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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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계의 '팝 아티스트'와 같은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대중 철학가의 이상의 진면목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자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살아 있을 적에는 이 두 사람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는데요. 물론 두 사람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혼란에 빠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폭넓게 규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젝이 자신의 이상대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론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엿보이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세계 좌파의 몰락이라는 뭔가 충격적인 상황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그럼에도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과 비판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재의 문제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인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를 많은 보수 우파들이 경멸하는 이유에는 입바른 사람에 대한 혐오와 진실을 밝히는 자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andemic 2 : Chronicles of a Time Last" 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지금 출간된 이 책은 얼마전에 번역 출판된 "팬데믹 패닉"의 일종의 보론으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근래 이 팬데믹 사태와 관련된 지젝의 철학적 비평을 담은 글들이 꾸준하게 국내에 번역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젝은 이 글에서도 조르조 아감벤의 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를 피력한 최근의 글을 비판하고, "자유가 없으면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명제에 일종의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젝은 "자유지상주의자와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및 백신 거부자들"과 함께 아감벤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봉쇄와 시민 격리를 많은 자유 우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적 음모"라고 몰고 갔던 것을 돌이켜 보면 지젝의 이러한 해석이 어떠한 진심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2장에서 보이는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결코 교환 될 수 없는 이 가치에, "모든 목숨은 쓸모 없다"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미 팬데믹 이행 과정에서 신물나게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중요한 가치를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 극우주의자들의 논법에 지젝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시"가 이 펜데믹 사태의 본질이며, 개인의 본질적인 자유와 그에 따른 자유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극우 포퓰리즘 시위에 나선 유럽과 미국의 시위자들이 과연 자신들의 자유가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진실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음 8장에서 트럼프는 익히 이 팬데믹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그저 경제적 온존성을 위해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를 충실히 따른 많은 시민들이 불확실한 경제적 이익과 자신의 목숨을 교환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러한 과정속에 트럼프에 대한 과오는 교묘히 숨겨져 버렸으며 그가 다가오는 2024년에 백악관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시민들 모두가 위와 같은 일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첨언합니다.

전세계적 팬데믹 사태의 초기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봉쇄가 진행된 23일 만에 총 282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조슈아 사이먼의 글을 지젝은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11장에서 그가 인정하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로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제 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코로나 시대에 자신들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보이고 있지만 결국 이들에게는 강력한 일반 의지가 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젝이 비평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극좌의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모두의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행태야 말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욕망'밖에는 그리고 그외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헝가리의 오르반과 미국의 트럼프가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며 이들 정치인들의 행태가 과연 다수 시민의 안전과 이익을 염두해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프로파간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적인 시위들이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더욱 좌초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과연 건전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봐야할지는 큰 의문입니다. 지젝은 여기에 한나 아렌트의 '폭력론'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극우 포퓰리즘 운동이 좌파식의 사회 개혁과 같은 대의와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시장 자유와 연계된 자유 지상주의의 욕망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엄중한 지젝식 비꼬기"라 할 수 있는 12장에서는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병대의 주지사 납치 기도를 이 팬데믹 사태에 대한 국가 봉쇄와 같은 현실을 '공산주의'로 몰고 가고 있는 자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감벤 식으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상시처럼 용기를 내 위엄있게 죽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반역설적인 헤겔의 인간성을 차치하더라도 자유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선택이 스스로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었느냐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전혀 알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자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태로운 상황에 몰고가게 만드는 것을 무덤에 있는 존 스튜어트 밀 조차 이를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지젝은 한 술 더 떠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거부하는 것"은 개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사전적으로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적 인간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지젝은 피히테를 인용하면서 "상업적 무정부사태와 더불어 카를 슈미트가 밝힌 '탈정치화'에 따른 정치가 단순히 경제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파행에 눈을 감은 리처드 포스너의 논법과도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할텐데요. 한낱 티끌만도 못한 이익을 손에 쥐는 것이 장땡이라는 저들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은 그럼에도 많은 시민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팬데믹의 또다른 자화상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지젝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근래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동의하면서 지젝이 주장하는 자유주의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분리에 시민들이 이제는 더이상 속지 말고 나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연대에 나설 것은 팬데믹 사태에 따른 보건의 위기 뿐만 아니라 이 사태를 기화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대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요약하자면 토머스 홉스의 이성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노동자들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죄가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에게 그릇된 선택을 제공한 죄가 있다"는 지젝의 비판에 거듭 동의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인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시민 사회를 좀먹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바가 있습니다. 이 일관되지 않은 모순 덩어리의 정치인을 민주주의적 정치의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하지 말고 현재 전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프로그램'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갖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와 같은 우리의 보건 위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 지젝 역시 여기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가 죽지 않고 이러한 상황에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후반부의 결론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의 보론이 작금의 포퓰리즘에 대하 지젝의 우려로 가득차 있듯이 페미니즘과 인종 차별. 그리고 반민주주의를 낱낱이 암흑의 영역으로 빨아들인 이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 '시민들의 진정한 앎'에 대해 지젝이 강조하는 점은 이토록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백하게 좌파적 음모라는 현재의 다수의 생명을 위한 극단의 조치가 공화주의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계몽적인 역사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하는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인명 경시를 뒤에 업고 훗날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헤겔의 인간성에 대한 가치를 저버리는 것임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젝은 '자유주의적인 상업의 무정부 상태'를 비슷한 논법으로 여러 군데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아주 일관된 논법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프레임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정확히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정반대되는 과정들이 폭력적으로 부상하여 기업은 부를 쓸어 담고 국가로부터 긴급구제를 지원받는다. 코로나 자본주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동시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는 이 유규한 해방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기에 이 고귀한 전통은 외설적 포퓰리스트와 보수주의자 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일은 순전한 광기가 될 터이다

팬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선택지는 트럼프식 길과 언론에서 중국식 길이라고 외쳐대는 방식 중 하나인 듯하다. 전자가 수천 명이 죽더라도 시장의 자유와 이윤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는 길이라면, 후자는 디지털화된 국가의 총체적 통제를 개인에게 가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홍콩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대만을 폭력적으로 탈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전면적인 태평양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난, 극단적 불평등,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시가 판을 치는 세상 그리고 법적이고 경제적인 정책들이 가난을 종결시키기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부가 창출되고 유지될 수 있게 설계된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도달하게 한 것이다

진행중인 팬데믹은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을 불러내고,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지만 단기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펜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전망들이 실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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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2021-07-16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감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론인 ˝알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명확하게 언명됩니다. ˝나는 우리는 물리적으로 계속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실제로 한때(팬더믹이 있기 전 어느 먼 역사적 시기에) 존재했었다고 스스로 믿게된다는 러셀의 주장을 정확히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하여 방역과 거리두기 조치에 복종하는 우리를 윤리적 재앙, 즉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함축적 비판으로 읽는다˝ 이는 아감벤의 글에서 불편하던 지점들 몇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1)레비나스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얼굴 운운하는 곳에서 매개되지 않은 직접성을 강조하는점들 - 그게 아니라면 인간들의 관계가 항상 언어든 사회적 작용이든을 통해서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면, 왜 디지털을 통해 매개된 관계보다 직접적인 얼굴을 대면하는 관계가 반드시 회복해야만 하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까? 2)삼권분립 운운하면서 행정조치들에 대한 아감벤의 반대는 어떻게 읽더라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이행의 시기에 필요한 독재따위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고 이점에서 여타 극우 절대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것아닌가? 이점에서 그의 예외상태론도 다분히 회복해야 하는 평화로운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꿈꾸는거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함 3)이러한 점은 팬더믹 다음세상에 대한 고민에서도 자본주의 바깥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계급적 관점이 전혀 부재하다고 느껴지는데(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아감벤 책에 대한 서평에서도 뵌 적이 있고, 저는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장인이고 해서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글을 적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아감벤에 대한 댓글에도 적었듯이 아감벤의 글을 정말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역자가 브뤼노 라튀르를 기후위기(정의)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함께 놓으려는 것은 이해도 동의도 안되네요.

베터라이프 2021-07-16 18:4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chaos님. 쓰신 장문의 댓글은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사실 이 책은 지젝의 비꼼의 수사가 가득한 글이라 조금 순화해서 쓰기도 하였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팬데믹 조치에 따른 아감벤의 비판과 현 사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방관을 중점으로 잡고 글을 썼습니다. 사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아마도 스스로 자유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진듯 한데요. 그럼에도 아감벤은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탈리아인으로서 과거 파시즘의 역사와 그가 조르조 바사니를 읽었다면 분명 거기에서 드러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참혹한 배신에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어떤식으로든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공화주의적 가치에 반할 수 있는 자유 지상주의에 반대하고. 반공동체주의적인 주장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좀 더 논의를 확대해보면 신자유주의도 역시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심지어 자연 상태에 준하는 그 자유를 물론 노골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감벤도 그러한 동의를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외상태를 분석하다보면 정치인들의 도덕적 제한을 풀어주는 느낌까지 주니 말입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2008년에 신자유주의는 죽었어야만 했다는 피터 플레밍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도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전세계 금융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지고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가 직접적인 계급화의 압력에 놓였던 것은 아닙니다. 1940년대 까지는 정부와 민간 그리고 사회가 대체로 사이좋게 지냈죠 (데이비드 코츠) 그렇게 자본주의를 더이상 자본주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그렇지 신자유주의가 태반을 변화시킨 것이죠. 초기 자본주의는 그 비인간성을 감출 수 없었지만 1900년대 들어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면서 잠시 인간의 탈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인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죠. 하여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 지젝이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지젝이 아감벤을 못마땅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아감벤이 흡사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데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번 댓글에서도 chaos님께 밝혔지만 저는 신자유주의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영향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신물나는 개인의 책임, 능력주의, 개인의 배타적 자유는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힘들게 구축해왔건 계몽주의적 전통을 무력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자본주의 사회적 기구들과 원만히 타협하고 상생하는 사회가 우리가 그려봄직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전에 테크노크라트들이 만들고자 하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지배체제를 불식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는 예상과는 달리 한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대한 정부를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chaos 2021-07-1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보게되었네요. 긴 답변 감사합니다. 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나 안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기로 하고요, ㅎㅎ 아도르노와 비교에 대해서는 만일 이 비교가 68혁명기에 아도르노의 처신과 그로 인한 난처한 입장을 말씀하시는거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긴한데요, 이론적인 입장을 염두에 두시는 거라면 생각이 좀 다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벤야민과 아도르노 편지의 인용을 재인용 하고 싶네요. 아도르노가 보낸 편지에서 ˝상부구조 영역에서의 눈에 들어오는 개별적인 경향들을 ‘유물론적‘으로 전환시켜 하부구조의 인접한 경향들과 무매개적으로 병치시키거나 인과관계 속에 넣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성격에 대한 유물론적 결정은 전체과정에 매개될 때에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런 유의 직접적인 유물론, 즉 인류학적 유물론에는 낭만적 요소가 깊숙히 들어 있습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매개란 당신의 작업이 삼가고 있는 ‘이론‘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들의 이름을 명명한다는 신학적 모티브는 이제 단순한 사실성을 공포에 질려 묘사하려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당신의 작업은 마술과 실증주의가 만나는 교차로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귀신에 홀려 있습니다. 다만 이론만이, 당신 자신의 냉정하고도 사변적인 이론만이 당신이 사로잡혀 있는 마법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 물론 이를 벤야민도 인정하는 답신을 보냅니다. 저는 이 논의에서 아도르노 편입니다. 이 주제로 본다면 아감벤은 벤야민(물론 전공자니 당연히 그렇겠지만요)에 비유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7-19 18:53   좋아요 0 | URL
우선 앞에서 답을 못한 몇가지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디지털 매개로 인한 협력 내지는 그런 관계가 직접적인 대면 관계에 비해 소극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주셨는데요. 사실 저도 현재의 인터넷 수단을 통한 시민들의 활발한 공론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다만, 마누엘 카스텔이 우려한 바와 같이 아마도 온라인 상에서의 지식을 통한 의견 교환과 정치적인 대화들이 다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의견 교환이 특정 세력이나 이익 집단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우려가 있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최근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의 전개를 보더라도 물론 초기에 이 넷망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허위 사실과 거짓 그리고 증오로 점철된 터무니없는 낭설이 시시각각 퍼졌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약간 논외지만 러시아의 조직적인 서방 세계의 봇 투입과 허위 사실 유포는 이러한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양자간의 차별이 없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겠죠.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조르조 아감벤을 비교한 것은 과거 아도르노가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우파에 부역하는 지식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감벤이 전적으로 억울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슈미트를 비판하며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지젝과 일부 지식인들의 그에 대한 비판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일전에 오스트리아의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는 자신이 전개한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논리적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자신의 오류를 쉬이 인정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아감벤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감벤의 최근 우려는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과거의 아도르노가 보수 우파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도 다소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한데요. 단순 비교를 해봤을 때 두 사람의 곤란한 지경이 문득 떠오르게 되더군요. 최근에 제가 서평을 쓴 아감벤의 시론집은 저로서도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도 했는데요. 저는 분명 그가 민주주의의 확고한 지지자로 알고 있었는데 chaos님 말씀대로 자유지상주의자와 같은 문법을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이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분리되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고려해 본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굴욕
크리스 헤지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실비판적인 논픽션을 다루면서 미국에서 큰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해밀턴에 소재한 콜게이트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거쳐 언론계에 투신하게 되는데요. 이후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종군 기자로 명성을 얻고 뉴욕 타임즈의 해외 특파원으로 재직합니다. 2002년의 퓰리처 상 수상을 기점으로 프리스턴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기득권과 지배 계급에 대한 도덕적 타락과 소위 이들 엘리트들이 체제 모순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서의 여타 학문적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영어 뿐만 아니라 아랍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Empire of Illlusion"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논외지만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원제를 그대로 차용해도 의미상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번역한 출판사의 자극적인 책 제목은 마찬가지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주요 논지를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재 미국 내의 시민들이 건전한 민주주의를 답보하는 자신들의 건전성이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또한 현재의 미국 정치는 인문주의의 쇠퇴, 기득권의 권력 남용 그리고 시장중심주의 내지는 시장자유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현실의 논거에 기반하여 이를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만연된 코포라티즘 coporatism 정치를 이러한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요. 이것은 주로 이 책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더불어 1장부터 2장은 시민의 건강한 정치의식이 거세된 현재 미국 내의 '싸구려 문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많은 "대중들이 상류층의 생활과 소비 문화를 흉내내는 데 급급한" 지금의 문화를 그는 냉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과 셀러브리티 들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저급한 포르노그라피 문화에 대해 저자는 미국 대중의 실체적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는데요. 3장에서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다수 지배 계급의 소위 "죽은 글"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시민 대부분의 보잘것 없는 문해력과 형편없는 독서 수준은 자유 시장주의의 질서를 꿈처럼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배 계급 대부분의 인문학 폄하 분위기와 맞물려 그대로 이중적인 악순환의 구조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3장에서 헤지스는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진단하고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동일한 장에서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헤지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도덕성과 권력이 상존하고 균형있게 존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데요. 이는 반대로 "인문학의 도피는 양심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데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 자유와 시장 중심의 현재의 체제 전반이 탈도덕화에 직면하고, 수많은 기득권이 이 도덕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경멸을 토해내면서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에 의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이를 도대로 2장에서 대학 본연의 "지성의 탐구"라는 순수 목적이 사라지고 현재는 직업적 엘리트들을 양산하기 위한 아주 도식적인 훈련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풍조가 저급한 대중문화와 이를 방조하는 지배 계급의 의도와 아주 잘 맞물려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위 지성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의 전반적인 모습이 엘리트 지배 계급에 의해 코포라티즘 정치로 강화되고 이러한 체제에 거의 쓸모가 없는 도덕과 인문학 등을 제거한 것으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헤지스는 이 글에서 대부분의 지배 계급이 현재의 체제가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안전하게 세습하고 이것을 공고화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전부 사회의 적이라 규정 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양 팔을 마음껏 휘둘러 이것을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것은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 변호사. 기술자들이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실질적인 측면에서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이들이 시민 전체의 정의와 보건, 사회 안정성을 쥐고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최소한의 의무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건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오로지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스스로 전혀 비판할 의지 또는 심한말로 필요성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헤지스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명확히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히 더 설명해 보자면, 높은 교육과 다른 시민들에 비해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지원 받은 이들 지배 계급 혹은 엘리트들이 다수의 이익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대학에서의 교육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자신들과는 다른 시민들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평가하는 알량한 계급주의적 편견이 스스로가 다른 사회에 있다고 믿는 것으로 동일시 되어 나타나기 때문일겁니다. 저들에게는 다수의 시민 사회가 자신들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와는 명백히 다른 곳임을 스스로 현명하게 구분해 내는 감각과 훈련을 체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인식적 매개들과는 달리 우리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희생에 기초한다"고 헤지스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수 우파들에 의해 자유주의 (엄밀히 따지면 신자유주의)가 마땅히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정치 인식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정치인은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전부 소멸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많은 시민들이 체제 전반의 건전한 변화와 개혁을 요청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부르짖은 모두를 위한 이익이라는 관념이 그저 사기임에 드러났음에도" 아직도 지배 계급은 이러한 앵무새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헤지스의 이 글을 통해 얼마나 시민과 대중이 무력화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시장 자유에 따른 개인주의의 폭발적인 영속화가 얼마나 제대로 된 견제를 받지 못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올더스 헉슬리 류의 허무맹랑한 음모론 따위로 치부하는 자들이 더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냉엄한 현실음은 분명합니다. 전반적인 사회정치적 상황이 저들을 제대로 견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문제가 하루 이틀의 상황이 아닌것도 명백합니다. 그래서 헤지스가 지면을 할애해 이처럼 거듭 인문학의 복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말대로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시민들을 경멸해 마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시점에서 이와같은 현실의 '시민 건전성의 복귀'라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득권의 권력 남용이라는 부분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는데요. 민주주의적 여론 자체가 이미 시민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주도할 수 있기에, 사회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그려볼 수 없는 것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이미 너무나 가까운 상황임을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글의 5장은 매우 중요하게 읽어야 될 부분으로 여겨졌는데요. 현재의 사회경제적인 모순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바라봐야 할 지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헤지스의 노력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인간이 '선악이 혼합된 존재'라는 것에 일차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반지성주의 윤리"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이 반지성주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양면적인 정치를 설명하는 아주 정확한 잣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책도 역시 꽤 오랫동안 제 머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코포라티즘과 함께 '기업 군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요. 과두제와 더불어 생각해보니 실로 적절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책을 구입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이 책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틀에 박힌 내용일거라 짐작하고 전혀 건드리지를 않았는데 일단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겠습니다.

조지 오웰이 두려워한 것은 책을 금지하는 자들이었다

외모, 효용성, ‘성공‘하는 능력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는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이 가자 지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거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대량 학살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냉혹한 사회다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배 계급은 폭넒고 보편적인 문제들, 인문학 교육의 주제들, 즉 문화의 기본 전제들에 도전하고, 정치 경제 권력의 가혹한 실체를 조사하는 주제들을 제기할 능력이 없다

의사, 변호사, 기술자는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 직업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이 건강, 정의, 좋은 정부, 안전을 떠받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도덕적 쇠퇴는 물리적 쇠퇴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도로, 다리, 하수 시설, 공항, 열차, 대중교통 등 우리의 기간 시설이 과부하 상태이고, 낙후되고 보수가 힘들 정도로 암울한 상태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제국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제국주의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과 예산은 민주주의가 불가피하게 시들고 말라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1911년에 실업가 리처드 텔러 크레인은 인문주의자들이 "정신 활동"이라 부르는 것을 훨씬 더 신랄하게 비난했다. "쓸모 있는 사람만이 행복할 자격이 있으므로 문학 취미를 가진 사람은 누구도 행복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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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
피터 플레밍 지음, 박영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인 피터 플레밍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대학교 퀸 메리 칼리지를 거쳐 현재 런던 대학의 경영대학원인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강고한 비판자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가디언지에 정기 기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민간 및 공공 부분의 조직적인 부패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고 후기 자본주의에 따른 경영 전반에 대한 재인식과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슈거 대디 자본주의"와 함께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두 편의 논저 가운데 하나인데요.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은 최근에 나온 "슈거 대디 자본주의"의 약간의 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Death of Homo Economicus : Work, Debt and the Myth of Endless Accumula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플레밍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마땅히 죽었어야 했으며, 명확히 지금의 자본주의를 분석해 보자면 "불로소득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이 글을 통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그는 신자유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번영을 구가한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글의 2장에서 꽤 심도있게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극심하게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어 그 자체로 파괴적 경제의 본모습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날 미국 시카고 대학의 소위 '시카고 학파'가 이러한 토대를 강화시켜 온 것으로서, 만약 밀턴 프리드먼이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에 대해 플레밍은 깊은 의문을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신랄하고 비판적이며, 투쟁적이기 때문에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자와는 다른 어조를 보입니다. 또한, 전체적인 글의 구조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사례와 함께 약간의 르포 형태가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실제적으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 등지의 사례와 권력 및 기업들의 파괴적 경제 행위 및 도덕적 해이 등을 깊이 다루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보다 명확한 실체가 궁금한 분들께는 이보다 더 좋은 책을 권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적 이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고유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쉽게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로소득 이데올로기에 따른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기본 토대로 분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가 후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넘어서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자본 축적이 금융 자본에 의한 서류에 잡히지 않는 이득으로 계산되면서 발생하는 퇴행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냉엄한 실체 즉, "작은 이득이라도 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중요하며, 무한한 금전적 이득이야 말로 인간 진보"라는 그 왜곡된 신념을 까발리는게 이 책의 주요한 골자가 되겠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는 푸코가 착안한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신봉하고 뒤따르고 있던 이 자본주의가 사실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지 너무나 오래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이미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기조에 벗어나, 알게 모르게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투하하고 있으므로 해서 여기에 순수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실로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토대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요. 대다수의 시민들과 사회적 토대에서 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왔으며 이러한 이행이 인간의 진보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사실은 오래전에 끝나버린 사실이라는 것을 거듭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테크노크라트가 신자유주의와 야합하고 이를 보수주의 정치가 지원하는 형태의 변종으로서, 차라리 사회 체제의 인식으로서 그 변화가 어떤식으로 작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설적이 일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요약해 보자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그저 권력의 속성과 추이를 나타내는 수준의 협소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재계 거물 지나 라인하트는 앞선 2장의 '파괴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딱 부합되는 인물로 볼 수 있을텐데요. 그녀는 철광업계의 거두인 아버지 랑 핸콕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상속받은 인물로 종전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자수성가형 자본주의적 신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면서 현재의 3세 상속자들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플레밍이 인용하고 있는 피케티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현대 계급 구조의 바탕이 되는 것은 불로소득"이며 오히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가 이미 어떠한 식으로든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선(善)과 다름없다"고 밝힌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각각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토대의 동반자이자 동료인 이웃들을 가진 재산과 소유한 돈에 따라 서슴없이 분류하고 '구별짓기'에 나섰고 이것이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결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위기'를 후안무치하게 내뱉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화되어 왔던 그 결과로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치가 정치적 토양을 제공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시민들의 파편화를 비롯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많은 시민들의 고용 불안 등은 마땅히 신자유주의적 강고화에 책임을 물어야 했으나, 오히려 민주 정치와 정치의 무능으로 그 화살을 돌려 끝내 '시민들의 변별력'을 무력화시키고 지식인-언론-정치인의 삼자 연합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해 오늘날의 사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플레밍은 파시즘을 먼저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계몽으로 이룩한 현실을 돈이 끼어들게 됨으로써 퇴행적인 정치적 관점"을 불러일으켰다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의 극심한 금권 정치와 기필코 과두 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내심이 기반이 되고 있는데요. 플레밍은 기득권 세력과 테크노크라트의 "시민 다수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악에바친 혐오'를 언급하면서 소위 선진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각각의 국가들이 구축한 민주제도와 민주 정치가 이들 기득권 세력에게는 먼저 자본주의가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미 권력화되어 오랫동안 헌법을 고립시켜 사회 내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한 연유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더 강화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개인주의는 이를 신봉하고 있는 정치인들조차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언제나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위 전문가가 주도하는 다수의 시민 배제 정치를 원하고 있으며, 사실 이러한 기반의 인식이 정치인들에게는 충분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경제적 관념의 우월성은 이토록 2세기 이상을 지배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저자인 플레밍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대중에게 가해지는 소위 선동 정치에서 돈 자체는 자유롭고 중립적이기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대로 자유 시장이 건전한 사회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는 불확실한 그의 의견이 있지만 과연 하이에크의 그 판타지적 이론이 얼마나 사회를 위해 경제와 정치의 조화를 원했는지는 아마 어린아이도 짐작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너무나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었고 그 파급을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부조는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사실 극단적으로 뭔가 변화가 있어야만하는 것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런던의 상수도가 1990년대에 민영화 되고 나서 호주의 '흡혈 캥거루' 맥쿼리가 한 것은 요금을 올리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공선 그리고 도덕주의를 붕괴시켰고 그러한 가운데 시민들이 오로지 자본의 논리 한 가운데에 놓여 스스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 마저 보장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플레밍의 말대로 서구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되어 겉보기에는 모두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약육강식의 비인간화였던 것이죠. 앞서 제가 잠깐 소개했던 바와 같이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는 시민의 민주적 권리에 대해 치를 떨고 있기에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이념 마저도 시민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작금에 이르러서는 시민 정치가 근본적인 힘을 잃게 된 연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학은 이러한 매커니즘을 먼저 가르치고 알려야 했지만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학의 냉혹한 자본주의화는 자본에 대한 자정 기능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우려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고의 글은 너무나 많이 출판되어 왔기에 단순히 확대해석이나 음모론으로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가 시민들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나 학문 자체에 대한 접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행에 대한 긴급 구제 상태가 발생한 이후,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동안 품위있는 삶을 포기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을 바쳐왔던 국가가 비정상적인 형태의 공공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비생산적인 기업 활동을 방조하고 주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일을 지원하는 부도덕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아마 기술이 진정으로 첨단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영역은 사람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리차드 탈러는 토마 피케티의 경제적 불평등 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받고, 진정한 문제의 원인은 시카고학파 계열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있다고 대답했다

신자유주의적 독단론은 명백히 오류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비 같은 모습으로 우리 사회 한가운데를 활보한다

소위 ‘달러를 사냥하는 동물‘의 위상은 개인주의와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에서 유출된 문서를 보면 시민들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사회가 보수파의 세상으로 변하면서, 이제 임시적인 조치나 부분적인 개선으로서는 현재의 상황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지배자들은 ‘검은 돈‘을 상징하는 금권 정치가들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부의 축적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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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천국 가는 法 -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불평등에 관한 논쟁
폴 크루그먼 외 지음, 양상모 옮김 / 오래된생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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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자극적인 국문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캐나다 최고의 정책 토론인 '멍크 디베이트'에서의 토론을 글로 엮은 것입니다. 이 멍크 디베이트는 2008년에 처음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이 된 토론이 있는데요. 그것은 헨리 키신저와 니얼 퍼거슨, 파리드 자카리아 등이 참여한 "21세기 패자는 중국인가' 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소개할 이 토론에는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전 그리스 총리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미국 하원의장인 뉴트 깅리치와 래퍼 곡선의 창시자이자 공급 중시 경제학의 학자인 아서 래퍼가 참여했습니다. 앞선 부분에서 제가 이 책의 국문 제목을 비판했습니다만, 글의 원제이자 주제인 "부자들에게 감세를 해야만 하는가?" 주요한 토론 주제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Should We Tax The Rich More?"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 역시 저런 자극적인 제목 설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겠습니다.

간략하게 부자 증세에 대한 입장은 폴 크루그먼과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찬성하고 있는 반면에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반대 의견을, 그리고 아서 래퍼 박사는 일단 반대하면서도 세제 개혁과 모든 시민들에 대한 실효적인 증세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회자인 러디어드 그리피스는 마크 트웨인의 '도금 시대'를 인용하며 자본주의의 진행 방향이 다소 왜곡될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크루그먼은 이미 우리는 '도금 시대'에 들어왔다고 언급을 합니다. 아마도 크루그먼의 저 말은 '금융 자본주의의 이행'을 뜻하는 것으로 보였는데요. 두 사람의 맥락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깅리치와 래퍼는 다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미국의 상위 부유층에 대한 감세 자체가 직접 소득에 대한 징세로서 1990년대에 이미 자본 소득에 대한 감세가 이뤄졌고, 2010년에 32조달러에 이르는 눈먼 돈이 역외 기업을 통해 조세피난처에 흘러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그저 정부의 무능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깅리치는 이미 부유층이 보유한 사회적 자원을 비롯해 변호사와 회계사의 아낌없는 조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시민들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로 맞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재산을 전부 깎아 먹고 10억 달러만 남겨 놔도 그 10억 달러 만으로도 대단한 부자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 점에 대한 아주 간단한 요약을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유층이 경제력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다"는 인식입니다.

이미 깅리치를 비롯해 4명의 연사가 전부 오늘날 심화되고 잇는 '불평등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깅리치야 자신이 정치인이니 이 불평등 문제를 모로쇠로 일관하면 아마도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차치하더라도 작금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내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깅리치는 먼저 '무능한 정부'를 비난하면서 세수를 획득한 정부가 효율성을 갖추지 못해 빈곤층 문제와 어린 아이들의 의료 문제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실효적인 지원이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를 엄밀히 따져보면, 너무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방위적인 사회적 부조를 삭감했던 저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이를 통해 제조업 분야 조차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 헤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등의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를 정부의 무능으로 갈음하는 것은 단순히 반대 의견을 보내는 것보다 어리석은 논리 전개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깅리치는 꾸준하게 '효율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효율성에 매몰된 결과가 어떤 식으로 사회의 불균형을 초래했는지는 매우 명확한 문제입니다. 그런 연유로 그 효율성의 매개로 부자들이 막대한 자신들의 재산을 조세 피난처에 숨긴다거나 일류에 근접하는 변호사와 회계사를 고용해 자신들의 이익 보존을 위해 매진하는 행위가 과연 동등한 사회적 자원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것들은 따로 사례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 논리이지요.

더불어 저는 이 지점에서 보수주의 정치인의 후안무치한 인식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 토론이 있었던 2013년 경이면 아마도 그 역시 2008년의 뉴욕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막대한 공적 자금을 풀어 월 스트리트를 정부가 구원했으면서도 그 자금의 일부가 자신들의 은퇴 돈잔치에 쓰이기까지 했지요. 그러면서 그 종말의 책임이 있는 어느 누구도 기소되지 않고 유유히 말년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대로 그 정부를 그렇게까지 무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와 화해하고 맹렬히 결합한 보수주의자들의 선택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피터 플레밍의 말대로 정부를 그저 '카지노 딜러'처럼 만든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었지요. 이제와서 깅리치처럼 정부의 무능을 운운하는 것은 실로 뻔뻔하다 못해 공언무시와도 같은 말일 것입니다. 물론 깅리치가 말하는 것에 한가지 동의할 만한 부분은 있습니다. 부자들의 알량한 직접 수입이 아니라 모든 수입에 대한 징세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미국의 사례를 들어 막강한 로비스트들과 그들의 이익을 채워주고 있는 정치인들이 과연 부자들에 대한 '혁명적인 징세 개혁'에 과연 동의할까요?

그럼에도 미국은 한 두가지 희망은 있어 보였습니다. 지금 셰일 가스 개발과 같은 자원 혁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잘 이용한다면 충분한 세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알래스카의 사례가 있을텐데요. 바로 '천연가스 배당'이 그렇습니다. 미국은 자원의 보유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국가이니 이것을 잘 이용만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사회적 지원의 부족한 점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곁가지는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폴 크루그먼의 대략적인 주장에 동의하는데요. 물론 크루그먼 조차도 엄밀히 따지면 보수적인 개혁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금 회피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크루그먼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그가 미국은 민주적인 통치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강조하면서도 조세 회피에 대한 강력한 법집행을 주저하고 있는 점은 뭔가 잘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미국은 빈곤층의 자녀들도 꽤 잘 정립된 주립 대학에 갈 수 있을정도로 보조금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사회적 부조들이 대부분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해 불살라졌던 것은 언급 조차 되지 않는 점은 그것대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번역의 조심스러움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은 그저 제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끝으로 깅리치는 자신을 '저렴한 매파'라고 말하면서 국방비를 줄일 수 있는 현대화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는데요. 현재 미국의 비대화된 국방비 지출은 이 뿐만 아니라 고도화된 첩보 조직에 의한 비용 지출도 상당히 증가했던 것에도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국토 안보부를 신설해 인력 충원과 그에 따른 막대한 돈이 지출되었죠. 또 다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하게 되었습니다만 어느 나라의 안보에 대한 열망은 아무리 돈을 투입하고 역량을 강화시켜도 결코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평가는 명목적인 것이고 아마도 관료 조직 내부에서 전방위적인 요구가 있었을 겁니다. 특히 FBI는 600만이 넘는 안면 인식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지금은 더 늘었겠지요. 결국 이러한 부분에서 미국은 재정적인 측면에서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보장을 위한 지원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차용할 수 없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처럼 테크노크라트의 관료제가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경제학에서의 '작은 정부'를 오히려 반대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논점과 벗어난 글을 썼습니다만 우리 나라도 부유층의 은닉 재산에 대한 전수 조사가 사회적 하위 계급 조차도 반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도 아마 우리 나라와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을 겁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에 의해 하위 계층의 비이성적인 계급 이반을 논했던 바가 있습니다. 사회의 안정적인 재구축을 위해 필요한 개혁을 반대하는 하위층이 있다는 것은 현실은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언론과 여론이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논지는 세제에 대한 실효적인 개혁과 부유층에 대한 실질적인 증세가 다방면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깅리치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불평등 경제로 국한해 인식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의 중요한 정치인이었던 그가 중국의 경제 성장이 분명 신자유주의적 기조로 인해 미국에도 상당한 이익으로 돌아왔음에도 이를 경시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점은 시민들이 어리석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파판드레우가 청중에게 경계를 촉구한 것은 그리스의 부유층이 경제력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2011년에 미국의 고액 남세자 상위 1%의 사람들은 자본이득을 별개로 하고도 약 1초 4,0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2010년에 역외회사가 벌어들인 32조달러가 과세를 면했다

총리(파판드레우)를 하고 있을 무렵, 나는 국내외에서 엄청난 부의 집중을 목격했다. 그것은 민주 정치의 토대를 침식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임시변통으로 어리석게 세율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인 세제 개혁이 필요하다. 모든 소득을 과세 대상으로 해야 한다. 자산 가치 상승에 의한 자본이득, 내국세법 제501조 C항 3호에서 비과세가 인장된 비영리법인, 자선 목적의 기부 등 이 모든 것에 일률적인 세율의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요즘 보이는 부의 집중은 정부가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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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3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착 소개 하신거 보고 책 담으려 했는데 정말 제목 보니 정 떨어지네요 ㅎㅎㅎ
책의 내용을 덮어버리는 제목이네요

베터라이프 2021-07-03 16:24   좋아요 0 | URL
저런 국문 제목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원제목처럼 부자들에 대한 증세라고 간단히 표현하면 좋았을텐데 아무래도 출판사의 책 판매고 욕심이 기반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책 내용은 크게 나무랄게 없었어요. 어차피 대담집 형식이라 출판사가 관여할 게 별로 없기도 하고 여기에 참여한 토론자들의 입장 차이가 명확한지라 기본 번역 많으로도 어려울게 없었는데 차라리 폴 크루그먼을 전면에 내세우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슈거 대디 자본주의 - 친밀한 착취가 만들어낸 고립된 노동의 디스토피아
피터 플레밍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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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학의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인 피터 플레밍은 영국 내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의 비판자입니다. 그는 비즈니스와 사회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공시적으로 '탈공식화'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의 비즈니스 전반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전반적인 고통을 시민들에게 전가하는 등의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는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사실 제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을 많이 읽기도 했습니다만 보통은 신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을 향해 소위 보수 우파들이 이를 음모론으로 공격하고 그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논리 등으로 맞받아치고 있기도 한데요. 이에 저자는 신자유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 사망한 2006년에 이미 종말을 고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 경제 이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자유 지상주의 및 극단적 개인주의를 연계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실체가 없다던 신자유주의'에 사실상 '실체'를 규명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보입니다. 이 책은 2019년에 원제, "Sugar Daddy Capitalism : The Dark Side of The New Econom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플레밍의 이 책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플레밍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판하면서 그의 유명한 논저 '노예의 길'을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와 같은 글로 비난하고,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잘 작동하는 시장이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불행하지만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은 플레밍의 표현대로라면 '하이에크의 뒷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를 아꼈던 대처에 의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강화되어 왔고, 여기에 밀턴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그런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강연에 뛰어들었던 것은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얼마나 사회학과 철학에 올바르게 심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홉스와 로크에 의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사회라는 계약을 맺게 되었던 것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유지상주의와 마찬가지인 시장 자유가 개인들의 갈등을 '경제적 계약'을 통해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던 것은 의도된 무시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프리드먼이 애덤 스미스의 글을 작심하고 제대로 읽었다면 그의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인지하고 '노동'과 '근로 단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보다 프리드먼은 일찍이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체계가 어느쪽으로 향해 있는지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초기의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집중했던 것은 '정부'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정부가 '최소한의 법이 얼마나 유지되는지 제3자의 입장에서 관리하는 정도"의 그것을 열렬히 원했는데요. 정부를 악마화시킨 것은 둘째 지더라도,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사회 자체에 '약육강식론'을 대입시킨 것은 매우 유명합니다. 정부나 사회의 개입 필요 없이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 더 나아가 인간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과 같은 통합된 지식의 시대에 얼마나 그 궤를 벗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플레밍도 이 글의 2장과 3장에서 이런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해 여실히 비판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고 메커니즘은 "시장에서의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가 이를테면 "경제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저들의 잘못된 명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글의 2부의 제목인 "당신의 가격은 얼마?"에 사례로 인용되어 나오는 브랜던 웨이드의 사업 아이디어에서 현 자본주의의 왜곡된 본질이 거의 과감없이 드러나 있다 생각됩니다. 제목의 모티브가 된 브랜던 웨이드는 소위 3~40대 재력가 남자들과 10대에서 20대의 젊은 여성을 연결시켜 주면서, 거의 매매춘과 다름없는 사업으로 부를 획득하게 되는데요. 이 '슈거 대디'들과 직접 만나 데이트를 하는 이 '슈거 베이비'인 젊은 여성들은 데이트의 마지막엔 이들 남성들과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으며, 그 일련의 남성들의 호의는 바로 이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들간의 금전 거래와도 같은 일례들이 성까지 사고 팔 수 있게 만들었으면 이러한 심각한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는 '오로지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이미 도덕과 최소한의 법이 유명무실해진 시장에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3부에서는 '규제' 자체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이 신자유주의가 정부와 국가에는 최소한의 법으로 야경 국가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그동안 거의 강제적인 사회 체제 변용을 저들은 추인했고 더 나아가 민주적 통제 자체를 '급진적 민주주의'로 몰아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돈과 거래에만 극단의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자들의 규제에 대한 증오는 전반적인 관료제에 대한 거부감과 멸시로 이어지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이 조직화 된 의사 단체들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던 것으로 보아 '조직화 된 힘'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자신의 조국이 너무 집합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터무니 없는 공격을 했기에  플레밍이 강조하는 탈공식화는 물론이고 사회에서 인간성을 제거하는데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짤막하게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고찰해 본다면 이미 극단적인 자본의 논리에 융합되어 '환자를 돈의 유무'와 '보험의 등급'으로 나눠 사실상의 생명 경시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장에서 플레밍은 개인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계약에 나설 때, 이미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는 명확하며 병을 얻게된 그 자체의 이유 마저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마땅히 시민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짓밟게 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되는지 저는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플레밍의 이 글에서는 논증상 한가지 미흡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어떻게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와 영합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저자가 주장에 대한 논거를 위해 공들여 사례로 입증하는 것으로 볼 때, 이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저 보수주의적 법학자인 리처드 엡스타인을 통해 어떻게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되었는지에 대해 약간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개인이 추구하는 경제적 이익'을 자본주의적 논리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린 보수주의 정치가 80년대 이후 '사회적 부조'에 치를 떨게 되면서 이어지는 이 신자유주의적 탄생에 이바지 했던 점은 거의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레밍은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화되었다는 문장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의 자유주의의 변질이 결국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 되었던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거듭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사회에서의 도덕주의와 인간성의 상실은 개인의 보호라는 사회적 의무가 단순한 계약관계에 의해 축소되면서 모든 책임은 오로지 개인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자유 경쟁과 시장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의사나 변호사를 비롯한 일반 전문직에 관료제의 의한 공적 시험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다 종사할 수 있게 하자고 하지 않는지 아주 의문입니다. 물론 저들이 위의 전문직은 타고난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않을겁니다. 다만, 그런식으로 입맛대로 이뤄지는 사고는 시민들에게 더욱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간 덧붙여 플레밍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인식을 피력하면서,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시민의 노동을 공장을 돌아가게 하는 일개 부품의 역할로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대해 그만큼 강조하고 긍정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을 자본 축적의 방해물로 여긴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결국 이러한 체제적 강화에서 신자유주의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구축되지 못했고 2008년의 그 극명한 붕괴 이후에도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이 건재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경제에 대한 맹신에 그 역사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던 바가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제약에서 벗어난 자본주의가 우리를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리라 믿었다"고 언급하기에 이르는데요. 저는 저 두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사회는 그저 시장 규칙이나 준수하라는 일갈만을 외치던 자들이 과연 인간성을 갖고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러한 사회와 삶 자체가 우리가 원했던 것일까요.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세상을 원했다고 주장들을 하고 있지요.

-번역이 크게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터 플레밍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신랄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이 콜린 크라우치보다 더 극적이면서 강조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비판적 의견을 담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저자의 비유대로라면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가격은 얼마인가"로 함축된다고 생각됩니다. 저 문장에는 실로 핵심이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고 동의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의 선‘은 분명 존재한다

고립된 개인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

모든 이가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시카고 학파의 유토피아적 판타지가 무엇을 말해 주겠는가

불평등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약화되기는 커녕 강화됐다

정부는 그저 카지노의 딜러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최저임금법이나 실업 복지와 같은 국가의 개입에 맹렬히 반대한다

산업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소유주는 늘 노동자와 전쟁 상태였다

시장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선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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