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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이후 (반양장) - 제도와 전략적 억제 그리고 전후의 질서구축
G. 존 아이켄베리 지음, 강승훈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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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과 국제관계론을 가르치고 있는 G. 존 아이켄베리는 미 국무부와 브루킹스 연구소를 거쳐 현재 로버트 코헤인과 함께 많은 인용과 관심을 받고 있는 국제정치학자입니다. 저는 아이켄베리를 과거 한스 모게소와 같은 비슷한 인식을 가진 학자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다만 약간 상이한 점은 모겐소와는 달리 아이켄베리는 국제환경과 국제정치에 대해 다소 자유주의적 시각에 따른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헨리 키신저와도 사뭇 비교되는 점이라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 ‘승리 이후’라는 글은 바로 제도와 타협을 통한 세력균형적 억제와 전후 질서를 만들기 위한 역사와 이론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또 이러한 가치들이 세계 안정과 평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 도입에 관련하여 아이켄베리가 논의하고 있는 여러 국제정치질서 즉, 세력균형과 패권, 입헌형태 등을 소개하고 최종적으로 전후질서에 대한 안정적인 요건을 구축해 특히, 제도적으로는 일종의 입헌주의적 형태로서 여기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공통적인 합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패권에 준하는 정치 주도국을 따라 포용 내지는 추종국들의 관계를 현실주의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적극적 이상주의의 모습과 같이 적절한 체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아이켄베리의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비엔나 체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유 체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테헤란과 얄타 회담에서의 전후 논의 및 냉전 종식 이후 세계의 체제 전환적 구축을 역사가 가미된 국제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이는 어떻게 하면 불협을 넘어 각국의 억제와 질서를 재정립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방안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혼란한 전후의 질서를 정상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주도국의 역할과 그만의 행적들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유용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2차 양차대전 이후의 질서 구축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도 분명히 이 책의 장점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전 유럽의 질서와 관련하여 특히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전쟁으로 종결될 것이 아니라 당시 나폴레옹을 통한 합의에 준하는 종식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역사는 그것과는 다르게 나폴레옹이 두 차례의 좌절을 겪고 나서야 소위 ‘구체제의 회귀’라는 비엔나 체제가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제일의 혹은 세계 제일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자신들이 유럽에 물리적인 군을 파견하면서까지 질서 구축에 나서기는 원하지 않았고, 다만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에 이르는 동맹을 통해 이후 이들 국가의 야심과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영국 스스로 기울여 왔다고 서술합니다. 즉, 이것은 점차 드러나고 있던 러시아 황제의 팽창주의적 영토 야욕에 이르러 적절히 개입이 되었고 이어 프랑스가 이 4국 동맹에 참여함으로써 이 전제주의 동맹이 결과적으로 전후 질서에 불안전하지만 도움이 되었다고 아이켄베리는 다소 제한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프랑스가 비스마르크에 굴욕을 당함으로써 이러한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는 “미국이 유럽에 제공하는 자산이 아니라 독일과 조기 단독강화를 맺을지 모른다는 유럽국가들의 우려”가 전제된 꽤 의심스런 질서 체제였습니다. 더욱이 우드로 윌슨의 그 끝도 모를 이상주의적 견해와 희망적인 에단은 전후 복구와 질서를 위해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수동적인 합의는 이끌어 냈지만 윌슨의 세계연맹의 그림, 자결주의와 같은 당장 실현하기 힘든 정치적 입장이 결국 느슨한 질서 유지에 그쳐 후에 독일의 굴욕에 따른 파탄을 간접적으로 초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윌슨은 스스로 “민주주의 세계혁명과 제도적 약속이행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다소 뜬금없는 이상주의적 태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고, 반대로 “유럽의 동맹국가들은 미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정세를 인식했으며, 전후의 경제부흥을 촉진하고 유럽 대륙에서 대국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이 전후 유럽에 계속 관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희망대로 미국의 보증은 다소 애매했는데 그것의 전제 조건이 “강화에 참여하는 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의 원칙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차대전 이후 각국의 황제를 비롯한 전제정권이 강제로 붕괴하고 그 짧은 시기에 민주주의적 국가체제를 이행하기란 사실상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동유럽 부근은 민족자결적 원칙에 따라 “민족국가들”로 쪼개져 이들 신생국가들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우드로 윌슨이 주도하는 유럽 질서는 마찬가지로 한계가 명백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전후체제가 교훈이 되었는지 2차대전 이후 처칠의 영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유럽에 대한 지속적 개입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처칠과 루즈벨트의 커넥션은 대체로 견고했고, 독일을 무장해제 시킨 후에 서유럽 전체에 대한 제도적 질서에 영국이 대체로 동의함으로써 ‘대서양 헌장’과 같은 전제 조건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영국의 제국주의적 질서에 미련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미국의 계획은 전후 질서가 민주주의적 입헌 질서에 따른 체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처칠이 총선에서 패배하지 않고 퇴장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처칠의 숨겨진 희망은 아마도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국-(부분적인) 서유럽 관계의 대서양 동맹이 후에 NATO로 연결되었고 전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영미 양국의 협력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은 색다른 전후구축을 탄생시켰는데 최종적으로 소련과의 냉전에 따른 봉쇄질서와 세력균형과 핵억지, 정치 및 이데올로기의 경쟁이 수반되는 혼재 양상의 체제였습니다. 이 2차대전 이후의 구축 체제는 미국과 서유럽을 경제 및 군사로서 잠정적인 하나로 묶고,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서 원만한 민주주의적 추종국들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 큰 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켄베리도 인정하듯이 미국 스스로 패권에 의한 강요를 서유럽 동맹국에 가하지 않음으로 이어지는 냉전시기에도 이들 자유진영의 노골적인 불협화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모델이 과거와는 달리 패권국의 새로운 형태였지만,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 뒤를 따르는 제도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자유진영 연합이 물론 산적한 문제도 있었지만 세계 안정에 기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냉전 이후의 상황도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의 극적인 장면은 아니었지만 러시아에 맞선 NATO체제의 확대, 통일 독일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으로 NAFTA와 APEC의 출범이 이념 대결의 끝의 혼란을 종식 시키는데 기여했고 특히 NATO의 확대에 따른 러시아의 묵인은 후에 러시아의 양보로까지 여겨지고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미국과 서유럽의 술책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의 러시아를 향한 신대결구도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현재로서도 NATO가 러시아를 향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및 공업국가 연합이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 직면해서도 힘의 분배가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의 기반이 아마도 미국의 전통주의적 고립추구를 제어하고 유럽과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이 바로 미국 이익에 기반한다는 의견을 확대시킨 결과로도 또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켄베리는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중요한 ‘제도적 합의’ 및 민주주의 국가들간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선험의 인식을 중요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패권의 지위에 이른 미국이 스스로 민주주의 체제를 신봉하고 있고 그러한 바탕으로 각국 간의 관계에서 제도와 입헌적 가치 체계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미국 패권의 아마도 생산적인 부분일 겁니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경제적으로 비상한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의 대두에도 일정의 제어력이 되지 않을까 감히 예측해봅니다.

과거 소련은 거의 비등한 동유럽 세력을 갖고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서유럽 및 대서양 민주주의 연합에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념적 대결이 경제적 부흥의 차이로 종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공업국가의 결합이라는 우월성이 안보와 경제적 측면에서 서로간의 제도적 합의를 전제하게 되었고 꼭 직접적인 위압과 물리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이러한 안정적 질서 체계의 번영을 보장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이 책 자체의 기본 골자가 기존 체제의 신흥 주도국의 정치적 개연성 등을 다루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앞선 나폴레옹 전후 및 1차대전의 전후 체제의 완만한 최종적 실패가 미국으로 대변되는 신흥 주도국의 학습효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정적인 세력 균형을 통한 질서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을 어떤식으로 달성하느냐가 과거에 중요했고 꼭 일련의 일어나는 주도국에 의한 약간의 불확실성의 동반되는 안정이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성공적인 주변 억제와 질서 구축이 그 자체 만으로도 미국의 이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중 독일과 일본의 공동경영권의 자급자족 권역을 미국이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듯이, 오늘날의 자유시장 경제 기조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이 여러 국가들에게 혜택이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미국의 과도한 냉전적 안보를 위한 불법적이고 불행한 타국의 개입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점은 망각하지 말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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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빈 2022-05-09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와 미 재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 주니어를 혼동하신 건 아닌지요.

베터라이프 2022-05-10 19:47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한스 모겐소인데 오타였네요. 전적으로 저의 착오입니다. 곧 수정하겠습니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질문의 책 12
자크 파월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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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으로 영국의 요크 대학과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수학해 정치학 및 역사학 학위를 취득해 현재 캐나다에서 방송을 통한 정치 토론과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자크 파월의 가히 ‘기념비적인’ 저술,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2002년경에 처음 출간된 뒤, 2015년에 개정판으로 재출간이 되었는데요. 개정 영문판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2015년판을 번역 출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판을 맡은 오월의봄의 ‘질문의 책’ 이라는 연작 시리즈 중에 하나이고, 더불어 역자인 윤태준 번역가의 나무랄데 없는 번역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자크 파월의 이 글은 실로 제2차 세계대전의 놀라운 관점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자 스스로는 일종의 ‘수정주의적’ 입장이라는 자기 겸손으로 평가하는데요. 이것은 글 서두에 “미국 시민들 역시 대다수가 이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고 언급하며 종래의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라는 악을 격멸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2차대전의 슬로건이 본질의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한 것으로 “서사의 흐름대로 운명처럼 미국이 이 유럽의 대재앙에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미국의 이익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준비하고 뛰어든 전쟁이라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전에 이 곳을 통해 소개한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서도 당시 헨리 포드와 같은 미국 기업 집단이 히틀러와 파시즘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미국의 기업가들은 히틀러의 독일이 소비에트의 스탈린 모델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에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일견 파악이 되지마자 크게 안심한 것으로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히틀러의 오판으로 비롯된 나치의 미국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에서야 파시즘과 히틀러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에 나섰고, 이러한 비슷한 태도는 전후 프랑스의 독재자 드골에 대한 승인에 미온적으로 나섰던 것과는 달리 우호적 판단 내지는 판단 보류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숨막히게 돌아가는 당시 유럽 전선에 독일 기업과 합작 또는 투자와 같은 형태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포드와 GE와 같은 기업들과 정치 엘리트들이 다소 나치 독일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과 같습니다. 이에 헨리 포드는 “연합군도 추축군도 (전쟁에) 이기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 했는데, 그는 일전에 히틀러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이력으로 이렇게 양자 사이에 저울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럽의 대전이 미국의 대공황을 탈출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고 그것을 몸소 체험한 미국의 많은 기업인들이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 태도를 보인 연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새로운 관점중에 하나인 대 일본 참전과 관련해서도, 당시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일본에 대한 지극한 인종주의적 태도로 떠오르는 이 신흥국이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발아래 두고 급기야 그것을 약탈하려고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매우 확실하게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루즈벨트가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유인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네덜란드와 손잡고 일본의 원유 등과 같은 중요 자원 공급을 막은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에 대한 무차별적인 영미 항공기의 폭격과 관련해서도 이들 소위 ‘정의로운’ 연합군이 독일 민간인을 상대로 75만발의 소이탄을 투하하고 30만명의 희생자를 내게 만든 것이 사실상, 스탈린과 소비에트에 대한 경고였다는 저자의 통렬한 분석과 독일군이 점차 괴멸하고 있던 시점에서 서부 전선의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내 이 잉여 독일군 부대를 재무장 시켜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치는데 이용하려고 했다는 근거와 그 자료들은 이 드레스덴의 재앙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진격한 연합군이 당시 시민들이 지지하던 정부를 제외시키고 제2의 파시즘 정부를 노골적으로 세운 것은 후에 스탈린에게 학습효과를 만들어 그와 같은 개입으로 거의 동일하게 동유럽에 써먹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방측이 흔히 말하는 ‘얄타 트라우마’가 회자되게 되는데, 이에 자크 파월은 “영악한 스탈린이 크림반도의 휴양지에서 그의 서방 동지들로부터 모든 종류의 안보를 쥐어짜냈다는 혐의는 전적으로 거짓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선 이유와 함께 이미 스탈린은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양보, 인접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연합국의 권리도 인정했고 원칙적으로는 폴란드와 체코에 민주 정부를 세우는 데 동의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미국은 트루먼 행정부의 그 즈음 개발된 원자폭탄을 이용하여 스탈린과 소비에트에 대한 협박과 같은 ‘원자외교’를 행했고 이 모든것은 대전 중 동맹이었던 관계에 태세를 바꿔 적대를 시작한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한 어떠한 당위성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보이는 거의 대부분의 논점은 나라와 나라간의 관계나 국제 그룹의 외교가 절대 낭만이나 이상주의적 품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이익과 그를 보장하는 술수들로 채워져 있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이후 시작된 기나긴 냉전의 시기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지만, 걔급 혁명의 가능성 때문에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적대로 몰아갔고, 이러한 매커니즘은 뒤이어 나오는 매카시즘과 자유민주주의의 자연스런 대적의 상대를 만듦으로써 분명하게도 그에 따른 숱한 과를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복지국가가 되지 못한 것은 핵심 권력들이 사회적 개혁의 압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즉 냉전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이 점은 미국 시민의 타고난 개인주의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분석합니다. 정말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이 냉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미 시작했으며, 20세기의 거의 대부분을 냉전으로 인한 명과 암이 수없이 혼재되는 세계의 편린들로 채우게 됩니다.

책의 맨 처음 부분에서 저자, 자크 파월은 종래의 2차대전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이라는 것을 다소 애매하게 밝히면서 여기에 인용된 근거 자료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이 글 자체가 구조적으로도 그리고 학문적 연계의 측면에서도 치밀한 대응을 하고 있고, 각각의 주장들이 터무니 없거나 과한 인용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대상을 정확히 조명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더불어 단순한 어느 사건의 전환된 시각이 아니라 두루두루 정확한 근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2차대전사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시에 우리는 어쩌면 이 글로 인한 적잖은 불편함을 목도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의로 포장된 전쟁의 진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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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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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알려진 슬로베니아 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자크 라캉과 관련하여 인정받는 권위자이며, 세계 철학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흔히 말하자면 ‘팝스타’와 같은 인기의 소유자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를 일독했습니다. 저에게 지젝의 서평은 이번이 3번째인데요. 저는 간혹 지젝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같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마 두 사람에게 학문적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음 좋겠군요.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로서, 번역 출간된 책의 제목인 ‘멈춰라, 생각하라’의 부제가 바로 이 원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의 이 책은 크게 10장의 논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의 성격이 대체로 문화비평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나, 특히 오늘날 세계의 정치사회적인 사건들의 분석과 비판도 분량을 할애에 담고 있습니다. 글 서두에 지젝은 독자들에게 ‘인식적 지도를 제공’하고자 하는 작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지젝에게 인식적 지도라는 것은 명백한 것으로 대중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정치사회적 파열현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일텐데요. 여기에는 지젝의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의 어김없는 비판의 논조를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들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이며, 이런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선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포장 되어 있지만, 결국 이 선택은 기존의 체계의 복종하더가, 아니면 자기 희생적 폭력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모순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두번째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가 정작 ‘세계’없는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란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이어진 ‘아랍의 봄’ 내지는 ‘아랍의 시민 혁명’과 관련해서 지젝은 그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행동에 나섰으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과 관련하여 수많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너무나 물리적인 수단으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의 주장들에 대해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정도이다”라고 일갈합니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한다고 행각합니다. 이러한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오늘날 유럽의 난민 문제와도 동일한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자체를 ‘현실주의’로 포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저로서도 부정적인 판단이 듭니다.

4장의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이라는 부분은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헝가리 정치의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이행을 다루고 있는데요. 다문화주의와 이민주의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민족주의적 체제 고수를 위한 정치 작업들이 이어지고 이에 헝가리에도 ‘자유의 방송’이 필요하다는 점은 의미 심장합니다.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에 반대의 큰 획을 긋는 이 헝가리의 사례는 이들이 파시즘으로 이르는 길을 닦고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매우 유념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며, 이 점은 어쩌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정치적 현실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유럽의 반이민주의는 위험한 수준인데, 이들의 반이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극우 포퓰리즘’을 초래하고 있으며, 마치 미국의 티파티 운동을 빗대어 말한 것 같은 지젝의 표현인 ‘새로운 기독교 근본주의 포퓰리즘’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기존의 사회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이 포퓰리즘을 과거 파시즘과 동일하게 위험하게 인식하고 있는 지젝의 평가는 그래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앞선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사례에서 아랍의 봄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다소 지지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봤던 것은 유대인들만의 배타적인 현재 민족주의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고 가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편협한 가치체계에 물들어 있는지 여실히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관여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현재의 팔레스타인들의 거의 인종 차별과 다름없는 분리 정책은 실로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지젝은 이스라엘의 래즈비언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만나서 서로 포옹을 하고 위로 했던 것을 큰 인식의 전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인지는 회의적이나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각심을 전하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뉴욕 발 세계금융위기로 그 ‘정합성’에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신자유주의는 지젝의 언급대로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으며,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고 희화화 하고 있는데요. 그는 오늘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모순과 폐해에 주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가 있다고 소개하며 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자체는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국가의 최소한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등의 입장을 보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리자면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자유’가 타인의 고통이 비롯되는 최소한의 보장 장치를 박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모두가 이에 나서야 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인용된 바우만의 일침도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것도 이와 같습니다. 더불어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된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며, 이는 많은 국민들의 세금 부과를 담보로 부유층의 증세는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경제적 포퓰리즘과 동일한 시각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의 번영이 오로지 한길이라고 주입되는 세상에 이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시민 사회의 연대와 공감, 행동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강요된 선택을 주입시키고 더욱이 점차 확대되는 포퓰리즘의 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앞으로도 시민들의 역할과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젝의 말대로 각각의 시민 내지는 대중이 현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시민들과 연대를 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의 ‘위대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길에 한걸음 내딛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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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기원과 구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평화인문학 기획총서 - IPUS 평화인문학총서 4
이문영 엮음 / 아카넷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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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평화인문학 기회총서 시리즈중의 한 권인 이 책은 이른바 ‘평화 및 평화상태’에 대한 인문사회학적인 탐구를 통해 시대의 진정한 평화 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그와같은 연계로 평화와 대응하여 결코 따로 이해될 수 없는 ‘폭력’에 관한 사회철학적인 의미론과 현실론적인 입장을 이 책에 잘 담고 있는데요. 서울대 이문영 교수를 비롯한 집필진들의 주의 깊은 폭력론에 관한 이 글이 아직까진 국내에 처음 시도되는 학문적 연구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목차를 봤을 때, ‘3장 탈폭력적 폭력 : 신자유주의 시대 폭력의 유형’이 새삼 관심을 끌었는데요. 더불어 근래 서평을 쓴 지그문트 바우만의 ‘레트로토피아’에서 소개한 근대적 폭력과 폭력주의에 대해 좀 더 면밀한 이해가 필요하여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논의하게 앞서, 폭력의 기원과 의미를 담은 1장과 2장을 접하고 나서 꽤 놀라고 말았는데요. 왜냐하면 최근까지 읽었던 아감벤,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데리다 등의 책이 폭력론과 관련하여 책 도입에 소개되고 있어서 뭔가 저만을 위한 책이 아닌가 하는 소감이 들었습니다. 예외상태, 정치신학, 법의힘, 폭력의 세기 등이 여태 제가 소화한 글의 목록인데요. 이 책을 읽기 위해 앞선 책들이 무대가 되어 준 느낌이랄까요. 조금 허무맹랑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의 폭력은 문명화의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바로 그 문명화 자체의 산물이자 악의 근대적 합리성의 가장 충실한 재현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파시즘의 그 원초적 기원에 붕괴한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후기근대론의 선구자가 특유의 이와 같은 통찰력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근대가 어느 정도 폭력에 기반한 결과 위에 있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폭력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문영 교수는 벤야민을 필두로 데리다, 지젝, 아렌트, 아감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만든 벤야민과 폭력의 양가적인 측면에서의 지젝의 논의 즉,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제적 폭력이 존재”와 같은 인식과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한나 아렌트의 성과, 카를 슈미트와 비교하며 분석해 내고 있는 조르주 아감벤의 폭력에 관한 해석은 과거 나치 독일과 근래의 9.11 사태 이후의 부시 정부를 비교하며 그의 ‘예외상태’ 개념에 폭력론을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폭력과 폭력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를 우리는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반으로 이문영 선생은 데리다, 아감벤, 발리바르를 재해석하고 있는데요. 특유의 해체철학이 모태가 된 폭력과 비폭력의 외부적인 경계에 대해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언어적 폭력을 기본으로 인식하여 ‘법의힘’에 이르러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고 그 위계를 제도화하는 ‘법의힘’일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벤야민과의 불화를 의미하는 데리다의 ‘법의힘’은 매우 중요한데요. 즉 오늘날 폭력의 합법과 불법을 규정하는 것에 이 법의힘이 관여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뒤이어 데리다와 아감벤의 논의 이후, 이 폭력은 “폭력, 비폭력, 대항폭력 사이의 상호구성성”에 관해 의미를 확장시키고 이러한 구분에 발리바르의 대응과 폭력의 필연성에 관해서도 논박을 하고 있는데요. 결국 1장과 2장의 논의는 폭력의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속성을 지나서 권력의 정당성이 법의 유무에,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가 경고하는 ‘폭력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시민의식을 우리가 쟁취해내야 한다는 점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폭력 상태 자체의 경계화와 외부화 등과 같은 생소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들 ‘경계의 경계’에 대한 깊은 고찰이 앞선 해결책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이어 3장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은 자기 자신이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탈폭력에 관한 논의를 4장은 종교근본주의의 폭력적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이 종교적 근본주의’가 얼마나 많은 폭력을 포함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양자가 매우 해악하고 오늘날 미국의 현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과거 프랑스 공화주의의 전통인 종교와 정치의 분리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고 평가 내리고 있습니다. 5장은 폭력의 효과, 즉 ‘공포’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려는 테러와 테러리즘에 대해 설명하며 ‘폭력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렌트에 의하면 ‘오히려 폭력이 권력을 파괴한다’는 인식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이 5장은 여러 의미로 주의깊게 읽어야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6장은 한국전쟁 시기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동일한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인식으로서,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 미군정과 좌우 대립으로 인한 경찰 권력의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 검증과 제주의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폭력을 넘어 제노사이드적 멸절 상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살처분 (extermination)이라는 표현으로 이 당시의 인간 멸절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살처분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기르고 있는 가축에나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으로 자행된 폭력 행위가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의 이 글은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폭력과 폭력론에 대해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사회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접근으로까지 이와 관련한 확장을 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1장과 2장 그리고 5장은 몇번이고 읽어봐도 좋은 논의였는데요. 이처럼 이문영 선생의 해석과 논지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고 데리다와 벤야민, 아감벤, 아렌트를 넘나드는 이론적 도입과 해석은 폭력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크게 넓혀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대와 근대성의 어두운 폭력주의와 권력과 폭력의 이론적 구분을 원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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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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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기근대론을 대표하는 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인용되고 일독되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이라도 불러도 무방한 작품, 레트로토피아 Retrotopia 를 정독했습니다. 2017년에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는데요. 고령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충분히 긴 삶을 보낸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전세계에 그가 필요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한 인류의 근대를 통렬하게 비판한 그의 양심은 실로 존경받을 만하며,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히 유용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의 구입은 국내의 출간일 즈음이었는데요. 이제서야 서평을 남기는 것은 글이 다소 난해하여 정독이 한 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부족한 편협한 글이 될까 걱정이 앞섭니다.

바우만은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차별적이고 일부 소수는 반대로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 내지는 상황”이 여기 이 글의 중요한 문제점의 인식이자,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현실적 상황입니다. 이것의 유토피아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는 인간 및 사회일 것입니다.

즉 그런 확장된 의미로서, 1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식론으로 확장했던 과거의 홉스주의에 대해 2장은 작게는 부족주의 Tribalism, 크게는 민족주의적 과거와 현실을 오늘날의 난민 문제와 재조명 하고 있고, 3장은 과거 영국 총리였던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유일론적 방식에 따른 현재의 우리 세계의 현실, 4장은 제대론 된 ‘연결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나르시스주의로서 변질된 성과 성의식, 성관념 등의 오늘날 변화된 남녀 관계론 및 인간관계론에 대해 비판론적인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의 바우만은 우리 인간사회가 매몰되어 있는 비인간화와 탈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의깊게 그의 나레이션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폭력을 관리하고 조정하기 위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작업은 근대 국가의 출현에 큰 사상적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만이 온전한 합법적인 폭력을 다룰 수 있다는 측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루소와 토크빌의 주장대로 인간과 사회를 위해 아주 적절하게 조절되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국가의 폭력’이 탈국경화가 되어가고 있으며 유효한 폭력 수단을 더 많이 보유한 일부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경 안이 아니면 된다는 식의 안일주의와 소급주의로 많은 희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주의가 이런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바우만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의 홉스주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실용주의가 최상의 합리성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할 것이다” 의 측면은 거침없는 폭력의 사유화를 동반했는데, 이것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사적 무장과 이를 조장하는 수많은 무기 회사,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고했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우만의 이러한 사회 인식을 이것들의 만연한 확장들로 부족주의 및 민족주의적 감성이 초래하는 결과들이 더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저의 사소한 예측이 어쩌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의 일독을 통해 저는 이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불평등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대로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별반 관심없는 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착화 되어 왔고, 여기에 시민들의 네트워크적인 연결성이 어려워 짐에 따라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글에서 분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소득의 불균형과 마찬가지로 상위 소득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분리와 단절이 이론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경계를 강화시켜 이 불평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면 근대론의 일상이 점차 이렇게 계층적으로 시스템화가 되어가고 있으면, 결국에는 고소득층 및 기득권층들이 다른 계층의 삶을 무지한 채로 넘겨버리는 몰이해적인 상황으로 이 인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의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것에는 고정적인 사회적 차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자본주의가 더욱 계층의 고착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우만의 해석이라면 어떤 물리적 혁명이나 강제적 상황 전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 진실된 네트워크의 회복, 각 집단이 노골적으로 갈등하는 것들을 개선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며, 다만 오늘날 잊혀지고 있는 복지와 복지 국가 개념이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의 삶’ , ‘소위 인간쓰레기 취급’을 방지하고 그들과 우리의 삶을 분명히 개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이고 복지라는 주제를 이념적으로 도태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시민들이 먼저 거부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성과 나르시즘과 관련된 프로이트적 주장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지만 이 장 중간에 아인 랜드의 ‘이기주의적 가치관의 재해석’을 바우만이 삽입한 것은 미국에서의 아인 랜드의 재조명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티파티와 신보수주의자들을 통해 전면적 이기주의의 숭배를 그의 탁월한 분석으로 비판한 것에 대한 부분은 놀라웠습니다. 사실상 현재의 미국 시민들의 변화와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은 바로 이 ‘아인 랜드 현상’이 기반해 있고, 그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은 바우만의 통찰력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스트립쇼’라고 지칭하며 현재 변화된 성과 사랑에 대한 이번장의 분석도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성의 결여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성의 결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 관계가 ‘애처롭게 트위터, 인스타, 페이스 북에 매달리는 수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에 보며 성찰한 바우만의 현실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즉 앞선 이 부분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성과 사랑 및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연결성의 회복이라고 봐야겠죠.

끝으로 바우만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활적 선택’의 문제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함께 가야만 하는 당위성의 문제이며, 현대 인간 사회의 통렬한 현존의 부조리들이 마찬가지로 함께 해결해야 되는 책무로 남겨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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