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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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너'라고 쉽게 칭할 수 없는 것은, 그 '너'라는 것이 정말로 그때의 나에게 '너'였던 그 사람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이 비누거품에 담갔다 나온 듯 뿌연 표지의 이 책을 말하는 건지 나도 좀처럼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병률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때 처음 들었다. 그저 좋았다. 열정에 관한, 청춘에 관한, 사랑에 관한, 이별에 관한, 여행에 관한, 삶에 관한, 결국... 사람에 관해서 셀수없는 별만큼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영원히 풀어낼 것만 같은 이 책이 좋았다. 이미 이성적 사고란 어딘가로 귀향보내고 바닥에 있던 감성들이 박박 긁어져 먼지처럼 날리던 그때, 그래서 쉴틈없이 재채기를 쏟아붓던 그때, 나는 그토록 나를 간지럽히던 감성입자들을 어딘가에 쏟아부을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시를 멀리했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과 같았다. 언어가 이렇게 빛날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때 처음 느낀 황홀은 내게 깊게 배어있는 상처를 잠시나마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균이 침투하고, 딱지가 생기거나 혹은 덧나거나 최악이라면 흉터가 남을 수 있는 그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가 한 인간을 안으로 훌쩍 더 자랄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도 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잠시였을 것이다. 초침에 한발씩 밀려 생이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해야할 일이 지난 몽상을 휩쓸어가면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터.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밤의 무게가 느껴지던 그 수많은 밤들 중에 분명 몇날 몇일을 나는 이 책으로 버텼으리라.

 

나는 아프면서도, 이 책이 나를 즐겁게 해줄 때 피식하며 웃었고, 행복한 이들을 봐도 질투내지 않았다. 글이 아파하면, 내 등뒤로 나를 받쳐줄, 나와 똑같은 각도로 서로의 등을 마주대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고마워했다. 한 단어로 곤궁하게 표현되던 것들이 이토록 간절하고 견고한 수식어로 포장되어 각양각색의 사유로 변신하는 것이 놀라웠고, 세계 어디에서든 인간의 감정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음에 놀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좋았던 것은, 그 우연성이 아닌가 싶다. 방심하던 내게 던져주던 질문들, 사유들, 혹은 단상들, 혹은 편린들. 전 우주적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저 하늘꼭대기 위에 걸려있을 것만 같았던 범 우주적 주제들이 중력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왔고, 영혼을 부여받아 그 어디라도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엇다. 그뿐인가, 마치 제각각 흐려지는 기억처럼 페이지 하나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 불친절함은 어떤가, 페이지를 뒤져보며 어디까지 읽었나 세어보던 (얼마되지 않던)나의 습관이 무력화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로 나눠두긴 했지만, 사실 페이지가 없는 마당에 그것으로 굳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래서 이책은, 아주 우연히, 우연한 순간에 우연한 이야기와 만나게 해준다. 그저 무언가, 그의 이야기가 다시금 궁금해질때, 우리는 어느곳을 펴기만 해도 좋았다. 그가 정해준 곳도 없고, 우리가 정한 곳도 없다. 그저 우리는 우연에 기댈뿐이었다. 우연에 기대어 때로는 죽인다는 표현을 쓰고싶은 이야기를 만났고, 어떤때는 별 특별한거 없는 날이네 하고 이야기 하고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이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났을때는 왜인지 예전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대부분 꽤 멋지고, 아주 가끔 평범했던 이 책이 바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누구나 화장실을 가고 방귀를 끼듯, 이 책도 내겐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특별함과 평범함을 모두 간직한 오래된 벗 처럼. 어쩌다, 책을 펼쳤을 때 시시한 이야기라 해서 조금이라도 시큰둥 해지기만 한다면야 페이지 표시하지 않은 이를 향해 구시렁 거리고 싶건만, 그 평범함에서 그의 사람 내음이 더 진하게 풍기기도 하더라. 거기에서조차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발자욱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켠이 쓸쓸하기도 하며 말이다. 때론 일상이 더 큰 존재감으로 밀려오듯 그랬다.

 

다시 한번,너를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수 많은 삶 중, 나의 삶, 그중에서도 폭풍과 같은 시기, 그 중에서도 그 여러 서점에서,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이 내 손에 쥐어지게 됬었음을 알게된다. 어딘가에 갈무리 하지 않고, 어딘가를 펼쳐봐도 그의 일기같은 독백도 좋고, 가을밤 같은 사색도 좋다. 그저 우연의 어딘가에 그 문장들이 있어서 좋다. 나처럼 모호해서 다행이고, 나만큼 짠해서 반가우며, 나보다 순수해서 좋고, 나보다 앞서 그 아픔과 불안을 쓸어담았기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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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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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같지만, 일단 책을 읽기전의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들 가족은 얼마나 불량한가! 라는 것이 가장궁금한 화두였다. 사실 문학에서 불량한 가족사야, 심심찮게 혹은 자주 등장하는 화두지만 청소년소설이라는 한정된 범위안에서 얼마나 불량하고, 또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리라.

이야기는, 학생들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하면서도 교육정책의 면에서 꽤나 등한시되는 도덕 이라는 과목의 선생님이 자서전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면서 시작된다. 자서전이라 함은, 그래도 나름 자랑할 거리라던가, 자신의 생에 자부심이 있는 이들이 쓰는 것일텐데 (그것도 때로는 대필작가까지 동원해서) 파란만장한 가족들 품에서 살고있는 여울이는 과연 어떻게 그것을 풀어낼 수 있을까?

자서전에 대한 여울이의 고민으로 인해, 대략적인 이 가족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미 두집살림을 차려놨던 할아버지에게 속아넘어갔던 할머니, 세 부인을 거쳐갔지만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은 아빠, 그런 아빠와 크게 다르지않은, 정말로 길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된 삼촌, 첫째부인이 낳은-기저귀를 차고있어야만 하는 오빠-와 둘째부인이 낳은-배가 삼겹이 되는 언니- 그리고 셋째부인이 낳은-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고등학생 여울이. 게다가 여울이또한 고등학생 신분에, (나이트)클럽도 가고, 술도 하고 식권 위조도 해본..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팔순이 넘었지만 따발총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할매와 항상 충돌하는 언니로 시작하는 이 가족으로 인해 여울이는 언젠가 가출이 아닌 '출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울이가 충동적인 마음을 누르고 차근차근 출가를 준비하는 모습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뿐만 아니라 대견할 정도였다. 사실, 이정도의 가족사였다면 나는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법한 가족사 아닌가? 그러면 사실 여울이의 참을성또한 보통의 현실에선 보기드문 인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내가 겪지않은 현실에 대한 오만함 이라고도 충분히 생각된다. 항상 현실은 허구보다 더 끔찍하니깐) 그 인내심의 근원은, 명민한 현실인식과, 고등학생의 선을 넘긴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좋은친구들, 그리고 코스프레 라는 것을 통해 잠깐씩 현실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던 점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파국이라면 파국이라도 할 수도 있는 어느 지점으로 치닫는 파란만장한 시기에, 여울이가 버틸수 있던 점들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그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매우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자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조금은 불량한, 조금은 괜찮은 친구들

 여울이의 친구들과 여울이의 행동은 사실.... 못말린다. 음주를 하고, 나이트를 가서 춤을 추고.. 그럼에도 친구들과 여울이는 어떤 선을 넘지는 않는다. 한 멀쩡한 가정에서 본다면 어지간히 속썪는 일일테지만, 제각기 그 반항의 이유도 있음직한 그 친구들은, 소박한 탈선은 했을지언정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을줄 아는 현명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것들은 여울이가 콩가루 집안에서, 먼지처럼 떨어져나가지 않고, 가끔 바람같이 떠돌다가도 이내 돌아오고야 말게끔 해주는 좋은 버팀목이다.


현실의 캐릭터 벗기


 이야기의 중심 소재이기도 한, 코스튬플레이. 여울이에게 코스튬플레이는 자신이 주어진 가정의 한계를 잠시 벗어나는 일이었다. 현실이란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17세의 여고생이 아닌, 모두가 캐릭터 복장을 하고선 개인의 이력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코스프레의 세계에서 말이다. 여울이에게 이 세계는, 현실안에 존재하지만 현실의 바깥이기도 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코스튬플레이는 그렇게 현실의 도피이기도 하면서도, 먹먹한 현실에서 쉽게 거머쥘 수 없는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현실을 좀 더 '잘' 바라볼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밉다밉다 해도, 긴시간을 함께한 가족

 사실상 오빠와 삼촌간의 충돌은 거의 없다고 비교될 정도이지만, 아빠와 할머니, 언니와의 충돌은 여울이의 고백을 빌리면 정말 못봐줄만한 수준인데.. 그럼에도 여울이가 그들의 테두리에서 버틸 수 있던점은, 그들이 실은 따뜻했다, 라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여울이가 차차 조금씩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국엔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연은 끊지못하는 그들의 가족애(?) 를 통해 자신의 나아갈 길 또한 엿봤기 때문이리라.


꽉 부여잡고 있는 순수

 사실 여울이가 빗나가도 빗나가도, 아예 튕겨나가지 않을 수 있던 점은, 근본적으로는 여울이가 본질적으로 착하고 배려있는 심성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여러가지 험한 요건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시도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장 드라마를 한편 본 느낌이다. 답답한 가슴을 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래층 계단 끝에 오빠의 파란색 티셔츠가 보였다. 오빠는 담배를 피우며 창너머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의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외로워 보였다. (127p)



이해를 시도하는 이야기..

사실 코스튬플레이는 나도 소싯적에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동경의 놀이였다. 지금은 사회적인식이 아주 약간 나아진 상태인진 모르겠지만 (사실 폄하하는 시선은 여전할뿐이고, 그것들을 다소 이해할 수 있는 세대들이 점점 사회에 발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쨌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에서 그런 소싯적의 관심사를 발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 여울이는 코스튬플레이에 대해서 어떤 어려운 이해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은 자신에게 잠시 나갔다가 들어올 수 있는 비상구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했고, 여울이는 그것을 인정하고 꿰뚫어서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나같은 경우엔 그저 동경하는 만화캐릭터에 스스로 몰입하고, 삐까뻔쩍하고 뭔가 폼나는 그들이 부러웠을 뿐인데,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갖는 생각은, 오히려 그때의 내가 부끄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여울이의 코스튬플레이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 할 거리가 많다. 여울이에게 그 놀이는 어떤 터닝포인트라고 부를정도의 힘은 없었을지 몰라도, 만만찮은 어떤 사유를 가능케 한 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엔, 천사옷을 입은 사십대의 아줌마가 있고, 여울이가 짝사랑했던 세바스찬이 있다.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우연히 달라붙은 천사코스튬의 아줌아에게 추천받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를 읽고서 여울이의 반응은 이랬다.

"누군가 내게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104p)

그럼에도, 후에 다시 천사코스튬의 아줌마를 다시 만났을때 여울이는 이렇게 깨달은점도 있다고 얘기한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남들이 관심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요. 그건 서로 사랑하라는 아주아주 고리타분한 교훈이기도 하죠.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요,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데, 어른들을 보면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180p)

거기에 아줌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말이야, 어른이 되면 얼마나 말이 늘어나는지 아니? 말이 잔뜩 늘어나서 자기가 내뱉는 말들에 발목을 잡혀 얽매이게 돼. 말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그러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마음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마음 깊숙한 곳에 사랑이 숨겨져 있어."(180p)

여울이의 깨달음은 지극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씁쓸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조용히 거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 가족의 대부분이 '출가'를 하고, 아빠가 하는일은 이제 정말 '끝물'이 되어가고, 할머니는 양로원을 알아보러 다니는 와중에서, 아이는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닌, 최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들의 연속적인 연결의 틈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사람에게 관심-즉 사랑의 가장 큰 표현방법 이기도 할- 이야말로 얼마나 서로를 지탱해 줄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의지할 수 있는지 조금씩 알아갔던 것이다.

천사코스튬의 아줌마 말마따나,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말에 갇혀버리는 지도 모른다. 많은 어휘와 수사를 배우면서 점차 타인의 말, 그보다 타인의 진심에 귀기울이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이이다. 오직 말로써만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다. 말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우리는 여울이네 가족처럼 끊임없이 오해하고 충돌하고,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큼, 말이란것이 중요함은 간과할 수 없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런식으로 살아갈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어쩌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말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할지 모른다. 어쩌면, 현란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즉, 말로 표현하다 잃어버린 '진심의 표현법'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입을 통한 말'이 아니라 '마음을 통한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말도, 타인의 말도, 진심과 조금 더 닿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때야 말로, 한뼘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건 아닐까? 그러니깐 나는 여울이가 아주 대견하고, 여타의 어느 어른들보다도 낫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주는, 왕자님의 키스로 마법에서 깨어나... 한뼘 자라났답니다.

세바스찬을 향한 첫사랑의 실패는 여울이가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처한 가족이 현실처럼, 피하고, 피하고 싶었던 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바스찬 이라는 왕자는 결국, 키스로 인해서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물론 세바스찬의 이런 행동은.. 단순 실패한 사랑에서 보자면, 못된 짓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그것을 통해서 현실바깥에서 자신을 위로해주던 판타지에서 깨어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다소 상징적으로 말이다) 현실을 좀 더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책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비록 그것이 판타지나, 여타의 현실과 괴리감 있는 경험을 통해서였을지라도, 현실이라는 산의 능선을 한바퀴 돌아서 올라왔다면, 비록 같은 방위에 서 있을지라도, 그곳은 전혀 다른, 더 높은 성숙함을 바탕에 둔 현실이 아닐까. 어쩌면 '성장'이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 할 테니깐.


그리고 그 '시도'는 우리와 항상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가족'이란 존재에게 먼저 드러서야 할 것이다. 여울이가, 자신의 '불량가족' 을 통해서 그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여울이는 콩가루가 산산이 흩어진 가족위에서 다시 소생을 꿈꾸며, 자신의 엄마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곧 신뢰할 수 있을테니깐.



파란만장 가족사,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혹은 17년 인생의 자서전)을 덮으며..

<불량가족 레시피> 는 놀랍도록, 소녀의 감수성이 극명하게 사실적으로 드러나있다. 어떨 땐 정말 (서사의 구조등이 아닌, 캐릭터의 대사나 생각의 표현을 미루어봤을 때) 이 작가, 정말 청소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맨 뒤에 작가의 말에서 그 궁금증이 풀어진다. 작가는 직업때문에 청소년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들이 만난 청소년을 통해서 그들을 좀 더 가깝게 이해하고,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갔으리라 추측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한 기성세대 작가가 쓴 이야기보다는, 파란만장 가족사를 지닌, 방황하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 나아가 조금 특별한 17년간의 자서전 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한편의 소설이 아닌, 좌충우돌 그 시절 한 소녀의 솔직한 일기장을 엿봤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어느정도 의구심이 들때도 있다. 개인적 경험에 입각해보자면, 17세에 이렇게 성숙할 수 있나? 혹은, 이 가족을 정말 이뻐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 ... 그렇게 생각해보고 나니, 나의 청소년기는 왜 이렇게 성숙하지 못했는지 책망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난 이만큼의 위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들만큼 고만고만했던 청춘은,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숙해질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솔직히 그 기회를 부러워하진 않겠지만..) 더욱이, 비슷한 환경이라면 나는 아마 이만큼 버티고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지구 어딘가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이런 비슷한 가정속에서 고민하며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이 책의 여울이만큼 조금 더 지혜롭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나는, '사회는 언제까지고 너희들의 환경을 측은해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이라고 밖에, 배부른 소리밖에 해줄 수 없지만, 그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이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일전에, 아는 초등졸업생 에게 여기 <불량가족 레시피>에서도 언급된 <홈리스 중학생> 을 선물해준 적이 있다. 이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대신 이 책을 선물해주었을 것이다. <홈리스 중학생>도 권장도서라 하니 좋은 책이겠지만, 이 책을 덮은 시점에선 조금의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아마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깐 그것은, '위태로운 가족안에서 타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법' 을 만나는 것은.. 그 가족이 챙겨야 할일 일 것이다. 그 가족이 꼭 이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그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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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터 1 : 식이조절 편 - 건강한 생활을 위한 본격 다이어트 웹툰 다이어터 1
네온비 지음, 캐러멜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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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이라는 기준의 변천사는 곧 그 시대에 걸맞는 이상적인 여성의 변천사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고도비만인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상처럼 여겨졌던 아주 고대시절의 유물들을 보면 지금과는 다른 기준을 조금 짐작해 볼 수 있다. 농경사회, 사냥과 채집을 하는 옛날에는 다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을 추앙했지만, 점차 한 가정에서 필요한 자식의 수가 줄어들고 힘으로 많은것을 해결했던 산업구조가 변화함으로써 여성들은 자기 만족과 더불어 남성들이 원하는 '시각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날씬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아주 옛날에도 미인의 기준에 날씬한 몸매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풍만한 몸매가 지금처럼 무시되고 힐난받는 시절까지는 아니었다는 기준에서 한 이야기다) 어쨌든, 의학의 발달과 미적 기준의 변화로 인해 날씬한-균형잡힌 몸매가 대세인 요즘, 이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균형잡힌 몸매를 가져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으레 '다이어트' 라는 과정이 붙기 마련이다.

 

사실 균형잡힌 몸매란 결국 이상적인 몸매다. 그런데 그런 균형잡힌 몸매를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이야 부지런하면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쉽단 얘긴 아니다;) 보통은 살을 빼야 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살-지방이라는 것은 현대의 식습관을 인위적으로 절제하지 않으면 결국 쌓일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의학의 발달로 겉으로만 날씬한 몸매가 무조건 좋은게 아니라 체지방과 근육이 적절한 비율을 맞추는 것이 필요함에 따라 식습관 조절과 운동의 균형도 필수덕목이 되었다.

 

늘 다이어트를 끼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비애다. 채소류나 가공되지 않은 고기등을 접했던 예전과 달리, 늘상 가공된 식품의 홍수에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니, 어쩌면 불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런 살들이 여러 성인병을 유발하기도 한다니, 우리는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풍요로운 시대가 갖는 단점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이어트 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중 하나인 식욕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고달픈 문제이다. 특히 거리에 넘치는 각종 고칼로리 식품과 더불어, 포화상태가 되다시피한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서 식욕을 억제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결국 이제는 시대가 원하고, 자신이 원하고, 건강이 원하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다이어터>라는 만화는 그 중에서 하나이다. 차고넘치는 자기계발서 마냥 차고넘치는 다이어트 방법중에서도 이 만화는..... 일단 재밌다. 그것도 꽤.

 

 

1. 만화적 재미를 읽지 않기

 

살이 찌는 속도와 살이 빠지는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찌는 것은 소리없이 편하고 또 즐겁다. 먹고싶은 음식을 먹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결과가 나오니깐. 하지만 빼는 것은 어떤가. 먹고싶은 욕구를 참고, 또 힘들게 운동을 해야한다. 그러니 살을 빼는게 즐거울리 없다.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다이어트 방법들도 효과적이라고 선전하지만 재밌다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이 <다이어터> 만화가 그 다이어트를 마냥 재밌게 해줄 순 없다. 결국 우리의 다이어트는 만화책을 덮었을 때 시작되는 거니깐. 다만, 일단 재밌게 두뇌-워밍업 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이어트를 주제로 하지만, 결국 만화적인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에 대해 알려주지만 재미를 잃지않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 다른 것들보다 비교적 쉽게 다이어트 상식들을 접할 수 있다.

 

모든 다이어터 들의 비슷할... 모습

 

우선 우리는 수지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늘 내일 시작 하겠다는 다짐, 이것만 먹고 내일 하겠다는 다짐, 대부분은 그렇게 다이어트를 오늘이 아닌 내일로 미룬다. 물론 모두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먹으리란 것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그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말이다. 어찌됐건, 주인공인 수지가 수많은 음식들의 유혹에 굴복하며 다이어트를 미루고, 그럼에도 살을 빼고싶다는 욕구는 공통인지라 현혹될 수 밖에 없는 각종 광고에 의해 다이어트에 돈을 쏟아붓는 것도 목격할 수 있다. 수지의 모습이, 경중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 많은 다이어터 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수지와 찬희의 만남

 

 

그런 수지 앞에 찬희 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헬스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신을 거둬주고(?)있는 헬스장 사장이자 트레이너 에게 많은 불만이 쌓인 상태다. 그 찬희가, 사장이 자리를 비운사이 작정하고 수지에게 접근해서 `살을 빼주겠다`라는 명목으로 돈을 가로챈다. 하지만 결국 얼마안가서 찬희는 붙잡히고, 재기를 노리는 찬희는 다시한번 수지에게 접근하여 이번엔 진짜 살을 빼주기로 하고, 그녀를 코치하기 시작한다. 다이어트를 통해 날씬한 몸매가 되길 원하는 수지, 그 수지의 다이어트 감량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아 유명 트레이너가 되길 꿈꾸는 찬희, 상부상조, 윈-윈 하는 다이어트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단행본에만 있을 화실 후기

 

이런 스토리라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만화는 다이어트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만화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 아무리 다이어트에 대한 상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그것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보통의 다이어터 들의 일면을 보여주며 시작해서, 멘토와 같은 찬희를 만나 동거동락하며 다이어트를 하게되는 과정에서 울고 웃는 수지를 보며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그녀를 응원하게 되고, 또 우리가 어떻게 다이어트 해야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

 

 

 

2. 과학적 유익함을 잃지 않기

 

 

 

 

물론 재미있는 스토리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다이어트와 너무 동떨어져있으면 안될 것이다. 다이어터가 유익한 이유는 재밌는 스토리 속에서 다이어트의 기본이 되는 상식들과 더불어,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근거까지 만화적으로 잘 풀었단 것이다. 특히 근육과 지방의 관계를 의인화 함으로써 외워야만 하는 다이어트 상식 대신 그 원리를 공부하게 된다. 그로인해 왜 다이어트를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손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겉으로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속까지 알게됨으로써 다이어트 방법 뿐만 아니라 지식과 원리까지 습득하게 되는 것. 그뿐만 아니라 수지의 회사에 있는 부장과 벌어지는 에피소드 등으로 인해 잘못된 다이어트 습관들이나 지식들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각종 다이어트 지식들을 섭렵하게 된다.

 

 

만화의 특성상 휙 넘겨버릴 수 있는 정보들을 위해, 각 파트뒤에 나오는 상세설명

 

 

 

3. 이어서 하기!

 

 <다이어터>1권은 본격적으로 수지가 운동을 하게되면서 끝이 난다. 정확히 보면, 운동을 하면서 끝이 나는게 아닌, 찬희가 없는 사이에 폭식을 해버린 수지를 다시 일으켜 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말이다. 식이조절편인 1편이 끝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다이어트는 이 책을 덮고 서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만화)를 읽음으로써 '제대로' 알고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실 효과적인 다이어트 법이야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재밌고' 효과적으로 그려낸 게 어디 흔할까 싶다.

 

각 음식에 맞는 핑계를 만들어가며 섭취중인 수지

 

물론 이 책이 전문적으로 완벽한지는 모르겠다. 전문가가 아니니깐. 하지만 적어도 일반인에게 필요한 전문적 지식은 거의 다 녹아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얻긴 하지만, 특수한 상황은 거기에 맞게 필요한 것들을 더 스스로 알아봐야 할 때가 있기도 함을 잊지는 말아야 겠다.

 

생활패턴이 불규칙한 나는 두어달전 결국 운동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결국 야외에서 운동하는 것은 여러모로 더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는 이 만화의 조언이 많은 역할을 했다. 사실 난 아직 제대로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떨땐 채소값이 너무 비싸고, 어떨땐 그렇게 만들어먹는게 너무 귀찮기도 하며, 일하다보면 규칙적이거나 혹은 음식을 가려먹거나 골라먹기 힘들때가 많다. (사람은 참 버라이어티한 핑계를 만들 수 있음을 새삼 느낀다) 어쨌든 그럼에도, 한번에 질릴때까지 먹는 과자를 1일 권장량에 따라 먹으려고 노력한다든지, 저칼로리 식품의 환상을 버렸다든지 하는 사소한 것부터 조금씩 습관이 들기 시작했다.

 

 

 

저칼로리 식품의 불편한 진실 

 

 

(어쩌다보니 세번째 언급하는데;;)결국 진짜 다이어트는 이 책을 덮으면서 시작되겠지만, 이 만화를 읽으면서 상승한 다이어트에 대한 욕구와, 즐겁게 습득한 깨알같은 상식과 정보들은 여전히, 수많은 다이어터들에게 든든한 멘토가 되어줄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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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아는것 없이 시작했다가, 이제서야 평가단이란 감투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본다고 생각했더니,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될것이다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운이 좋아 신간평가단 9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예술/대중문화] 분야라는, 사실 어느정도 관련이야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해서 말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책들을 만나면서 정말 좋은 책들도 많이 만났고, 평가단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법한 책들도 만났다. 어디든 일장 일단이 있는 것일까, 내게 그런 양끝 지점에 있는 책들을 만나면서, 여러가지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비교적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분야에 대해서는 더 심도있는 성찰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새로운 발견을 해볼수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사진철학의 풍경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연히 내겐 가장 좋은 책이었다. 많은 관련이 있진 않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말로 진지하고 진정성 있는 작가의 자세가 좋았다. 문체 등도 읽기 편했음은 물론, 저자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애정, 그리고 열정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찍어야 할지는 제쳐두고, 이런 마음이면 '행복한'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글도, 저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좋았던 책을 골라보자면, 

 <본격 시사인 만화>  개인적으로는 굽시니스트를 처음 만나게 해준 작품이자, 신간평가단 활동에 처음 받았던 책이다. 촌철살인 같은 풍자와 해학이 돋보였으며, 내가 생각보다 정치에 아는게 없구나 라는 걸 느끼게 해준 책이다. 즐거우면서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지만, 일단은 가려운 곳을 제대로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라는데 의미가 있겠다. 아주 재치있고 센스있는 만화기에 보기 어렵지 않았지만, 나의 정치적 견해가 더 충만했다면 더 많이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아 남았던 책이다.

    

 <옛 그림보면 옛 생각난다> 서양 미술만 주로 봐오고, 한국, 동양 그림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워 졌던 책이다. 저자의 맛깔스런 해석과 글이 그림에다 풍미를 더해주었다. 서양이 아닌, 동양의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만들어준 책이다. 옛 그림에서 현재까지 꿰뚫는 저자의 날카로움과 더불어 사람 그 자체에 대해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솔직히 처음엔 제본스타일도 낯선 데다가, 생소한 분야라서 힘들게 읽다가 중반을 지나면서 제대로 흥미를 붙여가며 읽은 책이다.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해 흥미를 트이게 해준 책이다. 그저 실용적인 설계로 알거나, 혹은 건축, 설치예술은 많이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다. 그의 열정도 좋았고, 그의 작품도 좋았다.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 이번 평가단을 하면서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지식을 쌓고 (사실 지식이라기 보단 눈을 뜨게해줬다는게 정확하겠지만) 관심을 갖게 해준 두번째 책이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 또한 선조들의 지혜와 한국건축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해준게 사실이지만, 일단 한국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볼때 이 두책이 가장 컸다) 이런 그림을 그동안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게 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민화들이었다.

  

 <사유속의 영화> 굉장히 영양가 있고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마음껏 읽지 못한 책이다. 읽기도 그렇고, 리뷰도 가장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책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게 적은 듯한 기분이었다.) 조만간 꼭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진중하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러면 생각하고 배울 것들이 많을 것 이란 확신이 든다.

  이 외에도, 각각의 책들이 모두 각각의 가치와 가르침을 주었지만, 규격상 이렇게 남긴다..거의 반의 확률로 희망하던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평가단 활동이 반을 지나고 나서야, 그러니깐 평가단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평가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태도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과의 만남을 통한 배움 외에도 신간평가단이라는 직책(이라고 하기엔 우습지만)이 내게 주는 가르침과 의미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예술, 문화 분야를 여가활동이나 취미로 대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가까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면에 직업적으로 다른 직업에 종사함에도 매니아 성향을 갖고,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정도만큼 평가할 위치에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사실 중반 정도까지의 나는 그런 애매한 위치,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있는 나의 위치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돌아보면 나는 항상, 완벽하게 전문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런식으로 느끼고 적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헌데 또 반면에, 몰라서 모르는 대로 적으면, 내가 이렇게 평가해도 괜찮은 책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고보니 정말 어정쩡한 평가들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내가 평가단에서 작성한 리뷰들이 (본의 아니게) 책의 가치들을 절하시키거나, 혹은 지나치게 미화시키진 않았었나도 돌아보게 된다..나의 리뷰가 어떤 역할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분한 많은 것들을 배워간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리뷰 마감을 맞추지 못한 전과가 있는 이유와 더불어, 내 스스로 내린, 평가단에 대한 나의 자격과 자체평가 결과를 고려해본 바 일단 이번 10기 평가단은 신청해보지도 않았지만, 다음번엔 좀 더 내 스스로가 만족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는 좀 더 나은 능력과, 나은 태도로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자리를 빌어, 책의 선정부터, 리뷰 작성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평가단을 위한 안내사항들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공지하고 알려주었던 담장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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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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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물이 흐르는 강위, 그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나룻배 한척에 올라탔다. 그 작은 공간에 수많은 타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누구도 없었다. 인상좋은 사공만이 한가로이 노를 저을 뿐이었다. 강의 한쪽편에 솟은 높고 단단한 절벽을 바라봤다. 높이도 가늠되지 않을만큼 높다란 그것은,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오를 수도 없을 것 같이 생겼다. 군데군데 밟아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것들이 툭툭 튀어나와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세상 그 무엇이 부딪혀도 저 돌들을 깨뜨리거나 올라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체념하여 반대편을 바라봤다. 무성한 숲이 있었다. 촘촘한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이 마치 다른 세상과 연결된 균열처럼 보였다. 그 나무들도, 잎들도 끊임없이 살랑거렸다.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흔들렸다.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기는 커녕,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통과하는 이 작은 배는 때로는 단단한 절벽에 다가서는 것 같더니, 금새 반대편 숲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사공은 술에 취한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절벽에 부딪힐 것 같은 두려움도, 나무 사이의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잊고, 어느샌가 나도 그 리듬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는 살아낼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 라고,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 강신주는 이야기 한다. '이 책 자체가 완벽하게 강신주가 바라보는 제스처로 시와 철학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심증으로 의심하기엔 이르다. 그저 다시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그동안 내게 철학은 너무나 먼, 억갑절의 안개 자욱한 산과 같아서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시는 길가에 소담하게 핀, 종종 만날 수 있는 꽃과 같아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도 이 책은 온기는 너무 따뜻하고, 또 포근했다.

이성복의 시와 라캉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각인된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을 씻어내기 위해 씨름하며, 곧 수평적 관계로의 나아가려는 시도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서로가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경계를 넘어가고, 극복하려는 사랑이란 것을, 그래서 그 길이 사랑이 나아갈 길임을 인지했다. 타인과의 관계, 그 사이에서 선택한, 혹은 선택받은 사랑을 시작으로, 나는 무수하게 다양한, 삶의 표면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와 세계의 모순과 위험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낡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했다. 어떤때는 타인과 '타인의 타인' 즉, 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며, 나에 대해 떨어져보려고 애썼다. 이 차이들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 생각해보았고, 선택하는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 너,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았고, 진정한 자유는 어떤 인식과 행동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았다. 나중의 생각이 먼저 한 생각을 덮어버리지 않게 애써야 했다. 그것이 곧,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었음을 모르고서 말이다.  

글자를 인지하는 시각의 활동은, 뇌로부터 사고(思考)를 시작하게 하고선 이내 그 소임을 다했다. 그 뇌에서 시작된 사고는 곧, 혈관을 타고 심장을 돌며, 감상에 젖게 하고, 온몸의 기관을 돌며 시각으로 점철되어, 상대적으로 미뤄뒀던 나의 모든 감각들의 기억을 다시 찾기위해 애썼다. 발끝으로 내려온 그 모든 감각은,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그것을 함께 딛고 있는 무수히 많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을 다시 바라보려 했고, 어쩌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또 누군가를 떠올리고, 누군가를 지웠다. 그리고 그 타인과 내가 함께 공존하는 이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내가 이 책, 이 세계에 어디부터 들이밀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스포츠 종목처럼 발끝부터 들이밀었는지, 가슴부터 들이밀었는지, 머리부터 들이밀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부터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때때로 머리가 이끄는 대로 향했고, 때로는 그저 발이 이끄는 쪽으로 향했다. 때로는 가슴이 뛰는 곳으로 향했다. 때로는 그것들이 불협화음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도 했고, 종종 그것들이 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자의든 타의든 삶의 어느 순간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있던 철학과 시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들에게서 나는, 열매가 떨어지길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게 열려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이 언제 내게 떨어질 것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 기다리려 해본적도 없거니와, 그 나무에 기어오르려 했던 적도 없다. 그것이 기억에라도 남아있었다면, 막 떨어진 열매라도 만날 수 있었으련만, 나는 그것을 너무 일찌감치 기억에서 지우고, 포기하고 사회와 자본이 부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내게 기다리고 인내하고, 성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쉴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속으로 나를 밀어버렸다. 실은, 그 움직임 또한 나를 등떠민 힘에 의해서였는지, 내 발이 먼저 움직였던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

강신주는 그런 나를 끄집어 내서, 잠시나마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러나 안에서는 눈물겹고 위험천만한 소용돌이가 휘몰아 칠지도 모를 강 한복판, 작은 배 위에 나를 앉혀준 것이다. 때로는 단단한 절벽의 모습을 한 철학에도 가까이 가보고, 때로는 바람이 굽이굽이 떠도는 시의 숲으로. 내가 배의 구불구불한 움직임에 맞춰 철학과 시를 잠깐씩 만나며 춤추기 시작하자, 어느새 배 위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내가 이 배를 저어가야 할지,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해야 할지, 절벽을 타야할지, 숲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은,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있는 감수성이라고 말한 그는,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을 이야기 하며, 서럽지만 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는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서럽지만,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내 길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바깥으로 향해서, 세계로 들어가고 타인으로 들어가고, 또 타인으로.. 그렇게 '타인의 타인'까지 만나고 오면 그것이 곧, 자신을 거쳐나오는 것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 살아낼 수 없다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가리킨 방향과 또 다른, 내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가르침을 흠씬 뒤집어 쓴 셈이다. 그가 시인과 철학자를 빌렸듯이, 나도 잠깐 그를 빌렸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나쁜 나는 금새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나아가고, 혹 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다보면 또 어느새 그가 말한 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나아간 만큼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언제라도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반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등떠밀 것이다. 내 길을, 내 방향대로 가라고. 다시금 앞으로 향할때마다 분명,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한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을 덮고, 적잖은 시간이 흐른 후 불현듯, 집중에 이르는 길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인들의 시를 읽고, 철학자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한데 엮은 강신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나의 내면으로 들어갔던것으로 착각했다. 사랑을 이야기 하고, 차이를 이야기 하고, 타인을 이야기 하고, 사회를 이야기하고, 감각을 이야기 하고, 자유를 이야기 했던, 그것들은 모두 나의 내면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타인의 타인'인 나 또한 세계를 향한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것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강신주는 철학이,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채워야만 하는 빈 그릇이자, 미래에 읽힐 숙명을 타고난 글이라고 말 한다. 고도가 높을수록, 즉 높은 곳일 수록 산소는 희박하다. 그래서 삶의 높은 곳에서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더디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읽힌다는 숙명이 결국은, 지금이 아닌 앞으로를 움직이 듯, 시와 철학은 앞으로의 삶, 나아가 앞으로의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어쩌면 가장 맑고 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시와 철학 사이에서 길을 좇던 강신주의 글을 통해 나는, 세계와 타인, 나 사이에 놓인 험준한 길들을 더듬어본다. 죽음이 삶을 인식하게 하듯, 벽을 밀어내는 힘이 곧 나를 일정하게 밀어내듯, 상대적인 것이 그 반대편의 본질을 깨닫게 하듯,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은 곧 나를 향해 뛰어드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베르테르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뜻을 넌지시 밝힌 그의 말처럼, 시인과 철학자를 멘토로 삼고 따라하려 하거나, 시를 외우거나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의 말처럼, 그는 어쩌면 이 책 또한 흘려버리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눈 쌓인 길 위에, 철학자와 시인이 앞서 걸어간 발자취 사이를, 우리는 일정하게 따라나설 것이 분명하다. (저자인 강신주 또한 이토록 많은 시인과 시집, 철학자와 철학서를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언젠가, 우리가 준비되어 있든 아니든, 눈보라가 그들의 자욱을 지울 것이고, 우리는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제스처를,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만 할 것이고, 또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 사이의 길인 동시에,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관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은, 그 길위에 꽃 한송이 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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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11-0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과 내가 공존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딱 한문장으로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요약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기다리는 자 2011-11-07 01:37   좋아요 0 | URL
횡설수설 적어놓은 제가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집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