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처럼 이곳으로서는 드물게 폭우가 쏟아지고, 코를 골며 잠든 브리스의 옆에서 홀로 긴 시간 뒤척이는 새벽이면 나는 오래전 비아리츠에서 내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기 위해 언니와 식당으로 되돌아갔던 일을 떠올린다. 다행히도 화장실의 세면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던 반지를 찾은 후 우리가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지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에 관심조차 없는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싶어진다.
- P39

지호와 나는 어려운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일상을 벗어나서, 우리가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부부였던 시절을 알고 있는 당신들과 함께 지내면 우리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예전같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겠죠. 나는 당신 부부와 함께 보낸 그 며칠 내내 나와 지호의 관계에 골몰했어요. 그런 까닭에 그 긴 시간 동안 쌓인 침묵의 벽을 깨고 당신이 나를 만나자고 했을 때는 당신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날 만한 사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한 번도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배낭여행을 하던 중 당신 부부를 처음 만나 함께 지냈던 시간은 고작 사흘, 그로부터 몇 년 후 지호와함께 다시 찾은 베를린에서 체류했던 시간은 오 년, 고작 오 년 사흘을 함께 보냈을 뿐인 우리는 서로와의 재회에서 무슨 기적을 바랐던 것일까요? 우리가 감당하며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면 오 년도사흘도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인 시간일 뿐인데요.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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