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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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쉽고 친절한 지젝 입문서를 쓴 토니 마이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젝은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구사자,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이다. 지젝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라고 권하는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알파카 코트처럼 가뿐하다. -198p

 [굴라쉬 브런치]라는 책에서 지젝을 발견했다. 이 문장을 보고 나는 대번에 지젝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을 발견했고 짜달시리 인문철학 시견이 넓지도 못한 처지에 무턱대고 책을 구입하여 책장부터 펼쳐댔다. 나 또한 영화를 좋아하니 지젝이 영화를 통해 인간 심리 구조를 해석해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근본적인 욕구에서부터 푸코, 라캉, 헤겔, 카프카, 히치코크까지 다양하게 훑어나가면서 이데올로기와도 연결시키며 완성시키는 지젝의 섬세하면서도 방대한 지적 정신을 탐험할 땐 내가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심과 관념적인 문장들 때문에 몇번이고 되짚어 읽어야 했다.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에서 현실과 사회적 문화에 대한 정당한 반항적인 면을 서술하고 있을 꺼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사실 잣대의 기준을 세워두고 참과 거짓을 따져드는 비평이라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요즘 인문서를 읽고 있었던 터라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다손 치더라도 몇번 듣거나 읽었던 여러 철학자, 사상가 이름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되어 반가운 면도 있었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이라는 책으로 알게 되었던 '하버마스'같이 말이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환경적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강박적인 환경보호론자의 주관적 입장이 갖는 기만성은, 그가 우리에게 꾸준히 임박한 파국에 대항하라고 경고하고 우리의 무관심을 비난하는 등의 경우에 실제로 그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파국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적절한 대답이 있다면 그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키는 것이다. "진정하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파국은 틀림없이 올 테니까 말야!" -100p,101p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소제목 아래, 
 '이러한 주관적 관점에서는 생태학적 위기가 우리의 무지막지한 자연개발, 즉 자연을 대화의 상대나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서가 아니라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대상과 물질들의 더미로 취급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형벌'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끌어내는 교훈은 우리가 탈선적이고 도착적인 생활방식을 그만두고 자연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연의 리듬에 순응시키며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에 관한 라캉적인 접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 중략.. 적절한 유일한 태도는 이러한 간격을 바로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취하는 것이다.' 76p,78p
 
 라고 주장했는데, 도대체 이 인간적 조건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의 유일한 주인은 인간이며 자연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고 인간외에 다른 동물을 멸종시킬 수 있는 힘도 인간에게 있다는 조건인가? 그래서 멋대로 강을 훼손하고 바다와 땅을 멋대로 부려 수많은 생물종들이 죽음에 이르는 원인을 만들어놓고 인간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까짓 짐승이니, 생물종이니 상관할바냐. 하며 발전을 위한 조건이라고 떠들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지독한 황사와 바다속의 수온변화로 인한 여러 생물의 멸종위기, 지구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지형의 변화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기에 전혀 인간의 잘못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체르노빌의 방사선에 대한 예를 들면서 자신의 비약적인 논지를 강화시킨 데에 반해 가장 문제시되는 환경문제는 어째 훌쩍 무시하고 지나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는 환경보호론자를 빈정대며 놀리는 투로 이 주제를 마무리했고 말이다.  

 그의 논지대로라면 '유비무환'이라는 한자성어는 별로 쓸모가 없는 말이테고, 모든 사건이 일어나면서 원인을 짚어보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이 파국은 틀림없이 올테니까.

 만일 그가 환경보호론자에게 들이댄 잣대를 과격 종교론자들이나 종말론자들에게 들이댄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 부분 말고는 다른 부분에서는 나름 흥미롭게 읽었다. 영화해석에서 심층적으로 들어가 낱낱히 분해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흩어질 때까지 심리와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젝의 대중문화에서 라캉읽기는 난해하다는 라캉의 사상을 읽기 전에 봐두면 좋을 책이다. 이 책에서 설명되는 '새'에 관한 상징은 프로이트의 심리 사상과 연결되면서 히치코크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대답으로 정리된다.

 '히치코크에게 있어서 새들, 즉 악한 대상의 화신은 모성적 법의 지배에 대한 대응물이다. 그리고 히치코크적인 환상의 중핵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매혹의 악한 대상과 모성적 법의 이러한 결속이다.' 211p
 
 지젝은 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19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이 책에도 역시 지젝의 정치관이 다분히 엿보인다. 그는 "욕망이 대상의 고유 가치와 교환 가치의 차액인 잉여 쾌락에 의해 지속된다"는 잉여쾌락 이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을 제시했다. 잉여가치란 자본과 노동력의 ‘평등한 교환’이란 형식을 통해 자본가가 취하는 잉여의 내용물이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잉여가치에 의해 지속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결코 닿지 않는 근원적 욕망을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막상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실체는 텅 빈 껍데기로 남아 ‘욕망과 미끄러지면서’ 결핍을 낳는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이 곧 ‘잉여쾌락’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에너지다. 잉여쾌락이 정도를 넘어서면 주체를 잡아 삼키고 파괴와 죽음을 부른다. 지젝은 실재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파시즘이나 도착증을 막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였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네이버사전참조)

 지젝은 라캉의 철학을 이어받아 영화를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풀이했다는 면만으로 포스트모던적이다. 이제 막 그를 안 터라 이해하려면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할 것 같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려면 부분적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아이콘으로써 지젝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는 철학적 패러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는 대중성을 지니긴 했지만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또 개성이 강해 약간 거부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지젝은 부분적으로 의견이 갈리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흥미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영화를 상업적인 면을 떠나서 인간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고 줄거리들의 상징에 온통 몰두했다. 그런 점은 덧없는 욕망의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써 적지 않게 그의 의견에 수긍할만한 내용도 있었다. 프로이트가 꿈의 영역의 첫발짝을 내딛었지만 무의식의 많은 부분을 성적으로 몰아붙인 면이 있었던 것처럼 지젝 또한 통찰력은 높이 봐줄만 하나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충분히 정신적 사유가 자극되어 많은 것을 생각할 계기가 되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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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 3유
김동근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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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크기의 파이를 갖고 서로 더 많이 갖겠다고 옥신각신하는 대신, 누군가 나서서 파이를 키우면 이 파이를 먹겠다는 사람이 좀 늘어난다 해도 한 사람 몫으로 돌아가는 파이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 파이를 더 크게 키우기만 하면 여기에 몰리는 사람이 늘어나도 오히려 내가 차지하는 파이의 크기는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41p

 세상에는 많은 직업들이 있다. 이 직업들을 음식이라고 해보자. 각자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 한 남자는 파이를 좋아해 파이만을 고집해 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파이를 먹던 남자는 갑자기 파이에 과일을 얹여서 먹거나 초코렛을 입혀서 먹으면 더 맛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 종류의 파이를 손수 만들어 처음으로 초코렛파이와 각종 과일파이를 만들어낸다. 그전엔 파이가 맛없다고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 파이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든다. 그리고 이 파이를 맛본 사람들은 그 맛에 반해 모두 파이를 나눠 먹기 시작한다. 어쩌면 일이라는 것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진정 창조로운 사람은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빌게이츠가 컴퓨터를 만들기 전에는 수많은 무시와 좌절을 맛보았고 아무도 그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다보지 않았다. 개가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만큼이나 생소한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하지만 실제론 안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말은 번지리리한 게 좋다고 말만큼이나 멋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속 다르고 겉 다른 현실 속에서 제법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대리운전이라고 하면 나는 차가 없어서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밤거리를 누벼보지 않은 것은 아니라 길에서 많이 보던 광경이기도 했다. 보통 대리운전을 부르는 사람은 술 취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3무 3유]를 보면서 의외로 여러 상황에서 사람들이 대리운전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만의 저렴하고 최고의 서비스를 가진 회사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여행사업이나 다른 여러 사업으로 확장하려 하지만 내 생각엔 콜택시와 함께 병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김동근'씨의 회사처럼 믿음직스런 곳이라면 콜택시와 대리운전 모두 최고의 품질이 되지 않을까, 그럼 앞으로 나도 자주 이용할 듯 싶다.

 

 

 사실 전에 자기계발서를 몇십권 질리도록 보면서 느꼈던 건 모두 성공이 물질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것 같아 내심 씁쓸했던 게 사실이다. 나는 성공이란 무엇과 바꿀 수 있는 자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착오적 사고일지도 모르겠지만 돈이라는 것이 성공과 비례한다면, 당사자의 정신이 아무리 비양심적이고 몰상식하며 천박하면 그걸 성공적인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런 나는 자기계발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요즘은 인문과 소설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4월 30일 밤, 어디 방송이었는지, 몇시였는지도 모르겠다. 박찬호가 나오는 프로였는데, 한때 승승장구하며 위만 보며 달리던 그에게 사람들은 스포츠 선수 중에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선수로 꼽으며 그를 당연히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잘 나가던 짧은 순간도 잠시, 해외에서 적응하는 것이 힘들어 자리잡지 못하며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돈=성공으로 생각하던 사람에게는 그가 성공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실력이 나오지 못해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로 옮겼지만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며 매일매일 자기 자신에게 힘이 나는 어구들을 읊으로 스스로 돕고자 했다. 잘 나가던 그보다는 지금의 그에게 나는 더 응원을 던지고 있었으며 나 스스로도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런 것이다.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이 길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내디딜때 그 과정은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그 순간 가장 큰 교훈을 얻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좋은 일이 한창일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거만해지거나 자신과 소중한 사람을 잊기 마련이지만 어려울 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소중한 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위에 있는 사람보다는 그 과정의 길에 있는 사람이 더 친근하고 함께 길을 가고 있는 동료로써 나또한 힘을 얻고 그에게는 내면의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싶다.

 

 

 [3무3유]. '1577-1577'이라는 광고가 외국에서 하는 대표선수 축구경기에도 비치고 외국인들이 이 숫자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대리운전이라는 글귀는 그야말로 압권이지 않을까.

 

 

 회사가 직원들에게 주는 혜택을 보면서는 저자의 회사가 고객에게 왜 믿음을 주는 지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초심을 잊지 않고 간다면 저자의 소망대로 대리운전 회사가 아닌 대리운전 기업까지도 가능하리라 본다. 뭇 사람들의 편견은 걱정하지 말길.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까지도 기억 못하는 사람들이고, 사실 대리운전을 시키는 술 취한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말은 터무니 없는 말만 지껄이는 것일뿐일테니.

 

  영화 <버킷 리스트>에는 아주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천국의 문에 들어서려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군요. 하나는 인생에서 당신 스슬 기쁨을 찾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랍니다." 263p

 
 그러고보면 사람이 직업을 선택한다고 하기 보다는 직업이 자기를 더 크게 가꾸어줄 인간을 기다린다는 말이 어찌 말이 되는 것 같다. 만일 버킷 리스트의 대사와 연결해 자신의 성공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성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꺼란 생각이 든다.

 

 '힘겹고 외로웠던 지난 시절을 잊는 게 삶의 지혜라면 그것을 애써 기억하는 건 진정한 용기라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문구를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꼽겠다. 대리운전의 세계에 대한 남모를 고충도 알 수 있었던 이 책에서 희망의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에게 가슴 깊이 응원을 메시지를 던지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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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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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하는 인간. 이처럼 놀이를 문화의 전 방면에 대입하여 정의하는 책은 처음 본 것 같다. 저자 '하위징아'의 말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행동원리에 놀이하는 인간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어적으로 살펴본 놀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구조는 여러 문화권과 다양한 나라를 예로 살펴보기도 한다.

 
 '[호모 루덴스]의 언어로 말해 보자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문화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는 것이다.' -14p

 놀이와 경기(아곤)의 관계. 이 둘의 경계가 확실하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하위징아는 매우 세부적으로 낱낱히 파헤친다. 논리적으로 이 둘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어느 영역에서든지 놀이로써의 조건이 떨어지는 근거를 찾아 하나하나 따져든다. 그런 그의 글을 눈으로 따라잡는 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복잡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이라곤 말하지 않겠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곤의 기능은 고대 시대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형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아곤적 기능을 획득했다. 문명이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과부하가 걸리면서, 또 생산 기술과 사회 생활 그 자체가 더욱 정교하게 조직되면서, 오래된 문화적 토양은 서서히 아이디어들, 사상과 지식의 체계, 교리, 규칙과 규정, 도덕과 관습 등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체계들은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뭐라고 할까, 문명은 좀 더 진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하기에는 부차적 지위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는 끝났고 아곤의 단계 또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 155p


 하위징아는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해선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가 설명하는 방법은 논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놀이하는 인간과 인간의 전 문명에 대한 관계를 파고 들었는데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부분에선 모든 것이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에서 그가 전쟁 또한 놀이의 일부분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그 전쟁이 놀이라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존중하에 예의적으로 원칙을 세우고 싸우는 것이라 하였지만 지금까지 역사속에서의 긴 전쟁 중에 그런 전쟁이 과연 얼마나 되었단 말인가. 또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 예의 바르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이성을 잃는 순간 그 원칙은 무너진다. 인간은 화가 나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고 원칙은 그렇게 쉽게 지켜지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론으로써 보다는 경험으로써 시각에 무게를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관한 부분에선 조심스러운 저자의 접근이 보였다. 거기에 관한 부분은 '하위징아'의 주장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외에도 그는 법률, 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시, 문학, 의인화, 철학, 예술, 서양 문명, 현대 문명 등 살펴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아울러 놀이와의 관계와 관점을 살펴본다.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을 자극해 놀이에 참여하게 만들어 지식을 익힐 수 하는 것으로 현재 각종 퀴즈쇼와 스도쿠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놀이 문화로써의 레고 또한 창조력과 이미지, 즉 상상력을 일깨워 주어 '하위징아'의 의견과 부합될 듯 하다.

 나는 문학을 좋아하므로 가장 문학적인 요소가 짙은 놀이와 시와 예술에 관한 부분은 나름 재미나게 보았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바테스(vates)라고 하는 데 이는 홀린 자, 신에게 매혹된 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자질은 그가 비범한 지식의 소유자임을 암시했다. 그는 지식인, 즉 아랍 사람들이 말한 샤이르(sha'ir)였다. 에다의 신화에서는 시인이 되기 위해 꿀술을 마셔야만 했다. 꿀술은 현자 크바시르의 피로 준비되었는데 이 현자는 그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못하는 법이 없는 모든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인 - 예언자는 예언자, 성직자, 점쟁이, 비법 전수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의 형태로 분화되었으며 심지어 철학자, 입법자, 연설가, 선동자, 소피스트, 수사학자도 원시적 복합체인 바테스로부터 나왔다.(234p참조) 이러한 특성들은 성스러움과 문학성을 동시에 수행했던 고대 시인들의 기능을 잘 말해준다. 성스러운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시인의 기능은 항상 놀이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놀이라고 하면 내 생각으론 가장 먼저 당사자가 재미를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화의 전 방면에 놀이라는 원리로 작용한 문명이 만들어졌다면 인간은 이런 문화를 창조하면서 먼저 재미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에 문화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것은 미처 상상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저자 또한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부분에 침투하다 보니 하나의 사실적 연구라기 보다는 이론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학문적 효과로써 매우 만족할만한 책이다. 이 한권만 읽어도 언어와 예술, 종교, 철학, 문명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놀이하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에 의해서만 즐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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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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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많은 시장에 가면 가끔 보곤 했던 게 누워서 혹은 앉아서 리어카를 끌고 가며 물건을 파는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가끔 좁은 길에서 빽빽한 사람들 사이들 사이로 리어카를 돌리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끼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리저리 돌려가며 리어카를 빼려고 용을 쓰곤 했는데 무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며 혼자서 해결하고 돌아갔다.

 그런 모습이 왠지 안타깝고 안쓰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아저씨를 위해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저씨의 모습이 비굴하거나 무례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남에게 피해 안주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아저씨의 모습이 내 마음의 딱딱한 곳을 건드렸다고 할까. 그 아저씨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도 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아픈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궁핍함의 향기가 곳곳에 스며있는 곳이었다. 집에서 조금 걸어 나오면 일명 '또랑가'라고 불리던 썩은 물이 흐르는 얕은 시내가 저 아래에서 흐르곤 했었는데 거기에는 박쥐떼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박쥐와 동거동락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또랑가 위의 다리를 건너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불퉁불퉁하고 양 볼에 혹이 달린 빨간 얼굴의 혹부리 아저씨가 살고 있었고 그 근처 어딘가에는 다리 없는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두 다리가 없는 아저씨는 가끔 허전한 자리에 고무로 된 무언가를 끼우고 엎드려서 고무 슬리퍼를 손에 끼우고 밖을 나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는 가족도 없었던 것 같고 휠체어를 살만한 형편도 안 되었기에 그렇게 누워서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반에는 몸에 화상을 입었고 얼굴이 조금 이상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시절 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르게 생겼고 좀 못생긴 편이라 남자아이들이 그 아이를 괴롭히거나 그 아이에게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 아이 이름은 '은지'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아이 이름은 결코 잊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은지 같은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내가 아는 아이들로는 10명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같은 반이 아닌데도 나는 그 아이들을 알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은지'와 비슷한 '형주'라는 아이와 같은 반이었는데 이 둘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은지'와 '형주'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놀린 적은 없었다. 단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중학교땐 내 학년 위로 난쟁이 언니가 학교를 다녔는데 이 언니는 분위기가 조금 어두웠던 것 같다. 나야 같은 학년도 아니었기에 그저 스쳐 지나치다가 마주치기만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 언니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어둡고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내가 아는 정도는 그 정도랄까.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온 학교, 길, 동네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늘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어느 곳에서든 장애인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먼 사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내 앞에 있는 삶의 무게 때문에 나보다 더 큰 삶의 무게를 가진 사람을 쳐다보지 못해서. 그럴려고 생각도 안해서?

 가끔 뉴스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용해 자기 실속을 챙기거나 심하면 장애인들을 멋대로 부리기도 하는 장면이 목격된다. 여자일 경우는 성폭행 사건도 조용치 않게 보도되곤 한다. 그런 걸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썩었고 나쁜 가에 대해 치를 떨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 소식을 들으면 분노를 터뜨리지만 다시 일상의 무관심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런 건 무능한 정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제법 긴 문장의 제목이지만 왠지 내 마음이 뜨끔해지는 문구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보면 장애를 가진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형태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있으며 세상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여태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펼쳐놓지 못한 저자 '김원영'씨의 심경을 알 수 있다. 내가 그의 삶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면 거짓말일까. 솔직히 겉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항상 내겐 어려운 숙제같다. 내 속에도 장애가 있다. 그러니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게 위선이 된다면. 나는 어떤 말로도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어릴 때 가난함과 궁핌함속에서 살았고 고통의 깊은 맛이 무엇인지 아니 당신을 이해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면 어떨까.

 어찌보면 수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책은 그의 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 당연히 있어야 할 권리에 대한 외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직은 많이 꼬여 있고 복잡해서 어려운 문제는 풀려고 하는 사람만 있다면 언제나 시간을 두고 해결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열정이 더해지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그 뜨거움이 전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책을 쓰면서 가진 열정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 열정이 식지 않아 계속해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갈 수 있도록 힘을 보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그에게 응원을 보내주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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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살인자는 권총의 총신을 희생자의 관자놀이나 가슴 혹은 아랫배에 갖다 댄다. 살해자는 희생자의 사지를 칼로 도려내고, 뼈와 두개골을 돌덩어리나 우연히 손에 들린 몽둥이 혹은 부서진 의자 다리 따위로 박살 낸다.' - 264p

 아무 페이지나 넘겨 읽어도 위에 같이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자주 보이는 인용구나 전문가의 의견 없이도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폭력 사회'를 정의하고 이론을 정리해가는 특이한 구성을 가진 이 책은 다소 빨리 지루해질 염려가 있다.

 질서와 폭력, 폭력과 격정,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이 책의 구성 제목들이다. 처음에 제목들을 보고는 역사에서 현대까지 일어난 사건을 짚어가며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인지 알았다. 그들을 통해 폭력사회의 단면을 살피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각 사회의 특징에서 살피는 것이라고.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살육현장과 무참히 짓밟히는 희생자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장까지 책을 읽기 전에는 그것이 '문명 비판'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제법 어수선하다. 다행히 번역자가 이 책의 후기를 달아줌으로써 내가 삼천포로 빠져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번역자 역시도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의 방에는 이런 계통의 선조들을 모셔둔다. 이 방에는 타살자, 강도 살인범, 암살자, 식인 살인자 등이 모두 모여 있다. 폭력의 관행은 다양한 (살인) 형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늘 그런 관행을 각인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문화이다. 본성(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 322p 


 문명이 만들어지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짐에 따라 전 시대의 폭력을 문화를 통해 다시 각인되어 반복한다. 결과적으론 이런 뜻인것 같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건 오리무중이다. 사물에 관한 지식을 논리적인 연관에 의하여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 놓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론이라는 것에 약간 애매해 그 뜻에 대해 한 번 찾아 보았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참고했다.
 
 - 학문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다. 일단 이론이 형성되면 그 이론의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냄으로써 미지(未知)의 영역에 관해서도 효과있는 예상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으로 인하여 이론 적용에 한계가 생기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이론에 구애되어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 허다하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이론 중에서 근본적인 전제가 있는 것, 또는 자료(資料)에 관한 보고 사항 중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은 공리(公理)가 된다. 다음의 명제는 공리로부터 연역(演繹)되는 정리(定理)가 된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연결을 철저히 정리하면 공리론(公理論)을 얻게 된다. 여기서 이를 논리기호(論理記號)로 표시하면 형식화(形式化)된 이론이 형성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동일한 이론이 전혀 다른 복수의 사상(事象)에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론이 적용되는 현상(現象) 또는 그 구조를 논리학이나 수학에서는 그 이론의 모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험과학(經驗科學)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그 현상의 모델이라고 할 때가 많다. 학문 연구 과정에서 논리적 전개에 치중하는 것을 이론면(理論面), 사상(事象)과의 대결에 치중하는 것을 실험면(實驗面)에 관한 연구라 하여 구별한다. -

 어째, 어느 면에서는 확실해진 것 같기도 하나 어떤 면에선 더 애매해진 기분이다. [폭력 사회]는 내 스타일의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게 지금까진 내가 내린 결론이다. 좀 더 인문 시각을 넓혀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해준 책이다.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답은 결코 멀쩡하지 않은 세계로 이끌어 모두가 혼란속에 빠진다는 대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점은 폭력은 절대 해결을 부르지 않으며 인간으로 태어나 느끼는 감정 중 가장 끔찍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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