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놀이하는 인간. 이처럼 놀이를 문화의 전 방면에 대입하여 정의하는 책은 처음 본 것 같다. 저자 '하위징아'의 말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행동원리에 놀이하는 인간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어적으로 살펴본 놀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구조는 여러 문화권과 다양한 나라를 예로 살펴보기도 한다.

 
 '[호모 루덴스]의 언어로 말해 보자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문화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는 것이다.' -14p

 놀이와 경기(아곤)의 관계. 이 둘의 경계가 확실하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하위징아는 매우 세부적으로 낱낱히 파헤친다. 논리적으로 이 둘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어느 영역에서든지 놀이로써의 조건이 떨어지는 근거를 찾아 하나하나 따져든다. 그런 그의 글을 눈으로 따라잡는 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복잡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이라곤 말하지 않겠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곤의 기능은 고대 시대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형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아곤적 기능을 획득했다. 문명이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과부하가 걸리면서, 또 생산 기술과 사회 생활 그 자체가 더욱 정교하게 조직되면서, 오래된 문화적 토양은 서서히 아이디어들, 사상과 지식의 체계, 교리, 규칙과 규정, 도덕과 관습 등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체계들은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뭐라고 할까, 문명은 좀 더 진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하기에는 부차적 지위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는 끝났고 아곤의 단계 또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 155p


 하위징아는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해선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가 설명하는 방법은 논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놀이하는 인간과 인간의 전 문명에 대한 관계를 파고 들었는데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부분에선 모든 것이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에서 그가 전쟁 또한 놀이의 일부분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그 전쟁이 놀이라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존중하에 예의적으로 원칙을 세우고 싸우는 것이라 하였지만 지금까지 역사속에서의 긴 전쟁 중에 그런 전쟁이 과연 얼마나 되었단 말인가. 또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 예의 바르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이성을 잃는 순간 그 원칙은 무너진다. 인간은 화가 나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고 원칙은 그렇게 쉽게 지켜지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론으로써 보다는 경험으로써 시각에 무게를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관한 부분에선 조심스러운 저자의 접근이 보였다. 거기에 관한 부분은 '하위징아'의 주장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외에도 그는 법률, 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시, 문학, 의인화, 철학, 예술, 서양 문명, 현대 문명 등 살펴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아울러 놀이와의 관계와 관점을 살펴본다.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을 자극해 놀이에 참여하게 만들어 지식을 익힐 수 하는 것으로 현재 각종 퀴즈쇼와 스도쿠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놀이 문화로써의 레고 또한 창조력과 이미지, 즉 상상력을 일깨워 주어 '하위징아'의 의견과 부합될 듯 하다.

 나는 문학을 좋아하므로 가장 문학적인 요소가 짙은 놀이와 시와 예술에 관한 부분은 나름 재미나게 보았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바테스(vates)라고 하는 데 이는 홀린 자, 신에게 매혹된 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자질은 그가 비범한 지식의 소유자임을 암시했다. 그는 지식인, 즉 아랍 사람들이 말한 샤이르(sha'ir)였다. 에다의 신화에서는 시인이 되기 위해 꿀술을 마셔야만 했다. 꿀술은 현자 크바시르의 피로 준비되었는데 이 현자는 그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못하는 법이 없는 모든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인 - 예언자는 예언자, 성직자, 점쟁이, 비법 전수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의 형태로 분화되었으며 심지어 철학자, 입법자, 연설가, 선동자, 소피스트, 수사학자도 원시적 복합체인 바테스로부터 나왔다.(234p참조) 이러한 특성들은 성스러움과 문학성을 동시에 수행했던 고대 시인들의 기능을 잘 말해준다. 성스러운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시인의 기능은 항상 놀이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놀이라고 하면 내 생각으론 가장 먼저 당사자가 재미를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화의 전 방면에 놀이라는 원리로 작용한 문명이 만들어졌다면 인간은 이런 문화를 창조하면서 먼저 재미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에 문화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것은 미처 상상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저자 또한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부분에 침투하다 보니 하나의 사실적 연구라기 보다는 이론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학문적 효과로써 매우 만족할만한 책이다. 이 한권만 읽어도 언어와 예술, 종교, 철학, 문명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놀이하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에 의해서만 즐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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