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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 ㅣ 나의 고전 읽기 13
정출헌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1월
평점 :
춘향전이 정절을 지킨 소녀와 그녀를 구해주는 도령의 이야기였다면 하품이 나올 것이다. 심청전이 착하디 착한 효녀와 불쌍한 눈 먼 아버지가 복받는 이야기일 뿐이라면 아무도 심청전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은커녕 당대에도 외면을 받지 않았었을까. 판소리가 19세기에 인기절정을 거치면서 당대인들을 매료시키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판소리가 지닌 폭발하는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나도 가끔 판소리의 박력을 빠져 더 알고 싶을 때가 많은데, 불행한 것은 평생 판소리를 듣지 않고 산 나에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소한 예술세계로의 진입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 흥미와 매력은 느끼는데 막상 접하면 인내심 있게 달려들지 못한다. 아름다운 산의 사진을 보고 그 매력에 끌려 찾아갔다가 험준한 산세에 질려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초보 등산자의 행색과 같다고나 할까. 내 스스로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럴때마다 죄책감과 나태함 사이를 방황하다가 결국 나태함이 이겨서 한동한 판소리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럴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이 입문서의 힘이다.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는 그런 점에서 판소리에 대한 입문을 도움과 동시에 판소리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판소리의 원전을 들여다보며 적절한 해설을 해주고, 더욱이 그것이 왜 당대를 풍미함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유효한 고전의 자격이 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춘향전은 정절을 지킨 소녀와 정의감 넘치는 도령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다. 수많은 이본이 존재하는 판소리답게 춘향도 지고지순한 처녀에서 당돌한 기생의 딸까지 수많은 캐릭터가 존재하며, 그녀가 이도령을 기다리며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모르던 젊은 여자가 자신을 맘대로 좌지우지하려 하는 사회의 힘에 저항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주위사람들 또한 처음엔 기생 딸인 춘향의 지조를 비웃지만 점차 그녀의 저항에 동조하며 힘없는 자들끼리의 동지의식을 공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두하여 변사또와 이방들을 처단하는 한바탕은 이러한 정의감과 저항의식이 축제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양반이자 과거급제자인 이도령이 미천한 신분의 춘향과 혼인하는 것은 축제의 절정이랄까. 신분제사회에서 천민의 딸과 양반 자제의 혼인이란 로맨스가 아니라 혁신 그 자체였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 '방자전'은 춘향전의 이본의 일종인데, 도발적인 시작에 비해 끝은 참으로 허무하달까, 용두사미의 전형을 보여준 것 같아 씁쓸~하다.
신분제를 뼛속까지 풍자하는 춘향가를 들으면서 당대인들은 구체적인 백일몽을 꿨을 것이고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는 들어도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오늘날에 춘향가를 들으면서 당대인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느정도까지는 판소리 자체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소리 자체가 변화없이 전승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판소리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판소리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철저히 적응하면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현대인이 더이상 판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럴 만해서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촌철살인의 풍자, 끝없이 이어지는 풍부한 말과 가락의 향연, 동시에 웃기고 울리는 판소리의 박력이다. 100년 전의 판소리와 같지 않더라도, 이러한 것을 담은 우리의 예술을 봤으면 하는 욕망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