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 - 폭주하는 세계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 지음, 정연우 옮김 / 나눔의집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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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사회인류학 교수이자, 유럽 사회 인류학자 협회의 협회장을 역임한 유럽 내의 저명한 인류학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현재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과잉 시대임을 자각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의 결말인 8장에서 현재의 문제를 단순히 관념적 비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요. 충분히 공감할 만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책 곳곳에 나오고 있는 이중구속과 스케일의 충돌이라는 용어는 그의 논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유럽연구위원회 (ERC)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 ‘과열 : 세계화의 세 가지 위기’의 서론이자 개요이다”라는 취지의 출판 목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아마도 이 책이 현시대의 문제 제기라는 측면에서 뒤이어 나올 후속 저작들의 일종의 방향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원제는 “Overheat : An Anthropology of Accelerated Change”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올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책의 1장에서는 의미심장한 제목과 일맥상통한 의미인 현재의 과열에 대해 저자는 “자본주의는 19세기 이후부터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오늘날 화폐 경제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 공동체는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좋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시장경제적우위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삶을 좌우할 여러 부분에서 파급력을 끼치고 있고 이것의 여파가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크게 에너지 문제와 난민 문제 및 도시의 인구 집중에 따른 불평등적인 인간의 파편화와 환경 오염의 심각한 원인인 쓰레기 문제들과 소셜네트워크를 비롯한 정보 과잉등의 현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즉, 과잉된 세계의 문제 제기와 함께 그로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를 7장에 걸쳐서 논하고 결론에 이르는 8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과열된 세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저자의 핵심 과제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과거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 되는 시점이었던 1815년보다 현재의 전세계 인구는 대략 7배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왔습니다. 더불어 자원의 개발과 시장의 확대 및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여기에 자본주의가 인간의 노동력을 통한 더 많은 상품 생산에 집중해 왔습니다. 소위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일종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인해 시장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 고취시켜 왔던 인간의 삶의 증대에 대해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져왔습니다. 물론 인간이 합리적 이기심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허구에 지나지 않았고 각각의 경제적 행위자들의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법에 의지해야될 만큼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냉전의 시기에서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정치가 마땅히 맡아야 되는 부분에 경제가 합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더 나아가서는 시장의 견제를 위한 정치적 요소를 전부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하이에크 조차 시장의 자율적 합리성에 무조건적으로 기대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밝혔고, 칼 폴라니는 “시장 원리 자체를 반대하기 보다는 마땅히 사회적 원칙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영역에까지 시장 원리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한다”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의 8장에서 저자는 “경제성장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중 구속은 현 세계의 이중구속 (혹은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단순한 환경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경제 성장의 요구와 생태적 환경의 지속은 그야말로 이중구속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여러번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로 비롯된 전세계의 규격화 내지는 초접근화의 세계화는 사실상 “구조적 모순과 지역적 갈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저자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고도화 된 자본주의의 이행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시장의 배타적 독립은 전 지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한 문제의 표출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난민들의 발생이나 남반구와 북반구의 외형적 불평등이라 볼 수 있는데 에너지 불평등을 비롯한 북반구 선진 기업들의 폭발적인 아웃소싱과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남반구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와 보다 나은 삶의 기회에 대한 박탈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 지역의 거대하고 긴 슬럼화 지역에서의 폐가전을 이용해 하루를 벌어먹고 살고 있는 가나 소년들의 실례는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단순한 빈곤층 내지는 저개발국의 국민이라는 담론을 넘어 유럽이나 북반구의 선진국에게도 “안정적인 고용과 즉각적인 생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유동적인 회색지대를 설명하는 데에는 새롭게 떠오른 개념인 프레카리아트가 특히 유용하다”고 저자는 가이 스탠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비인간화적 이행은 저개발 국가나 선진국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시장의 우위라는 한길만을 강요해 왔습니다.

또한, 이 신자유주의의 고도화는 난민 문제에 있어 거의 모든 이민자가 환영받지 못하게 되는 일종의 경계선주의를 만들었고, 이점은 큰 틀에서 “현대 국가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배제의 형태”라 불릴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리아를 비롯한 난민의 발생이 전쟁과 분쟁으로 인한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며 이런 전쟁과 무력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얻는 기업과 국가들이 존재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설계에 무고한 시민들이 난민화되었고 여기에서 한가지 명백한 점은 이들을 무슬림이라는 지칭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난민 발생의 일차적인 문제는 자크 랑시에르도 동의했듯이 이러한 정치외교적 배경이 먼저 박혀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된 틀에서는 “보편적 인권과 신자유주의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스케일로 재단해 등급을 나누는 등의 이중구속”이며, 이를 더 요약해 내자면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정치적 이슈를 경제적 이슈나 경영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근본적 가치, 사회 정의 장기적 관점에서 인류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앞선 평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완곡한 어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현재 세계에서 진보 좌파에게 거의 일임되어 있는 전지구적 생태 문제와 기후 변화 및 환경 오염은 그렇잖아도 현실 정치에서 궤멸되어 있는 이들에게 힘든 과제일 것입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타협하지 않는 개발론자들, 이를 옹호하는 경제주의자들과 영합하여 현재의 지구적 위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 여파가 적을수도 있겠으나 후세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으로 직면할 수도 있는 문제일텐데요. 여기에는 이와 관련하여 태평양에 존재하는 미국 텍사스주 크기의 거대 플라스틱 덩어리들과 육지에 터를 잡고 있는 쓰레기 무덤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등 쓸모가 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하루를 연명해 살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딜레마이자 이중구속이며, 이 글의 결론에 이르러 느끼게 되는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이를 더 부추기는 시장경제의 왜곡이 과연 개선 가능할 수준 정도의 논의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글의 결론인 8장에서 저자는 “시민 모두가 동의할 만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해결책을 강구하기에 앞서 현실 인식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수단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 칸트가 제시했던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으로까지 확대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점을 진정한 해결책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현실 인식의 괴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최소한의 기대는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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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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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스크러튼은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로 켐브리지에서 미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이후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 교수를 역임하는 등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타임즈와 BBC에 출연하며 일반인들에게 철학과 미학의 저변을 넓히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수차례 미디어를 통해 언급하며 그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1980년에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 ‘보수주의의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인지 약간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ow to Be a Conservative”로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년 뒤인 2016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13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각각의 포함되고 있는 주장들은 과거 세계 2차대전 시기부터 이슬람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재의 유럽까지의 논증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약간 차례대로 살펴보자면, 1장에서 저자인 로저 스크러튼은 자신이 왜 합리적 보수주의자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장 후반부에 대처리즘을 옹호하면서도 자신은 경제적 특권을 비롯한 기득권 층에 반대하며, 특히 “보수주의를 자유시장경제학과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대처리즘으로 영국내의 경제적 엘리트들의 출현과 자신의 경제적 특권을 차별적으로 옹호하는 인사들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큰 틀에서 대처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꽤 불명확한 부분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습니다.

이후, 2장과 3장에서는 보수주의가 옹호하는 전통적인 가치인 가정과 국민의 개념, 특히 9장에서 시민 사회 내에서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같이 이 부분에서도 ‘특유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 밝힙니다. 4장과 5장은 경제적인 담론에서 사회주의와 보수주의를 설명하고 6장에서는 보수주의가 추종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그리고 7장부터 13장까지는 현재 직면한 현실에서의 보수주의자의 눈으로 보는 문제들과 그것과 관련한 여러 해결책들과 마지막에는 후세들을 위한 간략한 담화를 끝으로 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저자의 논점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여러 관점입니다. “경제적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을 억제해야 한다”는 부분이나 “개인들의 이기심에 대한 토크빌 경고”를 언급하고, 의무와 사회적 책임 등의 전반적으로 세계의 자본주의적 이행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1장에서 대처의 입을 빌어 분배와 관련해 과연 정부가 특유의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면서 특히 10장에서 “차별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부당할 경우에만 용인할 수 없다고 약간 그럴듯하게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자본주의적 체제가 사실상 시민의 평등의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분명함에도 반대의 차별에 대한 개선 요구를 저런식으로 대처하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6장과 7장에 등장하는 ‘합리적 이기심’에 대해서도 과연 시장과 정치에 이 합리적 이기심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저자의 명확한 논증이 없었으며, 사실상 인용의 인용에 그치는 아쉬운 부분이라 할 만 했습니다. 물론 ‘비뚤어진 자본주의’를 바로 잡기 위해 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크게 동감했고, “도덕적 제재의 지원이 없으면 시장경제는 적절하게 기능할 수 없다”는 평가에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앞선 의무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유 재산을 신봉하고 더 나아가서는 현재로선 시장 경제의 특별한 대안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주장합니다. 앞선 고삐풀린 자본주의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리기 위해선 법의 수단 뿐만 아니라 시장에 민주주의가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 개인적으로 그렇게 여기는데요. “민주주의가 특수 이익 집단의 싸움판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시민의 공공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주적 선거만으로는 내분을 극복하거나 공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를 당선자들의 마음에 심어줄 수 없다”는 어떻게 보면 민주 정치의 제도적 한계에 대한 저자의 피력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결국 자신을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어찌됐든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하며, 선거와 상관없는 사회의 기득권층과 보수주의자는 확연히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7장 이후부터 이어지는 오늘날 (유럽의) 문제와 관련해서, 중동 지역의 여러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난민들이 유럽에 유입됨으로서 이들이 종래의 국민국가주의와는 상관없는 이슬람교의 맹종과 우선시하는 가치관으로 종교 자체가 국가와 제도에 우선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상황을 저자 자신이 이처럼 우려하고 있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보편적 인류애와 인간성으로 보아서는 이들 난민 문제를 격리와 추방으로 해결해서는 안되지만 이슬람인들이 대체로 종교와 세속간의 문제를 종교 우선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은 기존의 유럽 국가들 내부의 사회적 불안 요소를 갖게 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밝히는 대로 큰 틀에서 국민국가적 사회 관념체계에 이들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그대로 사회의 한 축이 되어야 함에도 ‘기독교적 사회-흡수되지 않는 별개의 이슬람’이라는 대결구도를 만들게 되는 위험을 안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슬람이 무엇보다 제도와 사회에 우선되는 종교적 가치관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큰 사회적 괴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유럽의 기독교적 문명 토대위에 지금까지 이어 온 발전에 전통적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믿습니다. 사실상 저자 역시 기존의 국가와 사회에 균열을 가하는 어떠한 것들에 대해 반대하고 “규칙, 직위, 의례, 위계 등의 가치”를 옹호하며 시민들의 자유의 영속적 결사를 지지하는 것이 이들의 의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10장에서 “자유 결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전체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보수주의가 옹호하는 전반적인 자유의 의미와 이를 바탕으로 시민의 자율성과 결사를 보장해야만 한다는 가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논법이 과거 에드먼드 버크의 담론과는 차이가 있으나 오늘날 극우와 구별될 만큼 그 언저리가 명확하지 않은 심지어 과두제를 옹호하는 무늬만 보수주의자들 하고는 매우 명확히 다른 보수주의라 인식될 만 했습니다. 보수의 반대는 진보가 아니라 반동이듯이 오늘날 극우와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진짜 ‘합리적인’ 보수주의가 사회에 뿌리 내리길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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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브로긴 2019-12-24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덕에 스크러튼을 알게 되는군요. 스크러튼이 쓴 책들 하나하나 읽어봐야겠습니다.
동의하지 못하는 의견이라도 배울 점은 있겠지요...

베터라이프 2019-12-25 10:15   좋아요 1 | URL
자유주의의 이행과정에서 보수주의와 영합한 것이 오늘날의 보수주의의 모습일텐데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는 사회에 상식적이고 건전한 보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면에서는 과거 보수주의 전통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일이 되었죠. 저도 보수주의자들의 노골적인 현실 이익에는 동의하지 않는편입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 브렉시트와 EU 권력의 재편성
폴 레버 지음, 이영래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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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레버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퀸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영국 외교부에 들어가 핀란드 헬싱키의 대사관 근무를 시작으로 EEC 및 UN근무를 거쳐 1997년부터 약 6년간 주 독일 영국 대사를 역임한 전문 외교관입니다. 그는 독일과 EU체제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과 연구를 해왔던 것으로 유명한데요. 특히 과거와 현재의 유력한 여러 독일 정치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더불어 영국 내의 여러 언론사에 독일 정치와 외교와 관련된 인터뷰와 조언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EU내의 독일의 포괄적 영향력을 분석한 그의 이 책은 “Berlin Rules : Europe and the Germany Way”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본격적으로 이 책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에 대해 칭찬을 하고 싶은데요. 꽤 훌륭한 번역이라고 판단될 만큼 가독성이 매우 좋았습니다.

책의 원래 제목과 국문으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이 아주 동떨어진 맥락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다소 도발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제2차대전의 독일과 오버랩되기도 하는 독일이라는 국가의 유럽 지배라는 제목은 당사자들도 역시 크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유럽의 균형 외교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담당했던 영국 출신의 한 외교관의 사소한 걱정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과한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로 촉발된 EU의 존재 의의와 8장에서 보이는 저자의 의외의 평가인 “영국이나 EU 어느 한 쪽도 서로에게 어떠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고 각자 미래의 발전을 이룰 것”이라는 문장이 다소 이채로운 부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영국 출신의 노련한 외교관은 자신의 국가와 관련된 국익과 그것에 상충되는 독일의 이해에 대해 최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글의 꽤 긍정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에게 2015년은 두 가지 사건에서 기억될 만한 연도일텐데요. 약 100만명의 이슬람 난민들 (저는 난민이라는 표현보다는 실향인들 내지는 불가피한 이민자라고 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리스의 시리자가 백기 투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2장에서는 EU 내에서 프랑스가 군사력에 대한 우위를, 독일이 경제적인 부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갖는 것에 관해서 저자의 말대로 과거 서독과 동독의 통일 과정에서 동독이라는 국가가 법적으로 완전히 해체해 서독이 이를 인수했고 그러한 흐름에서 동독의 통화가 서독의 통화와 1:1 교환을 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서독 국민들의 복합적인 고통을 언급하는데요. 독일 국민들 스스로가 통일과정에서 겪은 여러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충분히 감내했는데 왜 그것도 고통의 강도가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좀 더 도덕적으로 강화된 그리스의 재정 정책에 왜 그런 죽는 소리를 하는가에 대해 독일 내부의 입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경제의 독특한 ‘도제 시스템’, 기업 내의 노사간의 각 단계의 갈등에 대한 의무적인 합의, 대다수 독일 기업들의 높은 도덕적 경영 등이 독일 경제가 현재에 이르러 전세계에 영향력을 보이는 근원이며, 물론 여기에는 독일 정부가 자국의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들도 포함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해외에 만든 생산 공장들의 정치경제적 위치와 독일 현지와의 확연한 차이와 특수 직업군에 대한 면허제도와 오로지 독일인들만이 이런 일에 종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견제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는 “독일에서는 과거 영국의 옥스브리지 세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제조업이나 민간 경제 부분을 멸시하는 풍조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고 언급하는 것에 독일 국민성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EU내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독일은 유로화와 관련된 이득도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한 편입니다. 실질 환율과 관련된 부분과 수출 상품에 대한 영향력에 기반한 EU내의 흑자 달성은 물론 독일 제품의 우수성이 답보된 결과이긴 하지만 유로화의 확대에 따른 독일의 분명한 이익과 ‘솅겔 조약’이 기반이 된 사람과 제품의 열린 접근성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독일 총리 메르켈이 2015년에 100만명에 가까운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게 되었는데요. 바로 솅겔 조약에 대한 독일인들의 신념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자신의 글에서 앞선 메르켈의 결정에 다소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순히 메르켈이 휴머니즘에 입각해 그런 판단을 했던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후에 헝가리가 맹렬히 반대하고 있는 이슬람 난민들의 EU 분산 할당에 과거 빌리 브란트 총리 이후 독일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폴란드가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기권한 것에는 독일 총리의 결정이 또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8장에서 앞으로 EU가 20년내에 이러한 이슬람 난민의 유입에 어떻게 대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있는데요. EU군의 창설 움직임과 더불어 이것은 EU의 큰 도전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유럽 통합에 나서고 있는 EU체제에 대해 저자는 독일이 과거 전범국의 역사를 뒤로 하고 협력의 가치를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사를 부정하고 회피하고 있는 어떤 나라와는 달리 독일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직시했고, 수도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기념물은 이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독일의 수많은 정치인들이 실질적으로 참배를 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맥락입니다. 이런 독일에게 EU체제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왔고,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8개국과 전반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에 노력한 것도 과거를 긍정적으로 단절시키고 미래를 나아가기 위한 시도였을 겁니다. 다만, EU내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재정 위기 국가에 독일이 어쩔 수 없이 지원을 수락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에 대해서는 완전 항복을 요구한 것은 꽤 불합리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 경제적 규모가 성숙되지 않은 루마니와와 불가리가 유로화 경제 체제에 편입되지 못하는 상황이나 유로화를 통한 건전한 재정 정책에 해당하지 않는 국가들이 통합 경제에 따른 이득을 위해 들어온 것은 그리스와 같은 문제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덴마크가 유로화에 거부권을 갖고 스웨덴 역시 그러한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앞으로 독일이 주도한 ‘유로화 체제’에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영국은 이러한 EU체제 탈출에 꽤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종래에는 EU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입국의 외교와 군대가 통합되는 것에 대해 영국은 분명 반대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밝힙니다. 특히 파운드화가 유로화에 편입되는 것을 극히 거부했던 것이 주요 원인이자 이런 EU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중첩되어 있으며, 독일의 상품이 기존과 다름없이 영국 시장에서 자유로운 접근을 원하는 것에 양국의 협상력이 좌우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국의 이득이 기반된 성공적인 EU체제의 완전한 탈출을 바라는 영국에게 이러한 독일의 이해가 매우 중요한 지렛대가 되지 않을까 예측해 봅니다. 과거처럼 독일이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결단을 프랑스에게 미루게 된다면 영국의 완전한 브렉시트는 아마 어려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EU체제를 대표하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대표국이 프랑스로 국한됨으로써 프랑스인들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이득이 상당할 것이라는 예측에 저역시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은 전후 과정에서 독일의 재건과 냉전 시기를 거쳐 유럽 통합에 노정을 다한 독일에 대한 전반적으로 개관적인 해석과 유럽 정치사를 간략하게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EU에 대한 긴밀한 이해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꽤 유용한 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메르켈이 왜 푸틴과 그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적잖은 이해를 얻게 된 점과 독일의 의회 정치 전반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점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독일의 의회 정치가 미국의 의회 정치와 완전히 다른 구도를 갖고 있으며, 최종 권력자에 대한 제1 야당의 경쟁자가 기능적으로 불필요한 정치 조건을 갖고 있다는 점은 꽤 놀랍기도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브렉시트와 그리스 문제 및 EU체제 및 유럽에서의 NATO에 대한 함의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글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EU내에서 군사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기득권이 경제적으로는 독일과 프랑스의 연계가 있었으나 영국이 브렉시트를 감행했기에 앞으로 이것과 관련한 정치외교적 대차대조표가 어떻게 나오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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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시대
세르주 모스코비치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세르주 모스코비치는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사회 심리학자로 동시에 유대인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에 이르는 시간을 살아온 우리와 거의 동시대인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는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사회주의와 스탈린을 맹렬히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 이 책을 통해서도 그가 기울인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얼핏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와 비슷하게 군중 혹은 대중에 대한 좀 더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측면의 주장도 펼쳐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스타브 르 봉에 대해 약간 과장하자면 학문의 사조로 여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만합니다. 영문 위키에 그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행적들이 보이는 데, 읽어보니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스탈린주의자와 파시스트를 동격으로 보는 점은 그의 지난 삶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아마도 1981년 불어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인정하는 이상률 선생이 번역을 맡았기에 꽤 오래된 판임에도 흔쾌히 책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996년에 출판되어 얼마 안 있다가 절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런 책이 2쇄를 찍었을리는 조금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겠죠. 그래서 모쪼록 빨리 재간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9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분량은 거의 600페이지가 넘기도 합니다. 상당한 두께에 저 역시 이 책을 오래 잡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앞서 말한대로 이상률 선생의 번역은 정말 나무랄 데가 없기에 가독성은 꽤 훌륭했습니다. 전체 분량 가운데 1부 부터 3부까지 세르주 모스코보치의 핵심 주장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뒤이어 5부와 6부는 집중해서 읽어야되는 부분이었고, 7부부터 9부는 대략 일종의 지도력에 대한 부분이라 이후부터는 일독이 꽤 수월하였습니다. 맨 처음에 저자는 민중에 대한 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지도자의 지도력과 의무가 비롯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무릇 “국민의 진보와 자유라는 대의에 봉사”해야 하고, 또한 이 민중 혹은 군중을 단면적인 측면에서 이들의 이기심 (내지는 욕망)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약간의 아쉬움과 바람을 글 전체에서 토로하고 있는데요. 즉, 이 군중들을 설명해주는 ‘군중 심리학’이 더욱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심도있게 연구되고 이를 통해 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어야한다고 그 당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군중심리학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귀스타브 르 봉과 가브리엘 타르드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입니다. 물론 아주 짤막하게 ‘대중의 반역’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전반부인 2부와 3부에서는 광범위하게 귀스타브 르 봉의 주장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귀스타브 르 봉은 개인과 군중은 매우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이런 개인들이 모인 군중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군중속의 인간은 오히려 나쁘다”는 측면의 이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움직이며 우글거리는 이 사회적 동물들 - 군중- “은 개인과 달리 행동과 사고에 있어서 평균 이하의 측면을 보이고 이들을 통해 19세기는 난폭하고 유순한 유동적인 군중의 폭발 세기로 저자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앞선 이해에 기반합니다. 더욱이 양차 대전 이전의 시기에 폭발적인 판매고를 보인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히틀러와 무솔로니가 끼고 있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한 술 더떠 저자는 히틀러가 귀스타브 르 봉의 후계자라고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3부에서는 이 군중들이 지도자들의 선동과 암시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인식과 이해를 보이기 시작하고, 매우 충동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며 사뭇 통제가 되지 않는 일면을 보이는 군중에 대한 여러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에 대한 다소 이런 부정적인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는 통제력을 갖추기가 어렵고 많은 군중들은 사회의 질서와 통제를 위해 독재를 바라기까지 한다는 서술에서는 저로서도 이 점을 완벽히 부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지도자들의 선동과 진실과 거짓이 적당히 섞인 프로파간다에 군중들이 매료된다면 그것은 일관된 그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선동하는 지도자들이 앞선 프로파간다를 ‘질료’ 삼아 정치를 자신의 뜻대로 이끄는 것이 옳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죠. 물론 정치가 개인들의 이기심에 귀기울여 적절한 선을 제시하는 것이 맞다면 모든 군중이 그런것에 휩쓸리는 것은 어쩌면 자명해 보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세르주 모스코비치는 이런 군중과 관련된 해석 가운데 꽤 비범한 대학생 개개인에게 어떤 과제를 주지시켰을 때 쉽게 이해한 반면에 이들이 모인 클라스에 똑같은 수준의 강의를 시작했을 때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는 사례를 들며, 오늘날 꽤 고학력의 사회가 된 시점에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과연 모스코비치가 말하는 휩쓸림과 일방적 전도에 빠질지는 꽤 많은 숙고가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저자는 3부 5장에서 지도자가 위선적이고 사기꾼이라고 추론해서는 안된다고 이 군중의 사적 요구와 욕망을 지도자가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서로가 마땅히 필요해 벌어지는 고도한 정치적 과정으로 그는 여기고 있었습니다.

특히 앞선 바와 반대로 저자는 “대중들 특히 군중들 각각은 이론가들이 기술하고 정치가들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국가, 민주주의를 수립하고 싶어한다”면서 이 민주주의적 과정에 “이 이상들이 아무리 절대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은 예외없이 안정된 정치체제의 형성을 방해한다”고 민주주의적 한계를 언급하며, 통제되지 않은 정치를 저자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애초에 모스코비치는 글 서두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 군중에 대한 이해가 과연 현대 사회에서 쓸모가 있을지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인 “무엇보다 군중 정치가 결국 전제 정치로 귀결될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주장합니다. 즉, 그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군중들이 지향하는 정치가 결국 전제 정치로 도달할 것을 다소 경고하면서, 군중 정치 자체의 사실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군중 심리학적 여러 가설 중 현대 사회의 전제주의적 경향을 강조하고 이런 군중 정치의 배경이 되는 민주 국가들 가운데 일본과 같이 오랫동한 한 정당이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을 이것에 대한 예시로 들고 있기도 합니다. 더욱이 “파시즘을 필두로 한 노골적인 전제정치가 군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현대사의 무대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앞선 이해와 동일하다 볼 수 있습니다.

집단 현상의 에너지를 발견했다는 이 군중 심리학은 2차대전의 파시즘과 냉전을 오롯이 경험한 이 학자에게는 꽤 불안한 소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내내 양가적인 측면에서 주제의 양 쪽 전부를 판단해 내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모스코비치는 과거 세기의 어두운 정치를 너무 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2014년에 작고한 그가 앞으로 변화될 현대 정치의 사조를 아마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군중이 되어 포퓰리즘의 선봉에 서는 이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또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무덤으로 내치고 제2의 파시즘을 초래하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9부 생각하는 것의 금지가 어떤 의미일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수의 정치가 주요한 원동력이 되어 민주주의에서 좀 더 평등의 정치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람입니다만 엘리트주의자들을 비롯해 소수의 힘있는 자들은 아마도 다수의 대중 정치를 ‘폭거’내지는 ‘어리석음’으로 가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내는 이런 과장들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시민 모두가 냉철한 이성과 매사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러미 벤담이 자신의 사상을 펼쳐냈던 18세기에도 그와 같은 생각을 거의 불순한 것으로 매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메시아적 지도자를 갈망하는 모스코비치의 결말이 제법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바로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군중이라는 단어와 제가 신봉하는 시민이라는 단어가 같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이 글의 존재 의미는 바로 우리가 이런 군중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명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와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 그리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을 차례대로 일독하시면 이 책의 면밀한 이해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얼른 이 책이 재간행이 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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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무엇인가? 교양인을 위한 역사 강좌 1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남상구 옮김 / 역사공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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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요시미 요시아키는 도쿄대를 졸업하고 이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일본 명문 사립 대학이라 불리우는 주오 대학의 상학부 교수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잡게 된 계기는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의 ‘책임에 대하여’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언급 되었기 때문인데요. 2013년에 번역되어 읽기에 분량도 그리 많지 않고 주제와 관련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비전문가인 저역시 쉽게 일독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된 연유에는 가수 김장훈 씨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함께 뉴욕타임스퀘어 전광판과 뉴욕타임스에 실었던 위안부 관련 광고에 대해 부정하는 광고를 올렸던 일본 ‘역사사실위원회’의 역사 기만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한일 양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연유에는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의해서입니다. 이때만 해도 일본 정부는 김 할머니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했으나 관련자료가 1992년 아사히 신문에 공개되고 나서야 이듬해인 1993년 8월 4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담화가 발표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이후로 일본의 역대 정부는 이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방침을 내보였으나, 아베 신조에 의해 철회될 가능성에 놓이나 2011년 미 오바마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해 아베는 이 고노 담화 무력화를 백지화 시키지만 총리 개인의 입장을 떠나 다른 정부 인사들이나 보수 우익들 및 민간 극우 인사들에 의해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제국군의 조직적인 관여는 전혀 사실 무근으로 오도되기 시작합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소위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고 나서 미국 언론들은 일제에 의해 운영된 위안소에 있었던 위안부가 총 20만명에 달했다고 밝힌바가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조선인과 중국인이었던 이 위안부들은 감언으로 유인되어 남치와 감금을 포함한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적인 상황이었는데요. 당시 일본 제국 형법에 의하면 “국외 이송을 위한 인신매매와 유괴는 범죄이다”고 규정하고 이 형법은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만에서도 유효한 법이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아베와 그 무리들은 당시에 군에 의한 개입이 아니라 민간에서 이뤄진 행위라고 일축하고 있는데요. 당시 서슬퍼런 조선총독부 휘하애 헌병과 경찰들의 시선을 피해 조직적으로 다수의 조선인 처녀들을 국외로 반출시킬 수 있는 자원을 갖고 있는 자들이 과연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 형법 조항을 무시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저 역시 이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식민지에서의 법 준수와 관련한 논증에서도 “도항을 위한 신분 증명서를 발급할 경우에도 직업 계약 등을 조사하고 ‘부녀매준’과 ‘약취유괴’ 등의 사실이 없도록 특별히 유의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것은 군의 요구에 따른 특별 규정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다만, 일부 위안소의 인원과 운영이 해당 윤락녀들을 동원했던 부분도 분명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조선과 중국의 농촌 지역의 순진무구한 처녀들을 감언으로 유인해 군의 후방 지역에 강제로 거주지를 제한시키고, 거의 100 : 1 의 비율로 병사들을 받게 하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이 위안부들의 자유의사를 반영한 것인지 그리고 이런 비탄스런 상황에서 아무리 일부 병사들과 관계가 좋고 대화가 통한다 할지라도 이들 위안부들의 처지가 결코 위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동원되어 나온 병사들의 처지와 이들과 같이 생활하는 위안부들의 동병상련이 있었다고 말하는 어느 교수의 발언은 과도한 짜깁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 위안부라는 표현은 진실을 오도하는 측면이 있어서 시급히 ‘군 성노예’라고 통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저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일본이 국제 사회에 책임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어린 사과와 인정이 필요하다고 분명 직시하고 있습니다. 군에 의한 강제적 동원이나 아니면 그렇지 않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과 성폭력 상태로 내몰고 자신에 의사에 반한 행동을 강요한 것은 그것 자체로 범죄행위임을 일본 당국은 시급히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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