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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ㅣ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평점 :
독립출판 책이다. 독립출판 5년간 베스트셀러, 스태디셀러라는 말에 주저 없이 구입했다.
노래가사처럼 쉽게 읽히는 시(詩)들이었다. 읽다보면 그렇게 쉽게 쓰여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명료한 말들 앞에서 더 자주 복잡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쓰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덜어내고 수많은 생각의 층위들을 벗겨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독백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눈이 머문 詩들.
끝이라는 것이 단번에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뒤돌아볼 미련도 없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끝을 잡고 늘어졌다고, 결국 끝이 아닌 끄으으으읕만이 남겨졌다는 표현에 나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렇지! ‘이제부터 끝이야‘ 하고 뒤돌아선다고,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지. 한 번에 매듭을 지을 수는 없지. 수많은 밤을 뒤척이고 낯익은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매듭을 짓다가 풀고 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사이가 한 번에 끝나? 헤어지고 나서도 혼자 오랜 시간이별을 할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이건, 이별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이들로부터 거부당한다 해도 그것이 온 세상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것은 아니란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은 한 점에 불과하니까.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집중하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발견한 사막을 당당히 외치며 나아가라고 한다.
「관계라는 사막에서」 이건, ‘나 지금 혼자야?’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바쁘게 살다가 허기보다는 속이 더부룩한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아는 때가 있다. 출발점에서 멀어진다고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젊음의 때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채 내달리는 것에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돌아가는 길」 이건, ‘나 제대로 가고 있어?’ 라고 묻고 있는 당신을 위해!
누군가 자꾸만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하루를 밟아보라고 한다. 그 하루에 어떤 표정들이 들어차 있는지. 한숨은 몇 번이나 내쉬고, 푹 파묻은 고개는 몇 번이나 흔드는지. 그 하루를 밟고도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미워지는 사람이 있어 괴로운 당신을 위해!
전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시(詩)들 이다.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고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개인의 연애사나 청춘의 아픔을 담은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헤아린다. 등을 쓸어주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양손 가득 쥐고 달려온 사람들은 모르는 가을이 있다고 한다. 빈 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온 이들에게는.(「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나 그 연약한 사람들끼리 힘이 되어주기 위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려 보라고 그리고 꼭 안아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가난이 당신의 부유를 노려 볼 이유는 없다고... 우리는 그저 각자의 식사를 할 뿐이라고……. 반대로 당신의 부유에 내 가난을 조롱할 자격도 역시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속사가 붙여지며 시원한 감정의 폭로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벅차오르는 착각이 확신처럼 번져,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싶어질 때면 조용히 접시를 들고 일어서면 된다. 내 몫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각자의 식사」)
명쾌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시원하게 한판승을 거둔 것 같다. 저들이 달리고 있는 경주로 밖으로 탈주하는 기분! 이건, 나를 위하여!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진심이 담긴 시들로 작은 책을 채웠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앓고 난 뒤 그 병세를 알려주는 선배 같다고 해야 하나? 의사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마음을 앓은 흔적들이 있다. 감정에 침몰당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약하지만 심지 있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놓칠지 모를 것들에 대하여,
나는 놓쳤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놓쳐도 돼.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거야. 그게 우리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나온 시간에 나를 구겨놓고 사라질 것들을 찾아 헤매지 말라고…….
시들을 읽으며 ‘그래, 그래’ 하고 마음이 말했다.
“허름한 삶을 입은 것 같아도 대화를 나눌 때면
얼마나 근사한 태도와 건강한 미소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래희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