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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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0대가 되자 아는 사람들 중 몇몇이 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신문에서는 한 반에 몇 퍼센트가 유학으로 비었네, 하며 떠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떠났던 아이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공익으로 군복무를 했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기도 했다. 매스컴에서는 미국에 유학간 아이들의 부적응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가 그렇게 별로였나?

아마 그들도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에 가서, 영어를 잘 하고, 운좋게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딴다면 미국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들이 그렇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실체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미국인으로 살 수 없는 비애는 거기서 태어난 동양계 미국인, 네이티브 스피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는 바나나라는 속어가 있다고 한다. 황인종을 가리키는 말인데,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미국식 사고방식에 완전히 젖어있는 동양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워도 비웃음이라니, 분명 겉도 노랗고 속도 노란, 자기 고향 나라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 유색인에 관한 속어도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너네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은 것일까.

헨리 박 역시 그런 한국계 미국인들 중 하나이다. 백인 아내 릴리아의 평가에 의하면 그는 인생에서 B플러스짜리 학생이다. 예의바르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며 똑똑하지만 그는 어딘가 비어있고, 닫혀있다. 아내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한동안 떠나있기도 한다. 아내의 또 다른 평가는 그가 파파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콤플렉스의 근원은 파파가 아니라 페밀리이며, 컨츄리이다. 그는 영어를 원어민과 같이 구사하지만 그의 행동양식이나 느끼는 방식은 미국식 못지 않게 한국식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식인 것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땐 표현하기보다는 혼자 삭이고, 동적인 제스쳐보다 정적인 제스쳐로 말하는 것 등등.그가 미국인에 의해 비어보이고 폐쇄적으로 보이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동양인은 대부분 헨리 박과 같은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벗어버린 것 같은 인물이 있었다. 존 강이라는 시의원. 그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영어로 연설을 하고, 유색인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유색인의 영역을 넘어서는 무대에서 정치를 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슈퍼마켓에서의 성공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헨리의 아버지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산업 스파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헨리 박에게 존 강을 감시하라는 임무가 떨어졌을 때 헨리가 존 강에게 매료되어 간 것은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헨리에게는 아버지가, 타국에서 상처받고 자신의 껍질을 딱딱하게 만들어 속으로만 숨어버린 친부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진짜 아버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헨리는 전적도 있었다. 역시 지적인 동양계였던 정신과 의사를 감시하던 중 그에게 너무 솔직해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환자인 척 했지만 나중에는 진짜 상담 비슷한 것까지 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침착하고 얌전한, 거의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꺼풀 아래의 헨리 박은 기대면 스르륵 넘어질 것 같은 면이 있었다. 이것은 헨리가 노란피부라는 주홍글씨가 찍힌 동양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백인 아내의 릴리아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1세기 전의 유럽에서 카프카도 그랬다. 이 소설이 아웃사이더의 설움을 넘어서 '계시적'인 데까지 나아가는 건 작가가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는 카프카적인 인물의 위태로움을 미묘하고 정교하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예상하는 대로 이 책은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나는 책을 꽤 빨리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4일이나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작품들이 그렇듯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진가가 드러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끝나지만 소설을 다 읽은 독자에게는 미묘하고 끈질긴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다. 비록 헨리의 무의식의 아버지, 존 강이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함으로써 헨리의 파파, 페밀리, 컨츄리 컴플렉스는 치유되지 않지만 노란 피부의 헨리와 그의 백인 아내 릴리아의 미래는 단정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비관적이지는 않고,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지만, 손에 잡힐 것 같은 무엇. 그 무엇을 엿보는 것 만으로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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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 별이 뜨다 - 소설가 방현석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여행
방현석 지음 / 해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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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년 전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읽다가 베트민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수도에 입성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정의를 쟁취하는 것을 보는 드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렸을 때 인디언과 서부 개척자가 나오면 백인을 응원하고, 007에서는 본드를 응원하게 한 문화적 세뇌가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베트남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도 꽤 많은 전쟁을 치루고 수난을 겪은 나라지만 베트남은 한 수 위인 것 같다. 베트남의 근현대의 왕조는 조선의 왕조보다 더 사치스러웠고, 베트남을 침공한 중국과 프랑스, 미국은 한국을 침략한 외세보다 더 빈번했다. 그만한 수난이면 모든 용기가 꺾일 것만 같은데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여서 베트남 사람들은  더 강하게 벼리어졌다. 그리고 명쾌한 논리를 갖게 되었다. 이념이나 가치관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뭉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이념의 과포화 시대인 20세기에 이렇게 명쾌한 논리를 갖는 건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식민지하에서 고통받던 제3세계의 나라들이 모두 이런 단순한 진리를 체득하고 있었다면 오늘날 베트남과 같은 자부심을 갖는 나라가 더 많지 않았을까.

많은 고난들을 이겨낸 오늘날의 베트남 사람들은 당당한 역사에 준하는 활기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갖고 있는 자부심 못지않게 여행객에게 인상적인 것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국토의 문화와 경치다. 베트남처럼 종단여행이 의미를 갖는 나라도 드문 만큼 북부에서 남부로 조르륵 내려가며 작가가 묘사하는, 서서히 변하는 풍물들은 질릴 틈 없이 흥미롭다. 실제 여행을 해도 마찬가지겠지.

호치민에게 경도된 저자인지라 슬쩍 믿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북부 지방의 소수민족들이 비옥한 남부로의 이주 권고를 거부하는 게 호치민이 준 한 뼘의 땅을 버리기 싫어서라고 하는 부분. 소수민족들이 이주하지 않는 게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소수민족에 대한 베트남의 차별정책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 그런 의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무관심과 무시의 대상이지만 몇몇 지식인들의 베트남에 대한 죄의식이 베트남을 이상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상화도 결코 옳지는 않을텐데.

하지만 중부로 내려가면 베트남에 대한 죄의식은 오버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국군들이 파병됐던 곳이 중부지방이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집들이 한국군으로 인해 죽은 가족의 제사를 지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때 얻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정말 이상했던 것은 왜 미국의 요청 혹은 강요로 파병했던 용병인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잔인했어야 했냐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군인들이 느꼈던 정글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해 발생한 광기는 잊기로 하자. 실제로 그런 정글은 남부의 일부 지방에만 있다고 한다. 그런 영화들치고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고엽제로 밀림을 싹 쓸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밀림 자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은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지겹다. 그래서  여자와 노인, 아이들만 있는 마을을 전멸시켰는가? 베트남 참전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주로 불가피했는가 아니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는가로 나뉘어 있지만 베트남에서 보여준 우리 군인들의 행동도 논의의 대상이라고 본다. 앞으로 한국이 일구어 나가야 할 평화를 생각할 때 반드시 극복하고 설명해야 할 부분은 오히려 그것이 아닐까.

남부로 내려가면 베트남을 생각할 때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표적인 것이 메콩 강이며, 강둑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이고, 수많은 해산물이 즐비한 수상시장이다. 세계의 수출량 3위 안에 드는 쌀 생산 지대가 있는 풍족한 땅이다. 막상 가면 더위와 모기 때문에 녹초가 될지도 모르지만 메콩강을 가로지르는 보트 위에 누워 과일을 먹고 싶다는 바람이 저절로 이는 곳이었다. 북부에서 비장해지고 중부에서 괴로워진 마음이 남부에 오면 그 풍족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으로 바뀔 것 같다. 죄책감만 안고 다니는 것이 어찌 베트남에 대한 예의겠는가. 이런 아름다움도 베트남의 일부인데 말이다.

여행을 하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저자는 '허술하고 공허한' 삶에서 떠나기 위해 베트남 여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베트남에는, 말을 잘 통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레. 베트남의 시인. 얼마전에는 한국에 방한해 메스컴에도 가끔 소개됐던 사람이다. 그는 전쟁과, 그곳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에 관한 기억을 시로 만든다고 한다. 반레도 사실 그의 본명이 아니다. 시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홍안에 수염이 나기도 전에 전사해야 했던 친구의 이름이다. 친구의 이름을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옛 기억은 그에게 흐려지지 않는 영원한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근현대에 유럽의 어떤 나라는 자기들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했다. 어디 그 나라뿐이겠는가. 열강들은 모두 그런 일념으로 아시아를 침략했다. 권력과 돈이라는 태양을 숭배한 그들은 어디나 쳐들어 갔지만 어떤 나라도 베트남을 영원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옛친구의 이름을 새기고 그들을 기억하는 반레와 같은 어른들이 있는 한, 그리고 그 기억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한 다시 그런 시도가 있다 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이 비록 해와 같은 강함은 아니지만, 베트남의 별빛이 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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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편지
루쉰 외 지음, 리우푸친 엮음, 임지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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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가나 책이 있다. 너무 난해할 것 같거나, 너무 어두울 것 같을 때. 루쉰은 나에게 둘 다였다. 그래서 어두운 거인같은 이미지의 루쉰에게 쉽게 다가가고자 입문서로 이 책을 선택했지만 웬걸, 입문서 뿐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연서'를 읽는 즐거움도 함께 느꼈다.

확실히 루쉰같은 인물과 동시대에,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있다면 누구나 그에게 인생과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싶을 것이다. 더군다나 학교측의 횡포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에서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젊은이라면. 그 여학생이 후에 루쉰의 사상적 동지이며 연인이자 부부가 되는 쉬광핑이었다.

쉬광핑은 학교의 휭포에 못지 않게 동료 학생들의 무관심과 냉소에도 절망하고 있었다. 직선적이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이런 현실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학교 문제 뿐 아니라 부패와 인습에 찌든 구사회에 대한 분노와 어지러운 사회현실이 주는 절망은 그녀에게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가지게 했다. 쉬광핑은 한마디로 불이었다. 불같은 이 여학생이 쓴 편지에 루쉰은 서서히 스며드는 깨끗한 물과 같은 답장을 준다.

중국사회의 부조리와 일본인의 만행을 목격하고 의대생에서 작가로 변신한 루쉰이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을 연소시키는 행위가 때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면 한낱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젊은 시절을 쉬광핑과 같은 생각으로 보냈기 때문에 저돌적인 희생의 무의미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득했을 것이다. 전반적인 사회의식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희생해도 대중은 그 개혁가의 살점만 발라먹고 버릴 것이라는 걸 루쉰은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쉬광핑은 루쉰의 정성어린 답장에 스승을 발견한 느낌이었을 것이고, 이들의 편지교환은 계속된다. 루쉰은 한 편지에서 요령없게 명분을 위해 돌격하다 죽은 자로를 비판하며 우직함이 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언뜻 보면 루쉰이야말로 자로형의 인물일 것 같은데 사실 루쉰이 주장한 것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에 가까웠다. 인습, 부패, 타락이란 큰 적에 맞서 깨끗한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은 교활함에 가까운 지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해하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고,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현재에 여유를 찾는 것 또한 중요했다.

물론 루쉰이라고 이러한 것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던 것은 아니다. 요령도 없고, 때로는 소심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그는 쉽게 상처받고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 이후에는 달라졌다. 처음에는 루쉰이 쉬광핑을 충고하고 이끌었지만 루쉰이 약해지고 동반자가 필요할 때는 쉬광핑이 옆에 있게 되었다. 처음의 고상하고 잘 다듬어진 편지는 그들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음에 따라 유머와 솔직함이 넘치는 편지로 변해갔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정을 쫓아나가다 보면 쉬광핑이 1925년 3월 11일 루쉰선생님께, 라고 써 보낸 편지 한 통은 기적의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서로의 사상을 깊게 이해하고 같은 사회개혁 의지를 지닌 동지이자 누구보다 서로에게 순결한 사랑을 바친 연인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이란 으레 복잡한 내면을 갖고 있어 상대에게 순수하게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와르처럼 평등해도 충실하지 못한 관계가 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루쉰과 쉬광핑의 사랑은 시골 처녀 총각만큼이나 순수했고 반세기를 함께 한 부부만큼이나 충실했다. 루쉰이 이처럼 솔직하게 자기의 내면까지 드러내는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루쉰과 쉬광핑의 편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 책에는 또 한 사람의 글이 있었다. 엮은이 리우푸친의 글이다. 루쉰에게 너무 반해있는 이 엮은이의 해설은 독자의 판단에 맡겨도 좋을 칭찬까지 너무 자주 대신해줘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때도 있지만 루쉰과 쉬광핑 사이의 미묘한 암시와 변화를 생생히 잡아내고, 루쉰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에게 자세한 해석을 해줘 많은 도움이 됐다. 연애편지로서, 사상의 장으로서의 편지의 가치를 모두 살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해준 것이다.

루쉰은 스스로도 말했다시피 어두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두움을 누군가에게 옮기고 싶지 않아할 정도로 사려깊었다. 자기가 희생할지언정 남, 특히 젊은이들이 희생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의 다른 글에도 이런 사려깊음과 따듯함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 그림자만으로도 기가 죽었던 루쉰이란 거인에 대한 거리낌이 없어졌달까. 결과적으로 '연애편지 모음'인 이 책은 루쉰에 대한 입문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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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고독 1 - 망나니의 집
알라이 지음, 지쿤 옮김 / 아라크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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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티베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사람들은 티베트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내 무식을 더 가중시켰을 뿐이다. 사람들이 티베트에 대해 쓰고 말하는 것은 옛날 아이들이 처녀 선생님에 대해 '우리 선생님은 너무 이뻐서 화장실도 안가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은 하나같이 진정한 평화를 지니고 있고 지혜롭다고 묘사돼 나의 불신감을 샀다. 나 또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사람의 후예지만 그 때의 조선이 결코 조용한 아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눈먼 칭찬은 때로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성의부족의 증거일 수 있다. 그래서 동서양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티베트에 대해 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을 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티베트의 진면목의 일부를 본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한 바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티벳 영주인 메치 투스의 둘째 아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만취한 상태로 어머니와 동침했기 때문에 그가 바보로 태어났다고 여긴다. 그 또한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며, 별로 유감스러워하지도 않는다. 누구한테나 우습게 여겨지긴 하지만 그도 가끔 바보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똑똑하다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를 무시할 때. 혹은 단순한 마음으로 세상을 판단할 때. 그럴 때 그는 예기치 않은 통찰력을 보여 사람들을 놀래킨다. 그가 커갈수록 사람들은 그가 바보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그의 주위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나 투스 후계자인 형, 점을 치고 경을 읽어주는 라마와 활불 등등. 그러나 그가 몇 가지 일을 예견하고 그것이 들어맞자 사람들은 그를 점점 예지력 있는 존재로 본다.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제 그가 바보라고 단정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하는 예언에는 방문자를 미리 알아맞추는 진짜 예언도 있지만 한족 장군이 주고 간 양귀비꽃의 폐해를 예견하는 현실적인 통찰력도 있다.

사람들은 가끔 그에게 놀라지만, 그는 사람들이 놀라면 다시 그들이 바보라 불렀던 상태로 돌아간다. 무심하고, 느긋하고,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 그에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망치는 야심과 질투, 소유욕, 집착이 없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녀가 배신했다고 광분하지 않으며, 집안을 노리는 자객이 주위에 숨어있어도 불안해 하거나 날카로워지지 않는다. 시치미를 떼긴 하지만 주위의 늙은이들보다 그가 더 라마의 자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또한 티베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계와 고립되어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는 그들만의 향과 채취, 그들만의 규칙, 그들만의 부패와 그들만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서로 싸우고 속이고 사랑도 하지만 외부의 영향은 희미하고 가는 그림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너무 고립되어 있어 양귀비가 들어와도 그것의 의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옆나라 중국은 한창 대일전쟁과 국공내전이 한창이지만 공산당과 국민당도 그들에겐 빨간 한족과 하얀 한족으로 어렴풋이 구분될 뿐이다.

이들은 마술적 고립감에 싸여있다. 하지만 현실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꿈속에 있는 듯한 고립감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진실을 엿본 것 같은 이상야릇한 느낌을 주는 것은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닮았다. 그 소설이 마지막에 준 전율을 기억하는가. 제목에 '고독'이 선택되어진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티베트 또한 고독 속에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리고 '바보' 또한 티베트의 스러지는 먼지바람과 운명을 함깨해 간다. 끝까지 느긋하고, 무심하며, 조금은 외롭게. 그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이 땅을 사랑했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고. 그는 진심으로 바보같기도 하고, 현자같기도 하고, 수줍은 소년이나 방자한 도련님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건 번뇌없는 그의 마음이었다. 다소 멍청하고 따듯한 그의 마음이었다. 이것이 바보라면, 나도 바보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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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 - 잭 런던의 클론다이크 소설 잭 런던 걸작선 7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지식의풍경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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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덕이나 선과 악의 개념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만할 때나 입에 올리는 얘기이기가 쉽다. 혹한이나 혹서, 굶주림, 투쟁만이 있는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얘기하고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는 붓다나 예수같이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영역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타락해서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그곳에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자 힘인, 원시시대로부터 내려온 야생적인 본능과 지혜를 회복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세 개의 소설이 실린 이 책에서 잭 런던이 말하는 것은 마지막 영역에 속하는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첫번째 소설의 주인공은 덩치 큰 개다. 하지만 잭 런던이 동물의 생태를 묘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벅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덩치 큰 친구는 뭐랄까, 인간의 정신을 가진 개이자 동물의 훌륭한 신체와 본능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남쪽 지방의 귀족집에서도 살았고, 물욕에 눈이 먼 하인이 빼돌려 파는 바람에 북쪽 지방의 살이 에는 추위에서 썰매 끄는 개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주인 중에서는 영리하고 폭력적인 자도 있었고, 멍청한 주제에 폭력적인 자도 있었으며, 진심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주인도 있었다.

하지만 벅이 어느 주인에게 속해서 어떤 대접을 받았던 간에 그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야생에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이자 그의 먼 조상인 들개와 늑대로부터 내려오는 야성을 향한 충동이었다. 주인들이 주던 먹이만 먹던 그가 스스로 사냥을 할 때 느끼는 희열, "삶의 극치를 이루는, 혹은 삶의 극치를 넘어선 황홀경"은 그를 주인이 있는 영리한 개로만 남겨두지 않고 점차 숲속으로 이끌었다. 벅이 모든 충성과 애정을 바쳤던 손턴과 있었을 때조차 이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활기, 잔인함, 순수함이 구분 없이 녹아 있는 강렬한 영혼이라고나 할까. 잭 런던은 벅의 이러한 상태를 창작열에 사로잡힌 예술가나 "공포에 휩싸인 전장에서 미쳐 날뛰며 항복을 거부하는 군인"과 비교하며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차가운 순백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조차 동물을 닮아간다. 세 번째 소설인 '북쪽 땅의 오이세이아'에 나오는 금발의 사내와 인디언 사내, 인디언 여인은 벅의 멍청한 주인이었던 남녀들처럼 불평하고 흐느끼지 않는다. 불평하는 대신 무기를 들고 싸우고, 흐느끼는 대신 울부짖는다. 그들도 욕망이, 아주 뜨거운 욕망이 있지만 그것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우회하며 곁눈질하는 대신 직선으로 나아간다. 그러다가 무모한 행동을 해 위험에 처하거나 원하는 것을 찾아 헤매며 오디에세이아처럼 오랜 방랑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들은 우직하고 멍청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거나 나약하지는 않다.

두 번째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렇게 우직하고 상상력이 없는 한 남자가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해가지만,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위험을 피해 간다. 동물은 털끝에서부터 느껴져오는 감촉으로 추위의 정도를 파악하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온도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통해 혹한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집을 떠나 혼자 길을 나섰다면, 그는 이미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느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직하게 앞으로 나간다. 그는 당장 처한 상황보다 앞으로 먹을 점심과, 저녁에 야영장에서 만날 동료들의 생각에 골몰해 있다. 그는 심지어 동행한 개조차 느꼈던 위기감도 감지하지 못한다. 그는 뒤늦게 혹한이 가져오는 동상과 고립, 신체적인 마비를 자각한다.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려던 그는 뒤늦게 위험을 실감하고 살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지만 손과 발 끝을 파고들었던 동상은 너무 많이 퍼져 있었다. 점점 심해지는 동상은 불을 피우려고 하는 몇 번의 시도를 방해할 뿐이었다. 불을 피우려는 노력이 마비된 손발 때문에 불가능으로 끝나자 그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를 구해줄 야영장이 있는 곳으로. 야영장이 어디 있느냐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도 말했다시피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어야만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칠 수 있다. 사람들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따듯하게 해주지 못한다면 인간다운 높은 이상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이나 이상은 훈풍을 타고 오는 법이지 칼바람을 타고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칼바람이 가져온 세계를 봤다. 그곳에는 미덕과 악덕의 구분도 없었다. 살아남아 승리한 자도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더 강하게 생존했을 뿐이다. 추호도 이런 세계를 동경하지는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뜨거운지 차가운지 구분할 수 없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나에게도 야생의 기억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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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4-10-1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서, 풀내음이 섞인 땀냄새를 맡았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hoyahan1 2004-10-1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을 참 아름답게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