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폴 한센은 몬트리올 교도소의 ‘콘도’라는 감방에 수용된다. 함께 지내는 죄수의 이름은 패트릭 호턴. 살인과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진 바이커 갱단의 일원이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모습은 무례하지만 가끔씩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겁이 많다. 처음에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어갈수록 주인공이 왜 이 교도소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주인공은 전혀 이 장소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 말이다.

「갇혀 있으면 날이 길어지고, 밤이 느슨해지며, 시時가 늘어지면서 시간에 끈적끈적하고 약간 역한 질감이 생긴다. 저마다 빽빽한 진창 속에서 철벅대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자기 혐오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한걸음 한걸음 악착같이 발을 빼내고 옮겨야 한다. 감옥은 우리를 산 채로 묻었다. 형량이 가벼운 자는 뭐라도 바랄 수 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이미 공동 묘혈에 들어앉았다. 행여 운 좋게 가석방이 된다 해도, 그들은 잠시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갔다가 여기, 세상에서 배척당한 자들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들을 성姓으로 부르고 농장의 가축처럼 취급하는 이곳으로.」

그는 이 감방으로 오기까지의 삶을 회상한다. 그의 교도소의 일상과 회상이 평행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는 1955년 덴마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절대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혼 후 아버지 한센은 캐나다로 이주를 하는데 주인공은 아버지를 따라 퀘벡으로 간다. 거기서 아버지의 죽음 후 아헌트식으로 와서 ‘렉셀시오르’콘도의 관리인이 된다. 26년간 ….
주인공이 갇혀 있는 교도소는 그 아헌트식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렉셀시오르’는 68가구로 이루어진 콘도이다. 입주민은 모두 자가 소유자로서 수목과 화단이 잘 가꾸어진 정원, 소금으로 정화하고 따뜻하게 데운 물이 공급되는 23만 리터 용량의 수영장, 세차장이 구비된 얼룩 하나 없는 지하주차장, 스포츠실, 현관에 면해 있는 대기실과 접객실, ‘포룸’이라고 불리는 회의실, 스물 네 대의 감시카메라와 대형 승강기 세대를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의 노후화와 함께 늙어가는 입주자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도와주었다. 두 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104번의 계절을 겪었다.

그 거대한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돌봤던 과부들과 노인들이 그에게 각별했다고, 어떤 면에서 그들을 사랑했다고 깨닫는다.
그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위노나도 만났다. 그녀는 캐나다 인디언의 후손, 비행기 조종사이다. 그들은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지고 함께 부부로 산다.
함께 캐나다의 숲과 호수를 여행하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전임 입주자 대표가 죽고 새로운 대표가 세워지면서 빌라는 새로운 흐름 아래 놓이게 된다. 자본과 그 원리의 기계적 적용에 따른 비인간적인 모습. 불신이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고, 서로를 감시하며, 비생산적인 지출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는 총회에서 이러이러한 지출은 어떤 이유에서 발생했는지, 왜 그 공급업자를 선택했는지, 외주업체 청구서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설명을 해야 했다. 뉴스를 달궜던 아파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악영향은 이리도 빨리 퍼져갈수 있을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위노나와 반려견 누크와 함께 캐나다 숲을 비행하는 것이 이런 일로부터의 탈주였다. 부침 많고 서러운 일을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행복이 충전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위노나와 누크는 나를 너무 오래 갇혀 지낸 이 우주에서 이따금 빼내주었다. ……나무와 물, 땅과 동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그 공중 산책을 수 백년 동안 계속하라고 해도 나는 싫증 내지 않고 즐겼을 것 같다. 가없는 세상, 아름다움의 카탈로그가 무한히 펼쳐지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사는 기분이랄까. 하늘, 물, 숲 모든 것이 광대했다. 우리는 인터폰이 설치된 여섯층짜리 아파트, 아무도 물을 마실 수 없는 조그만 인공 호수가 딸린 공동주택에서 살겠다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야생의 삶이 우글댈 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우리는 인공 호수 곁에서 살아가고 산책하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기껏해야 디지털 출입보안장치 문자판에나 지문을 남길까. 」 226p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위노나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비인격적인 태도로 그만둘 것을 통보하는 입주자 대표에게 상해를 입힌다. 그는 재판을 받게 되고 이 형무소로 오게 된다. 감형을 위해 반성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주의 비인격적이 흐름 아래 적응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경험한 상실은 노인들의 죽음과 위노나의 죽음에 이르러 극단에 이른다. 세상이 뒤바뀌어도 누군가 함께 하는 것이 이길 힘이 되는 것. 그것이 위노나의 존재였는데. 그녀를 상실하는 것은 그가 그 파도를 버티고 설 힘을 잃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아버지의 고향인 덴마크로 돌아가는 그의 오딧세이는 불친절하고 낯선 바다의 섬들 사이를 부유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나마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위노나에 대한 추억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형무소에서 패트릭 호턴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는 아버지가 마지막 설교단에서 쓰러지기 전 한 말이다. 이혼, 파산, 파면 등 실패라는 인생의 결과 앞에서 아버지가 청중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패트릭 호턴의 삶을 보며 이 말을 떠올렸고,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개 앞에 아버지의 이 말을 기억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게 하는 폴의 복수와 귀향은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라는 말에는 아버지가 청중을 향해 이해해달라는 요청의 메시지였다. 살아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는…. 더불어 주인공을 향한 메시지로도 읽힌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당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니 이해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만큼 살아온 지금에서야 나의 부모를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의 삶에 대하여 친척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모두가 똑같이 살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도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라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삶이 있긴 하다. 그 삶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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