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인생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들과 엄마들과 함께 하는 독서토론 모임때문에 오래 전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게 됐다. 아이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함께 읽는 날보다 이런 책 토론하는 날을 더 좋아한다. 밑줄 긋고 태그 해놓은 부분 위주로 빨리 읽고 논제를 작성하려다가 그럴 수가 없었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주제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특별한 아이는 욕망이고 보통아이는 현실이다. 여러분, 혹 알고 계신가. 이 욕망과 현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바로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그러나 아홉 살은 아직 인생의 조화를 터득할 나이는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기껏해야 우림이와 기종이를 맞바꿀 수 있다면 무척 편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201~202p


여민이의 내우외환이다.^^
친구 기종이는 여민이가 그림천재가 아닌 보통아이로 돌아와 주길 바라고, 우림이는 여민이에게 특별한 아이가 되길 요구한다.
이 문제는 이 소설에 흐르는 하나의 주제이다.

현실에 맞추어 욕망을 바꿀 것인가,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꿀 것인가?
주인공 여민이가 살았던 산동네 사람들 역시 이런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하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현실은 꿈을 바꾸도록 한다. 그 중 다수가 이런 선택을 한다. 가난, 중독, 질병, 상실이 일상인 이 산동네 사람들의 다수는. 12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취직하는 검은제비의 선택도 그랬을 것이다.


검은 제비는 그렇게 숲 속 우리들의 영토를 떠났다. 검은 제비가 공장에 취직한 다음부터 우리는 검은제비를 볼 수 없었다. 어쩌다 마주치기도 했지만, 검은제비는 이미 우리들 영토의 사람이 아니었다. 새까맸던 얼굴은 몹시 해쑥해졌고, 맑았던 눈빛은 흐리멍덩해졌다. 그런 모습은 매우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굴이 해쓱해지고 눈빛이 흐리멍덩해짐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검은제비의 달라진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팠었다.
181p


반대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욕망을 좇아 살았던 골방 철학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현실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꿈은 결국 허상과 망상이 되는 것.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욕망은 무한하다. 거지는 왕자가 되고 싶어 하고, 왕자는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왕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현실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어찌 되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는 오만과 착각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월감과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
이런 성격 파탄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현실에 맞춰 욕망을 바꾸거나,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203p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꿈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게 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 토굴할매처럼.

누구에게나 꿈을 꿀 자유와 권리는 있다. 하지만 현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는 욕망은 분열적인 삶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욕망은 황홀하고 현실은 누추하다면 그 간극을 좁혀야 한다.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결국 골방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되고, 고립되어 버린다. 삶은 더욱 누추해질 뿐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우림이가 보여주는 허영심이다. 9살이면 인생을 다 모를 나이여서 우림이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여민이는 당황스러워 한다. 하지만 우림이의 허영심이 여민이에게는 보인다. 여민이의 당황스러움은 우림이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직한 시선을 가진 여민이의 태도는 우림이의 허영심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킨다. 허영심은 자신도 알고 어쩌면 상대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현실을 외면하고 수치심을 감추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에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지 않을까?


인간은 험한 세상과 홀로 마주 서 있는 단독자일지도 모르고, 인생이란 주어졌으니 사는 어쩔 수 없는 외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이 모든 실존주의적 정의가 다 옳다손 치더라도, 과연 인생은 단지 죽음으로 가는 길목까지의 외롭고 허망한 여정일 뿐인가.
어차피 죽기 마련이라면, 사는 동안만큼은 사람답게 사는 편이 한결 낫다. 사람들이 서로 기대하고 믿고 사랑하고, 때로는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증오하고, 또 때로는 지지고 볶고 우당탕퉁탕 싸움박질도 하고 사는 광경에 어느 것 하나 부질없는 짓거리라곤 없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얼마나 강해지는지, 나는 우리 동네 외팔이 하상사의 경우를 보고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215p


두 사람. 욕망과 현실의 조화를 이룬 사람들이 여기 있다. 하상사와 기종이 누나. 그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좇았다면 이런 화합은 이룰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상사의 고물수레에 가난하고 낡아빠진 이삿짐을 싣고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희망을 암시한다. 그들 역시 지지고 볶고 실망하더라도 해피엔딩일 것이라는 행복한 느낌이다. 만나서 힘을 보태고 강해지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이므로….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보다는 욕망을 더 사랑한다. 대개의 경우, 욕망은 찬란하고 현실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찍하건 않건 사람은 어차피 현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으며, 욕망도 현실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현실은 우리를 속이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가 현실을 속이기 마련이다.
260p


아홉 살의 눈으로 본 욕망과 현실의 문제. 어떤 이에게는 현실이 그 욕망을 말라죽게 하는 사막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여민이의 숲처럼 금지된 것일 수도 있다. 현실과 욕망사이에 놓여 진 낮은 문턱을 넘어설 힘조차 가지지 못한 이가 있는가 하면, 금지된 것을 무시하고 가뿐하게 철조망을 넘는 사람도 있다.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여기에는 존재론, 인간의 욕망과 같은 범주에서 생각해볼 철학적 담론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주인공처럼 정직하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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