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렛미인’은 벌써 세 가지 이야기로 가지를 쳐 탄생되었다. 그리고 원작을 읽은 지금 더 감탄스러운 것은, 앞으로도 무한 변주가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로도, 여자아이로도 묘사할 수 있는 12살짜리 어린 뱀파이어,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괴로운 사춘기를 보내다 뱀파이어 친구를 만나는 소년, 뱀파이어를 위해 살인을 하다 목숨을 잃는 중년 남자....이들은 세 가지 이야기에서 닮은 듯하면서도 빙점을 어디 찍느냐에 따라 명백히 다르게 변주되어 묘사되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의미에서 모두 흥미로웠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미국 리메이크작은 원작 소설에 대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스웨덴 영화에 대한 리메이크다. 소설에서 선택적 취합을 한 스웨덴 영화의 스토리와 설정을 거의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판에서, 그래도 이 영화를 꼭 봐야해! 라는 부분은 뱀파이어 역할을 맡은 배우 크로 모레츠 때문이다. 어린 외모에 부랑노인의 눈빛을 지닌 이 소녀는, 아름다운 긴 머리·가늘가늘한 팔다리와 공존하는 중성적이고 명민한 이미지의 뱀파이어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가난한 공동주택의 질척거리는 눈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이사 온 이 소녀는 성깔 있지만 평범한 소년을 완벽하게 매혹시켰다. 그녀가 아주 오래 전에 안경 낀 다른 소년을 매혹시켰던 것처럼....미국판이 매혹적인 뱀파이어 소녀에 대한 두 남자의 헌신과 집착의 러브스토리라면, 스웨덴 판은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스웨덴 판은 원작소설에서 깊게 건드렸던 ‘젠더’의 화두를 두 어린 배우를 통해서 구현한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은 포스터만 봤을 때는 여자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만큼 아름답다. 북구 특유의 백색금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하야디 하얀 피부...그에 반해 뱀파이어 소녀는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에 백인치고는 가무잡잡한 피부에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일단’만 소녀이다. 미국판에서 카디건에 치마, 때로는 부츠를 신고 나왔던 뱀파이어 소녀에 비해 항상 헐렁한 셔츠에 바지차림의 스웨덴판의 소녀의 sex는 끝내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애처롭게도 그녀는 미국판의 뱀파이어보다 훨씬 약하다...피를 빨 때 평소와 다른 괴수로 변신하지도 않고, 따돌림 당하는 주제에 시크하고 당당한 남자아이에게 다소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준다. 피를 빨다가도 성인 남자가 걷어차면 나동그라지고, 자기가 죽인 사람 앞에서 괴로워한다. 미국판의 뱀파이어가 매혹의 대상이라면, 스웨덴판의 뱀파이어는 연민의 대상이다.

영화 전체로만 보면 스웨덴판이 전체적으로 사실적이고 정밀해서(미국에서 리메이크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스웨덴판을 더 좋아했고, 원작과도 비슷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제일 나중에 접한 원작은 영화를 한 발로 뻥 차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두 발도 필요 없다..--;;)

어쩌면 그렇게 적나라한지...영화가 피 한방울이 또르르 흐르는 유리창이라면, 원작은 피칠갑을 한 흙바닥이다. 영화에서 간소하게 묘사된 주변 인물들은 복지국가 스웨덴의 최하층에서 뜨거운 숨을 내뿜고 있고, 뚱뚱한 왕따 소년은 모의 살인에 골몰해있다. 뱀파이어 소녀[소년] 엘리를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중년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혹은 보호자가 아니라 아동성욕자이다. 그가 엘리에게 협조한 최초의 이유는 명백히 변태적이었다. 엘리는 이중삼중의 낡은 이불속이 아니라 피에 잠겨서 잔다....맙소사.

교과서의 복지국가 모델 스웨덴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삶이란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삶이다. 살인과 도주의 반복. 슬픈 눈을 하고 있지만 아름다웠던 영화의 뱀파이어와는 달리 원작의 엘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피하지 못해 화상을 입고 피부가 지글거린다.

어떡할까. 이 책을 어딘가에 팔아버릴까....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지금도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제일 좋았어요, 라고 말하기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환상도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렛미인들의 마더보드이자 탄생설화이며 근원인 이 책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만의 리메이크작의 나래를 펼칠 때에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움과 참혹함, 외로움, 징그러움 등 모든 것이 있는 이 책이. 그런데 진짜 엘리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다 죽어도 온전히 죽지 못한 중년 남자 호칸은 너무했다. 호칸의 이 에피소드에 중점을 맞추면 엽기발랄 B급 영화 한편도 충분히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렛미인 너, 역시 물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 나의 고전 읽기 13
정출헌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춘향전이 정절을 지킨 소녀와 그녀를 구해주는 도령의 이야기였다면 하품이 나올 것이다. 심청전이 착하디 착한 효녀와 불쌍한 눈 먼 아버지가 복받는 이야기일 뿐이라면 아무도 심청전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은커녕 당대에도 외면을 받지 않았었을까. 판소리가 19세기에 인기절정을 거치면서 당대인들을 매료시키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판소리가 지닌 폭발하는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나도 가끔 판소리의 박력을 빠져 더 알고 싶을 때가 많은데, 불행한 것은 평생 판소리를 듣지 않고 산 나에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소한 예술세계로의 진입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 흥미와 매력은 느끼는데 막상 접하면 인내심 있게 달려들지 못한다. 아름다운 산의 사진을 보고 그 매력에 끌려 찾아갔다가 험준한 산세에 질려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초보 등산자의 행색과 같다고나 할까. 내 스스로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럴때마다 죄책감과 나태함 사이를 방황하다가 결국 나태함이 이겨서 한동한 판소리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럴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이 입문서의 힘이다.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는 그런 점에서 판소리에 대한 입문을 도움과 동시에 판소리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판소리의 원전을 들여다보며 적절한 해설을 해주고, 더욱이 그것이 왜 당대를 풍미함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유효한 고전의 자격이 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춘향전은 정절을 지킨 소녀와 정의감 넘치는 도령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다. 수많은 이본이 존재하는 판소리답게 춘향도 지고지순한 처녀에서 당돌한 기생의 딸까지 수많은 캐릭터가 존재하며, 그녀가 이도령을 기다리며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모르던 젊은 여자가 자신을 맘대로 좌지우지하려 하는 사회의 힘에 저항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주위사람들 또한 처음엔 기생 딸인 춘향의 지조를 비웃지만 점차 그녀의 저항에 동조하며 힘없는 자들끼리의 동지의식을 공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두하여 변사또와 이방들을 처단하는 한바탕은 이러한 정의감과 저항의식이 축제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양반이자 과거급제자인 이도령이 미천한 신분의 춘향과 혼인하는 것은 축제의 절정이랄까. 신분제사회에서 천민의 딸과 양반 자제의 혼인이란 로맨스가 아니라 혁신 그 자체였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 '방자전'은 춘향전의 이본의 일종인데, 도발적인 시작에 비해 끝은 참으로 허무하달까, 용두사미의 전형을 보여준 것 같아 씁쓸~하다.  

신분제를 뼛속까지 풍자하는 춘향가를 들으면서 당대인들은 구체적인 백일몽을 꿨을 것이고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는 들어도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오늘날에 춘향가를 들으면서 당대인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느정도까지는 판소리 자체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소리 자체가 변화없이 전승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판소리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판소리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철저히 적응하면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현대인이 더이상 판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럴 만해서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촌철살인의 풍자, 끝없이 이어지는 풍부한 말과 가락의 향연, 동시에 웃기고 울리는 판소리의 박력이다. 100년 전의 판소리와 같지 않더라도, 이러한 것을 담은 우리의 예술을 봤으면 하는 욕망이 절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독립하는 것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며, 고로 사회의 규칙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회생활을 싫어라 하는 내가 독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독립하지 않으면 날 먹여 살릴 다른 가족이 두 배로 사회생활의 고달픔을 겪어야 한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독립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나는 사회생활의 여러 규칙들도 존중하리라 다짐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미덕과 존경할 만한 점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사회를 반추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참으로 매력 없고, 때때로 너무 무신경하게 다른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 낸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직장선배들의 열이면 열 똑같은 질문과 강요로 지쳐갈 무렵 만난 이 책은 빵틀처럼 반듯하게 모양이 잡혀 가던 내 정신을 번쩍 나게 해주었고, 새롭게 힘을 낼 수 있는 근육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 세상에는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고,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사는 사람이란 삶의 중대한 기로인 30살에 외국으로 기약 없는 유학을 떠나버리는 것을 말하며, 길거리에서 만난 예술가와 오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말하며, 비혼으로써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것을 말하며, 확고한 자기사상을 가지고 사람들과 격렬히 논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이 모든 미덕들이 악덕으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하지만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든 그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피는 녹색이거나 짙푸른 바다색이 아닐까.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니까. 그냥 빨간색의 피를 갖고 있는 나는 도저히 목수정처럼 살 수는 없다. 나는 사람들의 편견과 강요를 그냥 농담으로 넘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연애만 하진 않을 것 같다. 일을 소중히 여기지만 일과 놀이가 합치될 만한 직장을 구태여 찾지는 않았다.

목수정처럼 살지 않더라도 그녀의 책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은 그녀가 애인인 희완의 예술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나도 느꼈기 때문이다. 실용성을 넘어선 아름다움, 삶의 자유로운 자락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먼 창공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라보게 해주었고, 삶이 답답한 것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줬기 때문에. 어느 책에나 있는 말처럼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하지만 그것을 체감하게 해주는 책은 별로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진짜로 바람이 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외딴 방이란 거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경험 혹은 공간이 아닐까. 원하지는 않았으나 필연인듯 다가왔고,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통증인 동시에 찬란한 기억. 소녀 신경숙의 서른 일고여덟 방 중의 하나, 곰과 호랑이의 마늘쑥 냄새 진동했을 동굴, 그리고 창문을 열면 거센 바람이 불었던 5층의 나의 작은 방까지. 

소년소녀와 어른은 뭐가 그리 다른 존재이기에 어른이 되기 위해 그 아득한 공간을 거쳐 나와야만 했나. 그 공통된 외딴방의 시련 하에서는 고대 신화와 1970년대, 2000년대라는 시간차도 부질없어 보인다. 

쇠스랑으로 자기 발을 찍고도 태연할 수 있는 오기가 푸르등등한, 동시에 꿈과 좌절에의 공포로 온몸이 팽창하는 때. 막연하게 그려보는 꿈만으로도 벅찬 그때 괴물같은 도시 서울에 올라와 공장 노동자와 야간학교 학생으로, 두 오빠와 한 명의 언니와 단칸방 생활을 해야 했던 16세 소녀의 혼란스럽고 망설임 가득한 내면이 나의 것인 듯 생생하다. 소녀와 환경과 시대가 다른 내가 그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혼란과 주저로 가득한 쌍동밤같은 내면의 일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늘쑥을 먹어야만 하는 모든 인간의 운명과 함께. 

하지만 그뿐이라면 외딴방의 회상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외딴 방에 있는 그 소녀의 의외로 단단한 뿌리가 난 몹시도 부러웠고, 감동적이었다. 혼란스럽고도 혼란스러운 시대와 노동자인 동시에 작가지망생이라는 애매한 정체성의 와중에도 소녀에게는 든든한 두 명의 오빠와 한 몸처럼 붙어다니던 사촌언니가 있었고, 고향에는 두 명의 동생과 부모님이 언제나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풍요로운 고향, 그리고 따듯함과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넘치던 가족은 그녀가 쇠스랑으로 발을 찍고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너무 막연해서 두렵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회사와 공권력에 쫓기던 동료 노동자, 가난과 실연으로 자살한 이웃 언니,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무수한 사람들이 그녀의 운명이 아니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단단한 뿌리와, 아마도 순수함으로 외딴 방을 빠져나와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 

그냥 인간보다, 곰과 호랑이의 꿈이었던 인간이 더욱 눈부시지 않은가. '외딴 방'에는 소녀의 어려움과 가족과 친구들의 고단함, 시대의 아픔이 생생함에도 희망을 봤을 때처럼 마음이 환하다. 아마도 동굴의 시험을 통과한 한 인간과, 그녀와 같이 살아남아 그녀의 책을 읽으며 이야기하는 가족과 옛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동헌의 클래식 이야기 - 클래식 음악을 스케치하는 레코드쟁이
신동헌 글.그림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악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때때로 즐기는 음악 하나 없는 삶은 얼마나 단조롭게 버석거리는 삶인가. 그에 비해 1927년이란 까마득한 시절에 태어났으면서도 유년시절부터 음악과 함께 음악애호가로써 80여년의 세월을 보낸 작가의 삶은 부럽기만 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가 한창인 때에 두만강변에서 태어나 대학시절에 6.25동란을 만난 작가의 인생이 녹록치는 않았겠지만 삶과 함께한 음악이야기를 펼쳐놓는 그의 말투는 발랄하고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작가는 밝고 개구진 문체답게 모차르트와 하이든에 대한 애호가 뚜렷하다. 나는 모차르트는 제쳐두고라도 하이든은 좀 과소평가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롱하고 맑은 음악을 듣고 싶다면 하이든보다 더 선율이 풍부하고 현대적인 모차르트를 듣겠다는 생각이랄까. 하지만 하이든을 열렬히 찬양하는 작가의 글을 계속 접하고 보니 다시금 구미가 당긴다. 특히 현악4중주는 꼭 들어봐야지. 

보통 클래식 해설서는 학문적 해석에 중점을 두거나, 해설자의 삶의 이야기와 함께 풀어가거나, 잡다한 음악사적 에피소드를 모아놓는 등으로 나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화가와 음악 애호가와 이공계 전공이 섞인 작가의 이력답게 세 가지가 알맞게 섞여 있어서 부담없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비록 클래식에 대한 학식을 늘릴 수는 없지만 음악과 평생을 함께한 작가의 이야기는 예술과 함께하는 삶이란 저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로 흐뭇해진다.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얘기할 때에도 유머러스하게 넘겼지만 두만강변의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그의 삶이 짐작되어 나 혼자 찡해지기도 했다.  특히 독일의 기차 안에서 만난 노신사와의 에피소드는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린츠 역에 눈물을 감추며 서 있는 노신사의 뒷모습을 내가 직접 본 듯 잊혀지지가 않아서 모차르트의 린츠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이제 내 삶은 뭔가 특별하고 독자적일 거라고 믿는 나이는 지났고, 어이없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 민초의 삶이라는 것도 알아 조금 스산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게 느껴진다. 나도 한참 후에 내 삶을 회고해볼 때 순간순간마다 삶과 함께 빛나는 음악들, 그리고 슬프고 괴로울 때 위로해준 음악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