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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쉽고 친절한 지젝 입문서를 쓴 토니 마이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젝은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구사자,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이다. 지젝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라고 권하는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알파카 코트처럼 가뿐하다. -198p
[굴라쉬 브런치]라는 책에서 지젝을 발견했다. 이 문장을 보고 나는 대번에 지젝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을 발견했고 짜달시리 인문철학 시견이 넓지도 못한 처지에 무턱대고 책을 구입하여 책장부터 펼쳐댔다. 나 또한 영화를 좋아하니 지젝이 영화를 통해 인간 심리 구조를 해석해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근본적인 욕구에서부터 푸코, 라캉, 헤겔, 카프카, 히치코크까지 다양하게 훑어나가면서 이데올로기와도 연결시키며 완성시키는 지젝의 섬세하면서도 방대한 지적 정신을 탐험할 땐 내가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심과 관념적인 문장들 때문에 몇번이고 되짚어 읽어야 했다.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에서 현실과 사회적 문화에 대한 정당한 반항적인 면을 서술하고 있을 꺼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사실 잣대의 기준을 세워두고 참과 거짓을 따져드는 비평이라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요즘 인문서를 읽고 있었던 터라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다손 치더라도 몇번 듣거나 읽었던 여러 철학자, 사상가 이름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되어 반가운 면도 있었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이라는 책으로 알게 되었던 '하버마스'같이 말이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환경적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강박적인 환경보호론자의 주관적 입장이 갖는 기만성은, 그가 우리에게 꾸준히 임박한 파국에 대항하라고 경고하고 우리의 무관심을 비난하는 등의 경우에 실제로 그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파국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적절한 대답이 있다면 그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키는 것이다. "진정하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파국은 틀림없이 올 테니까 말야!" -100p,101p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소제목 아래,
'이러한 주관적 관점에서는 생태학적 위기가 우리의 무지막지한 자연개발, 즉 자연을 대화의 상대나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서가 아니라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대상과 물질들의 더미로 취급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형벌'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끌어내는 교훈은 우리가 탈선적이고 도착적인 생활방식을 그만두고 자연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연의 리듬에 순응시키며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에 관한 라캉적인 접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 중략.. 적절한 유일한 태도는 이러한 간격을 바로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취하는 것이다.' 76p,78p
라고 주장했는데, 도대체 이 인간적 조건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의 유일한 주인은 인간이며 자연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고 인간외에 다른 동물을 멸종시킬 수 있는 힘도 인간에게 있다는 조건인가? 그래서 멋대로 강을 훼손하고 바다와 땅을 멋대로 부려 수많은 생물종들이 죽음에 이르는 원인을 만들어놓고 인간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까짓 짐승이니, 생물종이니 상관할바냐. 하며 발전을 위한 조건이라고 떠들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지독한 황사와 바다속의 수온변화로 인한 여러 생물의 멸종위기, 지구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지형의 변화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기에 전혀 인간의 잘못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체르노빌의 방사선에 대한 예를 들면서 자신의 비약적인 논지를 강화시킨 데에 반해 가장 문제시되는 환경문제는 어째 훌쩍 무시하고 지나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는 환경보호론자를 빈정대며 놀리는 투로 이 주제를 마무리했고 말이다.
그의 논지대로라면 '유비무환'이라는 한자성어는 별로 쓸모가 없는 말이테고, 모든 사건이 일어나면서 원인을 짚어보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이 파국은 틀림없이 올테니까.
만일 그가 환경보호론자에게 들이댄 잣대를 과격 종교론자들이나 종말론자들에게 들이댄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 부분 말고는 다른 부분에서는 나름 흥미롭게 읽었다. 영화해석에서 심층적으로 들어가 낱낱히 분해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흩어질 때까지 심리와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젝의 대중문화에서 라캉읽기는 난해하다는 라캉의 사상을 읽기 전에 봐두면 좋을 책이다. 이 책에서 설명되는 '새'에 관한 상징은 프로이트의 심리 사상과 연결되면서 히치코크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대답으로 정리된다.
'히치코크에게 있어서 새들, 즉 악한 대상의 화신은 모성적 법의 지배에 대한 대응물이다. 그리고 히치코크적인 환상의 중핵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매혹의 악한 대상과 모성적 법의 이러한 결속이다.' 211p
지젝은 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19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이 책에도 역시 지젝의 정치관이 다분히 엿보인다. 그는 "욕망이 대상의 고유 가치와 교환 가치의 차액인 잉여 쾌락에 의해 지속된다"는 잉여쾌락 이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을 제시했다. 잉여가치란 자본과 노동력의 ‘평등한 교환’이란 형식을 통해 자본가가 취하는 잉여의 내용물이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잉여가치에 의해 지속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결코 닿지 않는 근원적 욕망을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막상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실체는 텅 빈 껍데기로 남아 ‘욕망과 미끄러지면서’ 결핍을 낳는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이 곧 ‘잉여쾌락’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에너지다. 잉여쾌락이 정도를 넘어서면 주체를 잡아 삼키고 파괴와 죽음을 부른다. 지젝은 실재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파시즘이나 도착증을 막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였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네이버사전참조)
지젝은 라캉의 철학을 이어받아 영화를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풀이했다는 면만으로 포스트모던적이다. 이제 막 그를 안 터라 이해하려면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할 것 같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려면 부분적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아이콘으로써 지젝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는 철학적 패러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는 대중성을 지니긴 했지만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또 개성이 강해 약간 거부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지젝은 부분적으로 의견이 갈리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흥미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영화를 상업적인 면을 떠나서 인간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고 줄거리들의 상징에 온통 몰두했다. 그런 점은 덧없는 욕망의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써 적지 않게 그의 의견에 수긍할만한 내용도 있었다. 프로이트가 꿈의 영역의 첫발짝을 내딛었지만 무의식의 많은 부분을 성적으로 몰아붙인 면이 있었던 것처럼 지젝 또한 통찰력은 높이 봐줄만 하나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충분히 정신적 사유가 자극되어 많은 것을 생각할 계기가 되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