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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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된지는 일년이 조금 넘었지만, 언젠가 이 책을 본 처음부터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제목이었지만, 분명 내가 찾던 종류의 책이 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독서침체기를 지나서 다시 책을 좀 읽기 시작하고, 나는 드디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보다 사회는 더 곪아서 이젠 고름이 나오고 보기에도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다. (내게 그건 바로 '세월호' 였다. 하지만 이 글에는 글의 내용만을 가지고 짧게 서평을 쓰려고 한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정확히는, 이해는 되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반응들에 나는 너무 지쳤고, 질렸다.)

 

 이 책은,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에, 대한 이십대 (대학생)들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한 한 대학강사로 부터 시작했다. 이십대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서 들어오는데, 어떻게 비정규직이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하느냐' 다.

 

 그럴 듯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하니깐. 아니 그런데 좀 이상하다. 그래도 이십대라면, 비정규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거의 동일한 노동의 양에 대한 차별 보상, 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뭐라도 할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이십대들은 모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역량과 능력의 탓으로 치부해 버리게 되었는가. 한 십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비정규직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것 같은 이십대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 거침없던 이십대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겁이 많아져서?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개인에게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조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까지 개인의 능력 고하의 탓을 해버리는 이십대의 세태를 '자기계발' 즉 '힐링' 문화에서부터 찾는다.

 

과거에는 경영이라는 분야의 책들이 생산성 증대를 위한 논의나 마케팅 기법 등 전문서로서의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은 기업의 경영기법을 인간의 생애과정에다 적용해서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미사여구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 하는 내용이 사실상 전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분류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스스로를 잘 관리하면 어떠어떠하게 살 수 있다' 는 식의 논의가 무수하다. (28p, 위의 밑줄은 필자가 임의로 표기함)

 

 나 또한 한때, 자기계발서를 좀 읽은적이 있다. 손에 꼽아봐도 너다섯권 정도긴 하지만 나는 분명 힘들때 그 책들을 찾았다. 내가 일반적인 구직자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고있어서 사실상 책에 나온 것들이 직접적으로 연관없음에도, 지금의 상태를 극복하고, 역전의 드라마가 '나'도 가능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누군가 말해주고 증명해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 응답으로, 그 책들은, 위의 말대로 온갖 미사여구로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최면은 마치, 우리가 앞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비참한 '희망' 을 심어주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사회가 정말로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른 인간적이고 공정한 대우를 하고 있다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따뜻한 말들은 깊이 간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 '나름의 힐링' 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십대들이 처한 현실의 원인을 이십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현실이 공정하지 않아도 잠깐 힐링하고 가면 되는것 아닌가? 그게 왜 이십대들이 사회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 라고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관심사는, 이미 경쟁사회에서 무감각해진 이십대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을 비난하고, 자신도 통과할 확률이 미약한 그 좁은 문 안에서 권력을 부리는 자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언젠간 자신도 그 좁은문 안에 들어가 권력을 부리길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계발 또는 힐링을 표방하는 책들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간과하거나 혹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회적인 문제를 바꿀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개인이 자신 스스로를 추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자기계발_힐링의 무분별한 남용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자기계발서가 어떻게 이십대를 지금처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는지 이어서 얘기하겠다. 책에는 여러 자료와 근거들이 잘 나와있는데, 그것을 짧은 글에 선뜻 요약하기가 쉽진 않다. 나또한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주장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근차근 논리적인 설명과, 근거와, 반박의 반박을 통해서 해결된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이 허접한 서평보다는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다만, 내가 찾은, 내가 찾던 해답은 (의외로 책에서도 길지않게 정리해놓은) 아래와 같다. 물론 이것은 일부의 내용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기계발의 시대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이십대의 고유한 특성 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짧은 내용은 자기계발이 이십대에게 미치는 영향을 나름 간결하고 순차적으로 설명한다.  

 

 

1.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할 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시중에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남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남의 고통까지 신경쓸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타인의 고통과 극복을 그 자신 스스로의 몫으로만 치부하니 딱히 공감할 필요성을 못느끼며, 자연스럽게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2. 편견의 확대 재생산

 -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 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게 아니라, 한 개인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록 타인의 상황을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헌데, 공감력이 떨어지니, 타인의 상황을 이해할 생각도 전에 이렇다 저렇다 자신의 (세뇌된) 기준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 자기계발서라면 대부분이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해버리는 것이다.

 

3.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외에 길에 대해서는 부정적 편견을 생산하며, 다름에 대한 거부가 날카로워 진다.

 

(위의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책의 내용을 인용하다시피 해서  적었다.)

 

 '이러한 다름에 대한 거부감은 이십대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옥죈다. 자기 스스로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며, 그만큼 정해진 '레일' 위에 안착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한다. 이런 경향 자체가 시대적 특징이 되어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개인에게 강요된다. 그 결과 개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기 위해 해야 될 자기계발을 찾고 있으며, 또 그런 자기계발의 일부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부러워하면서 더 적극적인 수행을 다짐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순환적으로 이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로 인해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현상은 더 가속된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이십대는 당연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98p)

 

 이 책은 나아가, 대학가에 팽배한 대학 서열화에 대해 파헤친다. 자기계발 시대에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드는 이 폐단에 대해 진단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최근에 새롭게 <진격의 대학교>라는 책으로 탄생했다.) 어쨌든,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겠다.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진정 공정해지면 절로 희망이 부풀기 마련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럴 때 '실재' 할 수 있는 것이다. (214p)

 

리뷰를 쓰면서, 이 책에 언급된 책 중에 하나가, 나와 약간 인연이 좀 있다는 생각이 났다. 행사에 참여했던 책도 있으며, 또 그와 관련한 이들도 떠오른다. 이 책이, 이 글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들이 가진 삶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며,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건 간에 이제는, 우리가 무분별하게 남용하던 힐링과 희망이 어떻게 달라져야하는지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덧, 최근의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네티즌 들의 적지않은 반응이 '작정하고 덤비는 놈을 어떻게 막냐' 였다. 이는 마치 인생의 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나아가 생각해보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와 시스템은 할것을 다한것처럼 여기게 한다. 일차적으로 개인의 고의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 원인이라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비해야하는 시스템은 분명 허술했고, 그것이 사고를 키웠다.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게, 모든 것을 사회, 정부, 기관의 탓으로 하는 것보다 나을까? 더 책임있어 보일까? 좋은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었다고 해도 만약 사고가 난다면 문제점을 진단하고 보완해야 한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계속해서 개인에게 모두 책임전가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비슷한 사고들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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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하라 - 박노자, 처음으로 말 걸다
박노자.지승호 지음 / 꾸리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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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파란 말이 매우 거북스럽다. 내가 아는 좌파란, 북한과 소련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며, 그것은 곧 공산주의를 통해 몰락한, 그리고 언젠가 몰락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주체사상과 세습독재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자세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좌파란 말을 거북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소위) 보수라고 칭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현 정권, 집권당에 대한 반대를 비난하며 항상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바로 좌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좌파가 마치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할 불순물처럼 갖다대며 모든 의견들을 '빨강색'으로 통일시킨다. 내가 거기에 속으로 반박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나는 좌파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닥 관심도 없다 (이것은 당연히 자랑이 아닌 솔직한 내 생각일 뿐) 그저 현재의 정치와 사회가 잘못되어있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최소한 지금 너희들은 '최악'이라고 생각할 뿐이며, 그래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차선책인 진보를 선택한다. 그러니 나를 북한과 연결짓지 마라.' 나는 늘 북한군과 북한 노동당 그리고 북한주민을 나눠서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항상 결부시키려고 하는 지점은 북한의 온갖 악폐습과 직접적 군사위협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전쟁전후의 세대나, 직후의 세대들에게 전쟁은 생각하기도 싫은 살육과 고통, 가난의 시대였을테니 사실상 보수세력과 보수언론들이 끊임없이 북한을 들먹이며 소위'물타기'를 시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네들이 본다면 우리처럼 북한에 대해서 '일정이상 옹호적인' 태도를 지닌 젊은 이들은, 휴전이 오래되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해서 안보의식이 형편없는, 걱정되는 젊은이들일 뿐이니깐. 하지만 정말 좌파란 이념은 정말 이제는 북한에서 조금 떨어뜨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먼저 언급되진 않지만,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좌파의 단어를 보수들이 생각하는,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방어하며 역설적으로 인정하게 되어버리는 북한과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박노자는 좌파라는 말을 북한이나 소련 등 '왜곡된 형태의' 좌파, 실패한 사회주의 와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짧게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고, 길게는 진정한 좌파는 그런 좁은 의미가 아님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렇게 왜곡되고 잘못되어진 좌파,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한 예에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이야기 한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수확이다. 좌파란 단어는, 이 나라의 보수들이 늘 그렇듯, 그런 왜곡되고 오용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설령 그 예에서 좌파의 성향이 포함되있긴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좌파성향의 일부가 공유되는것일 뿐이지 그 형태와 지향점에서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논리는 당연히 현재 한국사회에서 좌파=진보 라고 인식되는 많은 스타급 정치인과 방송인들을 다시금 살펴본다. 처음엔 특히나 그런 것들이 많이 불편하다. 앞서 서두에 언급한, 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라고 선택하려하는 이들을 다 까고나면 도대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나는 실현가능한 변화의 인물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무리봐도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인물들에 기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읽다보면, 좀 더 생각하다보면, 좀 더 들여다 보면, 박노자는 (물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옳다면 그럴때도 있었지만) 그들을 부정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과 지향적인 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진보의 대표적 정치인이나 언론, 방송인)의 현재 태도와 행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박노자는 대통령이 바뀌면, 정권이 바뀌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믿는 우리의 망상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나아가 박노자의 분석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정치성향, 유권자들의 성향의 근거를 분석하며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럽의 사례들과 비교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그것이 곧 진정한 좌파의 길임을 역설한다. 그의 꿈은 타협적인 진보도 아니고, 소위 '북한or소련'스러운 체제도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 와 자본주의의 폐단이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기득권의 보수를 찍는 것도, 타협적인 진보를 찍는 것도 아니였다. 박노자가 말하고자 함은, 마치 민주주의의 힘이 오로지 그것인 마냥 부상한 투표가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자발적 참여와 연대를 통한, 이 사회의 '개혁' 이다. 정치참여로는 결국 한계가 있으며, 지금껏 많은 문제들이 그것을 증명해왔다. 우리가 정말 열어야 할 지점은, 사회구조의 개혁이다. 결국 좌파들이 저지른 스스로의 여러 잘잘못과 환경적 요인들, 그리고 그에 따른 시민들의 조금 섣부른 외면으로 인해서, 지지 받는 보수와 지지받는 진보 양자 택일만이 계속해서 화두로 여겨지는 경우 우리의 미래는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게 박노자의 생각 아닐까.

 

솔직히, 좀 불편했다. 서두 및 중간에도 언급했지만, 내 정치적 성향과 일정부분 같지만 또  일정부분 다른 다르며, 내가 옹호하는 현상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대체 그래서 어쩌란 건지' 란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럼에도 박노자의 이야기는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현재의 체제와 정치현실, 사회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풀어낸다. 특히나 어떤 특정 학문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당연히 한계를 긋지 않으며, 그로인해서 무척이나 확장된 시야를 갖고, 나아가 더 넓은 가능성을 심어준다.

 

아직 좌파가 무엇인지는 완벽히 정리가 되진 않는다. 어떻게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인지도 완벽히 정리되진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이제는 더이상 '좌파'란 수식을 마치 실패와 전쟁의 색(色)처럼 불러대는 이들에게 주눅들지 않을 것이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틀린' 용어로 우리를 조롱함에도, 우리가 그 뜻이 추구하는 '진짜'를 알고 있는 한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다. '그래 나 좌파다!' 하고 떳떳하게 외치기 위해서 내게 남은 숙제는, 누군가 내게 왜 좌파를 지지하느냐 라고 말할 때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좀 더 체계화된 정리이며, 내가 하나의 정말 잘 정의된 좌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 수많은 편견과, 의도적으로 왜곡된 색깔론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테지만, 세상은 항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가능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한 박노자 처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왜곡된 사회주의를 넘어서서, 우리가 진정 꿈꿀 수 있는 - 진정한 좌파가 꿈꾸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고 싶다.

 

'좌,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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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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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기업의 구조나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노동자의 파업같은 문제는 그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변하는 경영자들의 횡포로 생각은 했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원론적인 문제는 쉬이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법적 테두리는 정치라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실상, 초국가적 기업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일은, 비단 무기산업과 관련된 미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막대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됬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주식회사 집단 곧 재벌가문의 노예가 되어 있다." (236)

 

내가 다니는, 다닐 회사가 아니라고 아무런 관심도 갖고있지 않은것은 좁게는, 내 친구, 내 가족들이 속해있을 많은 기업의 횡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은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의 비극과 불합리함을 놔두는 것이니 썩은 정치를 두고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의 공공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다." (235)

 

서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이야기 하는 이 책은 어쩌면 회의적인 사람에겐 발길을 돌리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거들을 나열하다 마지막에 결론을 짓는게 아닌, 이미 지어진 결론을 증명하는 과정은 솔직함과 동시에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아마 그간 저자의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노동자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같은 슬로건에 대해 대부분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에 열이면 열은 사장, 혹은 회장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대답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기업은 대부분 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들에 의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좌우되고 있으니깐 말이다. 매스컴이 그렇게 비추고, 주변인들이 그렇게 바라보기때문에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모든 기업을 개인소유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소규모 기업이나, 예전의 기업들은 그랬었다. 주식회사란게 생길때까진 말이다. 저자인 김상봉은 순수 개인의 자본과 설립, 운영, 그리고 무한책임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업들의 경영권을 노동자의 것으로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본래 주인이 없는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자본을 가진 자가 경영을 하는게 아닌 구조의) 형태를 마치 개인의 것처럼 부리고, 부정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가 준비한 논거들을 따라가면, 말미엔 가장 뚜렷한 대안이 제시된다.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대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예상되는, 그리고 실제로 있어왔던 수많은 반박들을 다시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또한, 이 대명제를 실제로 이루는 방법이 단순 노동자가 회사를 운영하자는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것은 내 수준에선 불가능하다. 저자가 한권의 책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반발감이나, 상식에 대한 깨부숨의 근거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거기다 단 한번 읽어본 나로서는 이 책의 주장을 괜히 어설프게 열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앞에 언급한것, 그리고 뒤에 언급하는 이야기들은 최소한 이책의 내용이 실현하기가 용이하진 않은 상황이라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란 것을 조금이나마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글을 읽고 허무맹랑함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이 글이 부족한 탓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 평가할수는 있겠으나 '불가능하다'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법적인 논리와는 또 다르게 철저하게 경제, 기업, 정치생태를 논리적으로 파헤쳐야 할, 그리고 그랬을 것 같은 이 책의 내용들에 기본 밑바탕이 철학이라는 것에 나는 새삼 놀랐다. 경제학자, 혹은 기업인들이 '경영철학'이라고 함은 단순히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위한 어떤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철학이란 어디에도 빠질 수 없고 빠져서도 안되는, 그리고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때 다시 근본부터 되짚어 볼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라는 것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정도면 웬만하게 철학, 혹은 경제분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충분히 조금만 시간을 들여 읽는다면 십분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것도 이 책의 장점이겠다.(아마 저자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저자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실제적인 방법의 문제보단, 우리의 확고한 인식을 뒤집어야만 하는 문제니깐) 그럼에도 이 책이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철학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또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철학은 근본이념으로써 우리가 법이전에 갖춰야할 인식을 설명함에 바탕이 되는 것이지, 방법 그 자체는 철저히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 단절된 홀로주체들이 아니라 더불어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결속된 서로주체로서 '우리'라면, 경영자의 경영권 역시 타자로서 노동자에게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이며 실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영자가 노동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으로서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면, 노동자들은 경영자 속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경영자는 노동자들과 서로 주체성 속에서 '우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니, 이런 기업이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92)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라는 부제는 전혀 틀린말이 아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기위한 저자의 애정어린 철학의 시선을 바탕으로,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거나, 명료한 법의 해석을 통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소설만을 많이 읽어오던 내가 차마 (소설보다) 쉽다고는 할수없지만, 예상보단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었다. 철학을 파헤치고 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갖고있던 기업, 즉 주식회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되짚고, 그것을 우리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해외의 사례를 분석하며, 나아가 우리가 철학적인 사고의 부분에서, 그리고 법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해결을 해나가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실제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철저하게 경제와 사회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삼성은 이건희의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직 주식회사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이 주식회사를 두고 소유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0)

 

위의 말처럼 명심해야 할 포인트 및 논리전개의 과정은 사실상 간단하다. '법인' , '주식회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논리적으로 파헤침을 통해서,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주식회사란 것의 근본 성격과,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방치하고 있는 재벌 기업들의 병폐를 인식하며, 나아가 경영자와 노동자가 도구를 부리는 자와 도구 그 자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더 높은 하나를 이룩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과, 실질적인 법안을 살펴보는 과정이다.

 

끝으로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라는 법률조항이 현실적으로 제시되어,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짐과는 별개로 나는 모든 이가 사실상 노동자인 세상에서 아래의 문장이야 말로 중요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몫이요, 철학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세계를 형성해 나갈 자유로운 노동자의 몫일 것이다." (310)

 

 

 

 

 

 

 

 

 

 

 

 

 

(이 리뷰는 제공받은 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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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말해 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 양극화.분쟁.종교.민족.환경.질병
박종성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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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를 생각했을때 기억에 남는 것은, 마치 영화와 같은 테러의 공포가 점차, 단순 반복되어진 순간들이다. 즉, 테러에 관한 충격이 연신 티비에서 쏟아져 나와, 충돌장면과 붕괴과정의 반복으로 인해 단순 기계적인 사건처럼 느껴졌단 얘기다. 어쩌면 이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느끼게 된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아마 그때 분명 실제 사건과 녹화된 화면이 주는 무의미한 반복과의 괴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이라크전은 또  어땠는가. 미국 항공모함에서 촬영한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과, 적외선 카메라에 찍힌, 공습당하고 있는 이라크의 모습은 또래아이들에게, 전쟁의 심각성과 잔인성 보다는 영화나 게임과 같은 모습들에 불과했다. 우리는 미국이 발발시킨 전쟁을, 미국언론을 통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선진국이라 하는 나라들은 모든면에서 무척이나 개방적이고 청렴한줄로만 안다. 물론 그것은 근대화 이후 줄곧 해외의 원조를 받고, 또 그 나라들을 동경하며 자라온 세대들의 피할 수 없는 시각임은 어쩔수 없겠다. 하지만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특히 선진국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언론은 단면만을 바라보기 쉽다. 특히 공신력 있는 매체야 말로, 당연히 정부가 손에 쥐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한두개의 채널, 한두개의 신문이 그 시대를 읽는 창의 거의 전부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문제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져 왔다. 보여진 것들은 이미 해당국가가 선별해서 방송하고, 또 그것을 국내 방송사가 또 선별해서 가져온 것들이었으니깐 말이다. 일례로, 이라크전을 본다고 해도, 우리는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등 소위 강대국이란 곳에서 촬영한 영상을 접하기 쉽지, 이라크나 주변 국가들의 반응이나 담론을 접하기가 쉽지 않듯 말이다. 세계는 항상 시시각각 다른 사건들을 발생시킨다. 항상 새로운 것에 반응해야 하는 언론은 한가지 담론과 관심을 계속해서 끌고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또한 이미 역사가 수차례 증명했듯, 대부분의 언론들이 항상 권력에 무릅 꿇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강자가 만들어낸, 강자가 통제하는 언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봐 왔다.

 

국내 얘기를 하자면, 소위 조중동이라는 거대 언론사와 한겨례 경향의 대립정도로 생각되어왔던 언론사는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초창기 거대 언론사의 권력에 대한 방편으로, 그리고 촛불문화제에 대한 중계로 그 입지를 굳혔던 몇몇 인터넷 (진보)언론사들의 등장과 더불어 또 그에 맞서는 (보수) 언론사들이 등장했고, 이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해외파 SNS의 보급으로 인해 다시 또 새 흐름을 맞았다. (그리고 그 규제로 인한 새 흐름 또한 맞고 있는게 사실이다) 앞서 국외의 언론들을 통해 이야기 했듯, 이것들 또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보도하기엔 한계가 있다. 사실상 어지간한 큰 사건들이 아니면 지속적으로 다루기 힘들다. 언론 또한 구독자, 광고와 완전히 무관할 순 없으니 말이다. 여러 사회현상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수동적인 대다수의 사람들까지 포용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책이나 다큐멘터리 처럼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희망하고, 그래서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항상 다수가 되지 못해왔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 및 시사프로그램을 본다. 그중에 방영시간을 애써 맞추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그리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책이야 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 싶다.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은, 그것들의 총 합이다. 하루 이틀, 혹은 한두달의 현상들의 진실 찾기가 아닌, 웬만한 성인이라면 소싯적부터 꾸준히 접해왔던, 혹은 범국가적 문제들에 대한 진실찾기 개괄서이다. 책 표지에서 보이듯 양극화, 분쟁, 종교, 민족, 환경, 질병 등의 카테고리로 나눠져있다. 총 6개의 챕터로 나눠진 이 책의 중후반부는 거의 카테고리 분류에서 볼 수 있듯, 거의 제3세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의 진실 찾기다. 현재 월가 시위를 비롯한 양극화, 반세계화의 시작에서, 각 나라들의 가난과 분쟁이 강대국 및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 및 이권의 개입과 관련없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해준다. 티베트나 코소보 사태, 중동 지역의 독립, 민족, 종교 등에 관한, 보통 사람들이 어느정도 표면적으로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은 그 근원을 살펴 봄으로써 그것이 그들의 문제이면서, 또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내게 많은 시사점을 준 것은 소말리아 해적에 관한 문제였다. 얼마전 우리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준 부분이기에 특히 관심이 갔었는데, 실상 알게된 진실은 다분히 충격적이면서도, 앞 부분에서 얻은 강대국과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모습으로 인해 또 어느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행한 구출작전으로 말미암아, 소말리아 인근 해상의 위협과, 그것을 대비하는 여러 국가들의 모습은 알게되었음에도 정작, 몰랐던 '그들이 왜 그렇게 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해준 그 파트는 인상깊게 남아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이 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이전과는 조금 넓은 시각으로 그때의 사건을 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이 책은 사실 굉장히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에도, 서문에서 나와있듯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눈치보기식이 아니라, 언론이 말해주는 것에서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것으로 시선을 이동함에 있어 편향된 사고를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 이 책이 주는 전반적인 목적이 소위 '강대국과 다국적기업 까기' 가 아니라, 우리가 '그 국가', '그 민족', '그 종교' 만의 문제라고만 치부하던 것들이 사실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서 적잖은 국가와 기업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은 후에, 어떤 문제는 그 자체의 문제보단 그 주변의 영향으로 인해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음을 알게되고, 어떤 문제는 그 자체의 문제가 다른 주변의 영향을 끌어들여 심각해진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목적이 한 극단의 시선에서 한 극단의 시선으로의 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판단을 세우기 위해선 분명 더 많은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리라.

 

세계화는 결국 국가간의 이권으로 연결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힘을 쥐고 있는 나라들의 언론을 통해 접하는 세계의 모습들또한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곡된 국내 기사를 보는 것과, 해외에서 왜곡되거나 혹은 들어와서 다시 왜곡된 기사들을 보는 것의 차이는 결국 개념은 비슷하니깐.

 

다만, 지금과 같이 여러 언론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각들을 쉽게 접할수 있는 현실에서 보기엔 완벽히 새로운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더 큰 문제는 결국은 힘에 의한 논리라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식 매너리즘이 더 문제일 수도 있겠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기위해 각 이야기들의 분량이 적은 것도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같은 심층적인 책보다는 세계적인 여러 사건들의 이면에 대한 개괄서임은 확실히 해야할 것 같다. 한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보다는, 보다 많은 사건들의 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혹은 아직 다른 분야는 잘 모르는 이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세계의 개괄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분량이 적다고는 하였지만, 사실 민족과 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들을 처음접하고, 생각하며 읽는다면 약간은 더딜 것이란 얘기다. (민족, 종교에 관한 파트들은 조금 생소한 인물이나 용어에 따라) 그리고 다음 인쇄에는 몇몇 오타가 필히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책이든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어쨌든, 세계적인 문제이기에, 우리가 더 접하기 힘들었던 언론 저편의 진실들에 완벽하진 않더라도 쉽게 접근하기엔 별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회분야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 혹은 깊게 공부할 여건이 안되는 이들이 보기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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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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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이 시덥잖은 리뷰를 휘갈기고, 누군가가 후에 이 리뷰를 한번 스쳐지나간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적어도 영양결핍으로 인해 시력을 잃거나, 이미 인류가 정복한지 오래인 흔한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나가거나 하는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느꼈던 배고픔이 아무리 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진대사가 심각하게 훼손될 정도의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때, 혹은 지금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에 만족할까? 가난으로 인해 밥을 굶고 그로인해 영양결핍이 발생할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에 비해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는지, 이 책은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자료와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궁지에 몰린 나라들이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초국가적 힘을가진 횡포에 대응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이 옳은지까지 자세하고 열정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연민과 동정이 분노로 바뀔 수 있다.
기아와 가난에 대한 얘기를 들을때는 다소의 연민과 동정심이 생기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왜 그럴까. 물론 당연한 얘기겠지만 먹지 못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그 사실들이, 그것을 머나먼 거리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에겐 정말로 ‘너무나 먼’ 현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지는 못하는 일이다. 그 어떤 최악의 고통이라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다소의 연민과 동정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결국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 되버리는 것을 누굴 탓할 수 없는 일이니깐. 그러나 인간의 습성이 어느정도는 그럼에도,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과 동정이 행동을 이끌어서 세계 곳곳에서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 구호단체나 지원자들처럼 난민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그럴만한 이타심이나 상황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앞서 말했다시피 그것이 가장 첫 번째가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건데 두 번째는 바로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굶고 가난하게 사는 이유를 그저 ‘가난하니깐, 돈이 없으니깐, 환경이 안좋으니깐’..라는 이유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그들의 상황을 정말 단순히 ‘불가항력적인 사항’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아와 가난이 단순히 식량생산과 산업기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강대국들과 다국적기업들이 함께 펼치는 비열하고도 악랄한 “부채”의 고리때문이란 것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악덕 고리대금업자, 빚을 담보로 더 많은 것을 앗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티비나 영화를 통해서 보게된다. 간단하게 보면 그것이 국가적으로 범위가 커졌을 뿐이다. 우리가 기아와 가난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피해자를 향했던 연민과 동정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사실 급하기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급하겠지만, 가해자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런 악순환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이다. 인간적 존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 만든 기업과 정부는 ‘정도’ 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얼마간의 행복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어쨌거나 부채가 있는 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191p)

객관적 숫자는 인식과 기억에 힘을 보태준다.
모 카드회사 광고에서 그렇게나 숫자를 강조하던게 생각난다. 객관적으로 수치화 될 수 있는 것들은 그만큼 사람들이 신뢰를 갖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주제에서도 객관적인 숫자들을 토대로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숫자로 되어있지 않다고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숫자로 객관화 되었을 때야 비로소 누군가가 세계의 기아에 대해서 말할때, 자신의 연민을 토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를 갖고 이야기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 더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나 통계적인 숫자는 많이들 갖고 있을텐데, 그럼 이 ‘장 지글러’만이 갖는 특별함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면서 그가 실제로 경험하고 본 방대한 체험지식들이라는 점이다. 숫자는 여느 학자가 흉내낼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경험하고, 눈으로 본것들은 흉내낼 수 없다. 또한 그것을 토대로한 열정인데 어찌 감히 아무나 흉내낼 수 있을까.

진흙바닥위로 안개가 내려오면서 한기가 돈다.씻지않은 지저분한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다. 그러고는 슬며시 잠이든다. 이들 중 몇몇은 이 밤에 죽어나갈 것이다. (185p)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특정지역’의 기아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인류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이다.
어렸을적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라는 말을 본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어느정도는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라를 구성하는 정부과 관료들이 지은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에는 식량생산과 경제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기아와 가난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왜 현재에도 나라가 국민을 구제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그 나라의 부패한 관료들과 그들이 ‘이뤄낸’ 복구하기 힘든 썩어빠진 토대, 나아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강대국들과 거대 다국적 기업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부채’ 즉 나라 빚이다. 강대국과 다국적기업들은 해당 나라의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내전상황을 이용하여 가난한 나라가 그들 국가의 노력으로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를 계속해서 증가시키고, 내정을 간섭한다. 부채를 갚지 못하는 나라는 곧 식량, 의료, 복지 산업의 후퇴를 야기한다. 각 나라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IMF나 세계은행에서 부채를 빌려쓴 나라는 곧 그들에게 내정간섭의 권한을 쥐어주게되고, 그로인해 다국적 기업들이 매우 유리하고 불합리한 조건으로 해당 나라에 진출하고, 폭리를 취하며 도저히 그 나라가 회생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것은 그런 케이스중에 하나에 불과하고, 지금 여기서 나의 재량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독하게 철저히 교묘한 부채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강대국들이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선심쓰듯 하는 구호활동이나 물자지원은 그들이 앗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동냥과도 같으니, 가끔 이들의 그런 사회환원을 보더라도 우리는 크게 감동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것은 결국 이미지 홍보에 그칠뿐이고, 결과적으로 나아지는건 먼지만큼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영양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최대의 비극이다. 이는 그 어떤 이유나 정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다. 나아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에 해당한다. (115p)

이것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류전체의 비극이다.
아프리카와 남미국가, 동남아시아의 기아와 그로인해 희생되는 사람들의 비극은 비단 그들만의 비극은 아니다. 그들중에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혹은 인류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비극이 곧 인류의 궁극적인 발전 가능성 저해에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삶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들이 굶고, 질병으로 쇠약해가고, 죽어가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인가?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치부해버리면 될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운이 좋아서 다행이 (그나마)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되는 것일까?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밥이 곧 될거라며 거짓말을 하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이 비극적인 일들이 지금 이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현재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들을 기아와 가난에서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이 지리한 비극을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하루에 한끼조차 먹기 힘든 나라에서도 교육에 대한 토대를 끊임없이 닦아놓으려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는가. 아는것이야 말로 상황을 타계할 가장 큰 초석이 될 테니깐 말이다. 알고, 진실로 깨달아야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던, 횡포를 일삼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보이콧에 동참을 하던 할 것 아니겠는가? 또한 장 지글러는 (조금은 원대하다고 보여지지만,) 우리에게 혁명을 일으킬 것을 역설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당장 총칼을 들거나, 시위를 할 엄두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시위를 지지하고 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정당하고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라는 뜻 아닐까? 물론 그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어지간한 거대 다국적 기업이란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층에게는 매력적인 기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고,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면 곧 대안이 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정도면, 누가 더 세상을 가난하게 만드는지는 확실히 좀 더 명확해진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과 막강한 힘을 쥔 나라들, 부패한 정치인들, 그리고... 가난이 단지, 해당 나라의 탓, 구호활동의 부족함으로 알고선 방관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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