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
피터 플레밍 지음, 박영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인 피터 플레밍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대학교 퀸 메리 칼리지를 거쳐 현재 런던 대학의 경영대학원인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강고한 비판자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가디언지에 정기 기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민간 및 공공 부분의 조직적인 부패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고 후기 자본주의에 따른 경영 전반에 대한 재인식과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슈거 대디 자본주의"와 함께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두 편의 논저 가운데 하나인데요.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은 최근에 나온 "슈거 대디 자본주의"의 약간의 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Death of Homo Economicus : Work, Debt and the Myth of Endless Accumula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플레밍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마땅히 죽었어야 했으며, 명확히 지금의 자본주의를 분석해 보자면 "불로소득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이 글을 통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그는 신자유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번영을 구가한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글의 2장에서 꽤 심도있게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극심하게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어 그 자체로 파괴적 경제의 본모습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날 미국 시카고 대학의 소위 '시카고 학파'가 이러한 토대를 강화시켜 온 것으로서, 만약 밀턴 프리드먼이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에 대해 플레밍은 깊은 의문을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신랄하고 비판적이며, 투쟁적이기 때문에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자와는 다른 어조를 보입니다. 또한, 전체적인 글의 구조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사례와 함께 약간의 르포 형태가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실제적으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 등지의 사례와 권력 및 기업들의 파괴적 경제 행위 및 도덕적 해이 등을 깊이 다루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보다 명확한 실체가 궁금한 분들께는 이보다 더 좋은 책을 권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적 이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고유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쉽게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로소득 이데올로기에 따른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기본 토대로 분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가 후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넘어서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자본 축적이 금융 자본에 의한 서류에 잡히지 않는 이득으로 계산되면서 발생하는 퇴행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냉엄한 실체 즉, "작은 이득이라도 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중요하며, 무한한 금전적 이득이야 말로 인간 진보"라는 그 왜곡된 신념을 까발리는게 이 책의 주요한 골자가 되겠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는 푸코가 착안한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신봉하고 뒤따르고 있던 이 자본주의가 사실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지 너무나 오래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이미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기조에 벗어나, 알게 모르게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투하하고 있으므로 해서 여기에 순수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실로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토대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요. 대다수의 시민들과 사회적 토대에서 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왔으며 이러한 이행이 인간의 진보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사실은 오래전에 끝나버린 사실이라는 것을 거듭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테크노크라트가 신자유주의와 야합하고 이를 보수주의 정치가 지원하는 형태의 변종으로서, 차라리 사회 체제의 인식으로서 그 변화가 어떤식으로 작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설적이 일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요약해 보자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그저 권력의 속성과 추이를 나타내는 수준의 협소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재계 거물 지나 라인하트는 앞선 2장의 '파괴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딱 부합되는 인물로 볼 수 있을텐데요. 그녀는 철광업계의 거두인 아버지 랑 핸콕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상속받은 인물로 종전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자수성가형 자본주의적 신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면서 현재의 3세 상속자들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플레밍이 인용하고 있는 피케티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현대 계급 구조의 바탕이 되는 것은 불로소득"이며 오히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가 이미 어떠한 식으로든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선(善)과 다름없다"고 밝힌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각각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토대의 동반자이자 동료인 이웃들을 가진 재산과 소유한 돈에 따라 서슴없이 분류하고 '구별짓기'에 나섰고 이것이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결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위기'를 후안무치하게 내뱉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화되어 왔던 그 결과로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치가 정치적 토양을 제공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시민들의 파편화를 비롯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많은 시민들의 고용 불안 등은 마땅히 신자유주의적 강고화에 책임을 물어야 했으나, 오히려 민주 정치와 정치의 무능으로 그 화살을 돌려 끝내 '시민들의 변별력'을 무력화시키고 지식인-언론-정치인의 삼자 연합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해 오늘날의 사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플레밍은 파시즘을 먼저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계몽으로 이룩한 현실을 돈이 끼어들게 됨으로써 퇴행적인 정치적 관점"을 불러일으켰다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의 극심한 금권 정치와 기필코 과두 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내심이 기반이 되고 있는데요. 플레밍은 기득권 세력과 테크노크라트의 "시민 다수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악에바친 혐오'를 언급하면서 소위 선진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각각의 국가들이 구축한 민주제도와 민주 정치가 이들 기득권 세력에게는 먼저 자본주의가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미 권력화되어 오랫동안 헌법을 고립시켜 사회 내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한 연유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더 강화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개인주의는 이를 신봉하고 있는 정치인들조차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언제나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위 전문가가 주도하는 다수의 시민 배제 정치를 원하고 있으며, 사실 이러한 기반의 인식이 정치인들에게는 충분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경제적 관념의 우월성은 이토록 2세기 이상을 지배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저자인 플레밍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대중에게 가해지는 소위 선동 정치에서 돈 자체는 자유롭고 중립적이기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대로 자유 시장이 건전한 사회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는 불확실한 그의 의견이 있지만 과연 하이에크의 그 판타지적 이론이 얼마나 사회를 위해 경제와 정치의 조화를 원했는지는 아마 어린아이도 짐작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너무나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었고 그 파급을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부조는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사실 극단적으로 뭔가 변화가 있어야만하는 것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런던의 상수도가 1990년대에 민영화 되고 나서 호주의 '흡혈 캥거루' 맥쿼리가 한 것은 요금을 올리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공선 그리고 도덕주의를 붕괴시켰고 그러한 가운데 시민들이 오로지 자본의 논리 한 가운데에 놓여 스스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 마저 보장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플레밍의 말대로 서구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되어 겉보기에는 모두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약육강식의 비인간화였던 것이죠. 앞서 제가 잠깐 소개했던 바와 같이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는 시민의 민주적 권리에 대해 치를 떨고 있기에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이념 마저도 시민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작금에 이르러서는 시민 정치가 근본적인 힘을 잃게 된 연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학은 이러한 매커니즘을 먼저 가르치고 알려야 했지만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학의 냉혹한 자본주의화는 자본에 대한 자정 기능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우려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고의 글은 너무나 많이 출판되어 왔기에 단순히 확대해석이나 음모론으로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가 시민들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나 학문 자체에 대한 접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행에 대한 긴급 구제 상태가 발생한 이후,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동안 품위있는 삶을 포기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을 바쳐왔던 국가가 비정상적인 형태의 공공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비생산적인 기업 활동을 방조하고 주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일을 지원하는 부도덕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아마 기술이 진정으로 첨단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영역은 사람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리차드 탈러는 토마 피케티의 경제적 불평등 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받고, 진정한 문제의 원인은 시카고학파 계열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있다고 대답했다

신자유주의적 독단론은 명백히 오류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비 같은 모습으로 우리 사회 한가운데를 활보한다

소위 ‘달러를 사냥하는 동물‘의 위상은 개인주의와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에서 유출된 문서를 보면 시민들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사회가 보수파의 세상으로 변하면서, 이제 임시적인 조치나 부분적인 개선으로서는 현재의 상황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지배자들은 ‘검은 돈‘을 상징하는 금권 정치가들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부의 축적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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