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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ㅣ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평점 :
세계 철학계의 '팝 아티스트'와 같은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대중 철학가의 이상의 진면목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자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살아 있을 적에는 이 두 사람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는데요. 물론 두 사람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혼란에 빠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폭넓게 규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젝이 자신의 이상대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론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엿보이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세계 좌파의 몰락이라는 뭔가 충격적인 상황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그럼에도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과 비판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재의 문제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인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를 많은 보수 우파들이 경멸하는 이유에는 입바른 사람에 대한 혐오와 진실을 밝히는 자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andemic 2 : Chronicles of a Time Last" 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지금 출간된 이 책은 얼마전에 번역 출판된 "팬데믹 패닉"의 일종의 보론으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근래 이 팬데믹 사태와 관련된 지젝의 철학적 비평을 담은 글들이 꾸준하게 국내에 번역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젝은 이 글에서도 조르조 아감벤의 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를 피력한 최근의 글을 비판하고, "자유가 없으면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명제에 일종의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젝은 "자유지상주의자와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및 백신 거부자들"과 함께 아감벤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봉쇄와 시민 격리를 많은 자유 우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적 음모"라고 몰고 갔던 것을 돌이켜 보면 지젝의 이러한 해석이 어떠한 진심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2장에서 보이는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결코 교환 될 수 없는 이 가치에, "모든 목숨은 쓸모 없다"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미 팬데믹 이행 과정에서 신물나게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중요한 가치를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 극우주의자들의 논법에 지젝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시"가 이 펜데믹 사태의 본질이며, 개인의 본질적인 자유와 그에 따른 자유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극우 포퓰리즘 시위에 나선 유럽과 미국의 시위자들이 과연 자신들의 자유가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진실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음 8장에서 트럼프는 익히 이 팬데믹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그저 경제적 온존성을 위해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를 충실히 따른 많은 시민들이 불확실한 경제적 이익과 자신의 목숨을 교환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러한 과정속에 트럼프에 대한 과오는 교묘히 숨겨져 버렸으며 그가 다가오는 2024년에 백악관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시민들 모두가 위와 같은 일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첨언합니다.
전세계적 팬데믹 사태의 초기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봉쇄가 진행된 23일 만에 총 282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조슈아 사이먼의 글을 지젝은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11장에서 그가 인정하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로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제 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코로나 시대에 자신들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보이고 있지만 결국 이들에게는 강력한 일반 의지가 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젝이 비평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극좌의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모두의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행태야 말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욕망'밖에는 그리고 그외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헝가리의 오르반과 미국의 트럼프가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며 이들 정치인들의 행태가 과연 다수 시민의 안전과 이익을 염두해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프로파간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적인 시위들이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더욱 좌초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과연 건전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봐야할지는 큰 의문입니다. 지젝은 여기에 한나 아렌트의 '폭력론'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극우 포퓰리즘 운동이 좌파식의 사회 개혁과 같은 대의와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시장 자유와 연계된 자유 지상주의의 욕망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엄중한 지젝식 비꼬기"라 할 수 있는 12장에서는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병대의 주지사 납치 기도를 이 팬데믹 사태에 대한 국가 봉쇄와 같은 현실을 '공산주의'로 몰고 가고 있는 자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감벤 식으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상시처럼 용기를 내 위엄있게 죽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반역설적인 헤겔의 인간성을 차치하더라도 자유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선택이 스스로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었느냐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전혀 알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자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태로운 상황에 몰고가게 만드는 것을 무덤에 있는 존 스튜어트 밀 조차 이를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지젝은 한 술 더 떠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거부하는 것"은 개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사전적으로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적 인간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지젝은 피히테를 인용하면서 "상업적 무정부사태와 더불어 카를 슈미트가 밝힌 '탈정치화'에 따른 정치가 단순히 경제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파행에 눈을 감은 리처드 포스너의 논법과도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할텐데요. 한낱 티끌만도 못한 이익을 손에 쥐는 것이 장땡이라는 저들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은 그럼에도 많은 시민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팬데믹의 또다른 자화상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지젝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근래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동의하면서 지젝이 주장하는 자유주의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분리에 시민들이 이제는 더이상 속지 말고 나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연대에 나설 것은 팬데믹 사태에 따른 보건의 위기 뿐만 아니라 이 사태를 기화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대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요약하자면 토머스 홉스의 이성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노동자들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죄가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에게 그릇된 선택을 제공한 죄가 있다"는 지젝의 비판에 거듭 동의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인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시민 사회를 좀먹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바가 있습니다. 이 일관되지 않은 모순 덩어리의 정치인을 민주주의적 정치의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하지 말고 현재 전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프로그램'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갖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와 같은 우리의 보건 위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 지젝 역시 여기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가 죽지 않고 이러한 상황에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후반부의 결론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의 보론이 작금의 포퓰리즘에 대하 지젝의 우려로 가득차 있듯이 페미니즘과 인종 차별. 그리고 반민주주의를 낱낱이 암흑의 영역으로 빨아들인 이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 '시민들의 진정한 앎'에 대해 지젝이 강조하는 점은 이토록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백하게 좌파적 음모라는 현재의 다수의 생명을 위한 극단의 조치가 공화주의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계몽적인 역사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하는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인명 경시를 뒤에 업고 훗날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헤겔의 인간성에 대한 가치를 저버리는 것임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젝은 '자유주의적인 상업의 무정부 상태'를 비슷한 논법으로 여러 군데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아주 일관된 논법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프레임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정확히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정반대되는 과정들이 폭력적으로 부상하여 기업은 부를 쓸어 담고 국가로부터 긴급구제를 지원받는다. 코로나 자본주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동시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는 이 유규한 해방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기에 이 고귀한 전통은 외설적 포퓰리스트와 보수주의자 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일은 순전한 광기가 될 터이다
팬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선택지는 트럼프식 길과 언론에서 중국식 길이라고 외쳐대는 방식 중 하나인 듯하다. 전자가 수천 명이 죽더라도 시장의 자유와 이윤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는 길이라면, 후자는 디지털화된 국가의 총체적 통제를 개인에게 가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홍콩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대만을 폭력적으로 탈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전면적인 태평양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난, 극단적 불평등,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시가 판을 치는 세상 그리고 법적이고 경제적인 정책들이 가난을 종결시키기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부가 창출되고 유지될 수 있게 설계된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도달하게 한 것이다
진행중인 팬데믹은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을 불러내고,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지만 단기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펜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전망들이 실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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