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세습 - 불평등에 공모한 나를 고발한다
매튜 스튜어트 지음, 이승연 옮김, 이상헌 감수 / 이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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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 출신의 철학자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 매튜 스튜어트는 과거 프린스턴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길, 풍족한 중산층의 가정에서 자라나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함 없는 삶의 길을 걸었다고 먼저 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번역 출간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에서 독자들에게 전한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데요. 어찌됐든 이유와 변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진실성으로도 여겨집니다. 책의 초입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스튜어트의 이 글은 미국의 시사 월간지 애틀란틱에 실린 글을 따로 번역 출간한 것입니다. 원제는 “The 9.9 Percent in the New American Aristocracy”로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10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자신을 포함해 책에 함께 등장하고 있는 미국의 9.9 퍼센트 계층에 대해 소위 능력자 계층 meritocratic class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리브스나 마틴 길렌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중산층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능력자 계층이라는 조어를 글에 담고 있는데요. 이것은 의사와 변호사들을 포함한 고학력의 능력있는 화이트 칼라를 이르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스튜어트는 “우리는 우리의 성공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단순히 능력이 모자란 탓에 우리 계층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을 덧붙입니다. 좀 더 달리 표현하자면 마찬가지로 어느 부모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되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그 보편적 권리를 향유할 정당성이 있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조세 제도에서 이들(능력자 계층)에 대한 과도한 혜택 등과 같은 불평등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 단순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여러 사회학자들이 분석하고 연구한 사회적 계급의 분화와 반대의 고착화와 같은 부분에 어떠한 기준을 놓고 단정지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초기 자유주의 시대의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자체가 건전한 계급 이동을 용인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 사상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불평등 국가인 미국과 같은 사례에서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선명한 계급 이동성’이 차츰 무너지고 있으며, 이러한 복잡한 과정의 실체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하지만 이 선상에 놓인 현상 자체는 단지 불평등의 심화가 가시화 된 것 뿐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새겨들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소위 능력자 계층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집단적으로 불평등을 선택했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사실상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 개인들의 능력차는 어쩌면 개성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능력차에 따른 급여 차이와 직장 선택의 문제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저자가 다소 직접적으로 밝히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 대졸과 고졸의 임금차이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나는 것은 대졸과 고졸이 할 수 있는 일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짧게 첨언을 한다면, 최상위 대학 출신자들을 우대하는 일반적인 기업 정책들이 과도화되고 대학 이후의 사회적 재교육이 대체로 전무하거나 접근이 어려운 것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정부의 역할 분담에서 사회 현실이나 경제적 조건 등 여러 요인들을 차치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책임이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특히 저자도 밝히고 있거니와 “이런 전문직종이 포함된 능력자 계층들이 속한 직업 단체들이 결사의 권리를 이용해 급여 획득과 사회 영향력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그것을 공익적 목적이라 이해하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결사는 그 반대로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글에서는 “맹비난 받는 생산계층”이라는 표현으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도넘는 미국 내의 비난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참으로 고착화 된 계급 폐쇄성과 더불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사회를 분열에 이르게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약간 결론에 어울리는 말이긴 합니다만 경제적 불평등과 수많은 노동자들의 현격한 착취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것 자체가 건전한 민주주의 시스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대물림 하려는 의도를 단순히 개인적 호불호 정도로 넘어가지 말고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개선이 시급히 필요한 것도 크게 보면 우리의 정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미국의 상황은 우리와는 적잖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여러 수치로 봐도 우리의 불평등 상황은 외연적으로는 심하게 보이지 않기도 한데요. 다만, 미국은 조세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고 “현재 미국 GDP 중 12분의 1은 금융 부문에서 발생한다”는 저자의 자료를 보더라도 금융 부문에 대한 조세 감시와 재설정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일들이 지속되다 보면, “서서히 경제의 목을 조르며, 민주주의를 말살하게 된다”는 예상이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정치 전반이 반지성주의와 비이성에 휩싸여 정치 자체가 건전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에서 부터 10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 능력자 계층들이 스스로 불평등 문제에 침묵하고 이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의 보장으로 여겼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정부나 공공부문이 모든 사회 문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미국인들이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소중히 여긴다면 단순히 푸드 스탬프를 능력 밖의 사람들에게 남발할 것이 아니라 과도한 일부 계층에 대한 경제적이고 지위 강화적인 정책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거듭 중요한 것은 정치적 불신과 사회 분열에 놓여 있는 이 상황의 요인들을 각각 따로 놓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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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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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 카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인 여성 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비엔나 자이퉁의 프리랜서 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외르크 하이더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의 극우 포푤리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정치 공세에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등, 오스트리아 국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정치적 실험과 맞닿아 있는 이 책은 원제 “Ich Und Die Anderen”으로 지난 2018년 출판 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는 이졸데 카림의 이 책은 과거에 읽었던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라는 책의 꽤 훌륭한 답변으로 여겨졌습니다. 전 유럽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주의적 반이슬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시작된 우리, 유럽의 시민들? 은 그 결론과 앞으로 나아갈 길의 납득할 만한 해결책과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림의 이 글이 그것을 채워넣는데 정치사회학적으로 적절한 보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또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카림은 글이 시작되는 도입에서 계몽의 근대 이후 개인주의적 세대의 구분으로 1세대부터 2세대, 3세대의 시기적 근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권리를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이 개인주의가 태동했던 옛 1세대부터 1960년대에 다소 성격이 변화된 2세대, 그리고 오늘날 어떠한 권위와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정치사회적인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3세대까지 곳곳에서 피터 버거의 영향을 받은 그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벌거벗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겼던 다원주의 및 다원성에 대한 당위성을 앞의 개인주의적 여건과 시대 상황에 근거에 꽤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민주주의에 왜 다원성이 중요한 가치인가에 대한 대답을 저자인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여기에 민족의 형성과 민족주의 담론에서 출발해 비교적 성공적인 안착에 이르렀던 민족과 민주주의와의 정치적 상호 관계와 최근에 전유럽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슬람 이주민들의 이민 행렬이 근대적인 민족 개념의 민주주의 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상황을 제법 내면화된 목소리로 밝힙니다. 민족이 과거와는 달리 그 영향력을 실종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민족이 전언되고 그것을 새로운 대두라고 일컫는 것은 꽤 설득적입니다. 이에 좀 더 첨언을 하자면 민족이라는 개념이 각각의 민족에 속하는 이들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한울타리로 동질성과 공감대를 만들어 근대 국가의 형성 및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면 근래 ‘액체 민주주의’로 이반하고 뒤이어 국민의 개념까지 모호해지는 것으로 봤을 때, 민족의 허물어짐은 그 영향이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인 그녀 역시, “민족 정체성은 다원화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이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짚고 넘어거야 할 점은 “원천적인 다양성은 기분좋은 공존이 아니다”라는 전제입니다. 다양성에 따른 다원주의와 다원정치가 실상 모두를 만족하기는 어려우며, 개인주의화 된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타자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통합은 동화가 아니다”는 명제가 이를 반증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꽤 이채롭게도 제 3세대의 개인주의는 사실상 자기 방어적인 기재로서 다원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소극적이든 드러나지 않든 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분석대로 1세대 및 2세대 개인주의가 그나마 서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면 3세대의 개인주의는 거의 하이브리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3세대 개인주의적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은 “그렇게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인식으로 정치적인 것에도 개인의 고유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마냥 부정당할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매락 또한 사실상 다원주의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의 6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포퓰리즘적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분노와 증오를 재료 삼아 자신들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별개로 여기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 이외의 타인들을 같은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이런 포퓰리즘 정치의 폐쇄성을 고려하면 지나친 것은 분명히 폐단을 낳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근래 논쟁적인 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우파 정치인 및 이들을 지지하는 계층이 이러한 일종의 정치적 정화 운동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접근과 태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좌파의 예를 들어 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함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 정치적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 세력이 건전한 정치적 이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 보면 대략 이들이 만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열된 정치 전략에 따라 포퓰리즘적 국면이 나타났다”는 저자의 판단대로 “시민들의 계몽만으로는 포퓰리즘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실상 완벽한 다원주의적 정치는 마찬가지로 완벽한 민주주의적 토양에서 꽃피울 수 있으며, 현재의 여러 왜곡되고 때로는 각 사회를 분절된 상황에까지 몰고가는 포퓰리즘적 정치 공세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란 사뭇 어렵게 보입니다. 다만, 무작정 개인적 담론과 개인주의에 대한 열망에 기대지 말고 우리가 과거 민족주의적 사회의 공감대와 같은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서로의 연계성을 다시 부활시키고 이것을 해묵은 전통주의적 복고로 몰고가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다원화 사회에서 핵심적인 불의와 차별을 균등하게 하려는 정당한 도구”라는 저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러한 과정에 제일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서로가 동등한 대화 상대로 파악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개인적 고유성과 권리를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용기가 아닌가 먼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끝으로 저자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오늘날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반이슬람주의가 2차대전 전후의 파시즘의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관습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사법 당국의 판단이나 비이슬람 시민들의 정서가 과연 어떤식으로 결론이 날지 아직은 묘연합니다. 자크 랑시에르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첫걸음으로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사회 통합에 나서는 길로 바라 봤듯이, 얼마간 민족주의 향기가 남아있는 이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에 앞으로 이 반이슬람 정서가 어떤식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따로 꼬집어 언급하는 것은 근래 극심한 경제적 차이로 인한 다수 시민의 현재적 고통으로 봤을 때, 정치와 사회가 이 혐오와 분노를 자양분 삼아 과두제를 거쳐 결국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 유럽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정치적 과정을 주의깊게 보고 있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반이슬람 정서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만 하는 선결과제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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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 실업에서 잉여로, 새로운 빈곤층의 탄생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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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 혹은 액체 근대, 쓰레기가 되는 삶, 인간 쓰레기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창안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회사상가이자 사회철학자였습니다. 제가 서평을 남긴 그의 책은 꽤 여럿 되지만, 그의 유고작이었던 레트로토피아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소회를 남긴 것처럼 우리에게 바우만은 지금도 몹시 필요한 사상가이자, 또한 귀한 비판적 지식인이었지만 그래서 그의 부재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바우만은 유대계 폴란드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사회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근대와 지나간 근대가 밟아왔던 비인간성에 주목, 평생을 들여 이 문제에 천착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관련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지난 1998년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라는 원제로 초판이 발행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가장 최근인 2019년 4월 추가된 5장을 포함한 2004년에 개정된 2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대량 산업 시대라고 불리우는 근대 산업화 이후 변화된 기존의 노동 윤리가 어떤 식으로 자본의 이익에 부합되었고, 그 와중에 쓸모를 잃은 빈자들의 전반적인 현실적 문제에 이어 오늘날에까지 이를 연장해 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빈자들이라는 관계에서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1장은 공장 자본가들이 개입해 변질된 노동 윤리를, 2장은 소비 지상주의의 부상을, 3장은 역사상 꽤 단명했던 복지국가의 실체를, 4장은 오늘날 변질된 노동 윤리 상황에 놓인 빈곤층, 5장은 총체적인 측면에서 지구화 된 세계의 노동과 잉여를 살펴보고, 6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배제된 빈곤층에 대한 전망을 사회 전체적인 모습에서 조망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기 이전의 네덜란드와 독일의 유수 길드에서 평생을 바친 수많은 장인들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노동 윤리는 특히 제품 생산에 따른 노력에 있어서 이들의 책임감을 강조했고 일부 사회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전통적 노동 윤리가 보통의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포드주의를 비롯한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현실에 불만을 갖지 않고 현장 관리자에게 순응하면서 그 유명한 ‘시장적 효율성’을 발휘시킬 수 있겠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변화 혹은 변질되게 됩니다. 이러한 변질은 바우만의 평가대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라고 볼 수 있는 “도덕적 책임과 정의”를 사실상 사회에서 박탈했으며, 시장 자체가 정당한 법치 제도에 기반해야함에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묵인했다고 그는 또한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에 진보주의적 개혁가로 알려진 제러미 벤담 조차 노동 바깥에 있는 빈자들에 대해 가혹한 구빈소에 쳐 넣거나 일원화된 규율로 이들을 계도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 부유층과 중위층의 불안과 두려움은 1장에서 노동 윤리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회적 통제에 벗어나 질서와 통제를 뒤흔들 것이라고 보는 벤담 시대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 관념에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아마도 그것이 본질적이든 않든 간에 대부분의 일반 계층은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아니, 최소 1972년 전까지는 가난한 자들과 역외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계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뒤에서 살펴볼 전세계 노동 계층의 불안정성과 보편적 복지에 대한 공격, 대처 정권 시절 있었던 자산 조사에 의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 등 최하층의 계급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그러한 상황에 처했으며,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보는 시각은 꽤 멀리나 팽배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뒤이어 2장에서는 우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반적인 생산자이자 곧 소비자라는 양 측면의 시장 행위자임을 전제하고, “선택이 소비지상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것”과 “소비자는 파산의 두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외상으로 구매를 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소비자의 지상과제이자 미덕이라는 바우만의 일침은 인간의 노동을 도구화 내지는 상품화시켰던 자본주의의 의도와 맞물려 그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소비품에 대해 각자의 이기심을 발휘해 욕망을 실현시키라고 외치는 소비 지상주의의 논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의 극대화는 전반적으로 비대한 소비 풍조를 잉태했고 즉, 대량 생산-대량 소비라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양 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소비 대열에 자원의 부재로 배제되었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불안한 신분과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국가의 안정책 및 이들에 대한 탈정치화가 극심하게 맞물린 결과로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들이 소비 자본주의에서 배제되었다고 논평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것이 주변을 강제로 제압하는 자본주의의의 실질적 모순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듯, 1972년 이후 복지 국가의 개념이 후퇴하게 되고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의 대처 시기에 자산 조사를 통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과 같은 정부의 행동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 포용이 아니라 배제를 초래했고,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사회에서 거부된 자들에게 이런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의 진짜 가치 혹은 추정적 가치를 재확인한다”고 바우만은 더 덧붙입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있었던 흑인을 비롯한 미국내 유색인종의 대학 입학과 관련된 인센티브 제도는 흑인들 스스로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는 미명하에 말도 안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를 철폐해 달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사회적 보장을 비롯한 복지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내부의 인식은 주로 이와 같으며, 개인 선택의 문제라든지,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일어나 성공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의미로 되새김되고 있습니다. 바로 마틴 길렌스의 일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복지에 대한 연구가 이를 입증해, 꼭 길렌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복지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로 요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 도입부에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를 떨쳐낸 최근의 노동 윤리가 사회 전체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대한 보장과 안정성을 얼마나 박탈해 왔는지 바우만의 논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량 생산 시기의 노동자들을 한데 묶었던 이 노동 윤리가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결정에 의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장 자본가와 이들 주변의 이익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자본가들이 시장과 생산 공장에 순응하는 노동관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했고 상대적으로 이에 걸맞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우만이 언급하는 이 역외 계급이라는 정의는 꽤 광범위한 의미이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계층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낙인 효과와 당연히 이들을 도태시키고 배제해야만 사회적 질서와 통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허버트 스펜서를 꼽지 않더라도 토마스 칼라일과 같은 이들이 이에 동조했으며, 이 책의 마지막 6장은 이러한 불길한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교도와 관련된 공무를 민간에 외주를 주고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역할을 자본과 민간이 맡게 된다면, 더 나아가서는 이들 빈자들과 역외 계급들을 따로 관리하는 대형 수용소가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한 비인간적 수용소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철저하게 분리시킨다’는 주장 하에 이에 동의하는 ‘만족하는 다수’가 출현한다면 그것의 가능성을 영원히 배제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스스로를 옥죄었던 정교일체와 봉건주의를 타파한 바가 있습니다. 비로소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확인시켰고 그러한 가치 아래에서 공화주의와 민주 정치가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민주적 가치가 서로 격렬하게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널리 확대되어 왔습니다만 이에 관해 작고한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시장이 민주적 통제하에 있고, 민주 정치는 다원주의적 가치를 지지해야 시장의 왜곡과 전체주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단순하게 일을 통해 보람을 찾으라는 소위 전문가들의 논법에 설득당하지 말고 노동 자체가 삶을 풍족하게 하는 다른 수단들 가운데 한가지가 되어야 하며, 바우만의 언급대로 직업적 소명 의식이 사실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봤을 때, 이를 반대로 뒤집어 엘리트 계층들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 안정성과 각자의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는 ‘만족하는 다수의 출현’을 위해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 우리에게 있어 시장과 자본주의는 중요하지만 여기에 도덕적 책임과 정의 그리고 공공의 정치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두가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삶을 향해 나아간다면 사회는 분명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부정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을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봤습니다. 바우만도 역시 이런 당위성에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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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 도둑 정치, 거짓 위기, 권위주의는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유강은 옮김 / 부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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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들 중 매우 특별한 관심사를 갖고 있는 티모시 스나이더는 중부 및 동부 유럽 역사의 권위자이자 특히 2차대전 당시 전체주의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던 바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유수의 대학인 브라운 대학과 영국 옥스포드를 거쳐 런던 정경대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정치철학의 주제를 포함한 여러 주저들을 출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한 여러 국제 학술상들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작년인 2018년 처음 출간되어 국내에는 아주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19년 9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한 논점은 서방의 정치에 무차별적으로 개입한 러시아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더불어 익명의 누군가들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가짜 뉴스들과 진실인 척 현실을 오도하는 온라인 상의 주장들이 몰고온 현실 정치의 여파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풀어보면, 과거 이반 일린이라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이론적 외관을 가진 지식인의 사상을 기초로 ‘대속자’와 ‘영원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으로 현재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 및 러시아 정치’를 이론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책에 삽입된 저자의 특별한 한 구절에 괜히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요. 그것은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라는 설명입니다. 저자인 스나이더의 입을 통해 현재 러시아가 최종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세계의 중요한 축들인 미국 정치의 교란과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를 “마더 러시아”의 가장 시급한 이익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익 경로 안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교묘하지만 매우 직접적인 전쟁과 유럽 각지의 극우 정치인들과의 연계를 여러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일관된 논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국제적 정치행위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현실 정치가 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이 책 6장에서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경고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과두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표심과 정치 배경을 분석해 자신들의 이익에 규합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디지털 과두제 (digital oligarchy)라는 꽤 신선한 용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러시아는 수많은 해커들과 사이버 전사들을 동원해 이미 영국에서 수많은 영국인들에게 유럽 연합 탈퇴가 그들에게 이득이라는 자기 암시의 영향을 끼친 수많은 봇을 투입해 성공한 바가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2016년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 페이스 북이 가짜 계정 580만 개를 폐쇄한 일이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 발로 꽤 신빙성 있게 의심되는 수많은 봇들이 악성적 가짜 뉴스를 만들어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허위적 판단을 이끌게 하고 그런 식으로 정치화 시킨 것은 꽤 소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현재 세계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정부의 그림자 안에 수많은 해커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마냥 부인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더욱이 현재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는 무늬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전제 독재 정치라고 규정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어서 양자 사이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객관적이기도 합니다.

이 책, 4장에서는 러시아의 복합적인 정치적 속내가 녹아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입이 사악한 측면에서 얼마나 왜곡되고 날조된 가짜 뉴스들을 사용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의한 소행이라고 주장한 지난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 사건과 우크라이나가 무고한 러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스스로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고 하는 등의 수많은 가짜 뉴스들을 살포해 유럽의 일부 언론들이 이를 수용적으로 인용하는 등의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여기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매우 소극적인 대처로 말미암아 전세계 국가들에게 인정받는 주권국인 우크라이나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러시아의 직간접적인 작전과 군사 개입에 무너졌던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대량의 핵무기들을 러시아로 귀환시키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보증한 1994년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어떻게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는지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논외로 북한의 김정은이 리비아의 카다피 축출보다도 실제로 핵무기를 잠시나마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반출하고 나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자신에게 교훈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두 강대국이 보장한 이 안보 메모가 우크라이나에게 어떻게 작용되었는지 고민해 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차대전 당시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침략을 차단하고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대응의 의지를 보인 이후 현재 푸틴 치하의 러시아가 보이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 때문에 초래되었다’, ‘전세계에서 러시아를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음모다’라고 러시아 정계와 현지 언론에서 주장을 하는 것은 정치와 언론이 시민들의 정상적인 정치적 견제와 활발한 토론이 전무하면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온라인과 네트워크 상의 수많은 시민들의 정치 발언과 의견 교환이 민주주의에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과거 민주주의와 시민에 대한 존 듀이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교육과 정치 인식이 전무한 시민들이 인식론적 분별력을 발휘해 과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스나이더 역시 현재 러시아의 야욕과 관련된 분량으로 논의를 집중한 나머지 앞으로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라 볼 수 있는 과두제에 대한 논의를 미국의 예를 들어 사회적 불평등과 이를 교묘히 용인하게 만드는 거대한 부 소유자들과 이들과 연계한 여러 계층들의 연합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이러한 불평등이 통치 권력의 이득으로 직접 작용되고 있는 러시아와는 사뭇 상이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스나이더는 이를 “미국 엘리트들의 절멸”이라는 표현으로 러시아가 생각하는 과두제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푸틴에 충성하는 과두제와 미국 부유층들이 원하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경제적 제도화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양자의 현격한 차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러시아는 꽤 오랫동안 푸틴 치하로 남을 것 같으며, 이들 러시아와 중국을 명백하게 ‘민주주의의 그림자를 갖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 ‘전제 독재 국가’로 이해하는 것이 정치학적인 논법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도널드 트럼프와 러시아와의 커넥션과 관련된 트럼프 타워에서의 러시아인들의 돈세탁과 트럼프와 관련된 주변 인물에 대한 러시아와의 연계는 실로 너무 엄청나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티모시 스나이더가 어쩌면 양국 정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는데요. 모쪼록 저명있는 역사학자가 괜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체주의를 유지시킨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뚜렷한 잔학 행위가 아니라, 법치를 파괴하고 국민들을 그 파괴에 끌어들이는 사생활과 공적 생활 구분의 잠식이었다”





“글 초입에 저자인 스나이더와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토니 주트와의 사소하지 않은 일화를 담고 있는데요. 당시 심각한 병마에 싸우면서도 우리를 위해 사력을 다바쳐 글을 남긴 한 역사학자의 경건한 양심에 저는 절로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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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 민주주의의 적인가, 개혁의 희망인가
미즈시마 지로 지음, 이종국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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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바대학의 법정경학부 교수로 있는 미즈시마 지로는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네덜란드 정치사 및 유럽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의 한 월간지에서의 대담을 통해 일본내에 일고 있는 포퓰리즘적 상황에 대한 진단과 동시에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외연이 침식되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쉬이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작년에 번역 출간된 연암서가의 ‘보수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역자가 부탁받고 바로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후일담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출판사가 이런 기획물로 사회정치학 시리즈 단행본을 추진해 봤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2016년 최초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 출판은 올해 10월에 이뤄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전자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 의구심을 갖고 있는 점은 이것이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 가능성입니다. 얼마전에 국내의 모 티비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수적 논객으로 참여한 한 인사가 포퓰리즘이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와 활발한 참여에 기여한 바가 있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많은 사람들의 포퓰리즘을 바라보는 순진한 인식과 관련있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C. 라이트 밀스는 대중 정치가 심하면 중우 정치 내지는 선동 정치로 귀결뒬 수 있다고 경고한 대로 비슷한 일면의 포퓰리즘은 가장 큰 문제로 대중을 선동하여 그것을 정치적 이득으로 삼는 선동 정치인의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밀스의 경고를 곧이 곧대로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가 군중 정치화 된다는 판단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가 없이는 민주주의 자체의 존립이 흔들릴 가능성에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각국의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직업 정치인들의 등장과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 불신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끊게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양 극단의 정치세력들 가운데 극우에 있는 자들이 말로는 민주주의를 입으로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사실상 엘리트 기득권층에 의한 과두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보수 (사실 극우) 티파티 운동이 진보좌파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안보와 국가 체제의 수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위해 얼마간 시민의 권리를 법으로 제한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각국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을 때, 무조건 잘못된 심증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실 포퓰리즘의 어원과 사회적 의미를 봤을 때, ‘포퓰리즘’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이고 역겨운 단어로 여기는 지식인들이 많고 정치 본질적으로 극우와 포퓰리즘의 구분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현 유럽에서 극우와 포퓰리즘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왜 포퓰리즘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과 같다는 수식에 동의하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1장의 포퓰리즘의 간략한 정의를 제외한다면 북미와 남미, 유럽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과 최근인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끝으로 포퓰리즘의 전세계적 상황에 대한 나레이션이 끝나게 됩니다. 또한 폴 태가트와 카스 무데 및 크리스토발 칼트바서 등의 포퓰리즘을 연구한 학자들의 여러 인용도 글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포퓰리즘의 가장 큰 난해한 부분은 ‘포퓰리즘 자체를 학술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포퓰리즘 현상의 정확한 학술적 법칙을 찾기가 어렵고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현실 대안이 전무하다는 점과 트럼프와 같은 경우는 위험스럽게도 많은 연설에서 대중들의 궐기를 부추기는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재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이슬람 배외주의를 거의 신념화하고 있는 점도 정치 이론적 측면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입니다.

일단 3장에서 보여지는 유럽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프랑스 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의 국가들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한 민주적 정치 제도를 수립하여 발전시켜 온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인들이 보기에는 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풍토가 견고해 보이는 지역입니다. 흔히 민주주의하에서 벌어지는 이런 포퓰리즘 현상과 이 안에서 대중을 모으는 선동 정치인들이 입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만큼 정말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저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나 이득에 귀결하려는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적절한 대안 없이 자극적인 발언으로 대중들을 오도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 소외를 느끼는 계층의 분노를 돌리고자 이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게 한다든지, 이미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3D 업종에서 이미 좋지 않은 처우에도 일하고 있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등의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않는 태도는 일반적인 정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도 역시 인용하고 있듯, 샹탈 무페는 이 포퓰리즘 정치의 영향력에 놓여 있는 이들이 나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6장과 7장에서 영국의 ‘내버려진 (left behind) 사람들’과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있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영국독립당의 사례와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는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정치적 소외에 처한 이들애 대한 어떠한 사회적 안전 보장 없이 선동과 립서비스 만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의 급격한 자유화와 글로벌화로 발생한 다수의 정치적 경계의 바깥으로 몰리는 상황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필요하고 다시 시장에 대한 민주적 장치를 만들고 사회적 안전을 재정비 하는 등의 실효적인 제안 등이 필요하나 앞선 포퓰리스트들은 이것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단지 표와 지지를 위한 이들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특히 트럼프 같은 경우는 당선 이후 그나마 있으나 마나한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기 위해 밀어붙인 것으로 보아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 선동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 현재 시급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단순히 저학력의 단순 노동자 계층들이 포퓰리즘적 정치를 지지한다고 도식적으로 논하기 보다는 왜 기존 정치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금보다 더 뼈아픈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왜곡해 선동하는 것이 분명 해결과제는 아니며,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고 현실 정치를 개선하기 위해 나서는 겸허한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와 이들이 의회내에서 어느 정도 발언력을 확보할 수 있게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외에 어떠한 현실적 대안이 있을지 모두가 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한대로 시민들이 모여 정치 공론화를 할 수 있는 각 개인들의 역량 확대와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 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 불신을 조장하여 시민의 정치 참여를 무익한 것으로 몰아 이익을 얻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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