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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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계의 '팝 아티스트'와 같은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대중 철학가의 이상의 진면목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자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살아 있을 적에는 이 두 사람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는데요. 물론 두 사람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혼란에 빠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폭넓게 규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젝이 자신의 이상대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론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엿보이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세계 좌파의 몰락이라는 뭔가 충격적인 상황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그럼에도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과 비판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재의 문제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인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를 많은 보수 우파들이 경멸하는 이유에는 입바른 사람에 대한 혐오와 진실을 밝히는 자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andemic 2 : Chronicles of a Time Last" 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지금 출간된 이 책은 얼마전에 번역 출판된 "팬데믹 패닉"의 일종의 보론으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근래 이 팬데믹 사태와 관련된 지젝의 철학적 비평을 담은 글들이 꾸준하게 국내에 번역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젝은 이 글에서도 조르조 아감벤의 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를 피력한 최근의 글을 비판하고, "자유가 없으면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명제에 일종의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젝은 "자유지상주의자와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및 백신 거부자들"과 함께 아감벤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봉쇄와 시민 격리를 많은 자유 우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적 음모"라고 몰고 갔던 것을 돌이켜 보면 지젝의 이러한 해석이 어떠한 진심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2장에서 보이는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결코 교환 될 수 없는 이 가치에, "모든 목숨은 쓸모 없다"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미 팬데믹 이행 과정에서 신물나게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중요한 가치를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 극우주의자들의 논법에 지젝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시"가 이 펜데믹 사태의 본질이며, 개인의 본질적인 자유와 그에 따른 자유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극우 포퓰리즘 시위에 나선 유럽과 미국의 시위자들이 과연 자신들의 자유가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진실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음 8장에서 트럼프는 익히 이 팬데믹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그저 경제적 온존성을 위해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를 충실히 따른 많은 시민들이 불확실한 경제적 이익과 자신의 목숨을 교환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러한 과정속에 트럼프에 대한 과오는 교묘히 숨겨져 버렸으며 그가 다가오는 2024년에 백악관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시민들 모두가 위와 같은 일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첨언합니다.

전세계적 팬데믹 사태의 초기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봉쇄가 진행된 23일 만에 총 282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조슈아 사이먼의 글을 지젝은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11장에서 그가 인정하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로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제 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코로나 시대에 자신들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보이고 있지만 결국 이들에게는 강력한 일반 의지가 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젝이 비평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극좌의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모두의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행태야 말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욕망'밖에는 그리고 그외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헝가리의 오르반과 미국의 트럼프가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며 이들 정치인들의 행태가 과연 다수 시민의 안전과 이익을 염두해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프로파간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적인 시위들이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더욱 좌초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과연 건전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봐야할지는 큰 의문입니다. 지젝은 여기에 한나 아렌트의 '폭력론'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극우 포퓰리즘 운동이 좌파식의 사회 개혁과 같은 대의와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시장 자유와 연계된 자유 지상주의의 욕망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엄중한 지젝식 비꼬기"라 할 수 있는 12장에서는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병대의 주지사 납치 기도를 이 팬데믹 사태에 대한 국가 봉쇄와 같은 현실을 '공산주의'로 몰고 가고 있는 자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감벤 식으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상시처럼 용기를 내 위엄있게 죽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반역설적인 헤겔의 인간성을 차치하더라도 자유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선택이 스스로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었느냐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전혀 알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자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태로운 상황에 몰고가게 만드는 것을 무덤에 있는 존 스튜어트 밀 조차 이를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지젝은 한 술 더 떠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거부하는 것"은 개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사전적으로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적 인간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지젝은 피히테를 인용하면서 "상업적 무정부사태와 더불어 카를 슈미트가 밝힌 '탈정치화'에 따른 정치가 단순히 경제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파행에 눈을 감은 리처드 포스너의 논법과도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할텐데요. 한낱 티끌만도 못한 이익을 손에 쥐는 것이 장땡이라는 저들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은 그럼에도 많은 시민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팬데믹의 또다른 자화상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지젝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근래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동의하면서 지젝이 주장하는 자유주의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분리에 시민들이 이제는 더이상 속지 말고 나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연대에 나설 것은 팬데믹 사태에 따른 보건의 위기 뿐만 아니라 이 사태를 기화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대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요약하자면 토머스 홉스의 이성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노동자들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죄가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에게 그릇된 선택을 제공한 죄가 있다"는 지젝의 비판에 거듭 동의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인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시민 사회를 좀먹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바가 있습니다. 이 일관되지 않은 모순 덩어리의 정치인을 민주주의적 정치의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하지 말고 현재 전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프로그램'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갖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와 같은 우리의 보건 위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 지젝 역시 여기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가 죽지 않고 이러한 상황에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후반부의 결론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의 보론이 작금의 포퓰리즘에 대하 지젝의 우려로 가득차 있듯이 페미니즘과 인종 차별. 그리고 반민주주의를 낱낱이 암흑의 영역으로 빨아들인 이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 '시민들의 진정한 앎'에 대해 지젝이 강조하는 점은 이토록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백하게 좌파적 음모라는 현재의 다수의 생명을 위한 극단의 조치가 공화주의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계몽적인 역사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하는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인명 경시를 뒤에 업고 훗날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헤겔의 인간성에 대한 가치를 저버리는 것임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젝은 '자유주의적인 상업의 무정부 상태'를 비슷한 논법으로 여러 군데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아주 일관된 논법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프레임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정확히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정반대되는 과정들이 폭력적으로 부상하여 기업은 부를 쓸어 담고 국가로부터 긴급구제를 지원받는다. 코로나 자본주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동시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는 이 유규한 해방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기에 이 고귀한 전통은 외설적 포퓰리스트와 보수주의자 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일은 순전한 광기가 될 터이다

팬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선택지는 트럼프식 길과 언론에서 중국식 길이라고 외쳐대는 방식 중 하나인 듯하다. 전자가 수천 명이 죽더라도 시장의 자유와 이윤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는 길이라면, 후자는 디지털화된 국가의 총체적 통제를 개인에게 가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홍콩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대만을 폭력적으로 탈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전면적인 태평양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난, 극단적 불평등,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시가 판을 치는 세상 그리고 법적이고 경제적인 정책들이 가난을 종결시키기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부가 창출되고 유지될 수 있게 설계된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도달하게 한 것이다

진행중인 팬데믹은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을 불러내고,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지만 단기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펜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전망들이 실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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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2021-07-16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감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론인 ˝알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명확하게 언명됩니다. ˝나는 우리는 물리적으로 계속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실제로 한때(팬더믹이 있기 전 어느 먼 역사적 시기에) 존재했었다고 스스로 믿게된다는 러셀의 주장을 정확히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하여 방역과 거리두기 조치에 복종하는 우리를 윤리적 재앙, 즉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함축적 비판으로 읽는다˝ 이는 아감벤의 글에서 불편하던 지점들 몇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1)레비나스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얼굴 운운하는 곳에서 매개되지 않은 직접성을 강조하는점들 - 그게 아니라면 인간들의 관계가 항상 언어든 사회적 작용이든을 통해서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면, 왜 디지털을 통해 매개된 관계보다 직접적인 얼굴을 대면하는 관계가 반드시 회복해야만 하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까? 2)삼권분립 운운하면서 행정조치들에 대한 아감벤의 반대는 어떻게 읽더라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이행의 시기에 필요한 독재따위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고 이점에서 여타 극우 절대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것아닌가? 이점에서 그의 예외상태론도 다분히 회복해야 하는 평화로운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꿈꾸는거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함 3)이러한 점은 팬더믹 다음세상에 대한 고민에서도 자본주의 바깥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계급적 관점이 전혀 부재하다고 느껴지는데(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아감벤 책에 대한 서평에서도 뵌 적이 있고, 저는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장인이고 해서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글을 적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아감벤에 대한 댓글에도 적었듯이 아감벤의 글을 정말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역자가 브뤼노 라튀르를 기후위기(정의)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함께 놓으려는 것은 이해도 동의도 안되네요.

베터라이프 2021-07-16 18:4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chaos님. 쓰신 장문의 댓글은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사실 이 책은 지젝의 비꼼의 수사가 가득한 글이라 조금 순화해서 쓰기도 하였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팬데믹 조치에 따른 아감벤의 비판과 현 사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방관을 중점으로 잡고 글을 썼습니다. 사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아마도 스스로 자유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진듯 한데요. 그럼에도 아감벤은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탈리아인으로서 과거 파시즘의 역사와 그가 조르조 바사니를 읽었다면 분명 거기에서 드러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참혹한 배신에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어떤식으로든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공화주의적 가치에 반할 수 있는 자유 지상주의에 반대하고. 반공동체주의적인 주장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좀 더 논의를 확대해보면 신자유주의도 역시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심지어 자연 상태에 준하는 그 자유를 물론 노골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감벤도 그러한 동의를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외상태를 분석하다보면 정치인들의 도덕적 제한을 풀어주는 느낌까지 주니 말입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2008년에 신자유주의는 죽었어야만 했다는 피터 플레밍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도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전세계 금융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지고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가 직접적인 계급화의 압력에 놓였던 것은 아닙니다. 1940년대 까지는 정부와 민간 그리고 사회가 대체로 사이좋게 지냈죠 (데이비드 코츠) 그렇게 자본주의를 더이상 자본주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그렇지 신자유주의가 태반을 변화시킨 것이죠. 초기 자본주의는 그 비인간성을 감출 수 없었지만 1900년대 들어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면서 잠시 인간의 탈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인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죠. 하여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 지젝이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지젝이 아감벤을 못마땅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아감벤이 흡사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데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번 댓글에서도 chaos님께 밝혔지만 저는 신자유주의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영향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신물나는 개인의 책임, 능력주의, 개인의 배타적 자유는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힘들게 구축해왔건 계몽주의적 전통을 무력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자본주의 사회적 기구들과 원만히 타협하고 상생하는 사회가 우리가 그려봄직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전에 테크노크라트들이 만들고자 하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지배체제를 불식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는 예상과는 달리 한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대한 정부를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chaos 2021-07-1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보게되었네요. 긴 답변 감사합니다. 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나 안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기로 하고요, ㅎㅎ 아도르노와 비교에 대해서는 만일 이 비교가 68혁명기에 아도르노의 처신과 그로 인한 난처한 입장을 말씀하시는거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긴한데요, 이론적인 입장을 염두에 두시는 거라면 생각이 좀 다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벤야민과 아도르노 편지의 인용을 재인용 하고 싶네요. 아도르노가 보낸 편지에서 ˝상부구조 영역에서의 눈에 들어오는 개별적인 경향들을 ‘유물론적‘으로 전환시켜 하부구조의 인접한 경향들과 무매개적으로 병치시키거나 인과관계 속에 넣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성격에 대한 유물론적 결정은 전체과정에 매개될 때에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런 유의 직접적인 유물론, 즉 인류학적 유물론에는 낭만적 요소가 깊숙히 들어 있습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매개란 당신의 작업이 삼가고 있는 ‘이론‘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들의 이름을 명명한다는 신학적 모티브는 이제 단순한 사실성을 공포에 질려 묘사하려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당신의 작업은 마술과 실증주의가 만나는 교차로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귀신에 홀려 있습니다. 다만 이론만이, 당신 자신의 냉정하고도 사변적인 이론만이 당신이 사로잡혀 있는 마법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 물론 이를 벤야민도 인정하는 답신을 보냅니다. 저는 이 논의에서 아도르노 편입니다. 이 주제로 본다면 아감벤은 벤야민(물론 전공자니 당연히 그렇겠지만요)에 비유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7-19 18:53   좋아요 0 | URL
우선 앞에서 답을 못한 몇가지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디지털 매개로 인한 협력 내지는 그런 관계가 직접적인 대면 관계에 비해 소극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주셨는데요. 사실 저도 현재의 인터넷 수단을 통한 시민들의 활발한 공론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다만, 마누엘 카스텔이 우려한 바와 같이 아마도 온라인 상에서의 지식을 통한 의견 교환과 정치적인 대화들이 다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의견 교환이 특정 세력이나 이익 집단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우려가 있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최근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의 전개를 보더라도 물론 초기에 이 넷망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허위 사실과 거짓 그리고 증오로 점철된 터무니없는 낭설이 시시각각 퍼졌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약간 논외지만 러시아의 조직적인 서방 세계의 봇 투입과 허위 사실 유포는 이러한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양자간의 차별이 없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겠죠.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조르조 아감벤을 비교한 것은 과거 아도르노가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우파에 부역하는 지식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감벤이 전적으로 억울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슈미트를 비판하며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지젝과 일부 지식인들의 그에 대한 비판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일전에 오스트리아의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는 자신이 전개한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논리적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자신의 오류를 쉬이 인정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아감벤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감벤의 최근 우려는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과거의 아도르노가 보수 우파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도 다소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한데요. 단순 비교를 해봤을 때 두 사람의 곤란한 지경이 문득 떠오르게 되더군요. 최근에 제가 서평을 쓴 아감벤의 시론집은 저로서도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도 했는데요. 저는 분명 그가 민주주의의 확고한 지지자로 알고 있었는데 chaos님 말씀대로 자유지상주의자와 같은 문법을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이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분리되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고려해 본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