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 -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히라카와 스케히로 지음, 노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신부가 됐다. 그는 장년의 나이가 다 되었을 때 이교도의 땅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몇 명의 동료들과 중국으로 파견되었고 오랜 선교활동 끝에 끝내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58세. 마테오 리치라는 이름만 뺀다면 다른 선교사들과 다를 것 없는 행로였다.

하지만 권력을 이용해 현재인들을 개종시키거나 순교나 빈민 구제의 길로 갔던 보통의 선교사들 중에서 마테오 리치는 유독 눈에 띈다. 그는 단시안적인 성과욕이나 개인적인 신앙심을 떠나 동서문명 양쪽을 깊이 파악하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 동서문명의 교류에 공헌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인, 동서교류의 선구자란 타이틀에 걸맞는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400년 전에, 관용이나 상대성이란 개념이 거의 없던 시대에 동양과 서양의 가교를 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열매를 따기 위해 마테오 리치는 외부적 한계와 내부적 한계를 모두 극복해야 했다.

외부적 한계는 예수회와 중국 양쪽에서 왔다. 예수회의 방침은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신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회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의 방침이었고 선교는 무력을 쓰던 평화를 쓰던 그 한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천 년의 인문학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중국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라는 정교하게 짜인 관료제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명나라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우월한 문명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마테오 리치는 무력으로 정복되지도 않고 외부의 문화에 감동하지도 않는 중국인을 설득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고전들을 연구했고, 마침내 '교우론'과 '천주실의'를 씀으로써 중국 사대부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는 중국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학자로 존경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 개종한 신자 수는 무척 적었지만 이탈리아에 쓴 보고서에서는 중국인들이 자신을 신기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들은 서양의 과학에 감탄하고 있고, 황제를 만나면 중국에서의 개종사업이 큰 진전을 보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마지막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여러 수단을 통해 신자의 머릿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다른 선교지와는 다른 상황은 마테오 리치로 하여금 예수회를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하는 숙제를 남겼을 것이다.

내부적 한계는 리치 자신에게 있던 것,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 깊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 그 시대 그리스도교 신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을 선민주의였다. 그는 중국 고전을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동격으로 봤고 중국의 관료제와 과거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 한 가지는 다른 모든 장점을 무너뜨리고도 남았다. 마테오 리치는 존경심을 가지고 관찰했던 중국 사회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서 신의 품안에서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념으로 포장된 은밀한 정복욕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비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는 한 번도 황제를 알현하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지도 못했다. 마테오 리치의 숨겨진 정복욕에 중국 사회는 리치를 위대한 중국의 도를 배우러 온 서양의 현자로 대접함으로써 대응했을 뿐이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을 배운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근대 초기의 괄목할 만한 문명 교류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그의 중국관은 프랑스의 볼테르에게까지 이어져 비록 신화같은 형태로이기는 하지만 계몽주의와 이신론 사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문명의 교류는 어렵다. 문명의 교류는 구호가 아니라 지속적인 호기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의무적으로 상대주의와 하나의 지구촌에 대해 떠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것을 알리기 위해 상대를 이해하려 한 마테오 리치는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쿠타가와 작품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진웅기.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영화감독은 영상으로 관객을 굴복시키고 작가는 문장으로 독자를 굴복시킨다.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의 글을 읽었을 때 독자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이야기의 성격에 상관없이 백기를 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럴 때가 독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독자란 자기를 진심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작가를 평생 찾아다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은 염세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그런 소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퇴폐적이고 나약한 단점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는 희망이란 불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의 소설은 염세적이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드문데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문장 뿐 아니라 세계관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동반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지만 그가 그 불행을 극복하면 왠지 손해를 본 것 같아서 다시 그를 불행속으로 빠뜨리고 싶어한다<코>'같은 명확한 메세지가 있는 작품도 있지만 <군도(이 단편은 삼성출판사판에 있다)>처럼 헤이안 시대의 비정한 도적들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인간의 두뇌로 인한 잔인성과 감정으로 인한 추악한 동물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덤불 속>에서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사건 자체를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 여인을 겁탈한 도적과 겁탈당한 여인, 그 여인의 남편이 자신의 감정 속에 함몰되어 누구도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아쿠타가와의 인물들은 모두 <덤불 속>의 남녀들과 같이 자기중심적 몰입에 빠져있다. 그들은 3인칭 시점으로 묘사되지만 누군가에게 관찰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과 생각에만 빠져있다. 다양한 의견은 없으며 유일한 진실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뿐이다. 극단적인 상황은 그런 인물들에게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귀결인 것이다. 노파는 죽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지지만 청년은 그런 노파의 옷을 벗겨 도망가고(라쇼몽), <지옥변>의 원숭이를 닮은 화가 요시히데는 자신의 그림을 위해서라면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색골은 사모하는 여인의 대변까지도 아름답다고 여긴다(호색).

그래서인지 아쿠타가와의 소설을 읽는 것은 아주 선명한, 0.1g의 다른 어떤 것도 섞이지 않는 선명한 그 무엇을 봤을 때의 자극과 기쁨이 있다. 그 무엇을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의 적나라함이 걸리고, 현실이라 하기에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망설여진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은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아쿠타가와가 자살한 것은 그가 그렇게 민감하고 비정하게 느꼈던 현실을 더 이상 소설의 아름다움과 형식 속에 녹여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단편들의 끝이 미완성인 듯 약간 모자란 것 같은 소설이 몇 개 있다는 점이다. 옥의 티랄까,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없었으면 너무 압도당했을 것 같아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한다. 역시 독자란 작가에게 굴복해도 영원히 항복하고 싶지는 않은 오기있는 존재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륜서
미야모토 무사시 지음, 양원곤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어느 자세든 자세를 취한다 생각하지 말고 적을 벤다고 생각하라.'
이 한마디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오륜서를 쓴 이유를 모두 요약하고 있다. 오륜서는 평생 검객으로 살아온 그의 책답게 실용적인 충고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실용적인 충고가 향하고 있는 곳은 어떻게 하면 승부의 상대를 효과적으로 해치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깊이 새겨두어야 할 사항이다', '잘 연구해야 한다', '꾸준히 단련해야 한다'같이 단락의 끝마다 잊지 않고 새기고 있는 말은 그가 철학서나 에세이로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도 그 이상의 쓸모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책이 예컨데 논어같은 것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을 향한 실용적인 충고는 이 책이 더 이상 진검승부를 하지 않는 현대인에게는 직접적인 쓸모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소중한 고전으로 읽힌다고 하지만 검도하는 사람들에게라면 모를까, 출판사에서 선전하고 있는대로 인생에 대한 충고나 경영철학으로서는 그리 뛰어난 수준이 아니다. '오륜서'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누누이 말하고 있다시피 실전을 위한 가이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이라도 검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련이나 시합에 필요한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더 흥미 있는 부분은 승부에서의 요령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얼마나 검의 세계에 모든 걸 집중해왔는지 드러날 때이다. 걸음걸이의 모양 하나, 불빛이나 문의 위치 하나하나까지도 검을 쓰는 데 얼마나 유리한가를 따지고, 급습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평생 목욕을 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는 진검 승부의 세계에 대한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있는 부분은 앞쪽에 실려있는 서화이다. '오륜서'가 현대에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더라도 그의 서화가 현대인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 사실 대단한 인물이라도 환상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므로 '오륜서'를 가지고 미야모토 무사시와 그와 승부했던 사무라이들(시시도 바이킨, 요시오카 세이지로, 요시오카 덴시치로, 사사키 코지로)의 환상에 다시 한번 빠져보고 싶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진검의 세계란 순식간에 승부가 나버리기 때문에 드라마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섭섭함은 그의 서화들을 보면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것은 만화 '배가본드'가 가장 재미있었는데, '오륜서'에 실린 그의 서화에서는 배가본드 못지 않은 '환상적인' 매력을 엿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문화 왕국, 신라 - 지혜의 책장 2
요시미즈 츠네오 지음, 오근영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지도를 보면 극동아시아만큼 배타적으로 생긴 지형도 없는 것 같다. 아메리카나 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가 방대한 대륙에 자리잡아 여러 나라가 주도권을 다투며 다양성의 역사를 수놓았던 반면, 극동아시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역 주위에 한국이라는 반도, 일본이라는 고도, 유목민족 몽골과 은둔자 티벳이 흩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한자를 받아들인 '한자문화권'이란 개념은 극동아시아는 중국문화권이란 뿌리깊은 사고방식의 고착화를 가져왔다. 이런 의견에는 학자들조차 의의가 없었던 듯, 오히려 그런 사고를 더욱 굳히는 연구만 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둘째치고 한반도가 그런 중국문명의 영향권에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논점이다. 놀라운 것은 한반도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라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런 학설을 자신 있게 내놓는 근거는 무엇일까? 문자? 아니다. 6세기 이전에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있다고 해도 현재에는 해독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대신 신라 왕릉에 묻혀져 있던 왕관과 유리잔, 공예품들로 잊혀져 있던 신라문화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인간의 계산이 끼어드는 역사기록 대신에 '생필품'에 접근한 저자의 방식은 탁월해 보인다. 옷의 무늬나 머리모양 하나에도 지방과 나라의 특색이 담겨져 있던 고대에 '생필품'은 분명 가장 정직한 역사적 사실을 대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외국에 한국문화 전시회가 열리면 가장 인기가 좋다는 신라의 황금관. 날 출(出)자-실은 수목 모양-로 솟구친 얇고 빛나는 왕관에 하나하나 달려있던 나뭇잎 잎사귀 금세공품. 그것이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의 왕관과 전혀 다른 문명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라 왕릉에서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는 뿔잔들은 그리스나 켈트인들이 애용했던 것으로 중국문화권에는 전무한 양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던 황금관과 뿔잔 외에도 신라의 왕릉에서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진기한 것들이 발굴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리잔이다. 유리잔의 문양은 지중에서 흑해 주변, 남러시아, 도나우강 유역에서 발견되던 것과 흡사한 양식이었다. 고대 신라인들이 얼마나 유리잔을 애호했는지 후에 불교가 들어온 후에 금으로 만든 사리장치 안에도 녹색의 유리잔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계는 분명 언제나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외부문화가 어떻게 고립되어 있던 신라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는지, 왜 유독 신라만 이런 문화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저자는 명쾌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고구려와 백제가 방패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에 신라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 역시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까지 걸쳐져 있던 문화를 일괄적으로 '로마문화'라고 부르는 저자의 논조 역시 전적으로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런 흠들은 문명교류를 연구하는 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책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대 왕국의 정체, 그리고 그 왕국이 보유하고 있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문화를 감상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팔레스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들은 불행하고 우리는 무력하다'라는 애매한 위치 때문에 경멸하거나 미화하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테러 뉴스를 접하면 비난하고 그것에 의구심이 들 때는 저항정신을 칭찬하는 식이었다. 이 책에 신뢰가 가는 것은 여태까지의 그런 관행과 달리 정형화된 개념과 명분을 버린,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태도와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조 사코(저자)는 자신과 그 책을 보는 독자는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한 일은 거의 없으며 지구촌 이웃인 우리로 인해 그들의 처지가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곳에 가서조차 팔레스타인인들의 아픔보다는 나의 안전을 더 생각한다. 그래, 우리는 방관자다! 그럼 방관자로서 뭐가 진실인지나 알고 보자!

팔레스타인은 모두가 알다시피 국민의 대다수가 난민이며 한달에도 몇 번씩 테러가 일어나는 곳이다. 유혈사태는 매일 일어난다고 봐도 좋다. 국제뉴스에는 이스라엘인들을 죽인 '아랍테러범'의 사건이 자주 보도되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불법적으로 마지막 저항과 복수를 한다면 이스라엘인들은(민간인들조차도) 합법적이고 정부의 협력을 받아가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다고? 더한 일도 있다. 안사르 수용소 편을 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단기적인 배고픔과 폭력보다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야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정책이다. 아무 절차없이 사람을 잡아가 청년의 대다수를 전과자로 만들고 중요소득원인 올리브나무를 밀어버리거나 집을 뭉개고 추방시키는 것은 그 일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100년 전에 사막을 가로지르던 베두인의 매너와 여유는 찾아볼 수도 없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궁상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제 그들은 끝없는 푸념과 내부의 불화, 외국인에 대한 불신, 아프고 배고픈 몸, 눈물 흘리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대접하는 설탕범벅자 한 잔만 마시면 재판 없이 끌려간 수용소, 자식 잃은 어머니, 감옥에 갖다 온 사람, 길가다가 혹은 집에 있다가 이스라엘군인에게 얻어맞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껴안고 있다. 그들의 아기는 쉼없이 태어난다. 삶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팔레스타인에서는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이 발간된 10년 전보다 사정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저자는 풍자적이고 익살스러운 만화로 그들을 표현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올바른 여론이 조성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이고 정형화된 시각에 지쳤다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첫장부터 툭 튀어나온 입술과 비쩍 마른 몸집으로 팔레스타인을 헤집고 다니는 조 사코의 안내를 받을 수 있을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