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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1880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문학사 전체를 통해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고 봐요. 서사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게 교육적인 책이라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 씨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라고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1899년 출판된 『부활』에서 재판과 유형지의 모습은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를 배제하는 통찰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을 상호일체감 속에서 풍요롭게 호흡하고 있었다”(『러시아의 문학과 혁명』71-73p)고 이케타 사다요시는 말한다. 《죄와 벌》, 《백치》,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에 자신의 유형지 경험을 담았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작가인 톨스토이 역시 유형지가 서사를 퍼 올릴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원천임에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남편 없는 하녀의 딸”로 축사에서 태어난 마슬로바의 애칭들은 태생과 삶을 시사하고 있다. 지주인 마님들은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고 이 아이를 구원받은 아이라는 뜻의 ‘스파숀나야’라고 불렀다. 반은 하녀, 반은 양딸이 된 그녀는 낮춰 부르는 카티카도, 사랑스럽게 부르는 카텐카도 아닌 그 중간인 카튜샤로 불렸다. 이 이름들에서 어떤 자의식이 생겨날지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골 영지에 잠시 들른 귀족 청년이 하녀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리는 이야기는 흔한 사건이었던 듯하다.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푸쉬킨, 체호프, 부닌 등 많은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 지주 마님들의 조카 네흘류도프와 사랑하고 버림받은 마슬로바는 이 사건으로 삶이 나락에 빠진다. 그녀는 그 집을 나와 다른 주인들을 거치고 결국은 유곽을 향한다. “천한 하녀라는 굴욕적 처지에서 달라붙는 남자들과 은밀하고 일시적인 간음을 할지, 아니면 생계가 보장되고 정당한 처지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벌이가 좋은 일상적인 간음을 할지”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첫 남자와 다른 모든 남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불행을 본다.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재판정에서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만나고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낀다. 재판의 부조리를 목격한 그는 그녀의 무죄 판결과 석방을 위해 힘을 쓴다.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유형지를 향하는 그녀를 따라 간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속죄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스스로에게서 다른 모순, 죄악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을 해결하기로 생각은 확장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차츰 그의 시선은 타인을 향한다. 정직한 자기성찰이 불러온 파장이다. 마치 둑의 한 부분이 무너지자 그 주변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삶의 전 영역에서 전복과 회복이 이루어진다. 신념을 되찾고 삶이 변화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 과정이 너무 쉽게 보여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과하는 것조차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자신의 깊은 내면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을 마주하고 잘못을 정직하게 바로잡는 것은 삶을 전적으로 뒤바꿀 동력이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정의라는 과제의 실현에 있어 둘 사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현재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 개혁에 참여하려 한다면 “비록 도덕적 완성에 직접 반하는 수단이라도 모든 수단을 써야 한다는 위험한 유혹을 믿어서는 안 된다. … 그 목적이 선의 원리에 등을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허위이다.”(『인생이란 무엇인가』톨스토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그가 한 자기 개혁 중 하나가 자신의 영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젊은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품었던 열정을 깡그리 잊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토지는 사유의 대산이 될 수 없고, 물이나 공기나 햇빛처럼 사고 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모든 혜택을 인간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는 급기야 자신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개혁은 소작인들의 삶을 목격하는 충격을 통과하면서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영지와 관련된 결정을 하자 모든 것이 단순해져서 놀란다. 우리는 복잡하고 망설여지던 일들을 한 단계 실행하자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삶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머뭇거림과 실천이 없기 때문 아닐까?
유형지를 향한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들의 비참한 행렬을 본다. 그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열차에서 농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네흘류도프에게서 자유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마슬로바 역시 네흘류도프의 도움으로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여정과 유형지에서의 생활 동안 그녀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들에게 동화된다. 사면이 된 후에 유형지를 떠나 도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제목 ‘부활(Воскресение)’은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뜻한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남을 의미한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유형지를 향하는 여정을 통과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부활』2, 338p)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의 철학과 실천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이케타 사다요시가 말했듯 작가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육체가 포함된 온전한 인간 존재로서 살아가라, 고뇌하고 고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