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탄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파괴적이고 자신을 내버리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디게 싫어한다. 자신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보는 사람도 고양시키지만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은 보는 사람도 고갈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립, 폭력, 엽기적인 살인, 근친상간을 통해 인간을 탐구했다는 소설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편이다. 그건 대개 러브하우스에 사는 행복한 가정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지루한데다 짜증까지 덤으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목탄'은 그 모든 요소를 담고 있었음에도 보고 말았다. '일본 문학 70년의 이상을 실현'했다는 평이 주는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책은 그 수준도 대단했고, 끔찍함도 대단했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은 어머니의 몇 번의 재혼과 아버지 쪽 인물들의 외도를 통해 얽히고 섥히게 된 핏줄이 야기한 비극을 다루고 있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해안가의 작은 마을인 '고목탄'은 그들의 어지럽게 얽힌 핏줄에 폐쇄성까지 더해주고 있다. 이들은 산으로 막힌 해안 마을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관계하며 탈출할 수 없는 핏줄의 계보를 만들어 놓았고, 이것은 결국 이들의 목을 죄게 된다.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복잡한 집안관계여서 처음부터 충격적인 사건과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 책의 주인공 아키유키는 꽤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의 이복형이 그와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 안달하다가 10여년 전에 자살했고, 그 외 한 번의 살인과 누나가 발광했던 사건이 있었지만 지금은 집안도 평안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스물 여섯살의 건장한 쳥년이며 육체노동을 해서 먹고 살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아키유키는 아침과 더불어 일을 시작하고 밤과 더불어 일을 끝내면서 그날의 에너지를 그날에 소진하는 후련함과, 땅을 파는 곡괭이의 감촉, 땀을 흘리는 육체에 내리쬐는 햇살의 뜨거움에 평화로움까지 느끼곤 했다.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도 있었다.

하지만 잔잔해 보이는 물결 밑에 소용돌이는 항상 일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를 끊임없이 들추어내는 사람은 아키유키의 의붓고모인 유키였다. 그는 선대의 장녀로서 집안이 망해갈 때 유곽으로 팔려가 식구들을 굶주림과 파산에서 구했다. 그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어려워했으나, 그녀가 남 얘기하는 낙으로만 살며 식구들의 치부를 끊임없이 들췄기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혐오했다. 배다른 형제자매들로 얽혀 있는 집안에서 유키는 끊임없이 그들의 상처를 쑤시고 소문으로 퍼뜨렸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아키유키의 아버지가 이 마을에 오자마자 세 여자를 동시에 임신시키고 감옥에 갔다는 것, 감옥에서 나온 지금은 자신의 식구들까지 새로 거느리며 마을에서 실력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근본도 모르는 그가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떠벌리는 것도 유키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아키유키의 아버지 하마무라 류조는 아키유키가 벗어버릴 수 없는 그물이자 그를 끈적끈적하게 감싸고 있는 아교였다. 아키유키에게 생부는 하나였지만 생부에게 자식은 그를 포함해 다섯이었다. 그 형제들이 서로를 증오한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서로의 얼굴을 모르기도 한다는 것은 결국 비극의 원인이 되고 만다. 아키유키는 생부의 눈에 띄게 건장한 체격과 용모, 거친 성격을 가장 빼다박은 아들이었다. 외면하고자 애를 썼지만 마을에서 때때로 생부와 마주칠 때, 집안끼리 말썽에 얽히게 될 때마다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키유키가 배다른 누이, 그리고  또 다른 남동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을 때 더욱 명백해진다. 그는 새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지만 생부인 하마무라 류조의 분신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분신으로서 그의 악까지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비우고 단련했던들, 그에게 아무리 다정한 애인이 있었던들 그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었다. 그것은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서 얽힌 피의 계보 자체가 배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일본 신화를 원형으로 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와 신화는 결말 없이 이어진다는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인지 이 이야기의 구조는 열려 있다. 끝은 명백히 비극으로 끝났지만  또 다른  비극이 사실 처음에도 벌어져 있었다. 아키유키가 생부인 하마무라 류조의 행동을 얼마나 더 계승할지, 아니면 하마무라 류조와는 결별하고 아키유키로만 살아갈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하마무라 류조를 죽일지도 모른다.

비극답지 않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비극이긴 하지만 생활의 비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비극은 서서히 준비됐다가 하나의 사건으로만 치닫는 것이 아니고 선대에도 있었으며, 1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났고, 10년 후에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집안의 문제만은 아니며, 몇몇 인물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비극은 행복처럼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극은 끝내 참을 수 없어 터지는 웃음이나 울음과 같다. 소설의 중심인물도 아니었던 도루라는 청년과 백치소녀의 충격적인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이 '근본 모르는' 비극을 나타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초래할 결과를 몰라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다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혹은 하고 싶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도루와 백치소녀는 보여준다. 그것이 비극의 원인이자 추동력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핏줄처럼 이어진다, 라는 것이 이 책에 깔려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만 이 걸작을 다시 읽는 것은 좀 더 심신이 건강해진 멋 훗날이 될 것 같다. 그날까지는 책장에 소중히, 하지만 깊숙히 간직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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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9-2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hat a good review!...

2005-10-1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2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