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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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만 십 년 이상 살아서, 5층 정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계단을 기분 좋게 오르는 건 5층이 한계라는 걸 알고 있다. 5층 이상은 더 이상 계단오르기가 아니라 노동의 시작이다. 더구나 거기서 살아야 한다면 그 지겨움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7층이란 빈민가를 가리키나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모는 부모가 확실치 않은 고아이고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 없는 전직 창녀이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가끔 해괴한 행동을 했는데, 대부분은 유태인인 그녀가 젊었을 때 겪었던 아우슈비츠의 악몽의 결과였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아파트 지하실에 비상식량과 소파를 마련해놓은 것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모모는 먼지투성이 지하실을 남모르게 청소하면서 콜록거리는 로자 아줌마를 보면서 생각한다. '말릴 사람은 나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물론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아무튼 천식에 먼지만큼 해로운 것은 없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이 아니라 누추하고 애정결핍에 시달리기 딱 좋은 곳에서 싹 튼 사랑은 그런 것이다. 상대방의 단점까지 사랑한다는 건 더 이상 고귀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하지만 완벽한 짝으로 보이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임에도 그 둘은 바다 위의 돛단배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예순 아홉살, 모모는 열살 혹은 열 네살이었기 때문이었고, 로자 아줌마가 갖가지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가 아무리 억척스런 애정을 보여 줬다고는 하나 모모는 밤마다 암사자가 자기의 얼굴을 핥아주는 상상을 할 정도로 애정이 필요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며, 난데없이 가족인 척 나타난 맘에 안드는 아저씨를 '처치'해버릴 정도로 죽이 잘 맞는다.

"모모야, 넌 참 착한 아이야. 우린 늘 함께였지."     "그래요, 로자 아줌마. 아무도 없는 것보다 휠씬 나았죠."   "이제 내 기도를 올려다오, 모모야. 이제 다시는 기도를 못하게 될지도 모르잖니. "        "셰마 이스라엘 아테노이......"     유태인 할머니와 아랍인 꼬마의 기묘한 애정은,  이제 남을 보면서는 아주 가끔밖에 울지 않게 된 나의 눈에 오랜만에 눈물이 맺히게 했다.

조경란의 말대로 "<자기 앞의 생>은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비범한 일이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모모는 내게 말해주었다.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  슬픈 인생이어도, 사랑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대상이 누구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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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그러게요... 맞아요~!

hoyahan1 2005-01-2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으셨다니 제 얼굴에도 미소가 방싯 떠오르네요^^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