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글을 먼저 읽은 후, 직접 저자의 강의를 듣게 될 때, 글에서 받았던 이미지와 달리 낯설 때가 있다. 그러다가 강의 중에 글에서 끌렸던 생각의 방향이나 열정을 느끼게 되면 그 강사와 저자는 한 사람이 된다. 새삼 글쓰기의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강사의 책 2권을 읽고 2회에 걸친 강의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좋았다.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는 우리 옛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서양화 감상법으로 우리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우리 그림에서 색, , , 형상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선 그림은 사의화(寫意畵). “지식인의 호사스러운 취미의 그림이 아니라 묘사 대상에 자기의 정신세계를 담은, 즉 정신에 무게를 둔 그림이다.”(9p,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화가 개인의 삶과 사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마음을 움직여서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따라 거닐다가, 그의 세상에 말을 걸고, 인생을 만날 것을 권한다.

 

작가는 더 보고 싶은 그림에서 그림을 더 깊이 있게, 확장시켜 본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나의 눈으로 보는 감상을 소개한다. 내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방법은 '나의 눈으로 보기'이다. 감상자의 사상과 철학, 세상을 보는 시선이 그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저자는 독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가 수록한 그림들과 감상을 통해 독서를 통해 인문적 소양을 높이는 것이 중요함을 전달하고 있다.

실제로 그림을 보는 방법은, 텍스트를 읽고 작가를 읽고 나를 읽는, 독서의 단계와 통한다. 저자와 함께 그림을 보다보면, 그림의 서사를 읽고, 화가의 시대와 메시지를 읽고, 감상하고 있는 나의 시대와 나를 불러오게 된다.

 

이 책들은 두 개의 그림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조선의 그림과 서양화를 비교하는 형식이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시선의 미학을 보다에서는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를 비교한다. 흘러가는 물과 고여 있는 물, 멀고 가까운 거리의 차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 한다. 관조하는 시선, 어지러운 삶의 문제들도 다 잊은 듯한 고사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게 된다.

 

윤두서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 책들에서도 윤두서의 작품들에 많은 시간 머물러 있었다.

윤두서 <진관타려도>1715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는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를 소개하고 있다.

진단타려고사의 내용은

희이(希夷) 진단은 중국의 격동기였던 당나라 말에서 송나라 초까지 살았던 학자다. 당시는 당나라가 주전충에게 멸망한 수, 자고 일어나면 정권이 뒤바뀌는 510국이 난립하던 시기였다. 관상학과 수상학에 조예가 깊던 진단은 새 왕이 나타날 때마다 군주상이 아니라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흰 나귀를 타고 길을 가던 중에 한 나그네에게서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진단은 후주의 장군 출신 조광윤이 왕위에 오를 것과 그로 인해 태평성대가 열릴 것을 이미 예언한 적이 있었기에, 자기의 예감이 맞았다고 크게 기뻐하다가 나귀에서 떨어진 것이다.”(158p,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실제로 조광윤은 송을 세우고, 그의 통치 시대는 한 나라 이후로 가장 평화로웠다고 평가받는다. 진단 선생은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은둔한다. 윤두서는 이 고사를 읽고 <진단타려도>를 그린다.

윤두서 <자화상>18세기초


숙종의 환국 정치로, 당쟁이 극심했던 난세에, 입신양명의 길이 막힌 남인이었던 윤두서는 고사의 유머러스한 장면을 그림으로 자신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나귀에서 큰 대자로 떨어진 진단의 얼굴은 윤두서의 얼굴이다. 놀란 듯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그가 그린 <자화상>과는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염원을 해학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화상>에서도 화면을 꽉 채우는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과 눈썹에서 엄격함이나 진취적인 성품보다는 따뜻한 눈빛을 본다. 이 전에 <돌깨기><밭갈기>와 같은 서민들의 고단한 노동을 그린 그의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두서 <돌깨기> 18세기 초

윤두서 <나물캐기>17세기 말?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 윤두서의 <나물캐기>를 통해 춘궁기 서민들의 배고프고 고단한 삶과 여인들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더 보고 싶은 그림에서 이 그림을 더 깊게 감상하고 있다. 그는 <나물캐기>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교한다. 그림을 감상하다 문학을, 문학을 읽다가 그림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나 역시 에밀 졸라의 대지를 읽으면서 밀레의 그림을 떠올렸다. 동양 문화권에는 이미 서화동원(書畫洞源)의식이 있었다. “그림과 글은 삶의 근원을 묻는 언어적 역할을 하는 유사점이 있다.”(145p) 가파른 비탈길에서 식용 나물을 찾고 있는 여인들의 야윈 모습과 구부리고 허리를 펴는 힘없는 동작에서 굶주림의 시기를 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윤두서는 비탈을 가파르게 함으로 이 곳 험준한 지역까지 먹을거리를 찾아올라올 만큼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땅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흰 천을 쓴 여인은 이삭 줍는 여인들을 연상시킨다. 수확의 시기에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식량을 삼아야했던 가난한 여인들의 고단하고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비참함은 이 여인들의 뭉그러진 손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손이 기형이 되도록 일하더라도 그 노동이 자신의 소유의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남의 땅에서 손이 터지도록 한 일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도 모자란다. 17세기 말 조선이나 19세기 프랑스의 가난한 여인들의 삶은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18세기

윤두서의 따뜻한 시선은 아들인 윤덕희에게도 흘러간 듯하다. 저자는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을 소개한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수록되어 있는 프라고나르의 그림을 비교한다. 조선시대 그림 중 저자가 본 유일한 여성의 독서를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양반 여성을 위한 교훈서에는 여성의 할 일로 여공(女工)’치산(治産)’을 말하는데, ‘여공은 가사 일을 말하고 치산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을 가리킨다. 가사일과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며 살림을 일구는 것이 여성의 할 일이었다. 책을 읽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했던 이덕무의 부인이 바느질로 하루하루 끼니를 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구나 진보지식인이었던 이덕무조차 언문소설을 읽는 여성들에 대해 경계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윤덕희가 살았던 조선 양반가 여성의 이런 상황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여인을 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이 책은 여인의 행실을 써놓은 여사서』 『여범첩록』 『여계』 『여논어와 같은 종류가 아니라, 언문 소설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평상위에 한가로이 앉아 몰두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감동을 준다. 여인이 살고 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녹우당 어디쯤이었는지…, 다시 가보고 싶다.

 

두 책에 수록하고 감상한 그림들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본 화가들의 시선이 있다. 그림을 보는 저자의 시선 역시 사람을 향하고 있다. 그 방향성 때문에 글을 읽는 나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그 그림들을 지나 저편의 사람과 삶을 향해 간다. 그림을 보는 것은 사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그림 속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다른 감상자들과 교감하고, 상황과 나를 잇는 시공을 초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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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10 08:4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님도 축하드려요
추석명절 잘 보내시고 담주에 봬요~~

책읽는나무 2022-09-13 1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관왕!!
그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 중 한 분이시니까요^^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2-09-13 14: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거품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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