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전세계에 알려진 슬로베니아 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자크 라캉과 관련하여 인정받는 권위자이며, 세계 철학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흔히 말하자면 ‘팝스타’와 같은 인기의 소유자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를 일독했습니다. 저에게 지젝의 서평은 이번이 3번째인데요. 저는 간혹 지젝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같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마 두 사람에게 학문적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음 좋겠군요.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로서, 번역 출간된 책의 제목인 ‘멈춰라, 생각하라’의 부제가 바로 이 원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의 이 책은 크게 10장의 논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의 성격이 대체로 문화비평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나, 특히 오늘날 세계의 정치사회적인 사건들의 분석과 비판도 분량을 할애에 담고 있습니다. 글 서두에 지젝은 독자들에게 ‘인식적 지도를 제공’하고자 하는 작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지젝에게 인식적 지도라는 것은 명백한 것으로 대중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정치사회적 파열현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일텐데요. 여기에는 지젝의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의 어김없는 비판의 논조를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들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이며, 이런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선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포장 되어 있지만, 결국 이 선택은 기존의 체계의 복종하더가, 아니면 자기 희생적 폭력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모순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두번째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가 정작 ‘세계’없는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란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이어진 ‘아랍의 봄’ 내지는 ‘아랍의 시민 혁명’과 관련해서 지젝은 그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행동에 나섰으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과 관련하여 수많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너무나 물리적인 수단으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의 주장들에 대해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정도이다”라고 일갈합니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한다고 행각합니다. 이러한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오늘날 유럽의 난민 문제와도 동일한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자체를 ‘현실주의’로 포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저로서도 부정적인 판단이 듭니다.

4장의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이라는 부분은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헝가리 정치의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이행을 다루고 있는데요. 다문화주의와 이민주의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민족주의적 체제 고수를 위한 정치 작업들이 이어지고 이에 헝가리에도 ‘자유의 방송’이 필요하다는 점은 의미 심장합니다.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에 반대의 큰 획을 긋는 이 헝가리의 사례는 이들이 파시즘으로 이르는 길을 닦고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매우 유념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며, 이 점은 어쩌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정치적 현실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유럽의 반이민주의는 위험한 수준인데, 이들의 반이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극우 포퓰리즘’을 초래하고 있으며, 마치 미국의 티파티 운동을 빗대어 말한 것 같은 지젝의 표현인 ‘새로운 기독교 근본주의 포퓰리즘’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기존의 사회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이 포퓰리즘을 과거 파시즘과 동일하게 위험하게 인식하고 있는 지젝의 평가는 그래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앞선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사례에서 아랍의 봄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다소 지지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봤던 것은 유대인들만의 배타적인 현재 민족주의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고 가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편협한 가치체계에 물들어 있는지 여실히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관여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현재의 팔레스타인들의 거의 인종 차별과 다름없는 분리 정책은 실로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지젝은 이스라엘의 래즈비언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만나서 서로 포옹을 하고 위로 했던 것을 큰 인식의 전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인지는 회의적이나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각심을 전하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뉴욕 발 세계금융위기로 그 ‘정합성’에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신자유주의는 지젝의 언급대로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으며,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고 희화화 하고 있는데요. 그는 오늘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모순과 폐해에 주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가 있다고 소개하며 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자체는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국가의 최소한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등의 입장을 보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리자면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자유’가 타인의 고통이 비롯되는 최소한의 보장 장치를 박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모두가 이에 나서야 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인용된 바우만의 일침도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것도 이와 같습니다. 더불어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된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며, 이는 많은 국민들의 세금 부과를 담보로 부유층의 증세는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경제적 포퓰리즘과 동일한 시각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의 번영이 오로지 한길이라고 주입되는 세상에 이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시민 사회의 연대와 공감, 행동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강요된 선택을 주입시키고 더욱이 점차 확대되는 포퓰리즘의 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앞으로도 시민들의 역할과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젝의 말대로 각각의 시민 내지는 대중이 현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시민들과 연대를 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의 ‘위대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길에 한걸음 내딛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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