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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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인간, 동물, 식물, 밤, 땅거미, 고원, 증세, 분노, 두려움, 이론, 도구, 형벌 등 두꺼운 글씨로 쓰여진 이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가 만일 생명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살인은 그 메시지의 힘을 잃게 할 것이다. 탐욕적이고 파괴적이며 너무 많은 생명을 죽인 자들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당연시 여겨진다면 이 소설의 은유와 시적 언어들은 빛을 잃을 것이다. 반면, 두셰이코의 소외와 분노, 이상심리에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면, 그 많은 분량을 할애한 생명의 주어들이 그저 숲이라는 공간에 갇힌 소재로 전락할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작은 유충과 미생물도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이미 그 의도는 드러나고 있었고, 이 책에서는 훨씬 선명하다.

제목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란 시에서 가져왔다. 오래 전 C.S.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시가 인용되기도 하고 시집 번역이라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어서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때 읽었던 것을 지금 다시 읽는 것은 다른 작품을 읽는 행위이다.

‘블레이크의 시’가 날실로 놓이고 그 사이를 플롯을 담은 베틀 북이 오가며 씨실을 놓아 이야기를 직조하고 있다. 각 장의 첫머리에 ‘블레이크의 시’가 희미하게 부양하며 전개될 내용을 암시한다. 이 시 위로 사건들은 시간을 뛰어넘기도 하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선명한 패턴을 만들어 간다. 아니! 어쩌면, 폴란드의 국유림과 별들이 운행하는 천궁으로 직조된 천위에 ‘블레이크의 시’와 숲의 생명들이 수를 놓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려나? 인간들은 그 위에 얼룩을 남기고….

전직 교량 건설 엔지니어, 영어 교사였던 두셰이코는 폴란드의 국유림 근처 별장들을 관리하며 마을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타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사람들도 그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불편해 하지는 않는다. 숲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을 느끼며 고독을 즐긴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 실망, 소외 때문에 숲의 생명들에 더 애정을 갖는 것은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강화시키는 면은 있을 것이다.

사냥터에서 탐욕스럽게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과 그 뒤에 오고갔던 어두운 거래들이 연쇄 살인사건으로 드러나게 된다. 두셰이코는 그들의 죽음이 동물들의 복수라고 주장하고, 이로 인해 그는 더욱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 그녀는 함부로 생명을 파괴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분개한다.

자연을 그리는 시어의 환각(hallucination)과 심상을 그리는 중의어의 환상(illusion)은 진실을 희미하게 부상시켰다가 가라앉히곤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랐다. 사람이 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50p

이쯤에서 어떤 단서를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초반이었다. 자연을 그리는 언어가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이 환상이 진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가리고 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세심하고 애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힌트를 놓치게 된다.

「그곳에서는 오드라 강이 최면에라도 걸린 듯 계속해서 북쪽으로 물을 실어 나르는 광경을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다.」
120p

「우리는 고원을 가로질러 초원과 멋진 황야를 지나 마을을 향해 달렸다. 사방이 조금씩, 소심하게 녹색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연약하고 작은 새싹들이 뾰족한 머리를 땅 위로 내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앞으로 두어 달만 지나면, 저 작은 싹들이 초록빛 씨앗이 들어 있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빳빳하고 당당하고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리라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도로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데이지의 자그마한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쳐다보면서 하나하나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77p

묵묵히 쳐다보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엄격히 평가하는 데이지는 두셰이코 자신을 이입시킨 것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데이지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착시와 환각을 일으킨다.

두셰이코가 아니,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잠시 마을을 방문한 곤충학자 보로스가 말하고 있다.

「보로스의 손이 마술을 부리며 신비한 신호를 보내자 곤충과 유충, 그리고 조그만 알들이 모인 덩어리들이 나타났다. 그중 어느 것이 유용한지 물었더니 보로스가 격분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223p

보로스의 말은 마치 작가가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셰이코가 사냥꾼들에게 했었던 것처럼, 보로스의 격분을 빌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분노와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이고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인간이 끝도 없는 탐욕으로 움직이는 모든 생명에 총을 쏘아 대는 행위. 전리품처럼 동물의 사체를 전시하는 행위. 올가미를 놓아 동물들을 잔인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것, 생명 파괴 행위가 무시무시한 죽음으로 덮쳐 오리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분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두려움은 죄악을 중단하게 한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
294p

또 한번의 단서. 이중적인 메시지.
별은 어떤 진실을 가리킬 뿐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고통스럽고 별자리는 불행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바꾸려고 그녀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바꾸었을까?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을 ‘모던 스릴러‘로 규정했다고 한다. 만일 스릴러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모순의 덫에 걸려 그 생명을 잃을 것이라 생각된다.
생명을 위해 분노하던 주인공의 마음이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것은 이 소설이 윤리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황홀하기까지 한 문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는 최고의 짜임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게 한 작은 돌부리와 같은 장면이 있었다. 그냥 걷던 보폭과 리듬으로 걸어가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될 돌부리와 같은 스쳐간 상념!
죽어가는 생명에 가슴 아파하고 그 존재를 느끼고 숨쉬는 그녀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보로스의 존재는 내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도 실감케 했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산만하게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색을 방해하는지도 말이다. 또한 상대가 굳이 어떤 짜증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신경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그가 숲으로 떠날 때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고독을 축복했다. 대체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생활하며 수십 년을 함께 보내는 것일까?」
225p

그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하는 모습이다. 숲이나 들과 같은 오픈된 공간이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랫동안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그에게 있는 대비를 본다. 자연과의 친밀함과 사람과의 낯설음.

우리시대에 질문을 던진다.
반려동물 문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동거의 개념을 가져왔다. 애완이 아닌 반려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돌보는 일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이것이 반드시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을 증명하는 것일까? 우리는 ‘강아지가 제 입술을 핥았는데 무심코 닦은 것이 강아지에게 상처가 될까요?’(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하고 질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반려동물의 내적 상처를 걱정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의도적인 말과 행동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데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두셰이코의 분노는 이런 균형이 깨진 경도된 모습은 아닐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마음에서 낯선 징후를 읽게 되고 불안해졌다.

반려견과는 함께 살아도 노부모와는 함께 살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 이런 우리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불편하다.

“좋은 소설이란 그 외피가 스릴러이든 로맨스이든 상관없이 세상을 향해 지혜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 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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