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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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몬머스셔의 레이븐스크로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틀란드 러셀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논리학자 및 존경 받는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철학,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문적인 접근에서의 러셀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믿는 바를 실천했던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상당히 다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역시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겪기도 했고 전쟁 수행에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집중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평화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지식인의 의무를 알고 있던 러셀은 공공선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을 반대했고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공산주의 역시 그에겐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반대로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자각은 무엇보다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는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첨예화 되어 가던 시기에 BBC를 비롯한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향한 강의와 견고한 시민 사회를 위한 지성적인 기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정치권조차도 러셀의 이런 노력을 인정했고, 그의 왕성한 대외 활동에서 이를 지켜보는 언론인들조차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이미 수차례 러셀을 존경한다고 밝힌 노엄 촘스키는 러셀의 이런 치열한 삶을 정중히 인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애 말년까지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정력적인 삶을 이어간 러셀은 1970년 2월 2일, 웨일스의 한적한 지방인 펜린듀드레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wer'로 193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번역가 안정효 선생에 의해 1988년 1월 처음 번역됩니다.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03년 8월에 펴낸 신판입니다. 자리를 빌어 이 책과 관련된 짤막한 개인적 소회를 남기고 싶은데요. 러셀의 이 책은 제가 지난 2008년 5월에 신촌에 있는 모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 책을 비로소 찾게 되었는데요. 때문에 이제야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마련일 겁니다. 더욱이 이 권력이라는 존재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포함한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권력자의 명암'이라는 수식어처럼 러셀 역시 '고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의 속성'에 대해, 그의 특유의 현란한 수사를 통해, 거의 통사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는데요. 글의 후반부인 16장에서 러셀이 지나가듯 밝히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권력의 양상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제러미 벤담의 언급대로 인간의 무리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한 편이다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권력의 존재 유무는 바로 '통제를 통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러셀에 의해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은 유럽의 사료가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14세기 이전, 유럽의 전제 정치 하에 국가 사회적으로 양대 권력이었던 왕권과 가톨릭에 의한 소위 신권은 유럽 사회 전반을 끌고 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짐작하고 있듯, 특히 가톨릭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 대부분은 비판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과 황제가 체제의 질서를 위해 서로가 협력하지 않고 몇세기에 걸쳐 대립한 역사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나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교황권에 대한 본질에 있어, 종교에 대한 길드 상업주의의 개입은 꽤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러셀의 강조대로 교황권의 몰락이 촉발되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 이후 교회의 통치는 유럽의 지배력 나날이 잃게 됩니다. 여기에 교황의 스스로 자초한 권력의 이탈은 교황에게도 불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루터 이후에, 전 유럽이 종교 전쟁으로 피바람을 몸소 겪을 수밖에 없던 점을 감안하면 종교가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끝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시도 자체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훌륭한 성인들이 교회에서 나타나 이들이 "무절제한 탐욕과, 방탕과, 사리사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의 탄생과 헌신"은 이러한 교회 권력의 전반적인 몰락을 막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후에 등장하는 '실천적인 도덕'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주장대로 일반적인 도뎍률과 그에 따른 도덕의 함의는 권력을 보다 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저 윤리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말장난 같은 도덕이 아니라, 앞선 '실천적인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는 이 실천적인 도덕의 부재는 과거 교회 권력의 빠른 종언을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간음을 하지 않는 등의 교회의 가르침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도덕 관념의 이행은 아주 예전의 청렴하고 신실한 사제들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던 교회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그런 연유로 '종속은 항상 도덕성에 의해 강화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러한 진술은 꽤나 엄숙한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 도덕 스스로가 과거 말고 현대에 있어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혹은 상업주의적 시대의 태동은 사회에 적지 않은 부유층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콩도르세의 언급대로, "부유층 대부분이 과두제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6장에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과 같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부유층이 아닌 비로소 잉태하기 시작한 그 시기의 부유한 자들의 대두는 역사적으로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한 권력을 갖는 이 시기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본가들의 기저에 깔린 근심은 완벽히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파시즘이 유럽을 강타할 시기에 미국의 포드와 같은 자가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효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구실로 삼아 국가가 다른 모든 것들과 대기업의 위로 올라섰다"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대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여실히 잘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히틀러에 의해 종말을 고한 바이마르의 비극이나, 무솔리니의 철권 통치는 권력을 심각히 오도한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부유층의 대두와 그들이 가졌던 과두제에 대한 동경과 함의는 2차 대전시기의 자본가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인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철저히 민주적인 정부라고 해도 권력의 재분배는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혁명을 배제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회에 용인시키는 소위 다른 형태의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한 가지 비극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고 고백하는데요. 어떤 목적을 위해 가혹한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는 식의 권력의 오만은 그것의 정당성을 답보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을 거듭 강조했던 과거 공리자주의자들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많은 정치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월급과 이익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공의 선 같은 것을 '겉치레 과시'처럼 강조하는 연유의 바탕에는 '현대 정치의 복잡한 양상'이라는 왜곡된 지식인들의 선전 효과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요인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권력의 후퇴에 있어 많은 시민들이 그저 거수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작금의 정치는 참으로 불행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나 정치 권력'이 시민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박해로 이어진다면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러셀이 심히 경고하는 듯한 어조의 다음의 진술인, "광범위하게 얘기하자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몰락한 이유는 다수가 민주주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우세한 힘이 수적으로 다수인 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그 시사하는 바가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기에서 군대가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물음은 다소 논점을 벗어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지향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권력'에 대한 본질을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과거 권력이 초래했던 여러 불행한 사건들과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권력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셀은,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자신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라도 꼭 나쁘지 만은 않다고 믿는 습성이 필요하다"고 12장의 논증 가운데 강조합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이 부와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전쟁 자체가 민족주의와 경제적 이익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대다수의 민주 국가들이 이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민주주의 자체는 그것의 이식과 더불어 체제 안정에 있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정치인들의 인내심과 그에 준하는 시민들의 안정된 삶 또한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논증 하에 글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권력을 길들일 수 있겠는가'에 우리의 민주주의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판단을 옹호할 어떤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다수의 결정에 기꺼이 응해야만 한다"는 제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온순한 시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와 정치의 본질에 끊임없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민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소위 '강한 기질'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인 러셀이 "국가가 스스로 과학이나, 형이상학이나, 도덕의 수호자로 자처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과 시민, 국가와 국가 사이의 서로 간에 공감을 찾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며, 러셀의 논증에서 드러난 민주주의가 갈등과 대립에 다소간 취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러한 갈등 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그 어떤 사상가 보다 국가 간의 전쟁과 그러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정치사회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과거의 숱한 역사에서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쳐간 많은 엘리트 계층이 은폐했던 전쟁의 본질에 대해 그처럼 파고든 지식인은 아마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의 조언들은 현재에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본문 140 페이지에 역자는 모슬렘과 무슬림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기입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히 동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두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20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한가지인 권력에 대한 사랑은 아주 불균형하게 분포되었으며,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따위의 갖가지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의 벼락불에 의해 파괴되는 도시들이 런던과 파리가 아니라 베를린과 로마라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파괴자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인간다움이 남을 수 있겠는가?

상당히 묘한 일이지만 이른바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은 가장 야만적인 집단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진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의식을 지닌 상당한 규모의 계층이 없어야만 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권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납득할 수 없는 벤담 공리주의자는 실질적인 목적에 있어서 똑같은 개념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외적인 권위의 간섭이 없이 개인이 자유롭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일 어느 생활 영역을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때는 만인의 행복이 증가한다.>

기독교의 윤리에 의하면 어떤 국가의 필요성도 어느 사람에게 죄악 행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권한을 정당화활 수는 없다.

개별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잡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하게 권력을 연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 요소일 따름이다.

정부의 구성원들은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관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손에 넣지 못한 까닭은 러시아가 그곳에서는 영국만큼이나 강력했기 때문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 것은 그가 그곳을 방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자유가 부여되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해서 수립된 권리자들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진실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 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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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 참 인간을 행복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드는듯요. 인류역사의 불행의 이유인듯요.

베터라이프 2023-06-23 00:08   좋아요 1 | URL
러셀이 이 글에서 인간이 지배를 하는 쪽과 지배를 당하는 쪽으로 분류할 수 있고, 상당수가 은연중에 지배를 당하는 것을 원한다고 인간을 그리 평가했어요. 권력에 대한 측면도 이와 비슷한데 모순적인 부분과 동시에 자유주의에 반하는 속성을 권력이 역사에서 여럿 드러냈다는 점은 독재 권력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정치의 상반된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라고 읽히는 걸까요. 쓸데없이 주저리 쓰게 되었네요 ^^ 참.. 그레이스님이 쓰신 에르노 관련 글들은 에르노가 생각날때마다 읽고 싶네요 ^^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고전의세계 리커버
마르퀴 드 콩도르세 지음, 장세룡 옮김 / 책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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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18세기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입니다. 그는 일생을 계몽주의에 헌신했고 자유, 인간의 이성, 평등한 교육 등과 관련된 진보의 이념에 큰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은 오늘날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가 연상될 정도로 튀르고와의 놀라운 우정과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기운이 더할 나위 없이, 팽창한 시기에 보다 합리주의적인 사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792년 12월,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그는 재판 자체는 지지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점 때문에 혁명 수뇌부에 눈밖에 나 도피를 강요받게 됩니다. 그는 총 8개월 기간의 도피 끝에 체포되어, 곧 부르라렌느에 수감되고 얼마 안 가, 아편을 사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후 그의 사상적 업적을 기려 1989년 상징적으로 팡테옹에 안장되기에 이르는데요. 그의 시신은 19세기에 이미 분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콩도르세의 저작 가운데 두 편을 발췌해 번역한 것으로, 참고로 이 글의 1장은 '공교육 5론'의 1장을 번역했고, 2장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의 '열 번째 시대'를 옮긴 것입니다. 국내에는 2002년 1월 초판 번역이 이뤄졌고,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19년 12월에 펴낸 개정 1판이 되겠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글의 1장은 인종과 성별에 따라 차별 받지 않는 시민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권력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공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이것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콩도르세의 제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러 평론에서 콩도르세에 대해 공통적으로 평가하는 부분도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 계몽을 굳게 신봉했던 인물이며, 인간 이성이 기반이 된 우리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도 읽힙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성을 수단으로 삼았던 칸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소 이른 결론이지만 이러한 공교육이 많은 국민들에게 제공될 때, 그가 말하는 대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정치가 더 이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는 인간 진보와 나아가 사회적 진보와도 결부될 수 있고 이렇듯 진정한 계몽주의자라면 큰 맥락에서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교육은 어린 시기부터 훈련이 이뤄진다면, "이성을 강화하고 이미 습득한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살찌우고, 오류를 바로잡는 등"의 순기능을 보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협잡과 궤변의 홍수 속에서" 속된 말로 평생을 전전긍긍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콩도르세 역시, 약간의 논외로 능력의 차이라든지, 주어진 환경에 따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능력주의적 기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있습니다. 다만, 광범위하고 소위 독선적인 중상주의적 잣대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상업주의적 현란함에 우리가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무엇보다 이런 상업주의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의 이해를 저자는 1장 후반부에서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것은 콩도르세가 애덤 스미스의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용하며 경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사회에 만연된 대부분의 악덕을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철저한) 교육이 이러한 악덕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당위입니다. 이를 좀 더 확대해 보면 '특수한 지식'이라는 소위 특정 계층의 전문 지식화와 이를 통한 헌법 바깥의 소위 특별한 지위의 부여와 같은 주장 등이 많은 지식에 융합되어 전문성을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소위 전문 계층의 독재가 일반 시민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모든 사회가 특수 계층과 기득권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정치 관념적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대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평등을 그저 아주 일관된 '사회적 균질화'로 폄훼하여 이것을 언론과 여론을 통해 그 일고의 가치도 없는 분란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현란한 정치 논설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정 자체는 진정한 계몽주의적 진보의 흐름이라 읽히기도 합니다.


또한 일전에 로버트 달이 우려했던 바와 같은 통찰을 콩도르세의 다른 논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시민들의 자녀 대부분이 고된 직업에 종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문장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 보면, 높은 교육과 이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부모 밑의 자녀들이 그만큼 고된 일자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추정하는 것과 앞선 문장의 이후 진술에서, "교육에 적은 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립된다면 그 사회는 계몽의 진보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익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력합니다. 이처럼 교육은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 부와 지식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소외되어 있는 많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한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부모의 가난까지 짊어진 자녀의 세대가 진정한 삶의 돌파구로서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논증의 결말에서 교육이 어리석은 정치에 우리 권리가 희생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무엇보다 탁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을 위해, 공권력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이 교육을 둘러싼 환경에서 권력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콩도르세는 후반부에서 이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눈길을 사로 잡은 부분은, "공권력은 진실의 모든 힘으로 악덕에 대항해야 하지만 그 진실을 결정하는 것은 공권력이 아니다"라는 특별한 문장이었습니다. 이는 전반적인 논증에서 참으로 중요한 맥락으로 여겨졌는데요. 앞선 종교와 도덕의 원리에서도 그렇고 공권력이 시민들에게 그러한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들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처럼 민주주의의 '분립'과 하등 어긋나지 않고 맞닿아 있습니다. 시민들은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독립과 평등에 대한 고귀한 열정"을 몸과 마음에 지녀야 하며, 그들 스스로가 노예의 삶이 되지 않게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계몽주의의 뼈대가 붙든, 진보 이념 혹은 인간 이성의 곁 가지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구나 후반부에서 종교적 광신에 빠진 종파들이 사회와 시민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주장이나 진실과 진리를 결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같은 '이성의 불안'이 조장된다면 이는 계몽주의의 몰락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콩도르세를 콩도르세 다운 외침으로 여겨지는 남녀 평등에 준하는 교육의 필요성은 사실상 1세기 이상 차이나는 선구자적 발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교육을 통해 발견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에 대해서도 그는 강조하고 있고 특히 여성만이 갖는 이점에 대해서도 역시 논하고 있습니다. "치밀할 정도의 정확성, 정주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요구하는 그런 관찰" 등은 여성이 갖는 고유성으로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계몽의 이바지 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통해 더욱 더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여자들을 단순한 가사 노동에 몰아서 가부장적 체제에 이바지하는 것보다 이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 사회에 더 이익이라는 측면을 사실상 강조한 것인데요. 이는 계몽이 남녀를 떠나 서로 동등한 이성의 존재라는 관념에서 명확히 부합하는 인식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제안들을 한 콩도르세는 어쩌면 시대를 벗어난 진보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스스로를 교육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분연히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입으로만 이성을 위치는 다른 사상가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의 특성일 겁니다.

결국 완전한 인간상을 구현할 수 있는 교육과 이런 체제의 사회는 결국 진보의 이념적 결과물로서 태어날 수 있을 텐데요. 체제를 그저 생물로 빗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이성에 부합되는 수많은 시민들이 건설한 사회야 말로,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꿈꿔 왔던 사회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보적 건설이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추정한 건대, 상업주의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의 출현일 겁니다. 저자인 콩도르세도  "자신의 이익에 대해 계몽될 수 없다"는 문장으로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어긋난 이해 관계'라는 구절 자체도 앞으로 사회가 어떤 식의 갈등에 놓일지 그는 미리 예견"한 듯 보이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 이익과 도덕은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시장의 이성이라는 궤변도 어떻게 하면 개인이 추구하는 이익을 무엇보다 인간의 우선 순위에 둘 수 있겠는가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이전에 과학의 진보가 달성한 인간 사회의 개념적인 진보의 기여에 대해서 저자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상찬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인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것의 진보는 점진적인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과학의 진보가 초래한 광범위한 기여에 대해 우리가 망각을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일 텐데요. 그럼에도 콩도르세가 철학자의 역할, 철학의 의무 등을 언급하며 양자 간의 균형을 기대한 것은 그저 그가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논법을 주장한 것은 아닐 걸니다. 다만 인간은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고 궤변에 농락당 할 수 있는 존재이니 만큼 과학이 사회와 격리되는 것은 미연에 방지해야 하며, 마치 과학의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도록 여러 노력과 사회의 배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존 듀이가 설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논법들은 그저 뜬구름 같은 이론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도 인문학의 거듭된 쇠퇴로 매일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일전에 우리가 철학자에게 보였던 존경과 애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경제적 이성'의 노예가 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으니 그 가운데 민주주의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부득 전쟁의 비참한 참화가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볍률이 파괴할 수 없는 어떤 현실적 구분이, 계몽된 사람들과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의 수단이 아니라 분명 어떤 사람들을 위한 권력의 도구가 될 어떤 현실적 구분이 존재할 것이다.

무지의 결과인 이러한 굴종적 종속 상태는 거의 모든 인민, 최대 다수에게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수많은 의무 가운데 하나는 지식 획득 수단을 보장하고 용이하게 하고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평등은 예술의 완성에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의 불평등이 예술에 몸바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놓은 불평등을 파괴할 뿐 아니라, 복지의 평등이라는 더 일반적인 또 다른 평등을 확립시킬 것이다.

같은 지점의 주위를 더욱 확장해, 같은 원리에서 나오는 결과들과 같은 방법론으로 발견된 진실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는 것 역시 과학의 진보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육이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육은 양성한 사람들을 보존하고, 다시 무지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더 자유로운 국가는 더 많은 공적 기능이 공통 교육만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사될 수 있는 나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지 않으면 권력은 그것을 얻은 개인들의 배타적 유산으로 만들면서, 어떤 직업에 헌신하면서, 매우 현실적인 어떤 불평등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여러 나라의 인민이 결국 정치와 도덕의 원리 안에서 접근하게 될 떄, 한나라의 인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외국의 인민들에게 자연이나 자신들의 산업에서 나오는 재화의 더욱 균등한 분배를 호소하게 될 때, 국민적 증오를 낳고 악화시키고 영속시킨은 그 모든 원인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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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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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김규항 씨는 1962년생으로1980년대 초 한신대 재학 시절, 나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후 1998년부터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칼럼을 쓰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에 나서게 되는데요. 2000년에는 홍세화, 진중권 등과 함께 사회문화 비평지 '아웃사이더'를 만들고 편집주간을 맡습니다. 그는 한국의 진보주의 운동에서 드물게도 실천적인 사회 정치 이론가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논증을 통해 규명된 비판적 주장들로 큰 설득력을 얻고 있고, 예전에 인터뷰에서 접한 그의 솔직한 태도도 인상 깊어 지금도 간혹 그의 이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더욱이 저에게는 1999년 경에 시작된 의약 분업 사태와 관련된 그의 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한신대 김성구 명예교수가 마르크스 자본주의와 관련해 감수를 맡았고, 2023년 5월 글의 초판 발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현재의 경제학과 관련해, 인류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채 몇 세기가 되지 않는데 지금까지 인류는 자본주의를 거의 불멸의 체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과거 봉건시대에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농노들도 영주에 반해 들고 일어날 권리가 있었던 역사에서 우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미명하에 이상하게도 인간이 체제에 순응하고 종속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저자의 이 책은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본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면밀히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여기에서 논증되는 주제들은 대부분 현실적이고 이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6장에서 거듭 강조하는 대로, "우리가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에 저항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경제학자라는 수식은 어쩌면 많은 경제학자들이 비판적 이성 없이 그저 경제학에 순화된 상태로 그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비판대로 지금 경제학의 본질은 그저 일어난 일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결과물에 대한 일차적인 입장 정도 뿐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러한 일이 발생되었는가"는 경제학자들의 관심 범위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자체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학문의 비판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점은 이미 질베르 리스트가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그런 연유로 학계의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기존의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학을 실질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렇듯 체제 전반이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유일신 종교와도 같은 상황을 유지해 왔는데요.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핵 발전소와 관련한 현재의 원자 공학과 산업의 카르텔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 가격으로 매겨진 가치와 그에 따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부의 축적'이라는 메커니즘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중요한 토대일 겁니다. 특히나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상품의 교환을 경험하게 될 텐데요. 하물며 여성의 성 상품화를 통해 그것이 문화적인 행태일지라도 인간의 상품화까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거의 단적으로 말해, 인간 대부분이 이 체제에 종속된 상황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런 수많은 상품들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 역시, 자신들조차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전 포드주의 시대와 같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은 다소 복잡한 형태로 계급 분화가 되었고, 상품이 거의 물신으로 숭배되는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계급적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기존의 믿음이 회의적으로 현실에 안착된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이처럼 모두가 어떤 상품의 생산 과정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판매와 이익 회수에 있어 어떠한 권리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이 체제의 진정한 본질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상품과 관련해,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력 제공 시장'에 대해, 이 글 7장인 '평등을 삼킨 공정'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그런 사회적 여파에 대해 아주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평등은 자유와 함께,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가치입니다. 불행하게도 과거 냉전 시기에 있어 첨예한 대립의 역사 때문에 평등 자체를 색깔론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일 텐데요. 이 장에서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체적인 주장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품 교환의 원칙과 룰을 벗어난 모든 것" 즉, 최소한의 인간 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 부조와 사회적 제도에 대한 불신과 공격,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은 스스로가 찾으라는 소위 제한된 공정의 개념은 사실상 평등을 집어 삼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이익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능력과 능력주의에 있어 이 공정이라는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이며, 법을 내세우며 공정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평등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힙니다. "공정은 그렇게 평등을 삼킨다. 사람들은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항의하지만, 그럴수록 평등은 더 멀어진다."

한국 사회 만큼 능력주의가 철저하게 이식된 사회는 전세계에 드물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능력주의는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달리 말해,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거의 한 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꽤 중립적으로 여겨졌던 경제학자 홍기빈 씨조차도 일전의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 만은 아니라고 그런 취지로 발언한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자는 앞선 그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명확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우리 나라의 수많은 자본가 계급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전후 적지 않은 유산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계급으로 일전에 장 피에르 뒤피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가 계급이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그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고 좀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우리가 이것을 좀 더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사회적 이행에 필수불가결한 사회 체제와 어떤 동일한 인식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클로드 르포르가 바로 이 점에서 시민들의 분별력을 원했던 것이고,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의견을 낼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에 규제 없이 이행하게 된다면 시장이 좀 더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지난 2008년의 대붕괴로 만천하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데이빗 코츠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반복적인 구호가 사실상 이를 통해 붕괴된 것으로 봤는데요. 명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유로운 경쟁 혹은 시장의 관대함 등을 역설하지만, 일찍이 슘페터가 언급한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그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이 글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진국들의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우세를 거두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제3세계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임금 노동력에 따른 이익 창출의 체계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긍정한 '개인의 탐욕,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관념들이 명백한 법의 지배 하에서도 시장이 논외로 여겨질만큼 마치 무소불휘의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지 않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자유 시장이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처럼 말하는 허황된 미사여구처럼 여겨지기 때문인데요. 인간의 욕망이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아야만 하는 인식의 범주가 분명 존재하고, 오로지 경제학을 이런 인식의 논외로 취급하는 것은 그만큼 이성의 측면에서 위험하다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전에 대니 로드릭은 자본주의(아마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겠지만)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로드릭은 소위 주류 경제학에서 사실상 소외된 학자라 그 '주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의견을 피력한 것인데요. 우리는 스스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존엄을 갖는 인간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원과 지원에 있어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실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철저하게 거부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기업의 이익 창출에 맞지 않는 희생을 감내하면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삶을 영위해야 할지는 거의 불확실합니다. 아예 적나라하게 자본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의가 요구하는 가치들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도 극도의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미 여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눈을 감고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매번 저는 이러한 글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인간 다운 삶은 무엇인가. 존엄한 인간의 삶은 그저 이상으로 끝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매번 고민하게 되는데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백대로 우리가 서로 손을 붙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 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 개인적으로 이 글 6장의 결론이라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혹은 나쁜 상태로 이해하는데, 실상은 신자유주의야 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즉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 자체라고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한 소위 '제 세상을 맞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이 자리에 따로 기록해 두고 싶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에 의해 자연스럽게 규율된다.
국가 개입을 배제하고 규제를 완화하라.
국공유기업을 사유화(민영화)하라.
노동조합은 자유경쟁을 막는 독점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상품 교환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선 노동 배분의 공동체 질서가 있었고, 개별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이었습니다.

주류 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역사 속의 여러 경제체제 중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인류 최후의 경제체제로 전제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데는 타인에 대한 지배 욕구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 가치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임을 보지 못하고 상품체의 속성이라 보는 일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착시도 아닌, 오히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일입니다.

비인간화, 소외,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따위 이른바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이라 일컫는 것들은 대체로 상품 물신성 현상을 이르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사악하고 나쁜 상태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건 정상적 자본주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신자유주의야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기만은 자본주의적 정의, 즉 공정의 어떤 막장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의 사상적 틀로서 자유주의는 시장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평등한 사회라는 근거라 말합니다.

선진국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시대를 끝내고 독점자본주의 상태에 접어듭니다. 독점화한 산업자본과 독점화한 은행자본이 융합하여 거대 금융자본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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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이 온다
더글라스 러시코프 지음, 이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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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러시코프는 근래에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미디어 이론가입니다. 그는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소위 인터넷 세대인 '디지털 네이티브'에 주목하면서 앞으로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 나갈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뉴욕 시립 대학교 퀸즈 칼리지의 미디어 이론 및 디지털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과거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해, 캘리포니아 예술 학교와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러시코프는 미디어 업계나 이를 대변하는 지식인 계층에서 '미디어 생태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이런 그의 집필 활동은 꽤나 독보적인 부분이었고 전체적으로 그의 논저들은 미래의 미디어 현실에 대해 더욱 인간적인 측면을 상실하여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는 현재의 기술 만능주의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수많은 개인 정보를 자신들의 상업 이익에 활용하고 있는 점에서 가까운 미래의 소위 미디어 세대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성 세대를 포함한 소수 지식인 그룹의 우려를 대변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eam Human"으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의 원제는 '팀 휴먼'으로 저자인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미디어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적 d이행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대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공성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앞으로 있을 미디어 통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역된 책의 제목은 저자가 논지를 펴고 있는 주제의 맥락과는 다소 관련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확언하는 "대전환'과 저자인 러시코프가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현시대의 이행"은 꽤나 의미 차이가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는 부적절한 제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러시코프는 팀 휴먼이라는 가치 언어를 통해, 앞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넷 미디어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가는 데 있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서사적 근거와 더불어, 그에 따른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지나 자본주의는 보다 넓은 세계와 범접할 수 없는 유일 체제가 되었습니다. 과거 냉전의 시기에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된 것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깊게 관여한 고도화 된 디지털 미디어가 결국 인간을 도구로 격하시킬 가능성에 대해 저자인 러시코프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글의 4장에서 잘 서술되고 있는데요. 이런 변화된 디지털 환경이 핸드폰을 제조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 것과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는 원칙이 스스로 변질되어 현장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의 원칙은 이 시스템에 근거해, 더 수월하고 손쉬운 상품 제조에 기여해야 힌다는 사실상의 부정적 개변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러시코프는 교육과 민주주의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먼저 언급하면서, 교육조차도 그저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회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발전된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꾼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변화 자체는 사실이며, 마찬가지로 민주적 인간으로서의 개인들 역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에 어느 정도는 진보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시장 경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본의 속성과 만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시장 경제가 주장하는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점 역시, 모든 인간이 이에 봉사하도록 강요 되기에 이르는데요. 사실 이 부분도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개인의 많은 선호들'을 수집하여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에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과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러시코프는 글의 이후 진술 과정을 통해 이런 개인의 이익을 강조하는 사회 관념 내지는 경제적 기조가 사실상 모든 사회의 공공성을 해쳤고, 그저 자본주의가 알량하게 숨만 쉬게 만들었던 윤리의 존재 역시, 예상대로 사회에서 무력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마땅히 인간일 수 있는 가치, 즉 도덕과 양심 그리고 공공성과 같은 계몽주의적 맥락이 유명무실해졌기에 그만큼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AI 산업에 있어, 이 흉물스런 AI가 인간을 그저 불합리하고 다각도의 개선이 필요한 생물체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고도화 컴퓨터 산업으로 탄생한 AI가 아무리 관련 데이터를 축적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사고하는 것처럼, 혹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단계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양자의 서로 간의 몰이해는 결국 비극을 낳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디스토피아적 감성를 곁들이게 됩니다.

여러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날이 (상업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인터넷 세계는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무력화 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책과 글이 많은 평민들에게 금기시되었던 것처럼 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조악한 정보들'이 개인의 면밀한 선택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현실 정치를 오염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많은 넷 미디어 전문가들은 '넷 월드'의 발전은 이제부터가 초기 단계 과정이고 가짜 뉴스의 범람과 자본주의를 더 강고한 소비 지상주의로 내모는 넷 환경은 그저 기우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첨단 기술이 과거의 전통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이제는 주와 객이 전도되어 인간이 첨단 자본주의와 시장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인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지금의 '디지털 질서'에 개인들이 실효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러시코프의 분석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군다나 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특정 인종과 종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마찬가지로 우려할 만한 상황이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오도된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강제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정치마저도 먼 미래에는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끝으로 러시코프는 대략 중요한 두 가지 관점의 대안을 글의 끝부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줄곧 서로를 향해 관심을 갖고 있던 상호 관련성과 옛 것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도약을 위해 타인과 더욱 교감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등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와 그에 따른 집단주의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러시코프는 글 중간에서 "자신과 비슷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저 개인에게 있어 이 북플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슷한 생각과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요. 또한 많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자신의 생각이 차별적으로 고착화되지 않고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직접 대면하면서 인간 사이의 건전한 불편함을 무릅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동의 관심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 더 인간 답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확대될 수 있도록 모두가 자신의 책임처럼 가진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다소 허황된 생각일지라도 말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있을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 놓았다.

미국의 공중 보건에서는 인간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이 비만보다 더 큰 문젯거리다.

그러나 군주들은 인쇄기를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밈이 득실거리고 소셜 미디어에 의해 고립된 환경에서 인간은 더욱 더 자기 위치만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휘둘린다.

새로운 미디어 혁명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가 쥐고 있는 미디어 장악력을 뺏어서 사람들에게 주고, 그동안 훼손된 사회 유대를 재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를 어떻게 조종해야 할지 측정하는 방법은 알고리즘이 수집하고 편집하고 비교하는, 아무 의미 없는 메타데이터 metadata와 더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하는 인터넷 플랫폼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과 기업과 봇이 거주하는 환경 그 자체다.

텔레비전은 지구를 하나의 큰 유기체처럼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소비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촉진하기도 했다.

기술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일부 디지털 기술이 그 자체로 반인간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성향을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일부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땅을 파괴하고, 일부 나라의 젊은 흑인 남성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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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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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데커는 1771년 혹은 1772년에 유대인 출신의 출신의 부친인 존 킹의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고 추정됩니다. 그녀에게는 소피아와 찰스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샬럿 데커는 영국 고딕 소설의 작가였고 보통 로사 마틸다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비평가들을 혼동시키기 위해 두 번째 가명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815년 니콜라스 번과 결혼하면서 살럿 번이 되었습니다. 데커는 네 편에 이르는 주요 소설을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했는데요. 그중 1806년에 출간한 '조플로야'는 꽤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 동시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까지 했습니다. 앞선 조플로야를 국내 초역한 을유문화사는 이 소설을 '고딕 로맨스 소설'로 홍보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섬뜩한 소재의 교훈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세기 동안 그가 무명의 작가로 남아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상황이 기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Zofloya"로 앞서 언급한대로 1806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후에 다시 번역된 1997년 판을 번역 원본으로 이외에 모호한 부분은 1806년 원본을 참고했다고 출판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 번역본은 지난 2017년 9월에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비통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 이 소설의 완독은 저에게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요. 일단 여성의 정욕이라는 관념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그 시대에 있어 금기시되었다는 걸 충분히 알게 되었는데요. 정숙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당시의 주된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국가 베네치아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점은 꽤 신선했습니다. 추측하건대 당시 유럽은 거의 모든 여인들에게 가톨릭적 정숙함을 요구하는 문화적 보수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척점에 있는 장소로 베네치아는 여기서 묘사되는 귀족 간 사교 문화가 같은 시대를 다룬 다른 작품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작품의 여주인공이라 봐도 무방한 빅토리아의 비틀리고 충격적인 욕망은 그녀의 모친이었던 후작 부인이 잉태한 비극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음험한 분위기를 있는 대로 드러내는 고딕 소설의 고유성을 감안해 본다면, 데커의 이 작품도 그런 범주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소설을 그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는데요. 소설 초반에 작가가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불행한 환경은 교육과 스스로의 겸허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소설을 통해 쉽게 반박 되는데요.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과 빅토리아 그리고 또 다른 조연 급 인물인 메갈리나의 허영, 독심, 교만, 증오의 감정들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 과연 인간의 품성이 그저 후천적인 교육으로 개선될 수 있겠는가란 이 오래된 주제를 불신 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앞선 메갈리나는 빅토리아와는 같으면서도 좀 더 다른 성형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 역시 비틀린 욕망을 갖고 있지만 빅토리아와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이 작품의 대부분 여성 인물들이 대체로 극단적이고 왜곡된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인물상 자체에 간혹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극 전개가 독자들이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도덕적 선과 악에 대한 통념이 부숴져 나가기 때문에 인물들을 단편적인 감상이 아닌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 볼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가 큰 틀에서 규정하는 '도의를 잃어버린 군상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의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 지켜야 할 의무라든지,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에도 인정되는 도의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물론 데커의 이 소설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알리고자 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후반부에 비로소 전개되는 여주인공인 빅토리아의 급격한 감정적 전개는 실로 소름끼치는 수준이 아니라, 굴절된 인간에 대한 비통함을 절로 느끼게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쉽게 악에 기우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도의와 양심을 벗어나는 맹목적인 이성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스스로의 불행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매번 용인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빅토리아의 이런 비참한 인간성의 표본인 도덕적 탈선의 원인을 극적인 서술과 더불어 화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로레다니 부인과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 한 아돌프 백작의 비도덕적이면서 주변의 신뢰를 잃게 한 두 사람의 행동에 그 화살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특히나 이 작품에서 이 나약한 인물들이 스스로를 절망의 길로 내몰지 않을 충분한 선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들 모두는 비극적 운명의 안배를 여실히 '인간적'이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스스로를 배신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이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그와 죽어가는 넘편을 향한 그 고결한 신의와 맹세를 끝까지 지켜냈다면 그리고 그녀의 딸 빅토리아가 몇 년 간에 이르는 스스로의 삶이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오판으로 뿌리치지 않았다면, 작가의 평가대로 '신의 보답은 아마도 공평하고 관대했을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쉽게 악마가 판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행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들의 이런 방만한 행위가 결국 주변 사람들과 지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도 마땅히 절망의 지옥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중세 소설의 원칙과는 다름없는 전형적인 서사이자, 인과응보와 유사한 비틀린 인간들의 허망한 말로라는 비참한 최후를 통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교훈으로 얻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당시 완고한 가톨릭 사회가 철학에 대한 원론적인 적대를 차치하더라도 스스로 자신만만했던 베렌차 백작의 비극적인 결말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단순히 음모로 보기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초반에는 꽤 양식적이고 신중한 인물로 그려지는 베렌차 백작은 후에 '신분 계급의 남성들'이 갖는 개인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사실상 유희거리로 취급한 메갈리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 일련의 서사들이 흔히 '현명하고 사려 깊은 철학적 인간'의 틀에 결국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빅토리아의 그런 전인미답의 증오를 깨닫지 못하고 후에 그녀가 "정말 비열한 계산적인 철학자"라는 혐오를 뒤로 하고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비극적인 결혼, 충격적인 결말이라 볼 수 있는 베렌차의 몰락은 전반의 자신만만하고 신중함으로 무장한 꽤 인상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의 씨앗을 잉태한 필연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정상적인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 언급하는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베렌차 백작의 동생인 엔리케와 그의 연인 릴라는 서로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경애를 받을 만큼 훌륭한데, 특히 엔리케는 거의 유일하게 '도의'를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스포가 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의 제목과 동시에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무어인 "조플로야"는 그의 범상치 않은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 하나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꽤 뜬금없는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되었는데요. 비로소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의 복잡한 의미를 확연히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어인 조플로야를 현대에 맞게 대입해 본다면 이와 같은 인물들이 사회에 적잖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을, 데커의 작품을 통해 새삼 경청하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극도의 회의감으로 다루면서, 모든 인간들이 자신과 같은 비틀리고 삐뚤어진 인간이라고 취급하는 태도, 타락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죄 의식 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고, 그것을 초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성의 한 단편이며, 그것을 통해 도의가 무너지는 것은 오로지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조플로야'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앞으로 삶을 영위하며 쭉 경계의 마음을 유지하게 될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어쩌면 어느 정도 작위적인 고딕 소설의 전개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저는 빅토리아라는 한 여인의 파멸을 통해, 우리의 현대적 삶이 표면적인 풍요 상황에서 내면으로는 전혀 녹록하지 않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증오와 혐오를 그저 쉽게 취급한다면 무고한 다른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진정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데커의 이 소설에서 제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부분은 조플로야의 충격적인 인물 조형이었습니다. 인간의 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여자를 속여 마음과 절조를 유린한 남자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승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따라서 그녀를 법적인 아내로 들이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알았다면, 연인을 향한 모든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 분연히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

또 빅토리아가 헌신적인 모친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에 그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가장 천박한 외모를 지닌 오만과 위선의 인간이 고결한 척하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수치스러웠다.

아돌프는 마음이 이렇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파멸시키는 짜릿한 묘미가 아니면 쾌락을 얻지 못했다.

아돌프는 그녀의 망가진 영혼을 이렇게 농락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녀는 세상에 오직 그만 존재한다고 착각할 때도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기품이 넘쳐야 하고, 멋 없이 몸매만 가지고 덤비는 건, 난 그런 여자는 별로야. 그런 건 완전 촌놈도 즐길 수 있는 거니까."

타락의 깊이야 별 차이 없지만, 그럼에도 메갈리나는 가슴에서 요동치는 욕망들을 어떻게 거짓 세심과 절제로 포장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메갈리나는 자기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랬다. 젊은이의 높은 기상에 잔인한 상처를 주고, 그녀를 향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며 완전히 부숴 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레오나르도는 가문의 자부심이나 긍지에 관한 것이라면 신중히 여기고 전율이 흐르도록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사랑의 정절을 버리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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