강제적으로 순결을 빼앗긴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후에만난, 사랑하는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위로는 커녕 살을 베는 듯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실은, 맏딸로 인해 덕을 보겠다는 부모들의 어긋난 기대, 그리고 험악한 현실에 대해 미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그 테스의 사랑인 클레어가 진작 그 마을을 들렀을때 그녀에게 춤을 제의하지 않은 것 등.. 여러 많은 요소들이 그 결과를 만들어 냈음에도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순결은 점차 감소하는듯 보여진다.(하지만 그것이 그렇게나 시대를 탈까? 현대의 발빠른 매체로 인해 더 눈에 띄는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은 날로 저연령에게 개방되고 노출되고 있다.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그것을 벗어날 루트가 다양해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런 의식마저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순결을 희망하는 입장에서의 남성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크건작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시대에 따른 의식변화에 따라서, 그만큼 강요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한 인물의 내면과 진정성을 바라보지 않고 육체로 드러나는 흔적에 집착하는 사고는 여성만을 비극으로 몰아넣는것은 아니란 점이다. 감히 남이 흉내내지 못할만큼의 사랑과 진심을 바치는 상대방을, 과거의 이력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 상대방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비극이란 것이다.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잃는다면 그것이 비극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의 질량이 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판단하는 이와 판단받는 이의 처지가 같을수는 없으니깐.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가 되건간에, 과거에 존재했던 상흔의 의미가 현재를 뒤덮어 어떤 관계를 전복시킨다면, 그것이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란 점은 자명하다.

 

한 가족구성원으로 시작해서, 한 남성으로 인해 몰락할 뻔 했던 한 여인의 삶이, 또 다른 남성으로 인해 구원될 것 같았던 이 처량한 아름다움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관념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담론거리들을 얘기하고, (나만 몰랐던) 걸출한 명성에 어울릴만한 아름다운 문장들을 보여준다. 그 수려한 문장들로 인해 마치 테스의 비극적인 삶이 빛을 담아내서 반짝이는 듯 말이다. 인물의 간헐적인 희망과 지속적인 비극을 표현하는 수많은 문장들은, 때론 모든 희망을 걸만큼 아름다웠지만, 때론 모든 절망을 담아낸 것 만큼 무거웠다. 마치 작가가, 문장들을 빗어내느라, 테스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 정도로 말이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그 어떤것이든 미리 이야기의 전말을 아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부류의 사람이 더 많겠지만, 보면 이야기의 전말을 알아도 개의치 않는 대인배들이 있는데, 나로써는 이야기의 전말을 알면 그 감흥이 꽤 떨어지는 편이란 얘기다. 주변의 쏟아지는 극찬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더버빌가의 테스>가 더 좋았을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이책을 읽기까지 앞으로 몇년이더 걸렸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토머스하디는 충분히 독자가 테스의 비극에 집중할 수 있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끔 빼어난 문장들을 보여줬다. 책을 읽는동안 황홀감에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를 읽는듯한 순간들을 빠져나왔다. 좋은 책들은, 그 치밀한 계산과 완숙한 감정, 빼어난 문장들 덕분에 한번에 읽기가 쉽지가 않다. 앞의 정보가 지워지고 덧씌워지는것이 싫을정도로 좋은 순간순간을 느끼게끔 해주니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길 요구할 정도의 흡입력을 보여준다. 이 <더버빌가의 테스>도 몇안되는 그런작품들 중에 하나였다. 누군가가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었을 당시의 회고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여졌다. 좋은 책을 만나느냐 아니냐 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그 책을 언제만나느냐 하는 것 이다. 사람이나 책이나 매한가지 인듯 싶다. 지금에서야 처음 읽는 이 <더버빌가의 테스>를 통해서, 난 채 다 자라지 못한 감성이 겪을만한 풋풋한 열병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재는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을것이다. (소싯적에 이 이야기를 읽었다고한들 내가 온전히 이해했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 얼마나 부족하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테스'의 비극을 충분하게 느꼈고, 무엇이 여전히 얼마나 잘못 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모두에게 어떤 커다란 비극을 만들 수 있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가로지르는 지혜를 읽었다. 작품전반에 깔린 문장들은 더이상 언급하기도 입아플정도로 빼어남은 말할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만족하려고 한다. 지금, 현재에 <더버빌가의 테스>를 읽은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 읽었으면 된것이다. 어쩌면 지금이기 때문에 이만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 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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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시작한지 얼마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다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두꺼운 책이,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가졌던, 의외로 빨리 읽혀질 것이란 예상이 틀렸기 때문이다. 두깨로 치면 물론 적잖이 시간이 걸리는 분량 임에도, 추리소설이니깐.. 하고 생각했던 편협한 사고의 충돌. 아뿔싸.. 책을 읽으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추리를 하는 것은 그 서막에 불과했고, 그들의 심리를 추적하고 인간을 탐구하는대에 끊임없이 파고들어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그들에게 묻는 질문은 곧 나에게 돌아왔다. 일련의 사건들, 혹은 나아가봤자 그 심리까지만 다다를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대체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엄습해왔다. 물론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책은 드라마의 끝장면 같은, 극적인 요소들이 만개해 있으니깐. 나는 다만, 이 책이 말하는 것을 최대한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서둘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도쿄의 어느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한 여자의 팔이 발견됨으로써 사건이 시작된다. 그 최초의 발견자는 우연히 공원을 산책하던 신이치와 히사미다. 더욱이 신이치는 그 전에 있었던 다른 일가족살해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던 것. 공원에서 여성의 팔이 발견되고, 뒤이어 마리코라는 여자의 핸드백이 발견된다. 그렇게 시작된 사건의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그 살인사건들의 범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피해자의 주변인들과 매스컴에 접근해오기 시작한다. 마리코의 외할아버지인 요시오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조롱을 당하게 되고, 경찰이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속에 피해자는 속속 더 밝혀지기 시작한다. 

일단, 이야기의 묘미는 역시 그 구성에 있다. 각각 두꺼운 책 3권 분량은, 그 일련의 사건들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을지 짐작케해준다. 우선은,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최대한으로 담으려는 듯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생활을 만들어가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건과의 개연성이 생성된다. 서로 떨어져있던 인물들, 즉 그들 개인의 사건들이, 점점 그 거리를 좁혀 한가지 이야기,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과정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흥미로운 것이다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차곡차곡 꼼꼼하게, 낱개로 흩어진 실들이 결국 촘촘하게 짜여지듯이 사건의 진실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작가가 열어놓은 길을 통해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과 더불어, 범인을 찾아 모든 사건이 종결된것 같은 이후에도 그 이면에 숨어있는 또 다른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흥미를 잃지 않고 어떤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이야기에 몰입하게끔 하는 힘을 쥐어준다. 특히 그 과정이 마치 드라마와 같이 보여진다. 극적인 순간에 우리는 장소와 인물을 다르게 바라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에둘러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한 시간대를 두고 다양한 인물이 보여주는 다양한 시각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얼마나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봐야지 비로소 진실 혹은 사실이라고 부를만한 것에 가까워 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구원도, 파괴도 본능에서 시작한다. 

범죄라는 측면으로 볼때,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을 논외로 둘 순 없다. 하지만 이 모방범에선 조금 독특하게 표현되기도 하는 데, 그 예가 바로 히로미나 피스에게 희생되는 인물들의 선택의 순간에서 발현되는 본능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사건이 진행되는 순간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일지도 모르고, 범죄자들이나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는 논외의 본성이 될지도 모른다. 즉 위기에 대한 본능과 파괴에 대한 본능은 다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또한 그들이 그런 본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신이치와 다른 피해자들의 공통점,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본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갖고있는 생존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은 끊임없이 발현된다. 하지만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성적인 행동은 그저 순응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능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목숨과 바꿔야만 했다. 신이치의 경우도 물론 그 본능을 직접적으로 간과했다고는 할 수 없다.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부분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그것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신이치나 그녀들이나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 본능을 간과한 것이 그들을 본능의 피해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막아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보면 신이치의 부모,동생을 살해한 살해범의 역할또한 정립할 수 있게된다. 그들은 본능을 사용한 것이다. 메구미는 그것을 '피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틀리다. 본능은 곧 흉기가 되었고, 메구미의 아버지와 히로미, 피스는 그것을 이용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고, 신이치와 그녀들은 그 본능이란 흉기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절체절명의 진실을 둘러싼 사람들 

어쨌든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의에 앞서 히로미와 피스를 추적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추적하며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 인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로미는 누나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하나의 대체품으로 여겨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엄마는 히로미가, 그 이전에 낳았던 딸 히로미의 자리를 쫓아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히로미를 학대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히로미는 이전에 죽은 자신의 누나의 환영을 보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곳에 있었다. 누나 히로미는 사실은 엄마에 의해 살해됬고, 그 두려움이 살아있는 히로미를 괴롭히게끔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미는 그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자신이 마치 동명의 누나를 죽인것처럼 여겨졌다고 생각했다. 피스는 어떠한가. 자신의 어머니는 하나이지만, 아버지에 관해선 혼란스러웠다. 결국 친자감정에서 피스의 어머니가 사귀었던 다른 유부남의 아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것을 피스가 알았을 것이란 확증은 없다. 하지만 알았던 아니던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그것은 피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니깐 말이다. 

으레 이런 히로미와 피스의 상태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다른 관점을 대입시킨것이라 생각된다.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 진정한 '창조'인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히로미는 먼저 죽은 동명의 누나 히로미를 대신한다고, 아니 그녀의 자리를 박차고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는 끝까지 누나를 앞서지 못했다. 그러니 히로미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은 누나의 모방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히로미는 자신의 그런 혼란을 갖지 않으면서도 항상 히로미를 앞서는 피스를 무의식중에 모방하고, 따랐는지도 모른다. 피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모방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혼란은, 자신은 분명 누군가를, 혹은 그 무엇을 정확히 창조해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결국 한 인간은, 그 이전세대, 그러니깐 자신을 탄생시킨 유전자부터 시작하는, 이미 탄생과 동시에 창조이면서 모방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범죄자의 유년과 그 근본을 분석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역할을 다시한번 정의할 수 밖에 없다. 바로 '당사자'가 아닌 것을 체감하는 것이다. 범죄자의 유년기를 따지고 들어가면서, 범죄자를 만든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바로 이 사회이자 부모들 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냉정하고 논리적이라고 여겨질수도 있는 이런 사고야 말로 바로 우리가 제3자 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와 당사자가 아닌 인물들로 인해서,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추구하느냐가 달라진다. 모든 진실을 알고있는 것은 그 범죄 당사자, 즉 히로미와 피스다. 그리고, 피해의 범위가 정해지는 순간, 그 진실을 정말로 궁금해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것은 피해가 복구되는 것과 무관한, 분노로 점철된 궁금증인 것이다. 대체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 자신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범죄자에게서 찾아가는 비극의 원인 말이다. 나아가 그런 진실을 정말 알아야만 하는 인물들은, 그 진실을 긍정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로 나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찾아내야만 하는 역할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저널리스트와 경찰이다. 그들은 본연의 직업이 그런 의무를 갖는것과 동시에 한 인간이 갖는 호기심과 정의감이 있다. 물론 그것들은, 이들이 실제로 업무를 볼때와 아닐때를 구분해서 찾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대중들과, 이 책을 읽는 독자와 같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진실을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   

  

 

인정하자, 타인의 한계를

목숨을 잃은 희생자 만큼이나 희생된 사람들. 남겨졌다는 사실이 곧 그 희생인 사람들. 피의자의 신분이었던 오빠를 통해.. 아니, 마지막까지 아미가와의 덫에 걸려서 결국 무너저야만 했던 안타까운 유미코.. 가장 극적인 비극의 중심에 있던 가련한 그 남매를 제외시켜놓으면, 요시오와 신이치가 남는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었다. 비록 사건의 유형은 다를지라도, 모든것을 잃어버린 인물들. 많은 이들이 결국은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을지언정, 결국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건 다름아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예외를 남겨주었다면,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타인 이라면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신이치의 곁에 남게될 히사미의 존재이다.
 

미야베는 모든 피해자들을 다 다루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이 더 는 불필요하다고 느꼈기 떄문일 것이다. 궤변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전달자'를 통해 바라볼수 있는 지점의 한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모두는 직접적으로 사실을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해석하거나, 혹은 해석하는 이들의 해석을 바라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모방이 모방을 인정하지 않을 때

피스 즉, 아미가와를 끝내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를 모방범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저지른 일련의 범죄에 대한 근거를 추궁하는 것이 아닌, 그가 연출한 연극을 모방품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히로미만큼 깊은 언급되진 않았지만, 저널리스트인 시게코가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바로 따지면, 그또한 혼란스러운 유년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아버지에게도 자신을 인정받지 못했을 아미가와는, 그 자신이 곧 온전하게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방을 증오하고, 자신이 진정한 창조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일까? 보통의 성장과정에서 아기들은 많은 것들을 따라한다. 얼마전에 뽀로로에 한식을 넣자는 의견만을 살펴봐도 우리는 그 모방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미가와는 그 모방이란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미가와의 범행은 온전한 창조에 대한 열망이 파괴본능과 증오와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물 일까? 

유년시절이 성인을 대변해주진 않는다. 행동의 근원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어떤 뒤틀린 유년이라도, 그 후에 어떤 성장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추적할 수 없고, 그 과정의 모든 감정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 따라서 우리는 유년의 근거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한번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진정한 창조는 가능한가. 우리자체가 이미 유전자의 모방으로 시작된 창조물인데. 어쩌면 중요한것은 애써 우리가 창조의 근거를 만들려고 바둥대는 것이 아니라, 창조란 것이 이미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함께 인정하는 것 아닐까.  

대학시절 과 동기였던 형과 잠깐 나눴던 이야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만들거나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어디선가 봤던 소설, 영화, 노래, 타인의 이야기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창조해낸 것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 었다. 그리고 경험이란 것도 개인에게는 특별해 보이지만, 수많은 인류를 통틀어보면, 구분지을 수 있는 사례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으레 모방을 비난한다. 어쩌면 그것은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모방품이자 창작품'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무의식중에 모방한 수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말이다. 어설프게 베끼는 것은 훔쳐오는 것이 되고, 대놓고 베껴오는 것은 그것으로 하나의 또다른 작품이 된다고도 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방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창작과 모방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그 기준이라함은, 모방했음에도 그 대상보다 뛰어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것들과 그저 모방에 머무르는 것인지 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방하는 것을 인지하며 만드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일까? 어쨌든, 그 기준은 매우 모호하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인간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창작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전은 말할것도 없고, 숱하게 쏟아지는 정보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개인의 성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창작이라면 창작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차용하는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녹아들어가게 하는 것이 창조이고 창작일 것이다. 그러니깐, 아미가와의 실수는, 모방 자체에 있지 않다. 그 모방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완벽한 창조물, 창작물로써 인정받고 싶은 것

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모방'으로 인정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유년시절에, '무조건적인 자기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기때문 아닐까. 평범한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이유때문이 아닌 그저 존재함으로써 자신을 인정받는 과정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존재를 '그대로' 부모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던 히로미와 아미가와 의 유년시절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진정한 창조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그들은 으레 받을 수 있는, 그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내 자식' 이라고 불릴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받는 것을 알게되었을때 겪을 수 있는 좌절은 삶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은 곧,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순간 가차없이 누군가의 관심에서 밀려나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던 그들의 뒤틀린 심성이 극단적인 형태의 '존재의 인정'으로 치닫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 빛을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인정'받는 것이 곧 존재를 '입증'하는 한 방편.. 혹은 가장 큰 방법이니깐 말이다. 종종,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로 만족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로써 할수있는 자기 표현이 정말, 자신을 다 들여다본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어떤 생물체와 아무 접촉도 하지 않는게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인정받는, 인정받으려는 인생을 살고있다. 작건 크건간에. 누군가와,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것, 그래서 소통하는 것, 그것자체로도 이미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인지하는 진실과 사실, 그 간극

누가 더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느냐로 인해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자'와 '아닌 자'로 나뉜다. 근거는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근거또한 진실이 아닐수도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고되다. 우리는 진정 진실을 찾는가. 근거를 하나하나 추적해나가서 결과를 도출하는가, 아니면 결과를 갖고 근거를 찾아가는가. 확신할 수 없다. 이미 믿는 상태서 그에 맞는 근거를 찾아가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어떤 현상과 직접대면해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가 찾은 진실, 아니 사실또한 어딘가에서 완충되고 여가된 것 아니겠는가. 뉴스, 신문, 잡지등의 매체는 돈을 요구조건으로 우리대신 그 일을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인식하는 하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견해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드러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추측하는 것은, 항상 '그때까지의..' 라는 수식이 붙는다. 진실을 원하는 주인공과 독자는 닮았다. 하지만 그 거리는 매우 불균질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르포를 쓰는 기자와 같다. 잘 정리하고 보기 좋아야 하고 적당히 걸러야 한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쉽지 않다. 어쩌면 알고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을 뒤집어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사실을 모두 뒤엎어버려 자신에게 쏟아붓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앞을 향해 달리는 우리의 다리를 붙잡고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가 전복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진실을 두려워 하는 것 아닐까. 우리도 어쩌면 처음에는 진실을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참담했고, 과정은 고되고, 누군가가 대신해줌으로써 그 기능이 퇴화되고, 그것을 판단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그만둔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 

진실 

은 어쩌면, 닮은 모습을 하면서도 같지 않다. 진실은 사실 너머 막연할만큼 먼 곳에 머무르는 지도 모른다. 

 


진실을 정의할 수 있는 진실이 있는가 

어쩌면 진실이란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이란 이미 산소와 만나는 그 순간부터 산화하기 시작하는 금속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애써 감춰둔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녹이 슬고 변형되버리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온전한 '진실'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   

주위의 눈이란그런것이다.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377) 

한번 양보해서 진실이 있다고 치자면, 진실은 찾는 것이 맞는가? 진실은 이미 누가 발견하든 그 발견자들에 의해 변형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온전한 진실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발견하는 것도,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대로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 이다. 진실의 정의가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인간에게 사전적인 '진실'은 이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마치 객관에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근거있고, 인정받는 주관을 찾는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니 난 '객관'이든 '진실'이든 어쩌면 어불성설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 그럴만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인내가 없을 뿐더러 대부분 그럴 동기나 필요또한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모르는것 자체로는 비극이 되지 않는다. 물론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비롯되어 거짓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손실이다. 그런 진실에 대한 무관심보다 더한 비극은, 어느선에서 탐구가 중단된 진실을 그 진실의 최종지라고 믿고, 또 퍼뜨리는 일이다. 
 

진실을 파고들다 보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목을 조르고 산소를 빼앗아간다. 끝도 없이 바다 밑 심연으로 빠져들다 결국은 그 압력에 못견뎌 올라올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것은 각각의 한계치를 갖는다. 모두가 그 한계치까지 빠져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짜 진실에 목말라 있다. 어쩌면 한번도 그것을 본적 없으니깐. 항상 어느정도에서 멈춰야만 하니깐. 그래서 그 한계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문제는 그 한계에서 마주친 진실이 대부분은 부정적 이라는 것 아닐까. 그럴 때 우리는 처음의 먹었던 마음, 우리가 그것을 들춰내기 전, 먼지가 우리 눈을 가리기 전에 그 마음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그 진심이 가장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진실과는 동떨어졌을 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본성

우리는 진심이라고 말을 하면서 과연 진심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하다못해 진심으로 사과하며 자신의 사과도 마음편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고백해도 또 그 뒤로는 그런 얘기까지 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안도하는 것 아닐까? 
작가는, 인물들의 독백이나 행동, 혹은 생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진심, 본심을 되돌아본다. 가령 우리는, 어떤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자책하고 책망하지만, 사실 그 고백은 그것을 타인에게 부정받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서평을 쓰는 동안에도 그것을 발견한다. '나는 글을 참 못써요'라고 으레 하는 고백은 진정 그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받고, 부정받고 싶은 욕망을 내포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그런 욕망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초라하게 하니깐..)

이런 일련의 과정은, 동정의 과정과도 닮아있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등장했던 피해자들, 혹은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인간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등장하는, 우리보다 조금 더 힘들거나, 특별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갖는 우리의 연민, 동정 혹은 분노 또한 우리가 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며, 우리가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던 인지하지 않던간에 과오를 범한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동정이 고결한 감정인 마냥 착각하거나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이로울 지 모른다. 본성을 알게되고 자신에게 질문 던지는 것은 결국 더한 괴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순수의 목적에서 시작된 생각, 관심, 동정도 그 끝에는 결국 자신의 이로움을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더 높은 고지에 올라간 사고는 그만큼 추락의 충격도 큰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다행이,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을 그어준다. 이, 자신의 생각을 다시 파고들어가서 기어이 이기심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신이치에게 요시오 할아버지는 어떤 구원과 같은 존재였다.

"저 저, 또 저러지.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은 이랬다, 그런 말은 이제 그만둬. 네가 그때 생각한 게 네 진심이야." (3-278) 

"너무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런 행동은 절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 (중략) "저 쓰레기통은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철망으로 되어서 아래쪽에든것 까지 잘 보여. 안 보이는 게 보기 더 좋은데 말이지.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번 버린 것을 꺼내서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옛날에는 제 역할을 했다 해도 일단 쓰레기가 되어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굳이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3-186) 

자신을 벼랑끝까지 내몰아서 그 '진심'이란 것을 파헤치는 것이 결국 어떤 것인지.. 연륜으로 이미 알고있는 요시오 할아버지의 말은 묵직했다. 그 시간만큼이나 자신을 돌아본 자만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실' 너머 '진심' 으로

진심은 항상 그 생각의 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그 자체로 무결점인 진심을 우리는 의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책임질 뿐이다. 그것이 어떤 행동을 낳을지 까지도.

나아가, 진심은 홀로 빛을 낼 수 없다. 진정 그것을 온전하게 찾아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발견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자신의 진심을, 인간의 본성을, 진실을 찾는것만큼 중요한것은 타인의 진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것이다. 그 기준이 올바로 세워질때 우리가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온전히 발견하지 못한 히로미와 가즈아키, 유미코를 통해 그리고 반대로 그것을 온전히 찾아낼 수 있었던 그것을 믿을 수 있었던 시게코와 쇼지, 요시오와 신이치, 히사미를 통해 보여지지 않았는가.

진심과 진실은 어느형태도 띄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믿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를 달리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진심이 진심을 찾아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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