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에게 잘못은 없다. 비록 중대한 죄를 지은 어린이라도. 오히려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든 사회의 책임이 크며, 아이에게는 처벌보다 교육을 통해 갱생의 길을 찾아줘야 한다, 라는 게 14세 미만 소년범의 형사처벌을 부정하고 있는 현행법의 취지다. 

이보다 더 올바른 말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사상을 인류 진보의 결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사에 정답은 없는 법. 이러한 법이 옳을지라도 소년범의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없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요즘 일본 추리소설 중에 미성년자의 범죄와 그 처벌수위에 대해 다룬 책이 많은데, 아마 그 사회에서는 꽤나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인 듯하다. 소설로 들어가 보자면, 

젊은 아빠인 히야마는 어린 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부인은 몇년 전 3인조 소년강도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소년들은 13세였기 때문에 처벌 대신 갱생 시설에서의 조치만을 받은 채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젊은 여성이 살해되었고 한 가족의 삶은 망가졌으나 정작 히야마는 소년들의 신원조차 알 수 없었다. 분노한 히야마는 몰려든 매스컴의 카메라 앞에서 소리친다. "내가 그 범인들을 죽이고 싶다!"고. 

히야마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소년들 뿐 아니라 경찰, 사회, 나아가 법 자체에 대한 분노. 왜 소년범들의 보호에 쏟는 배려의 일부라도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에게 보여주지 않는가? 피해자 가족은 수사정보에서 소외되고,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매스컴에 노출되며, 범인들의 사과는 받기는커녕 그들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소년들은 어느 정도의 '보호' 후에 멀쩡히 자기 생활로 돌아올 수 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까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역시 세상사에 정답은 없는 법. 히야마의 이런 정당한 의문은, 소년들 중 하나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면서 의혹의 눈길로 바뀌게 된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이 용의자에 대한 의심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의 일.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남자다.  

엔터테이먼트 소설에서 이런 묵직한 주제를 차용하는 것은 마냥 가볍게만 흐를 수 있는 소설에 무게와 진지함을 부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작가 역시 소년범의 처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긴 했겠지만 3중 트릭으로 흐르는 스토리와 너무나 얽키고 설킨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이 소설이 엔터테이먼트 쪽으로 쭉 나가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른 최고의 작품은 역시 데드맨 워킹인데, 그런 작품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용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것은 새발의 피로써 히야마를 기다리고 있는 사건과 그에 얽힌 진실은 더욱 더 무시무시했다....라는 게 이 소설의 진행방향으로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거기에 소년범의 형사처벌이라는 주제는 보너스. 우리 사회도 점점 무서운 10대가 늘어나는 형편인데, 소년범의 갱생의 방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따끔하게 혼을 낼 수 있는 방법, 그리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한 배려의 방법도 연구할 때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겐지 이야기 1 - 아사키유메미시
야마토 와키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겐지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남자와 우아한 여인들이 나오는 일본 귀족의 연애담이다. 만화책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시간이 꽤 오래 걸렸던 것은 '아름다우신 분', '냉정하신 분', '고귀하지만 의지가지가 없으신 가엾으신 분' 같은 나긋나긋한 일본어투와 사랑에 한숨짓는 그들을 보노라니 나마저 나른해져서였던 것 같다. 마치 내가 몇 겹인지도 모를 비단옷에 감싸여 키보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듯한 나른함. 사실 겐지이야기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며 일본의 귀족들은 반쯤 비치는 발을 옆에 세워두고 비스듬히 앉아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천황의 아들이지만 동궁(후계자)이 되지 못한 아름다운 청년 겐지의 연애편력을 부러워하면서.  

사실 이런 나긋나긋함과 친하지 않은 나는 겐지이야기가 왜 일본 최고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는가 하는 호기심을 푸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오래 전에 원작 겐지모노가타리를 읽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화로 나온 것은 고맙기만 했고. 일본에서 이 만화가 청소년에게 권장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등장인물 겐지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와 닮은 첫사랑마저 아버지의 새 부인이었기에 포기해야만 하는 사랑에 좌절한 인물이다. 하지만 고귀한 신분의 미남자에 학식과 예술적 소양도 뛰어난 그는 장안 제일의 도련님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고 첫사랑을 잊기 위해 여러 여인을 만난다는 것이 1편의 내용이다. 그가 만난 여인들에는 나이 많은 귀부인, 어린 소녀, 신분은 낮지만 진실한 여인, 천하의 추녀 등 매우 다양한데 심지어는 실패한 첫사랑이었던 계모(그래봤자 나이차는 얼마 나지 않지만)와의 사랑도 이루어진다. 

좌절한 첫사랑까지 이루었지만 그의 연애편력이 그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나. 아마도 겐지이야기의 세계가 여리고 아름답고 방탕하고 힘없는 한숨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겐지는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계속 다른 여인들을 찾을 것 같다. 안타까운 사랑에 한숨짓지 않는 겐지는 더 이상 겐지가 아닐테니까. 일본에서 이 이야기가 계속 읽혀왔던 것은 우아한 애상미로 가득찬 세계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시리즈의 끝까지 읽지는 못할 것 같다. 비슷한 시대를 다루고 있는 만화라면 '음양사'의 그림이 훨씬 뛰어나며, '세이메이'의 등장인물이 훨씬 입체적이다. 겐지이야기의 애상적 세계는 나와는 안 맞는 듯. 다시 한번 유명한 고전 겐지모노가타리를 살짝 엿봤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마리아 유디나의 유산 11집 -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0 & 23번 외
Vista Vera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마리아 유디나의 모차르트는 정말 충격적이다. 특히 20번을 듣고는 과장 조금 보태서 경악을 하고 말았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이렇게도 칠 수 있다니! 

마리아 유디나는 음악의 빠르기나 강약을 매우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아마 악보의 지시는 별로 따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거슬리기는커녕 원곡에 충실할 때와는 다른 감명을 준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다 보니 감상자의 긴장감은 배가 된다. 고전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질 때가 얼마나 있을까. 슈베르트나 모차르트와 같이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여기지는 곡도 마리아 유디나에게 걸리면 다이나믹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음악으로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마냥 강렬하게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니다. 사실 마리아 유디나의 가장 큰 장기는 아다지오 연주에 있다. 워낙 조용하고 감미로워서 왠만한 피아니스트가 치면 흘려듣기 쉬운 아다지오 부분을 마리아 유디나는 가슴이 저릴 정도로 연주한다. 아다지오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특유의 긴장감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의 아다지오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아다지오는 정말이지 소름끼치는 연주이다. 

구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리아 유디나의 녹음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애석하다. 서방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음반이 적어도 수십장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정말 부당하다고나 할까. 유명한 클래식 해설서를 봐도 그녀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넘버원 중의 넘버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리스트 : 피아노 협주곡 1,2번 외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작곡,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Sv / PHILIPS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다른 피아노 협주곡에 비해 짧다. 게다가 리스트의 음악이 그렇듯 많은 기교가 담겨 있다 보니 언뜻 정신 없게 들리기가 쉬워서 피아니스트의 역량이 많이 요구되는 곡이다. 음악에 아마추어인 귀족 자제들을 위해서도 작곡했던 모차르트와 달리 리스트 시대에는 프로 연주가를 위한 곡을 만들었다. 프로만이 칠 수 있는 곡이라기보다는 프로가 아니면 맛이 살지 않는 곡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추어가 연주하는 리스트는 듣기 괴로울 것이다. 못쳐도 나름 귀여운 모차르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런 리스트의 곡을 프로 중의 프로인 리히터가 쳤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기교가 강조되다보니 음악의 아름다움이 묻히는 경우가 있는데 리히터의 연주는 리스트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살려내고 있다. 콩쿨용으로 키워진 요즘 피아니스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다. (20세기 초중반의 피아니스트들이 정말 그립다) 

이 음반의 가장 큰 장점은, 리히터의 영롱한 피아노가 화려한 리스트의 음악에 더할 나위 없는 테크닉으로 발맞추면서도 일면 단정함이랄까 명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돈된 화려함. 다른 말로 하면 귀족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한데, 리히터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은 진정 '귀족'이다.  

Sir Piano concer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쌍화점 - A Frozen Flow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진모가 연기한 고려왕 때문이었다. 주진모란 배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왜 안뜨는걸까?) 그가 연기한 고려왕의 캐릭터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원의 간섭에 분노하는 자존심 강한 군주인 동시에 예술적 재능과 감성이 뛰어난 예술가이자 남자를 사랑했던 동성애자의 내면을 지닌 왕. 영화에서도 그런 왕의 캐릭터는 잘 살아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견인차는 역시 삼각관계의 주인공인 홍림(조인성)이다. '신하의 도리는 왕을 위해 죽는 것'이라는 충성심으로 왕의 사랑을 받은 아름다운 호위대장. 어렸을 때 궁에 들어와 20대 초반까지 왕의 호위무사이자 애인으로 살았지만 왕후와의 잠자리 이후로 급속도로 여자와의 사랑에 빠져드는 캐릭터.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더구나 그 둘은 한 나라의 왕과 왕후!) 권력싸움과 애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홍림의 캐릭터는 지나치게 만화스럽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표현됐어야 할텐데, '쌍화점'의 실패요인이라면 이 홍림의 캐릭터를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인성의 연기가 비록 '대단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것은 조인성의 연기력부족보다는 감독의 미숙함 때문이다. 

시종일관 홍림을 사랑하는 왕의 캐릭터는 일관성이 있다. 비록 최고권력자인 왕이 한 사람만을 주야장천 사랑하는 것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해도(양귀비도 수많은 후궁 중 하나일 뿐이 아니었던가) 왕이 극중에서 동성애자임과 동시에 성불구자임을 암시하는 만큼 한 사람과의 정서적이고 육체적 교류만을 원했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일관성이 없는 것은 홍림인데, 홍림은 분명 충성심이 강한 캐릭터였고 왕과 밤낮을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홍림이 관객 모두를 속였다는 반전은 아니겠지요 설마). 왕후와의 관계에 빠져든 후조차 왕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끝내는 왕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왕에게 정사장면을 들킨 후의 홍림은 완전히 변해서 왕후와의 '연모'를 운운해 왕을 화나게 하더니 왕후가 죽었다고 착각을 한 후에는 일당백으로 호위무사들을 전부 죽인 다음 왕의 방으로 쳐들어 가 살벌한 칼싸움을 벌이다 왕을 죽인다. 이 얼마나 이해 안되는 비약인가. 

왕후 또한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홍림이 눈엣가시였지만 홍림과 하룻밤을 보낸 후로는 급속히 그와의 관계에 빠져들어 왕에 대한 충성과 고려에 대한 사랑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가볍게 버리고 홍림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역모를 부추기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육체적 사랑이 이렇게 강력한 것이었던가? 사람으로써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정적과 연적이라는데 연적이었던 홍림과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목숨을 바치는 연모를 할 수 있을까? 누구말대로 정사신을 반으로 줄이고 홍림과 왕후가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과 관객도 납득할 수 있는 왕후의 매력을 부각하는데 필름을 썼다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을텐데.  

'색계' 이후 정사씬을 통해서 두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많아지는 것 같은데 유사품만 범람하는 것 같다. 앵글 하나 인물의 동작 하나도 모두 전체의 이야기로 맞춰지는 색계에 비해 쌍화점은 너무 허술했다. 감독은 출중한 미모의 배우 둘이 섹스를 하면 관객 모두가 그 둘이 사랑에 빠졌다고 납득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밤낮없이 섹스만 하더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서로에 대한 '연모'를 부르짖으며 왕도 나라도 친구도 버리는 홍림과 왕후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정욕이 아무리 강력한 감정이라고 한들 연모와는 분명 다를텐데, 차라리 둘 중 하나만 택해서 이야기를 끌어나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감독은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대담하게도 섹스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결국은 '둘은 서로를 사랑했답니다'라는 안이한 결론으로 빠져버림으로써 영화를 아쉽게 만들었다. 홍림과 왕후는 사랑의 늪에 빠졌지만 제일 심하게 빠진 것은 사실 감독이 아닐까. 감독 따라 영화도 수렁으로 빠졌고.

사실 '쌍화점'은 주진모의 연기나 조인성의 매력, 시대극의 배경 등 볼만한 게 많은 영화인데 개연성이 떨어진 스토리가 안타까울 뿐. 배우로서나 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전라노출을 감행한 배우들이 너무 소비된 것 같아 아깝다. 더불어 '동성애'라는 소재 또한. 새롭고 흥미로운 소재를 찾는 것은 쇼비즈니스의 당연한 속성이고 그런 면에서 '동성애'는 영리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차별 받는 소수자인 동성애자를 소재로 사용하려면 이성애적 사랑 사이에서 소외되고 마는 캐릭터로는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성애적 '연모'의 굳건함을 위해 희생되는 소재로 '동성애'를 보는 것은 씁쓸하다.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용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