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문화 왕국, 신라 - 지혜의 책장 2
요시미즈 츠네오 지음, 오근영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지도를 보면 극동아시아만큼 배타적으로 생긴 지형도 없는 것 같다. 아메리카나 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가 방대한 대륙에 자리잡아 여러 나라가 주도권을 다투며 다양성의 역사를 수놓았던 반면, 극동아시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역 주위에 한국이라는 반도, 일본이라는 고도, 유목민족 몽골과 은둔자 티벳이 흩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한자를 받아들인 '한자문화권'이란 개념은 극동아시아는 중국문화권이란 뿌리깊은 사고방식의 고착화를 가져왔다. 이런 의견에는 학자들조차 의의가 없었던 듯, 오히려 그런 사고를 더욱 굳히는 연구만 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둘째치고 한반도가 그런 중국문명의 영향권에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논점이다. 놀라운 것은 한반도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라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런 학설을 자신 있게 내놓는 근거는 무엇일까? 문자? 아니다. 6세기 이전에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있다고 해도 현재에는 해독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대신 신라 왕릉에 묻혀져 있던 왕관과 유리잔, 공예품들로 잊혀져 있던 신라문화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인간의 계산이 끼어드는 역사기록 대신에 '생필품'에 접근한 저자의 방식은 탁월해 보인다. 옷의 무늬나 머리모양 하나에도 지방과 나라의 특색이 담겨져 있던 고대에 '생필품'은 분명 가장 정직한 역사적 사실을 대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외국에 한국문화 전시회가 열리면 가장 인기가 좋다는 신라의 황금관. 날 출(出)자-실은 수목 모양-로 솟구친 얇고 빛나는 왕관에 하나하나 달려있던 나뭇잎 잎사귀 금세공품. 그것이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의 왕관과 전혀 다른 문명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라 왕릉에서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는 뿔잔들은 그리스나 켈트인들이 애용했던 것으로 중국문화권에는 전무한 양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던 황금관과 뿔잔 외에도 신라의 왕릉에서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진기한 것들이 발굴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리잔이다. 유리잔의 문양은 지중에서 흑해 주변, 남러시아, 도나우강 유역에서 발견되던 것과 흡사한 양식이었다. 고대 신라인들이 얼마나 유리잔을 애호했는지 후에 불교가 들어온 후에 금으로 만든 사리장치 안에도 녹색의 유리잔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계는 분명 언제나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외부문화가 어떻게 고립되어 있던 신라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는지, 왜 유독 신라만 이런 문화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저자는 명쾌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고구려와 백제가 방패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에 신라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 역시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까지 걸쳐져 있던 문화를 일괄적으로 '로마문화'라고 부르는 저자의 논조 역시 전적으로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런 흠들은 문명교류를 연구하는 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책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대 왕국의 정체, 그리고 그 왕국이 보유하고 있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문화를 감상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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