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자유
밀턴 프리드먼 지음, 심준보 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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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은 1912년 7월 31일, 뉴욕 브루클린의 헝가리 왕국 출신의 유대인인 부모 밑에서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난 직후 가족은 뉴저지 주의 유니온 카운티 남부에 위치한 라웨이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프리드먼은 처음에 보험계리사나 수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당시 불황에 빠져 있던 경제 상황으로 인해 경제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그는 뉴저지 주에 소재한 공공 연구 대학인 러트거스 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뒤, 1932년에 졸업을 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원은 그가 누리는 명성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과 진학을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라 평가 받는 조지 스티글러와 W. 앨런 월리스를 만나게 되는데요. 결국 그는 동시대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비견되는 학자로서의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더욱이 그의 또 다른 업적이라 볼 수 있는 소위 '시카고 보이스'로 통칭되는 '시카고 경제학파'의 초석을 쌓은 일인데요. 후에 이들 시카고 경제학파들이 양가적인 측면에서 전세계 경제학계에 끼친 영향력을 짐작해 본다면, 프리드먼의 기여는 의외로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에 이르러서 그는 학계를 넘어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사조'로 거듭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apitalism and Freedon"으로 지난 1962년에 초도 출판되었으며, 국내 번역본은 시카고 대학 출판부가 2002년 11월 15일 출간한 40주년 기념판을 기반으로, 2007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1판 17쇄로, 지난 2020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참고 밀턴 프리드먼의 이 논저는 그가 인디애나주 크로퍼즈빌에 소재한 와바쉬 대학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에서 얻은 영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문을 통해,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논저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저자 스스로가 밝힌 '자유주의'를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과거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에 기반한 전통적 자유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 인정한 바대로, "자유와 복지, 그리고 평등'을 포함한 시민권 개념과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리드먼 스스로가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앞선 의미가 아니고, 확연하게 다른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장 자유에 기반한 맥락으로 여기에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것에도 반대를 표명하는 인식입니다. 물론 그는 이외에도 "자유를 촉진하는 국가 개입이라면 당연히 유지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요. 다만, 이 글이 나오게 된 시기가 냉전이 첨예한 때였기 때문에 그에게 미국과 대결하는 소련의 체제와 그에 따른 집산주의에 결연히 반대하는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이에크과 그는 인식의 궤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통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관세 철폐와 같은 자유 시장 개념을 도출한 경제학자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저 개인적으로 그의 이 논저를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그가 '시장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는데요. 더욱이 스스로가 무정부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했기에 시장 자유에 대한 본질적 기대를 민주주의가 지원하고 그에 따라 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의 공통된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시장 자유'가 자본주의의 근간인 동시에, 이런 자유가 인간의 이익과 복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공익에 대한 언급은 이 글에서 미처 몇 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에 대한 경제학자의 불명확한 이해도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분석은 앞선 저의 느낌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이 글의 2장은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부의 역할이 시장에서 보장된 개인들의 '거래의 자유'를 지원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고, 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가 결과론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경제적 자유 담론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익히 알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작금의 세계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의 실질적인 축소가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악화일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결국 우리의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쇠퇴는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의 권력이 정부의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한다는 그의 일관된 생각은 시장이 정치에 제한을 받지 않는 운신의 자유를 일컫는 소위 자유주의적 보장이 정부의 오판을 방지함은 물론, 그런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움직임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8장의 독점과 관련된 프리드먼의 논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정부의 독점을 용인할 바에는 차라리 울며 겨자 먹기로 민간 부문의 독점을 차라리 선택하겠다는 일종의 차악의 선택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사실상 독점에 대한 프리드먼의 인식은 불가피한 '기술적 독점'상황을 먼저 예시로 들고, 이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지 그에 대한 분석을 사실상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민간의 독점을 명쾌한 경제적 기법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것 자체로 발전된 경제 사정이라고 보는 측면도 '시장의 합리성'을 너무나 과신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그저 애매한 설명으로 '법에 의한 규제'로 제시하면서 시장에 미칠 독점의 폐해를 어설프게 비켜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예시를 드는 것들이 가히 미국적인 것인 것이라 볼 수 있는 연방 정부와 그 사이의 민간 독점 문제이고, 그는 이것의 타개책으로 세법 상황에서의 '법인세 폐지'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독점 상황과 상당히 관련 있는 면허 제도와 관련해서 예를 들어, 의사들의 면허와 같은 '면허제'의 사실상 폐지를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의사 면허 제도와 같은 시스템에 있어 프리드먼은 의사와 관련된 면허제 전반을 살펴보고, 끝내 '의료업의 요건으로서의 면허 폐지'라는 결론에 이른 것인데요. 의사와 의사 협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의사 협회와 같은 특수 이익 단체의 문제점들을 열거하며 이러한 '전문가들의 독점'을 언급하는 부분은 꽤나 충격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기득권과 특히나 전문가 그룹의 특수 이익을 사실상 자본주의적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능력주의와 맞닿은 것으로 이를 사실상 용인하고 긍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프리드먼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막상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해당 장에서 논의되는 의료 협회 내지는 의사들이 기반이 된 이익 단체에 의한 사회의 부정적인 파급을 그는 언급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의료 단체 혹은 협회가 병원과 사회에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이 기반이 된 서술은 프리드먼이 앞서 강조한 "독점적 지위의 형성"이라는 가시적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실 의사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특수 지위를 갖는 직군이라 이들의 이익을 어디까지 보장하고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 단순히 의료 서비스 제공 문제를 떠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프리드먼은 경제학자로서 자신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시장 접근에서의 자유'를 기반으로, 이들 의사 단체들의 독특한 폐쇄성과 통제력은 앞선 '자유'에 있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의료 시장에서의 접근 자유'가 우리들의 공익에 중점이 될 부분이기도 하지만, 면허 등록과 관련된 프리드먼의 "자유주의 원칙에 비추어 이익과 불이익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꽤 면밀한 제안은 의외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욱이 무능한 의료 행위로부터 일반 시민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고, 의료 과실에 있어 보다 보상이 어렵게 된다면 이는 의료 행위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이 같은 면허제도는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논증되면서 이에 면허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확실히 인식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요. 더욱이 의료협회를 노동조합과 비교하여 인식하고 있는 프리드먼의 진술은 이 부분대로 충격적이라고 느껴질 만합니다. 앞서 노동조합에 대한 프리드먼의 부정적 인식을 감안해 본다면 그가 '시장 접근으로서의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선 부분과 별개로 그가 얻은 통화주의자라는 명성은 화폐 교환의 문제, 더 나아가 대략 자유로운 화폐 교환 시장의 필요성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과거 미국의 금본위제와 관련해, 내국인들의 금소유 및 금거래 문제에 대한 정부의 견제를 비판합니다. 즉 이는 내국인에 대한 차별로 확장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FRB 조직 이후, 이 조직이 미국의 시장과 경제 정책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통화와 화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거듭 강하게 이러한 '소수의 조직'에게 그런 권력을 부여하는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 의문을 표하고 있는데요. 완고한 시장 자유주의자가 시장에 어떤 통제를 가할 문제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데요. 더욱이 그는 1931년의 경제 지표를 들고 와서 당시의 연준이 국내의 통화량 감소를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노골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상업은행의 건전성을 FRB가 사실상 해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과 더불어, 통화 당국과 다름없는 FRB의 시장 개입과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연방 정부의 시스템적 묵인 등을 꼬집으며, 이러한 법제화가 과연 올바른 통화 정책의 수렴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프리드먼은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결과적으로 "통화량 증가율, 부채관리, 은행감독 등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부적절하게 많은 재량권이 연준과 재무부 당국의 수중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라고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앞선 의회가 주도하는 통화 전반을 비롯한 시장 위기에 대한 법제화가 정치적 당리당략으로 좌우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프리드먼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1933년에 제정된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무력화가 시장에 어떠한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데이빗 코츠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의 초석으로 제안된 신자유주의 경제, 그리고 이 체제를 강력히 옹호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특히 국방 분야에서 만큼은 정부의 자금 지원을 용인했던 진상과 그리고 2008년의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서 보인 극심한 도덕적 해이라는 민낯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10장에서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짐에 따라 불평등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식의 장미빛 미래를 강조하는 부분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영혼이 없는 인간의 말처럼 '시장이 알아서 공익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과 흡사합니다. 프리드먼은 이토록 자신의 논저에서 복지 담론과 케인스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어떤 대안도 명확히 제시한 바가 없는데요. 물론 그는 말년에서야 "사회 정의'에 대한 회의적 인식을 상당히 철회하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공익과 공공선이 과연 무엇인지, 여기에선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접근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많은 주장들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특히나 존 스튜어트 밀과 애덤 스미스를 제한적으로 인용하고, 특히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은 마치 지구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덕 철학자이기도 한 스미스를 그저 '시장의 화신' 정도로 소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학자의 양심과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프리드먼이 이 글을 쓰게 된 역사적 맥락이 당시 세계의 불안전성에 기인했다는 점은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그가 평생 견지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기반의 자유 세계'라는 일종의 신념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2006년이 아니라 최소한 2010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2008년의 기록적인 전세계 금융 위기 사태의 원인이 된, 중국발 자금으로 막대한 신용 생활을 하고 있던 미국 시민들과 그것을 부채질한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그가 과연 어떻게 인식했을지 지금으로선 너무나 궁금해지는데요.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내뱉는 '대마불사'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 시장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그저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구제할 수밖에 없었던 정부와 그 상황을 프리드먼은 과연 이를 어떻게 판단했을지도 마찬가지로 알고 싶습니다. 
 




더구나 실제로 보수주의자라는 용어는 너무나 차이가 큰 입장들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불가불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나 귀족적 보수주의와 같은 복합형 신조어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와 자유롭지 못한 정치체제의 조합도 분명 가능하다.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조정의 가능성은, 종종 부정되곤 하는 기본적인 명제, 즉 경제적 거래가 ‘쌍방 당사자 모두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동시에 쌍방에게 똑같이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있다면‘ 쌍방 당사자 모두가 일득을 본다는 명제에 기반하고 있다.

만약 공동의 행동을 위한 합의의 범위를 사람들이 항상 일치된 견해를 가질 만한 한정된 범위의 문제들로 제한할 수 있다면, 이러한 부담은 크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의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명확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따라서 합의를 이루어야 하는 쟁점들은 더욱 적어진다.

정부가 수행하기에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자유가 저촉되는 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인종의 분리나 통합 중 어느 하나를 시행해야만 한다. 내게는 어느 쪽이나 다 나쁜 해결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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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4-14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탄이 나오는 멋진 서평입니다.

베터라이프 2024-04-14 17:46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프리드먼의 이 책은 제가 프리드먼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일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순수의 시대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4
이디스 워튼 지음, 신승미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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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의 이름이 이디스 뉴볼드 존스였던 워튼은 1862년, 미국 뉴욕시의 브라운스톤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부계 쪽은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부유층으로 사회적으로도 꽤 저명한 가문이었습니다. 남북 전쟁 기간 중에 태어난 워튼은 그녀의 가족들을 따라 1866년부터 1872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을 장기 여행 목적으로 방문하면서 전쟁과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이미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던 워튼은 15세가 되던 해에, 중편 소설을 썼고, 1878년에는 24편의 시를 포함해, 몇 가지 글을 비공개 출판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사교계의 격려를 받지 못했고 그녀 나름대로 글쓰기는 지속했지만 1889년에 그녀의 새로운 시가 출판될 때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대 시절을 보낸 뒤, 그녀가 23세가 되던 1885년에 12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와튼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테디 워튼은 보스턴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만능 스포츠맨이자 그 시대의 존경 받는 신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적 문제를 끊임없이 드러내자 이 부부는 결혼 28년만인 1913년에 비로소 갈라서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전세계를 돌며 여행을 하다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정력적으로 전쟁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병행하며, 평생에 걸쳐 수십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또한, 이 시기에 워튼은 헨리 제임스, 조셉 콘랜드 등의 당시 문호들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 출간하는데 관여하고, 이러한 활동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오도어 루즈벨트의 관심을 받기도 합니다. 바로 그녀에게 1921년, 미국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안겨 준 작품이 바로 이 '순수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1920년, 미국에서 초도 출간되었고, 이 새로운 국내 번역본은 2023년 5월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워튼의 소설을 일전에 1부를 일독하고 나서, 오늘에서야 2부를 마저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여태 까맣게 잊고 있다, 이제야 겨우 완독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렇게 쉼 없이 2부를 완료하고 나서, 워튼이 절묘하게 배치한 스토리 상의 예측 못한 사건들로 인해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2부 후반부의 서사는 당시 복잡한 시대상 만큼이나 구조적으로도 거의 탁월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처 뉴랜드와 엘런 올렌스카 백작 부인(극중 내내 신분상 유부녀이기에)과의 안타까운 -관점에 따라- 엇갈림이 그러한 복선 이후, 생각지도 않은 흐름으로 이어질 줄은 거의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작품 후반부에서 더욱 드러나는 워튼의 탁월한 필력과 연달아 터지는 사건의 흐름 상,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그 특유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묘사와 특히 유럽의 흔적이 묻어 나오는 뉴욕 시에 대한 설명도 대체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워튼의 이 작품 역시도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의 명문가 중 한 곳인 '뉴랜드'가의 촉망받는 청년인 아처 뉴랜드는 이 신대륙에서 보이는 과거 유럽의 귀족적 유산과 다른 말로 관습이라는 본질을 때론 비판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행동거지와 '뉴욕의 신사'를 잘 연기하고 있지만 여느 젊은이들처럼 이 시기에 홍역처럼 겪게 되는 '남녀 간의 열정'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않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는 곧, '가문 대 가문'으로 맺어지게 될 메이 웰랜드와의 약혼과 이 둘을 진정으로 이어지게 할 결혼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작가인 워튼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결혼하게 될 메이와의 육체적 관계를 기대하고, 이를 통한 서로 간의 뜨거운 사랑을 어느 정도 원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러한 스스로의 본심을 가문의 적장자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더불어 뉴욕을 대표하는 가문의 일원으로 그가 다소 경멸하는 '뉴욕의 일반 시민들'이 행동할 법한 그런 무모성과 충동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데요. 하지만 그런 그도 엘런을 극적으로 대면하고 나서 일전의 사고와 행동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극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라 볼 수 있는 엘런은 아처와 약혼을 한 메이 웰랜드의 사촌 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메이의 모친과 올케 사이인 밍고트 부인의 손녀로 그녀 역시, 뉴욕의 상류 계층 가문의 일원입니다. 일찍이 그녀는 폴란드의 백작가에 시집을 가, 현재는 위태로운 결혼 생활에서 염증을 느끼고 도피하여 뉴욕으로 온 상황인데요. 뉴욕의 명문가를 구성하는 각각의 이름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이혼'자체를 모욕으로 여기기에 웰랜드 가를 비롯한 저명한 인물들이 엘런의 '조기 복귀'를 매우 애타게 바라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처는 미래의 아내 될 사람의 사촌이 상류층이 한 몸으로 원하는 그녀의 이혼 방지를 위해, 설득을 위한 대리인으로 나서면서 엘런과 특별한 연을 맺게 되는데요. 결국 엘런은 아처의 바람대로 이혼 자체를 무기한 연기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점차 깃들게 되는 흠모와 애정에 기댄 결과물이기도 했는데요. 극 초반에 아처와 메이 이 커플의 약혼에 대한 일련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아처가 간절히 원했던 메이와의 즉각적인 결혼으로 1부는 그렇게 마무리 되고 되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기인한 구 시대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귀족 특유의 소산들과, 거의 구태에 가까운 경직된 규범과 이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사교 모임과 각종 파티는 이 소설에 있어 주요한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이미 여기서 그려지는 뉴욕은 점차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귀족적 유산이 사라지고 있었고,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는 몇몇 가문들의 밀접한 교류를 제외한다면 빠르게 퇴색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위 뉴욕의 상류 계급들은 자신들만의 법칙과 사교적 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바로 이런 범주 바깥에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엘런입니다. 그녀는 진정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특별한 감각을 가진 인물인데요. 더불어 결혼 제도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결혼 생활을 잠정적으로 거부하고, 경제적 독립을 비롯, 스스로의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여성이기도 합니다. 아처에게 있어 엘런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어머니나 여동생처럼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여성으로서 해서는 안될 사회적 금기와 대척점에 있는, 소위 다른 세상에 서있는 여성이기도 한 데요. "여기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라고 꼬집어 말하는 엘런은 뉴욕 사교계의 염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런 사교계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데요.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보는 시선, 사소한 집안의 인테리어 마저 엘런은 여느 여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런 엘런과 여러모로 얽히고 비교되는 캐릭터가 바로 메이 웰랜드입니다. 그녀는 이 상위 계층의 여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여실히 인식하고, 여기에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여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메이의 이 모든 지침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 되었고, 그녀의 부모가 그리 원만한 부부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가 노력했던 것처럼 메이 역시 아처와의 결혼 생활에서, 미소 속에 자신의 감정을 곧잘 숨깁니다. 메이는 아처가 본질을 깨닫는 여러 대사들을 통해, 그를 향한 그녀의 배려와 이해심, 다른 한편으로 그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또한 남편인 아처에게 때론 무감한 태도와 아내의 절제를 보이기도 하지만 엘런과 남편 간의 감정에 대한 실체를 누구보다 재빨리 깨닫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를 아처에게 직접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결혼 드레스를 통한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치기 어린 반항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후에 뉴욕 사교계의 갈등 원인들 중 하나로 언급 되지만 뉴욕을 떠나 워싱턴에 임시 거처를 두고 있던 엘런과 이런 그녀와 만나려는 아처의 행동을 아내의 입장에서 극렬하게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겉으로 나마 자신이 두 사람의 재회가 집안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위선을 잘 감추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시대의 귀족 계층이 중요시 여겼던 부부간의 덕을 인정하고, 특히 부부간에 눈빛과 표정의 변화 만으로 이를 짐작하고,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면 메이는 가정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인데요. 무엇보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남편에게 이해 받으려고 도를 넘게 되거나, 자신이 익히 인지하고 있는 아내의 의무를 망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메이는 작가가 살았던 현실 세계의 결혼관과 맞물려, 어떻게 보면 워튼 본인의 경험을 글에 녹여낸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극의 후반부로 다다를수록 저 저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봤던 장면은 이런 뉴욕 상류층의 극도의 위선과 허울을 작품 전반에 덧대고, 이를 여러 인물들의 행적과 굴절된 대화로 드러내는 서사 전반이 갓 결혼한 상류층 계급의 남성과 주변으로부터 홀대 받는 유부녀와의 거의 통념을 벗어나는 애정 행각과 대비되는 서사 자체는 뭔가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정 부분 금기에 대한 인간 본연의 욕망과 더불어, 이와 상반되는 사회가 현격히 통제하는 이런 관습적 틀을 평소에 경멸해 마지 않던 인간도 이를 쉬이 벗어나기란 어려운 것이 그 실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성가신 가족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남편인 아처가 엘런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를 바랬던 메이는 자신 또한, 그의 아내로서의 의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엘런의 이혼 문제와 관련해, 많은 유럽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미국인들을 일컫는 '신대륙의 상류 계급'을 경멸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아마도 자신 역시 그런 남편과 사촌 언니의 벌어질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이혼은 전혀 해당 사항에 없었을 겁니다. 물론 워튼이 아처와 엘런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지는 여러모로 불확실하게 보인 점은 사실인데요. 작가인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서 불륜을 경험해 봤지만 이미 거듭된 몇 번의 대화와 나레이션을 통해, 엘런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사랑의 도피'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 몸서리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엘런이 아처를 향해, 자신의 입으로 '정부 情婦'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 아처를 몹시도 당황하게 만들지만, 당시 뉴욕 상류층이 누구보다 정직과 도덕률을 지켜야만 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아처에게 그와 같은 선택지는 거의 가능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누구보다 남편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했던 엘런의 운명은 사실상 거부되는데요. 다만 이 지점에서 아처 이전에, 웰랜드가를 비롯, 뉴욕 사교계가 그녀를 체제를 흔드는 터무니 없는 여자로 취급하고, 그녀를 향한 굴레 자체는 거의 지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뉴욕과는 어울릴 수 없는 외부인과 다름없는 내부인으로서, 이 엘런이라는 캐릭터는 아마 작가가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는데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게 되지만 아처 부부의 갑작스런 변화로 말미암아 극은 예기치 않은 흐름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훗날 아들의 입을 통해, 지난날 엘런과의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다시금 듣게 된 아처는 세상을 먼저 떠난 메이의 짤막한 소회를 접하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요. 결국 메이는 누구보다 자신의 남편을 신뢰했고 또한 경애했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뜻하지 않게 쉽게 부서짐을 극명하게 드러냈던 워튼을 잘 알고 있던 저로서는 이 소설에서의 결말 만큼은 정말 의외이기도 했는데요.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극명한 인물상, 여기에 뉴욕 상류층을 배경으로 제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시대와 관계의 진정성을 고찰하여 극에서 도출된 여운은 참으로 한편으로 이디스 워튼 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개인의 원초적인 열망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작용되고 때론 예기치 않게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해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난 시대의 금언은 어떻게 보면 철지난 문답 정도로 취급되는 시대를 워튼은 마지막으로 그려냅니다. 어쩌면 이는 누구보다 결혼 자체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후반부에 언급되는 아처의 소회와 그런 의미에서 결말 부분의 '시대가 바뀌었다'는 독백은 한때 나마 그런 자유로운 열망을 몸소 경험했던 작가와 가정을 지켜낸 주인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장한 아들의 보다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삶과 맞물려 주인공 아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극적인 엘런과의 재회는 그만큼 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 '책 읽는 남자'에 대한 워튼의 일관된 묘사는 이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환락의 집과 버너 자매에서도 책 읽는 남자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성을 이해하는 남자에 대한 묘사와 그런 설정은 이미 여러 여류 작가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지식이 한때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해 본다면 이는 여러모로 상당히 복잡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들이 속한 세상의 사람들은 은근한 암시와 섬세한 배려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고, 젊은이에게 그와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은 어떤 설명보다도 두 사람을 가깝게 해주는 듯했다.

약혼녀에게서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두 사람 다 자라면서 배운 대로 ‘불쾌한‘것을 무시하는 관례를 최대한 따르려는 단호한 의지였다.

‘품위 있는‘ 남자로서 자기 과거를 숨기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혼기가 찬 아가씨로서 숨길 과거가 없는 것이 그녀의 의무인 마당에, 그와 그녀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예절에 따르면 숙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신사들이 차례대로 옆에 앉을 때까지 우상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야 했다.

인간의 비열함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과 인간의 약함에 대한 본능적인 동정심을 조화시키려다 보니 골치가 아팠다.

언제나 아처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는 자신에게 일어나게 하는 타고난 기질이 우연과 환경보다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해결하면서 삶을 헤쳐나가겠지만 슬쩍이라도 미리 내다보고 생각해 두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당신에게 완전히 솔직해지고 싶어요. 나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바랐어요. 당신이 날 얼마나 도와줬고 어떻게 바꾸어놨는지 말할 기회요."

그녀의 선택은 그가 더 가까이 오라고 부탁하지 않는 한 그의 근처에 머무는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마 메이는 마담 올렌스카가 별거한 아내보다는 불행한 아내로 사는 것이 더 낫고, 돌연 제일 기본적인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어 골치가 아파진 뉴랜드와 이 일을 상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가족의 의견에 공감했을 것이다.

"꼭 엘런을 만나러 가요."메이가 그늘 하나 없는 미소를 짓고 아처를 똑바로 쳐다보며, 성가신 가족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 같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가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동안 그녀도 자신의 운명과 싸웠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결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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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1 사일로 연대기
휴 하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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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하위는 1975년생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서점 점원, 요트 선장, 지붕 수리공, 오디오 기술자 등, 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요. 지금 이 소설의 원전이기도 한. '울 Wool'을 단편 소설 형태로 독립 출판이 되었고, 아마존 킨들에 소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결국 이 작품은 장편 시리즈로 재탄생을 하게 되는데요. 더욱이 이 시리즈에 대한 영화 판권은 '20세기 폭스'에 매각되고, 결국 2023년, 애플TV에서 '지하창고 사일로의 비밀'이라는 TV시리즈로 방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원제, "Wool"로 지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9월 초도 번역을 거쳐. 현재는 개정판 1쇄가 2023년 4월 새롭게 출판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좀 살펴보다 어떤 영화 유튜버가 1시간이나 넘는 분량으로 이 TV 시리즈를 소개하는 것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영상을 보자마자 지난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시티 오브 엠버"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작품도 SF 디스토피아적 암울한 주제를 다루면서 공동체 권력의 붕괴를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더군다나 양 작품에 팀 로빈스가 출연하는 점도 그렇고 미래의 음울한 인간 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유튜버의 나레이션에 좀 집중을 하다 순간 이 TV시리즈를 찾아보는 것보다 먼저 원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배경인 '사일로 silo'는 평시에 핵 미사일이 잠들어 있는 일종의 격납고를 지칭합니다. 다만 이곳에서의 사일로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비롯한, 각종 기능적 공간이 구축되었고, 크기는 수직으로 나선형 형태의 144층이나 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은 '청소형'을 구형 받은 사람이 형 집행을 위해 외부 바깥으로 나가, 사일로에서 일종의 광장 역할을 하는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큰 화면으로 연결된, 외부 '렌즈'를 닦을 수 있는 '울 수세미'에서 인용되었는데요. 이미 바깥 대기는 인간이 숨 쉬고 살아갈 수 없는 '8가지의 독성 물질'이 만연된 상황으로 다만 지구 환경이 이렇게 된 정확한 연유는 아직 극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폐쇄된 소규모 사회라 볼 수 있는 '사일로'가 하나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다만, 이전 시대의 도시와는 달리 최적화 된 인구 조절을 위해, 아이의 출생을 법의 공인을 받는 부부 만으로 한정해, 추첨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일로가 자급 자족으로 연명하는 공동체이다 보니, 산소와 물, 먹을 것까지, 어느 하나 법의 통제 안에 놓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봐야 했습니다.     

이 사일로를 이끄는 시장인 '잔스'는 자신을 옆에서 수행하는 '만스' 보안관과 함께, 내부 치안을 오롯이 책임졌던 전임 보안관인 '홀스턴'의 후임으로 내정된 인물인 '줄리엣'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최심층부에 있는 발전실로 향하는 여행에 나섭니다. 제가 봤던 TV시리즈 영상에는 사일로의 전체 규모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 인류 공동체는 아마도 꽤 거대한 규모라고 짐작됩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일전에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지하 도시 '시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일로에는 여느 도시 기능과 마찬가지로 일반 법률로서 자리하는 '협정'과 이를 수행하는 사법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도시 전체를 총괄한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IT부서'가 있습니다. 이 IT부서는 심층부 석유 발전소에서 만든 전력의 총 4분의1 정도를 소비하고 있다고 언급되는데요. 이 부서를 책임지는 버나드 홀랜드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 사일로를 위해, 여기에 구축된 서버 컴퓨터와 그 기반 시설의 중요성은 그만큼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의 중요한 이유는 TV시리즈에서 자세히 나오지만 여기에선 따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버나드의 저 진술의 주요한 배경이 1권 후반부에 비로소 드러나기는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저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앞선 잔스 시장과 만스 부보안관은 서로 자애하고 동시에 가족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시장의 죽은 전 남편과 만스 부보안관은 서로 친구이기도 했고, 그런 친구의 홀로 남은 부인을 챙기고 보듬어 나가는 것이 어쩌면 그의 고귀한 의무로도 읽혔는데요. 나중에 드러나지만 그가 얼마나 그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극의 전개 과정에서 TV시리즈와 원작은 전반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전임 보안관인 홀스턴과 줄리엣의 얽힘도 그렇고, 극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심스의 역할이 원작에서 조금 축소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2권에서는 과연 어떨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합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잔스 시장-만스 부안관-후임 보안관인 줄리엣'의 따뜻한 유대감이 중요한 요소로, 여기에 대척점인 인물이 바로 IT부서 버나드 홀랜드 세력의 양자 구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선의와 음모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버나드는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세상에 대한 비밀과 이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계산적이고 냉혈한에 가까운 인물인데요. 아마도 그에 대한 복선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것은 아마 2권에서 많이 해소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저는 극에 등장하는 소재인 'IT부서'의 본질적인 면을 엿보고 나서, 우리의 민주주의 정체에서 시민의 안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소위 정보 조직 혹은 정보국이 떠올랐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CIA 정도가 되겠지요. 우리의 경우, 1980년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국가의 정보와 수사를 다루는 등의 국가 권력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그에 대한 면밀한 견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제가 뭐 미국의 정치를 일일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 자신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CIA를 비롯한 중요한 정보 기관이 투표로 선출된 하원 의장의 강력한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의회가 이들 특수 정보 기관들을 면밀하게 감시해야만 미국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지켜내는 길일 겁니다. 이 작품의 경우도(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IT부서의 독단과 전횡은 아주 큰 비중의 서술로 드러나고 있는데요. 물론 이 IT부서가 사일로 내에서 조직이 비대 해진 이유는 '과거 지구에서 벌어진 어떤 중대한 사건' 때문이겠지요. 조지 오웰도 그렇고 올더스 헉슬리도 그렇거니와, 시민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급격한 위기 상황에 자신들의 권력을 키우려는 세력들이 분명 '인간 세계'에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한 번 그렇게 구축된 권력은 쉽게 철회되지 않는다는 측면의 교훈과 함께 말이죠.

이 작품의 여실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하에 투표로 선출된 대표자 뒤 장막에 숨어, 조직의 전체적인 흐름과 시스템을 통제하고 사법마저 손 아래 두고 있으며, '언제나 겉을 미소로 포장하고 은신한 어둠의 권력'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바로 이러한 측면의 불행한 서사를 섬뜩하게 보여준 작품이기도 한 데요. 저는 이 작품이 주장하는 그 무엇보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구가 왜 그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참을 수 없는 의문을 갖고 있어 이 소설을 계속 읽게 될 것만 같습니다. 휴 하위의 이 야심 있는 소설이 저에게 어떠한 교훈을 줄지 이 부분도 크게 기대하면서 하루빨리 다음 권이 도착하기를 바래야겠습니다.



"당신 말은 누군가 우리 역사를 지운 이유가, 우리가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막기 위해서였다는 건가."

사일로 시민 모두가 품고 있는, 말하지는 않지만 막을 수 없는 희망이 있었다. 우스꽝스럽고, 근거도 없는 희망이었다. 그들 자신에게는 안 될지 몰라도 자식들 세대에는, 아니면 자식들의 대에는 다시 바깥세상에서의 삶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고,

그녀는 문득, 이 여자를 보안관으로 얻고 싶어 하는 이유에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층에서 심각하게 전력을 규제해야 했던 것은 주로 IT부가 지닌 면제권 때문이었다.

부부 사이에 오간 삭제된 이메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메일이 폭발적으로 오간 시기가 앨리슨이 삭제 복구 방법에 대한 책을 출간한 무렵이라는 점을 알아차린 줄리엣은 제대로 길을 찾았다고 느꼈다. 앨리슨이 서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줄리엣은 이 뒤틀린 공정성의 개념이 다른 이유 못지 않게 가엾은 만스를 갉아머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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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자격 - 지식인의 책임과 그 후편
노암 촘스키 지음, 강성원.윤종은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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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는 192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이스트 오크 레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부친인 윌리엄은 1913년, 징병을 피해 러시아 제국에서 미국 볼티모어로 이주를 해왔습니다. 촘스키가 16세가 되던 해인 1945년,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일반 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철학, 논리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특히 아랍어에 대한 관심을 키웁니다. 그런 그의 지적 호기심은 젤리그 해리스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되고 그런 해리스의 인도 하에,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리고 1955년에 촘스키는 MIT에서 조교수를 시작으로 강단에 서게 되는데요, 특히나 '통사론의 측면','생성 문법 이론의 주제'와 같은 논문들은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미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1967년 이후의 시기에, 촘스키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인의 책임"이 그를 대표적 반체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데요. 더욱이 직접적인 반전 운동으로 여러 차례 당국으로부터 체포되었으며,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반대자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피력하고 1985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개입한 니카라과 콘트라 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미 정부를 강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이 노년기에 접어 들었을 시기에는 9.11 테러로 촉발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일련의 그의 활동으로 친정부 지식인이 아닌 저항하는 대중 지식인이자 좌파 지식인으로서 전세계 자본주의 문제, 미국이 저지른 타국에 대한 불법적 군사 개입,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을 언론과 평단에 끊임없이 제기하는 그야말로 미국의 실천하는 양심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일종의 합본 형식으로 추가된 후편은,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 Redux"로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Who Rules The World?"의 발췌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4년 3월 이뤄졌습니다.

편의상 촘스키의 이 글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다면, 전편은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 시기의 촘스키는 반전 운동으로 비롯된 반정부 운동으로 유명했고, 스스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지식인의 개념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당시 출판된 비평가 드와이트 맥도널드의 거의 동일한 제목을 가진 에세이로부터 글이 전개됩니다. 지금도 '통킹만 사건'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이 사건과 배경과 사건이 상이하지만 1961년의 '피그만 침공'을 고찰해 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이 과연 어떤 국가였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촘스키가 이 글을 통해 일일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의 행정부의 권력 조직이라는 것이, 헌법을 통해 의회의 견제를 받는다고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시절의 위법한 '이란-콘트라 사건'을 기억한다면, CIA와 국방부 엘리트 관료들이 주축이 된 비공개 군사 작전 같은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나날이 첨예화 된 냉전 시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 간의 소위 극명한 이념 전쟁을 다른 영화나 드라마로 접해본 분이라면,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이 거대한 자유주의 정부가 어떤 식으로 법과 정의 위에 있었는지 분명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헌법을 거의 국체로 여기는 국가인 미국은 의회의 권한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소 도식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권력 분립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행정부의 오판이라든지, 외부에 대한 과도한 군사력 투사, 타국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인접 국가들의 군사 쿠데타 지원 등은 의회의 견제 만으로는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방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는 시민들의 입을 통한 여론이 필요한 부분이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언론의 의무 또한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식인의 책무와 더 나아가 이들의 양심이 무척이나 중요한 지점인데요. 이에 촘스키는 이 글의 후편에서, 일반적인 지식인들은 '체제 순응적 지식인'과 '가치 지향적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후자는 특히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고 단언하는데요. 그만큼 가치 지향적 지식인들은 행동에 따른 대가가 그 발언과 비판에 비례하여 처벌이 가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체제 순응적 지식인이야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촘스키가 말하는 "지식인은 특권을 갖고 있다"는 설명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원하면 권력에 합류할 수 있고, 엘리트 지배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의 정치와 같이 사회 내부의 존경과 개인적 이익을 쉽게 거둘 수 있다는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내용일까요. 촘스키는 독자들을 위해, 정확한 답변 없이 그저 '진실의 여백'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일찍부터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협력(이것의 수사는 아마도 다양할 겁니다.) 아래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하면서, 그렇게 지식인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보통의 지식인들이 사회의 공익과 다수의 이익에 소위 기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진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위의 얄팍한 진술로 그저 지식인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론에 근거한 입장과 양심의 문제로만 추동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능력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미덕인 사회로 진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사적인 이익 획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촘스키의 '지식인의 자격'은 아마도 권력과 가깝고,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조직과 그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식인들을 냉정히 비판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로 확인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서두에 등장하는 아서 슐레진저의 사례는 촘스키가 '함량 미달의 지식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의 말대로 지식인의 책무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되어, 사회를 위해 양심의 소리가 적시적소에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오판을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저의 순진한 생각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슐레진저와 같은 내각에 참여했던 지식인이 시민을 오도할 수 있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일련의 군사적 개입 사태에서 미국 시민 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민의 운명까지 포함해, 가감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촘스키가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그 추악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다시 한 번 '굴절된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해악이 될 수밖에 없는지 곧이어 등장하는 논증들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힘에 굴복하는 동물의 날 것 만큼이나 유리된 시민 다수의 이익과 안전은 추방되고, 그렇게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 과연 우리의 미래일지 진지하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미국의 현저한 국익과 관련해, 1954년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1973년 합법적으로 들어선 칠레 아옌데 정부를 미국이 무너뜨리기 위해, 시카고 보이스(시카고 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들)와 불법적인 CIA의 개입은 일전에 브레진스키가 남아메리카를 꼭 집어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한 언급을 새삼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정의와 권리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미국에 의해,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등지에서 벌어진 비극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에 촘스키는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더욱이 1973년 9월 11일의 칠레 피노체트에 의한 군부 쿠데타는 묘하게도 28년 뒤의 9월 11일과 불길하게 매치가 됩니다. 저자인 촘스키는 마찬가지로 이 23년전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 정보 당국이 충분히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여러 정황들을 포함해, 설득력이 높은 논증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게 보일 '답변'과 비극적인 테러 이후, 2011년 5월, 미 특수부대에 의해 그가 살해되고 시신이 바다에 버려진 사건에 대해서도 "왜 그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지 않았는지"에 합리적 의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빈 라덴의 처리를 둘러싼 여러 현실적 요건을 고려해, 이런 자에게 알량한 재판 따위는 필요 없다고 윗선에서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 국제정치학적인 배경에서 빈 라덴을 그렇게 처리했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중요한 법의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재판에서 '그날의 비극과 참상'이 빈 라덴에 의해 오염되고 훼손될 것을 두려워해서였을까요.


촘스키는 평생에 걸쳐,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불법적인 군사 개입과 은폐된 작전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비판했던 지식인입니다. 만약 그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의 시민이었다면 쥐도새도 모르게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지식인의 자격과 책무란 참으로 무거운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텐데요. 후편의 결론에서 지식인은 특권이 있다고 단언하는 부분에서 촘스키 자신은 사회로부터 얻은 그 특권에 보답하기 위해, 그런 고난의 길을 서슴지 않고 걸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도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 세력에 의해 '미국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촘스키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를 전형적인 좌파 지식인이라는 틀을 씌워 그의 경력과 양심을 애써 폄하하기도 합니다. 촘스키 이전에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언급했던 쥘리앙 방다는 지식인은 양심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 당위를 강조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유복한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양심에 목숨을 걸기에는 지식인 개인이 '잃을게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자칭 지식인이라는 벼슬로 자신의 입장과 스스로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나 조그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기득권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며, 진실을 오도하고 더 나아가 대안적 사실과 같은 궤변으로 이 세상을 아주 재미난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떤 식으로 귀결이 될지 참으로 음울한 생각이 드는데요.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과잉된 민주주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것처럼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가 사람을 고르는 시대'를 우리는 곧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헨리 키신저는 전문가의 책임을 자세히 설명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전문가는 자기 선거구민의 합의를 "높은 수준으로 구체화하고 정의"하여 선거구민이 세운 틀 안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격을 갖춘다.

독일과 일본 국민은 자국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아주 당연히 맥도널드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도 던진다. 전쟁 중 민간인을 잔혹하게 폭격한 데 영국과 미국 국민은 어느 정도로 책임이 있는가?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과 동기, 숨은 의도를 파악해 정부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드러내는 것은 지식인의 책임이다. 이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는 진부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에 반해 미국의 동기는 순수하며 분석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종교적 믿음이나 다름없다.

‘전문 지식‘이 세계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한, 정직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지식이 타당한지 어떤 목적에 쓰이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이는 더 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미국의 공격적 행보가 세계정세를 좌우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미국의 정책은 그 이면에 있는 명분과 동기를 가지고 분석해야 한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고 어느 정도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에 신경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벨이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자. "민주적 제도를 구축하면 새로운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변혁은 전체주의적 수단으로만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물음을 제삼세계의 이데올로그보다 미국의 지식인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버틀란드 러셀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최근에 나오는 전기에서도 여전히 욕을 먹는다.

닉슨 행정부의 표현을 빌리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목적은 "외국인이 우리가 엿 먹도록", 즉 국내 자원을 장악하고 더 넓게는 미국 정부가 싫어하는 노선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 정책을 추구하도록 부추길 가능성이 있는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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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반대한다 - 무능한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적 비판
제이슨 브레넌 지음, 홍권희 옮김 / 아라크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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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브레넌은 1979년생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의 턱스베리와 뉴햄프셔의 허드슨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소재한 사립 연구 대학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뉴햄프셔 주 더럼에 있는 공공 연구 대학인 뉴햄프셔 대학을 거쳐, 애리조나 대학에서 데에빗 슈미츠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 대학의 연구 센터인 PTP (Political Theory Procject)의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대학의 철학과 조교수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브레넌은 민주주의 이론, 유권자 투표 역량, 공공 정책, 미국식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기초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그의 논저들은 대부분 이론과 현실 정치의 괴리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유권자들의 무지성,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의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포함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gainst Democracy"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스스로를 '현격한 도구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 저자는 민주주의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그 자체로 흡사 숭고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자신의 글에서 줄곧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독일이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에 어떠한 참화를 초래했는지 돌아봐야만 하고, 저자의 강조대로 민주주의 자체를 혹여 과도하게 신성시 할 필요는 없지만 기존의 체제를 그저 쉽게 생각하여 경우에 따라서 비상시에 '어떤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소위 '결단주의자들'의 지독하고 편의주의적인 논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역시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저자는 꽤나 직접적인 수사로 분석되고 있는 우리 유권자들의 '무능'과 민주주의 체제 특유의 내재적 분열로 정치가 더 이상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지 않는 작금의 모습을 고통스럽지만 거의 가감 없이 규명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재 민주주의의 한계를 저자 자신이 분석한 여러 근거와 인용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동안 여러 민주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현실과 일정 부분 괴리가 있던 민주적 이상도 회의적인 측면에서 동일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대안으로 뒤이어 충분히 논증되는 '에피스토크라시'를 현실 정치의 대체제로 제안하며, 전체적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는 일종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과 주요 지식 체제 전반이 주가 되는 통치로, 현재의 전문가 정치 내지는 전문가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다수의 '위임된 주권'이 기반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질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특정 영역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엘리트 지배 체제'임을 감안해 본다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에피스토크라시가 이 엘리트 지배 체제와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와 그 불확실성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유권자들을 크게 3가지 성향의 부류로 나누고 있었는데요. 독특한 작명 센스 만큼이나 그 내용들도 충분히 평범하지가 않았습니다.

우선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며, 사회과학적인 지식도 거의 없는 '호빗'은 그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의 일반적인 비투표자들을 대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훌리건'은 정치적 광팬으로 이들 모두는 대체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룹입니다. 특히나 이들은 앞선 호빗들과는 달리 사회과학을 어느 정도 신뢰하지만 자료를 선별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나 연구만 취합하려는 경향이 다분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속한 정치적 그룹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은 가히 배타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때에 따라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이 훌리건 그룹은 미국에서 매번 꾸준히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어느 정도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컨(아마도 미국 SF 드라마 '스타 트렉'의 모든 사적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지향하는 종족인 '벌컨 Vulcan'을 모티브로 삼은 듯 보입니다)은 정치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여기며, 이들의 의견은 사회 과학과 철학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벌컨의 특성은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편향되고 비합리적인 것을 피하려 하기에 냉정하지만, 유권자 그룹 전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습니다.

이렇게 2장에서 3장은 유권자들을 '3그룹'으로 나눠 분석한 내용들을 담고 있고, 저자의 분석은 어느 정도 날카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벌컨을 제외한 호빗과 훌리건은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그룹으로, 저자인 브레넌이 체제의 구성원들과 혹은 유권자들의 소위 정치적 기본 능력에 기반한, '역량 원칙'에 있어서도 이 두 그룹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이들이 "정치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조차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들이 아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그 맥락은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2장에서, 미국의 유권자들 가운데, 현직 대통령이 속한 정당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자료 해석은 전세계에서 가장 고도화 된 대학 시스템을 보유한 국강의 시민들이 그와 같은 간단한 정치적 배경 지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이는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요.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유권자가 민주주의 전반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또한 이러한 다수가 구성하는 민주주의의 불확실성 자체도 심각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기존의 기득권층과 지식인 계급이 오랫동안 보여왔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대중 자체에 대한 불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거듭 분석하는 이런 비판은 "기본적인 기초 경제학 지식도 없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경제적 지식과 그렇게 확대한 주장이 근본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해석하는 측면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현대로 넘어오며 요구되었던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은 시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과 이를 통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부분일 텐데요. 이러한 사고는 어느 정도 계몽주의에 기반한 것이고, 저자가 계몽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의 정치적 인식이 얼마나 회의적이고 부정적인지 짐작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에 하나인 "숙의 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를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대다수의 시민들이 상당한 인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자료적 증거와 함께 현실 민주주의에 있어 정치가 유권자들 대부분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채로 있기를 심지어 부추긴다."는 2장 후반부의 도발적인 진술은 선연히 이해될 수 없었는데요. 이것은 정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제 전반의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누군가가 이 현실 정치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며, 그런 유권자의 기본 자질이나 자격조차 없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어찌됐든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더 나아가 그런 '주권적 형태'를 저자는 그리 아름답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유권자로서의 시민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관념상 무의미하다고 보는 장면은 저자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했는데요. 이어지는 3장의 진술도 '시민들의 재교육'과 '스스로를 위한 학습'이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현실 정치를 알고자 지식을 찾는 행위 자체가 많은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분석은 이처럼 반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전에 알렉시스 토크빌과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의 역량 재고를 위해 광범위한 재교육이 체제에 있어 시급히 필요한 일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런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 자체가 이들 개인에게 있어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저자의 논평은 꽤 흥미로웠던 부분인데요. 3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정치 참여는 타락시킨다"는 제목은 마치 옳은 방법으로 숙의하지 않는 다수가 정치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그만큼 순진한 생각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확증 편향과 인지적 편견에 쉽게 벗어날 수 없고, 특별한 정치적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재논의나 오류로 판명된 의견의 개선 역시 불행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공론장을 매개로 시민들 간에 건설적인 토의가 가능할 지는 이곳의 논증대로 라면 거의 회의적인 수준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예를들어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방향성을 가진 정치 세력과 토론이 가능할지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저자의 해석대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공적 숙의와 시민들 사이에서는 더 큰 포용과 진정한 정치적 평등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현실에서는 상당히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요. 숙의의 개념은 앞선 부분에서 같은 맥락으로 한계가 있다 손 치더라도, 뒤이어 이어지는 저자의 '정치적 평등'에 대한 분석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 내부적으로 모든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 소위 '정치적 효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데요. 이를 단적으로 말해, 현재 미국 의회에 대한 정치경제적 금권 로비는 의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계층이 전투적인 로비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정치적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어떻게 개념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을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이는 역으로 놓고 봤을 때,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적 평등과 현저히 거리가 있는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논증적 한계는 현실의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적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그저 정치적 평등에 대한 모호성을 다소 빈약한 근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것이 시민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더욱이 앞선 숙의 민주주의가 인간의 원초적인 불합리성으로 인해 시민들이 편견에 빠진 상태에서 숙의 자체가 시민권을 가진 개인에게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촘스키가 분석한 지식인에 대한 몇 가지 분석과 맞물려, 어느 특정 지식인들은 시민들이 정치와 국가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진실의 공개는 사회의 지식인 그룹과 권력층이 어느 정도는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와 관련된 직접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지만, 이보다 큰 다른 이점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할 수도 있다."고 실로 어정쩡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그 자체로 정부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자유와 자율성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맥락이 기반이 된 정치적 투표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인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의 한 표가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저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양자'에서 주권 개념이 중요한 가치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과 시민이라면 마땅히 공직에 지원할 수 평등한 자격이 주어져 있겠으나 현재 대다수 시민들이 공직에 지원하여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사실상 제한되어 왔다는 점에서 '주권 개념에서 도출된 공화주의적인 정치'가 얼마간의 시대를 거치며 변질되어 왔다는 부분도 우선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더욱이 저자는 필립 페팃이 주창했던 '비지배 자유'를 특별히 인용하면서 앞서 진술했던 정치적 평등과 이 전자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정치적 평등과 관련해, 자체 의미와 개념을 애써 재단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였는데요.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평등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냉전 시기에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자유'에 어느 정도 협력한 민주주의에서 반이데올로기적이든 태세를 바꾼 능력주의의 신봉이든 간에 어느새부턴가 '평등'이 상당히 금기시 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는 일전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인터뷰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기도 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가 현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실질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관된 논증 가운데 저자는 각각 시민들의 투표 역량 검증을 위해, 일종의 지식 테스트를 사회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일정 부분의 점수에 도달한 유권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저 역시 즉각적인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의 앞선 주장을 단순한 '기호론'으로 국한해 해석할 수는 없기에 앞선 유권자들의 역량을 측정해 보겠다는 아이디어의 발상 자체는 아마도 에피스토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반해 고유한 의견을 갖는 핵심적 내용으로도 읽힙니다. 제가 맨 처음에 언급 했듯이, 저자는 철저한 도구주의자로 현실 정치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현실에 잘 부합하는 체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도 한 데요. 그가 제안하는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놓여 있는 동시에 쉽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간단히 취사 선택이 가능한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5장 후반부에서 저자가 이 에피스토크라시가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인정한 진술은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 논저에서는 엘리트주의와 에피스토크라시를 구분하여 독자들에게 인식 시키고 있진 않지만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엘리트주의적인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가 서두에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하면서도 '공리주의'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이 의도된 차원인지 의심을 갖게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하는 시민들의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모호하게 그려지고 더 나아가 힘없는 다수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 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유권자들의 성향, 그들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 역시,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6장에서 유권자들을 불합리하고, 제 역할을 못하고, 부도덕하며,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분석하면서 이들이 주가 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결국 이 논저의 원제가 의미하는 'Against Democracy'는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정치'전반에 대한 확고한 반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글에서 짧게 언급되는 도덕적 원칙은 민주주의에서 정의의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선 '시민들의 이익'이 사회가 보장하는 정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지는데요. 인류가 구축한 여러 정치 체제 가운데 민주주의 만큼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그만큼 규명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텐데요. 민주주의의 근원적 가치인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저자가 인정하는 시민들의 인지적 다양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비록 현실 민주주의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정체 자체를 경험한 시민들이 과두제나 혹은 엘리트 지배체제와 비슷한 에피스토크라시를 수용할 지는 그만큼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브레넌의 이 책이 일관되게 유권자와 이들이 갖고 있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상대적으로 다른 시대와 비교해, 질적으로 고등 교육의 사회임에도 시민들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기본 인식에 대한 무지와 그런 이들이 절대 다수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한계라고 볼 수 있는 오늘날 왜곡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과 맞물려, "오늘날 민주주의가 왜 불공평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이 대답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은 스스로 견고한 지식인 계급에 속한 사회 주류로서, 대중들에게 알릴 수 없는 금기시 되는 문제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식적 한계는 명확합니다. 결국 그의 최종 결론이기도 한, 정치가 앞선 부정적 요소들로 인해, 시민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정치 전반이 시민들을 교묘히 충동질시킨다는 진술은 어느 정도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굳건한 권력을 갖고 있거나, 충분한 자원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층이 절대 다수의 무지한 시민들을 손쉽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몇 세대 앞의 민주주의는 전망 그 자체는 상당히 암울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자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일반 유권자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분류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배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투표권을 역량의 수준에 따라 유권자들에게 부여하자는 아이디어도 그렇고 논증과 주장의 과격함은 제가 읽었던 여느 논저들에 비해 가장 극단적인 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와 동시에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희망적인 사고와 타당성 없이 우연히 믿게 된 평판 나쁜 다양한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해 투표한다.

제 역할을 못하는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논의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지능을 요구한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한 명의 후보를 선택한다.

부도덕한 유권자 : 대다수는 인종차별주의에 따라 흑인보다 백인 후보를 선택한다. 아니면 피상적으로, 더 잘생긴 후보를 선택한다.

부패한 유권자 : 대다수는 어떤 정책이 소수자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거나 그럴 위험이 매우 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정책을 선택한다.

              





"일반적인 시민은 정치 분야에 들어오자마자 정신적 수행 능력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자가기 정말 관심 있는 범위 내에서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논쟁하고 분석한다. 다시 원시인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길게 주장하겠지만) 보통 선거가 대다수 유권자에게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도록 부추기고, 이러한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에피스토크라시는 지식인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체제는 역량, 기술,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행동하는 선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분배되는 정치권력의 정도만큼 에피스토크라시적이다.

먼저 어떤 형태의 에피스토크라시가 현실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낸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대신 에피스토크라시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사에서도 대부분 정치권력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이고 혐오스럽고 사악한 이유 때문에 불평등하게 분배됐다.

시민 개개인은 정부에 관한 힘이 거의 없고, 개인의 투표는 기대 가치가 거의 없다. 시민들은 정치 지식을 얻는 일에 투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선호가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상관없이, 정치를 잘 알기 위해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

그 결과는 많은 피실험자가 집단에 순응하기 위해 실제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료의 압박은 의지뿐만 아니라 시력까지 왜곡시킬 수 있다.

반면에 나는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가 당신이 정부에 동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당신의 이익을 증진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의 자율성을 증가시키지 않고, 지배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며, 당신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도덕적 발전을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주의의 상징적 힘에 광범위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동등하지 않은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은 또 무엇을 표현하는지, 그러한 표현이 사람들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것들이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도 대부분의 시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많은 이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이 경험적 증거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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