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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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해보는 생각인데, 세계는 60년대에 더 행복했을까, 오늘날 더 행복할까? 60년대엔 정의를 '믿었고', 민주주의를 '믿었고', 조국의 해방을 '믿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베트남 반전시위를 벌이며 히피의 예술까지 함께 만들어냈고, 68혁명을 터트렸으며, 외국인 의사가 낀 게릴라들은 쿠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반전시위는 결국 철군을 촉진시켰고, 68혁명으로 남녀평등과 낭만을 함께 이뤄낼 수 있었으며, 쿠바는 미국의 집요한 훼방이 있기 전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의료와 교육이 가장 튼튼한 나라였다. 그때의 불평등과 부조리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오늘날에는 모든 환상이 깨졌다. 모든 분야가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인류는 21세기인이 되어 우쭐해있지만 더 이상 이상과 꿈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렇다할 반전운동도, 혁명의 기운도 없다. 세계는 더 나빠졌는데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정직하고 진실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도 없고, 람보에 열광하는 사람도 없다. 여전히 세계는 미국의 대중산업의 술독에 빠져 있지만 그 상황을 불편하고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을 큰 잔치에 초대해놓고 수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이 세상은 균등한 동시에 불평등하다. 세상이 강요하는 습관과 생각은 균등하지만,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회는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누구나 열광할 수는 있지만,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사회주의는 무너졌지만, 그때문에 자본주의는 더욱 폭주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유를 희생시켰다. 놀랄 만한 균형이 아닌가. 자본주의는 자유의 이름으로 매일 정의를 희생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오늘날 선진국들과 무역단체들이 말하는 자본주의, 자유무역이란  "니네 나라의 자원과 시장을 통째로 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다름아니다. 그들의 이익추구란 너무 집요하고 교활해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나라인 미국이 전세계 마약의 40%를 수입하며, 자국내의 거물 마약상을 단 한번도 처벌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스위스는 오랜 금융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때 히틀러와 나치의 돈을 세탁해주면서 급성장했고, 오늘날에도 세계의 검은돈을 빨아들인다는 면에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알프스에 사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정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는 '척'하던 모습은 단 한 번도 진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껏해봐야 자기네 나라 안에서 일정한 계층이 향유하던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옛날 귀족사회의 살롱 계몽주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난한 계층과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적용된 때가 없었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구역질나는 부조리를 까발리고 나서 희망을 얘기하는 갈레아노가 언뜻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에 그가 얘기하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이 상황도 현실이자 역사라면, 베트남 반전시위와 68혁명, 쿠바혁명도 현실이자 역사다. 저울추가 한쪽으로 너무 기우뚱하다고 해서 반대편 저울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갈레아노의 생각인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인간 족속이 이웃을 집어삼키고 지구를 황폐화하기 위해 대단히 열심히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멀고 먼 구석기 시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일부를 이루고 살았던 자연에 적응하지 못했더라면, 또 채집하고 수렵하는 것을 나누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 없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언제 살든, 한 사람은 그 속에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좀 생.뚱.맞.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한반도의 조상들이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를 진심으로 경멸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위의 말이 생뚱맞게 여겨지는 것 만큼 우리의 세계관은 전락한 것이다. 구조도 타락했고, 세계관도 타락했다면 세계관부터 끌어올려보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아무도 자신이 가장 편한 일을 하는 대신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함으로써 영웅이나 바보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되는 것.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면 구조를 바꾸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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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2-16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제 절망할 만큼 절망해서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더 어둠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hoyahan1 2005-02-1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 생각엔 절망이나 희망은 따로따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의 세상을 보면 절망이나 희망은 같은 곳에 있는 것 같거든요. 사람은 절망한 만큼 희망을 꿈꾸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희망보다 중요한 건 의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