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
사와키 고타로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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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나의 취미생활 중의 하나이다. 현실로 말하자면 내가 가장 멀리 여행을 떠난 곳은 지리산이다. 혹은 설악산이거나. 그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함이었는지 여행기에 대한 나의 기갈은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읽은 여행기의 수만큼이나 이젠 여행기를 그만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적도 여러번이었다. 나의 경험이 아닌 그들의 경험, 그리고 비슷비슷한 그들의 견문과 느낌은 여행기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다시 여행기를 펼쳐든다. 재미있다는 여행기가 있으면 꼭 읽어보고, 그런 여행기가 없으면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라도 뒤적거린다. 나는 여행기 사이를 여행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짜 여행을 떠나려면 이 책의 저자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알량한 자신의 돈과 친구들이 모금해 준 얼마 안 되는 돈을 들고 떠날 수 있는 용기, 궤도에 오르고 있는 직업을 버릴 수 있는 배짱, 한참 경력을 쌓아야 할 27살의 사회초년생으로 사회를 등져버리는 방만함. 덧붙여 다른 여행기를 읽으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거지만 유혹에 과감히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무대책이야말로 훌륭한 여행가에게 필요한 필수조건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홍콩에 도착한 저자가 가장 먼저 빠져드는 것은 불야성의 밤거리, 그리고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도박같은 삶을 꿈꾸어왔으나 도박 자체에는 흥미가 없어 간단한 카드도 안했다는 저자가, '대소'라는 중국도박에 여행경비를 걸어가는 과정은 내 솜털마저 곤두서게 할 정도로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여행가가 자신의 책에 이국의 거리나 야외 레스토랑이 아닌 도박장에 빠졌던 '타짜 스토리'부터 써놓다니, 이 책의 원제대로 '심야특급'이 따로 없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저자는 악덕 현지인이나 선하고 순수한 현지인을 만난 에피소드나 이국의 풍물에 관한 서술에도 발군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 구분되는 가장 뛰어난 점은 가이드 북 하나 들지 않은 무대책의 젊은이가 홍콩에서는 도박에 빠지고, 인도에는 여관 삐끼노릇을 하며 버스로만 아시아에서 런던으로 갔던 과정의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함이다. 뒷골목에서 깡패에게 얻어마신 맥주상표에 써있는 지명이름이 멋있어서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가다 어두운 벌판을 헤매는 도박같은 여정의 생생함 때문이다.

보통은 몇 달, 몇 년 동안 여행하는 여행가는 대단한 사람으로 비춰지게 마련이고, 여행가 스스로는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젊은 여행가들의 황폐함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불과 25살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 길거리 까페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자가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을 한다. 현실로 돌아가기 싫어서 여행을 계속하는 사람도 많고, 여행이 거듭될수록 감동과 신선함은 엷어지고 오로지 다음 목표점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여행가들의 모습은 여느 중독자들의 퇴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그의 여행의 1부밖에 나와 있지 않으며, 책을 쓴 후에도 그의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을 하면서 르포 작가로도 성공했으니 그의 우려대로 영 쓸모없는 사람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유머감각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 만난 여자는 그에게 고한孤寒, 즉 외롭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자의 별을 타고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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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0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어본 적이 있는 책이에요. 리뷰를 읽고 나니 정말 사고 싶은 책이 되는군요.

hoyahan1 2005-11-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문으로만 듣다가 읽어봤는데 특히 1권은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예요. 아마 저자가 가장 사랑한 곳이어서 독자에게도 그 흥분이 전달됐겠죠. 그곳은 홍콩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