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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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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보니 좌식 책상위에 책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상이 평생을 두고 잊지 않던 ‘삼근계’의 가르침. 부지런함은 그저 단발성인 나에 대해 지레 무안해서 복사뼈로 바닥을 꾹 눌러본다. 인지하지 못했던 뼈와 바닥의 단단함에 정신이 집중된다. 괜스레 다리를 바닥에 더 붙여보자, 단단한 뼈가 바닥을 밀며, 혹은 바닥이 뼈를 밀며 통증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지 한 감각이 새롭게 느껴진다. 일정한 통증과 단단함을 버티어 내고, 나아가는 일.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는 그런 부지런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간과 집중은 점차 감각을 삼킨다.

 

  다산이 가르친 황상, 황상이 섬긴 다산. 이 둘이 서로간의 삶을 변화시켜 이롭게 살아가는 서사는 지은이를 통해 해설로, 때로는 시 로, 부 로 이어진다. 그 어느것하나 맛깔스럽지 않은게 없다. 이런 다양한 형태를 통해 다산이 황상을 이끌고, 황상이 다산의 뜻을 받들어 흐트러짐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는 어느새, 인물에서 인물로 뻗어나간다. 굳건한 나무가 단단한 가지를 뻗어 주변 나무와 공간을 공유하듯, 인연이 인연으로 이어진다. 자식은 물론이거니와, 형제와 벗까지 나아가는 길목 길목에서 뜻 은 뜻으로 만났다. 위대한 삶이 또 하나의 삶을 위대하게 이끄는 과정이 여간 감격스러운게 아니다.

 

“다산을 정점으로 당대 최고 명류들의 인연이 종횡으로 그물망처럼 얽히는 광경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큰 나무 한 그루의 그늘이 이리도 넓었다.” (448p)

 

  읽는 맛을 보자면 소설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이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과 황상,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몇몇 인물들의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도 허물을 숨기지 않은 솔직한 일대기이자,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태도에 대한 계발서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운치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행간 곳곳에서 때론 황상으로, 다산으로, 또 다른 이들로 겹쳐보인다. 다산과 황상이 일궈놓은 삶과 만남의 기록은 분명 작은 의미가 아니었으리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고맙게도 지금에서야 이렇게 쉬이 엮인 글을 만날 수 있는것 또한, 지은이의 뜻과 노력, 그리고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성스런 기록과 정리는 한 인간의 성취를 그리고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다른 누군가의 삶에 끼워넣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다산으로 시작해 황상으로 맺어지는 이야기를 되새겨보니, 내가 나를 향해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는 분명 내가 다른이를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와 크게 떨어져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걸어야 할 필요도, 편지를 부칠 필요도, 그것을 기다리거나 분실을 노심초사 할 필요도 없다. 만남의 순간은 어디에서건 차고 넘친다. 그 흔한 ‘만남’ 중에서 ‘맛남’을 가려내는 일은 때론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 필요한 건 스스로 먼저 부지런함을 초석삼아 세워진 뜻(그것이 비록 남 보기에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과, 두터운 ‘신의’를 갖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절로 맛남을 구별하는 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흔히 스쳐갈 수 있는 만남을 맛남으로 이끄는 것도 가능치 않을까.

 

“인생에서 귀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일세” (242p)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황상을 두고 말한 편지에서 건진 이 한 문장에서, 이 책을 통해 다시 정의된 ‘만남’이 간결하고 값지게 간추려진다. 다산과 황상, 그리고 여러 이들의 기록은 이것에 대한 명명백백한 증명이다. 여러 번의 만남에서도 마음을 나누지 못한 이, 한번의 만남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이, 그리고 여태 만남을 이어가는 고마운 이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오래도록 귀한 것은 사람 사이에 있었다. 그 깨달음의 시작에 '이런 사람이 있었네’,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깊게 기억될 것이다. 멋쩍은 내 복사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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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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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전 의도치 않게 친척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살 어린 동생과 함께 그의 방에서 있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서 마주치는 것이 전부인 그와 나는 그다지 친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아니다. 소싯적에 머리카락 붙들고 싸우던 일은 이제 그냥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관계. 무슨얘기끝에 그가 나에게 물었다. 꿈이 무엇이냐고. 나는 갑자기 깔린 멍석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석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대답했다. 그리고 왜 지금 거기에 코빼기도 가깝지 않은지 둘러댔다. 그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되기위한 공부와 실습을 하고있으니,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꺼내놓게 하는데 능통하겠구나', 라는. 어쨌든 그는 그것들이 핑계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이야기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그 이후였다.
 
그는 우리 부모님과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다른 친척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잘되라고. 말문이 막혔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예수께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왜? 그 집안은 우리집을 비롯한 다른 친척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다고 할 수 있지는 않다. 물론 냉전과 같은 분위기가 시종일관 지속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속에 문득 그런 기류가 감지될 뿐이다. 어쨌든, 그 이유 가운데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집안행사는 교회행사보다 뒷전이었고, 다른 친척과는 투닥거릴지언정, 자신교회의 교인들을 더 아꼈다. 모두가 모여 논의를 할때에는, 그들 자신의 믿음이나,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비단 종교만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항상 완벽히 환영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들의 관계는 은연중에 나에게 약간이나마 심어졌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 동생까지 그 범주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결국 그 또한 한 범주에 들어갔던 것이 사실이니, 무척 당황스러웠던것이 내게는 당연했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고마웠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매일? 웃기시네..' 라고 속으로 비웃고 뭉개버리기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짐짓 진중했다. 나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는 선교로 흘러갔다. 우리 가족은 아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무렵까지 교회를 다녔던걸로 기억한다. 나또한 부활절에 반투명한 컬러의 종이에 쌓인 달걀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깐. 하지만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건, 우리가 살던 윗집의 영향이었다. 부모님의 말에 따르면, '교회에 다퍼주고 망했다.'라고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렇지만, 대략 자신들의 수입에 맞지않게 교회에 헌납했었으리란 사실은 짐작이 간다.
 
한때는 가식으로 보기도 했지만, 내가 바라본 시골교회에서의, 노인들을 위로하고 묶어주는 교회, 목사의, 교인의 역할을 보았기에, 교회를 통해 조금 더 안정을 찾은 그들을 보았기에, 나는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얘기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혹은 부유한 자 일지라도, 종교가 안식처가 되고 좀 더 나은 행복을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그러니 그가 말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다니거나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은, 다시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그나마 상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기도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한 '궁극적인 행복을 향한 종교의 역할'은, 선한 행동이 선행된 뒤의, '강요하지 않는, 자율적인 종교생활 = 믿음' 이었다. 그들 스스로, 보여야만 믿느냐고 반문 하듯이, 그것은 진실의 문제이기보다 믿음의 문제니깐) 그는 대답했다.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죄가 완벽히 없을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고 또 그런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살아가야 하느냐고, 예수님이 그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메달렸다고, 기도 함으로써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차라리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과오들을 지워낼 수 있다는 '자기만족'을 정당화 하는게 나으면 나았지, 이런 면죄부라니...
 
면죄부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모집할 때의 그 유명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을 지나치고 나니, 열흘동안 공의회가 토의를 거쳐 결정한 사항에는 그것과 똑같은 말이 들어있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 (31) 
 
완전한 면죄는, 십자군에 참가함으로써 그 어떤 죄든 면죄될 수 있단 것이었다. 그것이 살인이든 더한것이든.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아니 논리를 들이대기에도 어리석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으로 이야기 해야할 테니깐. 십자군에 대해서 아주아주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이유들을 알고있고, 관심도 없던 내게 이 부분은, 그 친척동생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가 말한 '면죄'를 통한 안식을 얻기 위해,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게되겠구나."
 
부(영토)와 권력에 대한 야망, 소속 클랜으로서의 공동체 의식 + 금전적 수입을 위한 참가도 적지 않았고, 어쨌든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과,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자신이 처한 권력의 약화를 타파하기 위해서 제창한 십자군이라도 (과학/의학 및 생활수준/신분고착으로 비롯된 괴로움을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타파하려했던 시기였기에) 종교에 대한 믿음이 참여에 대한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성지순례행위에 타인(이슬람)에게 대가를 바치는 것에 대한 불만 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그로인해 '성지탈환' ,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이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었을 것이란 것도 예측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무리 표면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향한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셈하는 것도 새삼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다시 반추해보면, 그것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면제받기 위해서 참가하거나, 지원금을 충당한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은 곧 면죄의 대한 믿음과 나란히 걸어갔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면죄부'에 집중해서 몰입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의 신을 위해 벌이는 살육이 과연 신이 바란것인지, 인간인 자신들이 바란것인지 질문하면서. (아니 이미 내 스스로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고선)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가 일단 연대순으로 민중십자군부터 차례로 언급한 것과는 다르게, 이 <십자군 이야기1>은 교황을 통해 시작된 본격적인 십자군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민중십자군은 적절하게 다시 등장한다) 아마 이것은 민중십자군이 결국 종교에 대한 믿음, 면죄/천국에 대한 욕망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과 비교해서 각 귀족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1차 십자군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종교를 넘어서는) 권력, 야망, 음모, 이기와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권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중요도'에 단순히 밀린것일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1차 십자군은 출발했고, 매우 집중력있게 (초반에 이 멍청한 머리가 또 이름들을 헷갈려한것을 제외하자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엔 무엇보다도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역사의 사실적 기술 사이에 배치해둔 인물의 심리묘사와, 그리고 로마를 비롯한 고대 세계에 대한 애착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시대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 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문학적 감수성이 이들의 원정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초반부를 서술하며 명칭에 대한 정리를 한다. 이슬람국가에서 바라보는 로마(그리스)인, 그리고 그 반대의 시각과, 프랑크인을 비롯한, (현재 와는 매우 다른) 민족적, 영토적 경계를 그 시대적 상황에 맞춰 교정해주고 시작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동방이나 서방이나 호칭 하나도 상당히 엉성했던 것이 중세 시대이자 십자군 시대였" 으니깐. (87p 인용)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그녀(작가)의 역할은 바빠진다. 사실적 기술로는 '읽게'만드는 힘에 한계가 있을테니깐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는,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표면/심리)적 묘사를 채워넣는다. 작가의 역량을 통한 인물들의 묘사(교황 우르바누스2세부터, 보두앵 까지)는 역사적 사실들 사이를 수놓는 다리가 되고, 또 잘 닦인 얼음과 같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십자군에 참가한 다양한 제후들에 대한 탐구로 인해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셈이다. 역사는 결국 빈틈을 남길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채우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자료가 근거가 되지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 주변의 근거를 통해 추정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것들을 이제껏, 거의 비슷한 모습(태도)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상에 대한 혜안으로 받춰주는 이것들이야 말로 과거의 역사를 현재서도 짚어볼수 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어쨌든, 나는 시오노 나나미가 그리는 각 인물들이 심리묘사가(비록 작가의 판단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더욱 찰지게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1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모두 성직자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전략적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은 자기 관심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나의 지나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이처럼 되었다. (111)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인물의 묘사는, 시대적 이야기를 좇는 즐거움과 더불어, 독자들이 그 인물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 원정과정에서의 완급조절과, 작가의 적절한 개입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며, 집중력을 더해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시대를 지금의, 작가 자신의 시각으로 반추하는 것이 빠질수 없다. 나아가 그런 시각에서 탄생된 고차원급의 유머러스함은 또 얼마나 즐거운지.
 
십자군은 프랑스의 유력한 수도원이던 클뤼니 수도원이 불을 붙이면서 시작된, 말하자면 종교가 주도한 ‘사회개혁운동’ 이었다. (119)
 
이렇게 그리스도 전사들은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자면 ‘속죄’. 동양에서 말하는 ‘목욕재계‘, 내가 보기에는 ’집단 세뇌‘를 마쳤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속죄를 마치자,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다툼하는 사이였던 레몽과 탄크레디가 우애의 증거로 서로 껴안았다. 그걸 보면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233)
 
또한, 사실적 표현의 경계를 묘하게 오가며 문학의 그것과 같은 서정적 표현이 담겨있는 묘사는, 인물의 감정에 더욱 깊이 몰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내 앞의 펼쳐진 이야기가, 글자와 여백을 넘어서 그 시대를 눈앞에 투영하게끔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준다. (다만, 이런 감상적 표현은 아주 드물다)
 
그날은 ‘철의 다리’ 맞은편에 펼쳐진 평지에 천막을 치고 밤을 보냈다.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안티오키아를 보려고 했는데, 바라본 자가 우선 감탄하고 그후 바로 절망한 것도 이 무렵일 것이다. 오리엔트에서도, 가을엔 해도 달도 한층 빛을 더한다. 그리고 모래먼지의 방해를 받는 날이 적어서 중근동 전역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이다. (133)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과, 작가 의견의 개진 방법이다. 작가는 미묘한 사실이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없는 판단지점에서 다른 역사가들의 의견을 언급하며 인정하거나, 덧붙이거나, 혹은 반대의견을 꺼내놓는다. 그것은 작가가 펼치는 객관적 역사로서의 신뢰를 강화하고, 작가의 시각을 다른 역사가들과 (간단히라도) 비교해보며 독자에게 판단의 권리를 쥐어준다. (다른 역사가들의 관점을 함께 알아보는 것은 덤으로) 어쨌든 이런 작가의 철학적, 역사적 시각으로 인한 개입은, 역사를 객관의 산물로 바라보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함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그 개입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으며, 혹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작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견해와 (현재까지 공인된)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껏 증명되고, 인정되온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더불어 작가의 시각을 받아들일것인지 말것인지는 우리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후세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을 해방한 후 유럽으로 돌아간 장수들을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으로만 뭉친 기사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만으로는 신앙조차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니까. (253)
 
물론, 한참 이야기를 따라갈 당시에 시오노 나나미가 기술한 사실과 더불어 작가가 추정하는 사실들(병사들의 숫자나, 각 리더들의 행동근거)에 대해 큰 의심없이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근거로한 시대적, 종교적, 신분적 배경과, 인간 본성을 근거로한 판단에 큰 이의를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서는, 보다 신중하고 열린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인간이 판단하는 사실에 대해 감히 무결점의 역사가 있겠는가. 어디에도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이란 마치 비문같은 말이다. 많은 이가 좇고있는 허상같은 결정. 시오노 나나미가 중립적인 상태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술했다고 까지는 생각치않는다. 아니, 그 누구도 그럴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는 십자군에 대한 비판과 인정의 그 근거를 나름 균형있게 제시하려고 했다. 그녀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의 인물묘사, 사건의 디테일을 완벽히 믿고 동의하든 말든, 적어도 작가가 그것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작가가 그 경계에 대해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지점들을 세워두었으니, 판단은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술자의 객관성에 관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독자의 객관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대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넓은 이해와 견해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 많은 이가 지나간 이후, 처음의 발자국은, 점차 아래에서 흐뜨러지며, 흐려진다. 그녀는 (다른 역사에 대한 접근과 저술은 별개로) 십자군 이야기의 전개에 자신의 이름을 이제 막 올렸을 뿐이다. 시대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녀의 '판단'을, 우리가 또 즐겁게 '판단'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더불어, 아래 문장에서 역사의 운명을 감지한다.
 
틀루즈 백작 레몽은 ‘성스러운 창’을 계속 보관한다. 그러나 6년뒤 그가 죽은 후 이 ‘성스러운 창’은 기묘하게도 네 개로 늘어난다. 이 네 개의 ‘성스러운 창’의 행방은 이런 성유물의 운명을 무척 흥미롭게 보여준다. (211)
 
처음의 '면죄부'에 대한 조소에 가까운 시각에서부터 비롯된 이 독서는, 그 끝을 알면서도 시종일관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에, 십자군의 온갖 모습들을 떠올리고 그리는 도중에 그런 조소는 거두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 종교에 대한 내 시각이 달라졌음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좀 더 명확히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마 그와 동시에 나는 거기서 몇걸음 물러났다. 십자군과 중세의 역사에 깊이 들어갔더니 결국 어쩔수 없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국으로의 희망, 권력, 명예, 부의 욕망, 인간적인 질투 등,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대부분의 성질을 발견하게 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체게바라로 시작해 쿠바의 전후 역사를 살펴본 이후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뜸했다. 최근엔 조선시대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가, 이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접한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이름만 줄기차게 접했을 뿐, 로마인 이야기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독자다. 더불어 다른 역사(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다른 십자군 저서와의 비교가 가능했을리도 만무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제 막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 독자인 셈이다. 그런 어설픈 독자이지만, 아직 나의 판단기준은 부족하지만, 아마 앞으로의 십자군 이야기에도 주목할 것이다. 읽을것이고, 즐길것이고, 또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넘어서 인간을 다시금 짚어볼 것이다. 그들의 궤적을 따라간 끝에서 결국 오늘날의 누군가와, 또 우리와 닮은 그들을 발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속에서, 현재의 사람들과 똑닮은 그들을 발견하며, 절망하고, 또 희망할 테니깐. 이미 많은 이들이 연구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의 인간, 불멸의 속성에 대해 좀 더 나은 혜안을 가질 수 있으리란 것에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한살터울의 친척동생과 함께했던 그 몇 시간, 집에가서 처리해야할 일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받아치는 것을 관두었다. 굳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어떡할 셈인가? 하며 아직도 사회가 합의보지못한 사안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폭력적 선교활동 및 정치, 권력, 부의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이들을 거부할 뿐이지,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고, 종교적 논쟁에 일침을 가할만큼 그 종교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니깐. 어설프게 그의 말에 인정한 나에게 그는 그 자리에서, '진실된 기도를 하겠노라'고 약속하라 했다. 나는 덜컥 겁이났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했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약속할 수 없다. 거짓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는 이해했고,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마 나는 그런 생각을 햇을것이다. '언젠간 더이상 아무것도 강요하지 못하게 제대로 반박해주겠다고.' 하지만 이젠 아주 조금 달라졌음을 느낀다. 혹, 이후에 그와 함께 다시 그 얘기를 할 수 있다면 믿음의 강요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믿어라-안믿겠다' 같은 영양가 없는 논쟁이 아닌, 내가 그에게서 발견하고, 그가 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 그때가 좀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할 테니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종교 너머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싶은 바람이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239)
 
(종교가 전부인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신을,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그 사람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중세의 그들과 비교했을때, 우리는 늦게 태어난 인간들일 뿐이지, 새로 태어난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시대, 그 종교뿐만이 아니라, 지구위에서의 인간을 배우고, 이야기 하고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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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여행 끝에서 자유를 얻다 - 마음으로 몸을 살린 어느 탐식가의 여정
데이나 메이시 지음, 이유미 옮김 / 북돋움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한 개그맨이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나름 유명한 일화인지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지 모르겠다. 어릴적, 어른들이 개고기를 해먹기 위해 뜨거운 물에 개를 넣었었는데, 그 개가 아직 죽지 않고 솥에서 뛰어나와 어린 그의 앞으로 와서 꼬리를 흔들더란 일화. 그 후로 그는 '개는 먹는 음식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중요한 얘긴 아니지만, 내가 음식에 대해서 생각했던 몇 안되는 이야기중에 하나다. 사실은 이 책의 모습이 그런 음식에 관한 일화들의 합이 아닐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책의 모습은, 다이어트라는 화두로 시작해서, 과도한 음식섭취, 특히 육류쪽에 치우친 식습관을 그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제로 되짚어봄으로써, 그 비율을 줄이거나 하는 쪽인줄 알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좀 더 포괄적이지만, 또 개인적이었고, 그래서 근원적인 이야기 였다. 사실 그녀는 특별나게 육류를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육류만으로 비만이거나 뚱뚱한 편도 아닌 듯 싶다. 다만 많이 먹었다. 육류나 인스턴트 뿐만 아니라 올리브를 비롯한 채소등도 좋아했지만 문제는 식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생기는 여러가지 불편함이나 괴로움을 올바르게 잡고자 하는 것이 었다. 그녀의 다이어트는 비단 식습관의 조절이나 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쪽에선 음식 자체의 여정을 따라가 음식에 대해서 고찰하고, 한쪽에선 자신의 과거를 쭉 다시 돌아봄으로써 그녀 자신과 음식의 관계가 언제부터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구축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농경사회가 공업사회로 바뀌고, 다시 첨단기술 및 서비스 산업으로 바뀌어 가면서, 농업의 풍경은 도시인들과는 너무 먼 거리가 느껴지게 된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음식은 현대에 이르러 먹어야 하는 강박과 먹지 말아야 할 강박이 동시에 우리를 급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먹어야 하는 강박은 많은 요소들의 발전과 맞물린다. 재료의 대량생산의 가능과, 그것을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는 운송수단의 발달, 그리고 (물론 여전히 빈국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주요 국가의 국민들의 수입증대, 그에 따른 보편적인 소비 가능성의 상승, 그리고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고 기계와 속도를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와 공허함을 채우려는 자극적인 음식의 향연 등 말이다. 하지만 또 역으로 먹지 말아야 할 강박 또한 그에 못지 않은데, 의학의 발달로 인해 식습관에 따라 건강과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일부) 풍유로워진 식량배급으로 인해 정점을 찍은 속도위주 사회에 반기를 든, 슬로우한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의 꾸준한 증대, 그리고 무엇보다 늘씬함 혹은 많이 양보한 표현을 빌리자면 균형잡힌 몸매를 위해서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니깐 결국, 자본을 획득하려는 쪽의 유혹과 그것을 적절히 수용해야하는 양쪽의 강박이 맞부딪치는 세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음식만의 이야긴 아님이 분명하고.


그녀의 과거는 조금 어두했다. 가끔 폭력으로 위협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그녀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견뎌왔다. 이 특별한 저자의 과거에서 시작된 음식에 대한 여정은, 가공식품의 폐해로 인해 열량만 높아진 현대의 음식에서 한발 더 들어가 자신이 먹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 자신의 과거에서 찾아가는 과정과 어우러진다.


이야기는 유혹/공유/변화 이렇게 총 세가지의 주제로 묶여있다. 맨 처음 /유혹/은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소시지나 올리브, 초콜릿 등 삶에서 그녀를 가장 유혹하는 것들이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기술들을 거쳐서 만들어지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크게 그녀에게 어떤 유혹을 제거시켜준 것 같아 보이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음식이 그저 살기위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작은 부산물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자신과 진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 혹은 그저 즉흥적인 욕구로 인해 '가짜'로 연결되어 있었음과 함께. 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의 행보의 시작이, 그저 음식의 단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그것을 대해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치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책에서 그녀가 보여주고자 함은 표면적으로 그녀는 음식의 재료가 자라는 곳이나, 가공되어 지는 과정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음식에 대한 개념을 다시 재정립하고, 그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음식과의 연결성을 올곧게 바로잡는 일을 통해 새롭게 음식과의 관계를 재정립 하는 일이 분명하다. 


두번째는 /공유/이다. 앞에서의 과정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완제품'의 가공과정을 돌아보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그것들의 이전단계, (가령 소시지라는 가공된 고기가 나오기 이전단계의 고기들을 추적하는 식으로) 농장이나 과수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만나는 것들은 이전의 가공단계에서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연결성을 그녀에게 확인시킨다. 여기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음식, 곧 식량과의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그 음식의 탄생과 성장에 몇십, 때로는 몇백 키로나 떨어져있어서 그 처음의 생산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연결되어있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이미 이전부터, 마트같은 기업형 대형유통체인이 아닌 생산자와 직접 연결되는 공급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농장이나 과수원에 가서 생산자가 그 수확물을 대하는 태도, 혹은 그것을 운영하고 공급하는 것과 소비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소비자의 신분을 떠나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자연이 주는 자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변화/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듣고 했던 것들을 체득한 몸에 변화를 주는 마지막 순서다.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요가의 의미를 돌아보고, 4일간 단식을 하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했던 것들을 몸으로 응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미 앞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음에도 실제로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물론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의지를 갖고 하나씩 하나씩 음식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세웠다. 그녀가 정말로 음식을 심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되짚어 보자면, 이 책은 식재료가 우리 식탁으로, 혹은 입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봄을 통해 그간의 식습관을 '충격요법'으로 깨우치는 책이 아니다.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모르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소모적임 음식으로써의 의미를 깨고, 자연이 주는 '먹을 수 있는'것들의 의미를 재조명해서, 그것들과 우리의 그동안의 편협하고 의존적이었던 관계를 서로가 더 긍정적이고 독립된 위치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이 더욱 특별한 것은, 그녀 자신이 과거에서부터 마음의 상처나 아픔들을 음식에 위로받던 것들에서 벗어나고, 과거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과거의 자신을 보듬는 과정과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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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도 -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윤미화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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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내용을 제목으로 차용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질문을 던져주는 책인지라, 이런 제목이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진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는 특별히 서평집이라는 인지를 하진 않고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 서평집이었다. 하지만 이 서평들은 한데 묶여 또 하나의 책으로 완성이 됐다.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쓰려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참 막막하다. 좀전까지 칼날같이 날카로운 문장도, 목화솜처럼 부드러운 문장도, 그리고 그것들을 그물처럼 이어놓은 글들을 만나고선, 이런 시장바닥에서 나뒹굴만한 같잖은 글을 쓰려니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서평들이 여기 <독과 도>의 저자처럼 여러갈래로 뻗어가며 각각의 사유를 확장시켜나감은 분명할테니, 낯을 두껍게 하고 짧은 글이나마 적어가야겠다.

 

이 책은 세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처음에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어쩐지 내면에 천착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예상했건만, 실제로 책의 초입부터 역사와 사상의 인식, 정치와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두번째로는 자연과 함께 살아간 이들의 태도를 엿보고, 세번째에 이러서야 비로소 좀 더 내면 안쪽 깊숙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큰 얼개는 분명 이렇게 세가지로 나뉘어 있지만, 반듯하게 자른 면처럼 그렇진 않다. 가령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을 가지고 이야기 한 부분에서 현 교육세태에 대한 것 대신 공부와 책에 대한 태도를 읽는다면, 그것은 뒤이어 다른 책을 언급한 부분에서도 통할 수 있다. 

 

국가, 애국, 국익, 공익, 진보라는 신념을 맹신할 때 신념은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된다. 게다가 이런 경우 괴물은 죽어도 괴물성은 쉽게 죽지 않는다. 괴물성이 진정성으로 둔갑하면 비로소 괴물은 부활한다. (257)

 

<독과 도>는 우리가 사는 사회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자본에 잠식된 사회를 벗어나 자연으로 들어가, 결국 자신 속의 이야기까지 들어가는 과정인데, 이 사이에서 다양한 책을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것이 <독과 도>의 가장 큰 존재의 이유이며, 특성이다. 그리고 다양한 책들은 각각 저자의 손끝에서 다양한 관점과 담론으로 확장된다. 그 다양한 관점과 관심들이, 여럿이 모이고 모여 세가지 큰 줄기를 이루고, 결국 그것이 <독과 도>라는 하나의 강과 같은 책으로 흐르는 것이다.

 

오지 않을 사람인 줄 알면서도 기린처럼 목을 길게 내밀고 기다려본 사람은 압니다. 그는 오지 않지만, 다시는 웃는 얼굴로 내게 뛰어오지 않겠지만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요. 기다림은 우리들 사랑의 열병이겠지요. (282)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부분은 날카롭고 명쾌한 논리를 통해 풀어나간다. 사실, 정말로 여러책에서 에둘러 말하는 것들을 한방에 풀어주기도 했다. 이때에 이것은 하나의 서평이 아니라, 하나의 책이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할때는 저자인 자신의 생활을 많이 차용하며 자연으로 회기하는, 그러니깐 우리 인간의 존재를 좀먹는 아주 문제많은 체제들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간 이들의 이야기와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혼연일체 되어 표면적으론 자연에 대한 예찬이고, 안으로는 모든 존재들과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번째에 이르러, 좀 더 안쪽으로 안쪽으로 향해, 이윽고 우리 마음을 이야기 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아마 이 문장으로 그 이유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외부 세계가 마치 무한히 복잡하고 힘든 것처럼 얘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내적 여행의 미로에 비하면 가벼운 스텝 댄스에 불과하다!' (290) 그러니깐, 처음에는 좀 더 쉬운 접근법으로 시작해서 점차 내면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방법아니려나.

 

(...) 잘 조절된 자기애는 나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타자 존엄성을 인지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사랑을 체험한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배려와 관용을 보이면서 자신조차 행복할 수 있다. (286)

 

잘 쓰여진 서평은 이미 그 책에 국한되지 않았다. 거의 늘 한가지가 아니라 몇가지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글은, 하나의 책에서 나온 뿌리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튼튼한 나무처럼 우뚝 섰다. 서평이라고 해서 한 책의 곁다리로 생각해선 안된단 얘기다. 하나의 독립적인 책으로서 충분했다. 이미 책을 읽은 사람에겐 그 책이 가진 바를 토론하고 확장하고,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겐 책에 관한 이야기를 훨씬넘어 하나의 독립적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책들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그것들이 누차 언급되고, 그 본문들이 인용되지만 나는 그것들이 그 해당책의 곁가지라고 생각들지 않았다. 내게 이 <독과 도>는 서평집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인문학 책이 되고, 에세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서평들의 모음이라 각각의 사유가 다른 책들처럼 길게 이어지진 못하고 약간은 단절됨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것들이 놀랍도록 밀접하게 이어지며, 언급된 많은 책들과 별도로, 단일한 주제로 통하게 됨을 목격했다. 그저 책의 형태이기 때문에 책이 아닌, 하나의 책으로서의 가치가 다른 것들에 비견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단 얘기다.

 

칼바람 같은 글도, 카스테라 같이 달콤한 글이 책을 통한 이야기에서 나와 다시 책을 이루었다. 그 사이에서 정말로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났고, 또 기대한다. 읽는 다는 행위를 어떻게 기록하며 확장해야 하는지 한번 더 고민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흐르고 흘러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제의 길을 돌아보고 내일 갈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인연의 발자국을 찍는 일이다. 당신은 무슨 책과 어떤 인연을 맺는 여행을 할 것인가.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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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서재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꿈과 지식의 탐험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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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처음 본 이 <과학자의 서재>제목에 대한 느낌은 언뜻 보기에, (아주 창피할만큼 단순하게도) '과학분야에 국한된 책 소개가 주된 주제가 아닐까' 하는 편견아닌 편견. 책을 읽기 시작하다 보니, 그것도 참 쓸데업는 기후에 불과했던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서재라는 책의 제목에서 조금 떨어져 보자. 실제로, '책을 추천하는 책'은 참 많기도 할 것이다. 내가 알고있거나, 혹은 갖고 있는 책만해도 벌써 몇권은 되니, 내가 모르는 세상에 그 많은 책들 중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오죽하겠는가. 물론 이 책의 말미엔 저자인 최재천이 소개하는 몇권의 책이 언급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책들도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어불성설인듯 싶다. 이 책은, 책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했던 한 소년이 특별한 과학자로 성장해가는 성장담이다.

 

누가 보면 궁색한 과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책 과 사람을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것은 군대 훈련소 때다. 생소한 모든 것, 내일, 혹은 잠시 후도 알 수 없는 순간순간, 그동안 해왔던 많은 것들, 정확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통제되고 금지되고, 남은 것은, 하기 싫거나, 할줄 모르는 것들만을 남겨두었던 그때다. 아마 훈련소 입소식이 아니었을까. '이들과 함께 과연, 더 큰 소리를 낼 수는 있는걸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예행연습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갔던 그때는, 실제 입소식 때 주먹을 쥔 손에 너무 힘이들어가서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헌데,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은 그때 훈련소대 대대장이 해줬던 짧은 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충 기억하기론 '다들 책을 읽을 텐데, 한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는 한권의 책과 같다는 것, 즉 여러분 주변에 있는 전우들 이나 조교들 혹은 간부들 모두가 하나의 책과 같으니 많은 것들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배우라' 는 말이었던 듯 싶다. 많은 시간이 지난 이야기라 내가 어떤 말을 빼고, 어떤 말을 더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그나마 좋은 축에 속하는 기억으로 간직하니, 미화했을 확률은 많겠다) 그때의 훈련소가 얼마나 부조리 했든, 군생활이 어땠든 간에 상관없이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니깐.

 

자, 우리가 들고있는, 종이로 되있는 종이책, 혹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태블릿PC 나 스마트폰 등으로 보는 E-BOOK 이 갖고 있는 책의 개념을 잠시만 내려놓자.

 

 

한권의 책으로 분한 그의 삶을 따라가보자!

 

 

마치 가까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듯, 따뜻하고 부드럽고, 솔직한 그의 입담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도 하거니와, 딱딱하지 않게 설명해주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그의 이야기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한다. 또한, 성인 독자뿐만 아니라 청소년 독자또한 고려한 듯한 (보통의 소설보다) 좀 더 넉넉한 줄간격은 편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기본적으로 독서는 내가 즐겁기 때문에 하지만, 때로는 곤욕이 될 때도 있는 반면에, 한 과학자의 삶을 '들어보는' 이 책은 마음 편하기만 하다. 그가 고향인 강릉에서 느꼈던 어릴적의 '편안함' 과 '그리움'만은 못할지라도 말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중학교부터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절, 대다수가 이제 동등하게 대졸이고, 그래서 자격증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지금 세대와는 다르게, 공부를 잘하고, 일류대를 나오는 것이 곧 최고의 성공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시대에 육군 간부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그때의 어머니의 교육열과 (시대가 변해도 교육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듯 하니 가타부타 긴말 할 필요는 없겠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인한 이유로 서울로 전학오게 된다. 중학교부터 시험 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대학입시와 이어져 있기에, 저자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과외도 잠깐 받아가며 공부를 하게 된다.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이었지만, 본디 자연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서, 초,중,고등학생 동안그는 방학때마다 강릉에 내려가 자연을 벗삼아 놀았고, 서울에 있을 때도 남산에 올라가서 친구와 함께 시를 쓰며 놀기도 했단다.

 

하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강릉에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의 남는 시간에 읽었던 책들이다. 물론 무슨 책을 읽었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었는지는 중요한 사실 같다. 온갖 다양한 것들이 담겨있는 '백과사전'에 엄청난 흥미를 느끼고 접했던 그의 책과의 인연은 '동화전집'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이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나아가, 자연과 한데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는, 그런 감수성 때문인지, 중학교 때 충동적으로 친구따라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詩)를 통해 장원을 하게 되면서 시인을 꿈꾸게 되기도 하고, 고등학교때는 미술선생님에게 스카웃되서 미술반에 들기도 한다. 그리고 '노오벨상수상전집' 을 통해, 어렴풋하게 과학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이야기가 길게 풀어져 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요는, 소싯적부터 '자연을 벗삼아' 놀며 시 와,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며, 그러니깐, 기성세대가 본다면 소위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던 그가 처음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위에 설명한, 그가 기술한 삶의 반정도 되는 대학입시 무렵까지 그는 시, 소설, 미술, 등 꽤 다른 분야에서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의 모습과 언뜻 닮기도 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전공분야는 있었지만, 거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그 계열에서 그가 자신의 진로를 명확히 결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데에, 여전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길을 인도해준 것은 '한권의 책' 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고, 그 일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내게 생물학이 그저 흰 가운을 입고 세포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학문이란 걸 알려줬다. 그 책은 내게 생물학에 몸바쳐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155p

 

내가 그의 삶의 태도 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나는 무엇을 할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태도다. 그것이 어떤 확고한 삶에 대한 의지와 자세로 이어지고, 나아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멋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제약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시인이 될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지금 과학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때의 감수성, 언젠가의 철학적 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차가운 증명과 무한실험'에 그치는 과학자가 아닌, 감성 풍부하고 철학적이고, 마음 따뜻한 과학자가 된 것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했고, 그런 순간순간들은 책이 길을 가르쳐준, 혹은 책을 통해서 바뀌게된 태도가 많이 눈에 띤다. 하지만 내게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어떤 구불구불하고 불확실한 길을 걸으면서 방황하고 또 방황하며, 머뭇거리다가도 달리고 마는,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길 위에 서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찾은 저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멋졌다. '최재천 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정말로 과학과 사회,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통찰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다른 저서도 얼른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만약,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실패'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쩌면 거기서, 우리가 꿈꿔오던 꿈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거기에는 어떤 '각성'이 필요하고, 또한 그 각성이 그저 자신에 대한 '위로'로 여겨지면 안될 것이다. 길을 찾는데 책이 전부는 아니지만, 또 책이 아닌것도 아니다. 어떤 한권의 책을 '잘' 만나는 것은 가장 저렴한 대가를 통해 삶을 바꾸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인 최재천이 풀어놓는 아주 솔직한 삶의 애환과 방황을 통해서, 삶에 대해 조금은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꿈을 찾으며 방황하던 그의 나날, 그리고 선택의 연속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요소요소에 있는 몇권의 책들, 그리고 그가 추천해준 몇권의 책들을 꼭 한번 읽어봐야 겠다. (신문에서 서평을 쓰기도 했던 그의 경력대로, 소개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 또한 아주 재미나다) 읽다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책들이 있겠지. 어쩌면, 한권의 책들에서 느꼈던 작은 울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과 더불어 책과 같은 사람, 어느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치열하게 읽고, 치열하게 방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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