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편지
루쉰 외 지음, 리우푸친 엮음, 임지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가나 책이 있다. 너무 난해할 것 같거나, 너무 어두울 것 같을 때. 루쉰은 나에게 둘 다였다. 그래서 어두운 거인같은 이미지의 루쉰에게 쉽게 다가가고자 입문서로 이 책을 선택했지만 웬걸, 입문서 뿐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연서'를 읽는 즐거움도 함께 느꼈다.

확실히 루쉰같은 인물과 동시대에,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있다면 누구나 그에게 인생과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싶을 것이다. 더군다나 학교측의 횡포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에서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젊은이라면. 그 여학생이 후에 루쉰의 사상적 동지이며 연인이자 부부가 되는 쉬광핑이었다.

쉬광핑은 학교의 휭포에 못지 않게 동료 학생들의 무관심과 냉소에도 절망하고 있었다. 직선적이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이런 현실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학교 문제 뿐 아니라 부패와 인습에 찌든 구사회에 대한 분노와 어지러운 사회현실이 주는 절망은 그녀에게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가지게 했다. 쉬광핑은 한마디로 불이었다. 불같은 이 여학생이 쓴 편지에 루쉰은 서서히 스며드는 깨끗한 물과 같은 답장을 준다.

중국사회의 부조리와 일본인의 만행을 목격하고 의대생에서 작가로 변신한 루쉰이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을 연소시키는 행위가 때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면 한낱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젊은 시절을 쉬광핑과 같은 생각으로 보냈기 때문에 저돌적인 희생의 무의미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득했을 것이다. 전반적인 사회의식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희생해도 대중은 그 개혁가의 살점만 발라먹고 버릴 것이라는 걸 루쉰은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쉬광핑은 루쉰의 정성어린 답장에 스승을 발견한 느낌이었을 것이고, 이들의 편지교환은 계속된다. 루쉰은 한 편지에서 요령없게 명분을 위해 돌격하다 죽은 자로를 비판하며 우직함이 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언뜻 보면 루쉰이야말로 자로형의 인물일 것 같은데 사실 루쉰이 주장한 것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에 가까웠다. 인습, 부패, 타락이란 큰 적에 맞서 깨끗한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은 교활함에 가까운 지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해하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고,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현재에 여유를 찾는 것 또한 중요했다.

물론 루쉰이라고 이러한 것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던 것은 아니다. 요령도 없고, 때로는 소심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그는 쉽게 상처받고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 이후에는 달라졌다. 처음에는 루쉰이 쉬광핑을 충고하고 이끌었지만 루쉰이 약해지고 동반자가 필요할 때는 쉬광핑이 옆에 있게 되었다. 처음의 고상하고 잘 다듬어진 편지는 그들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음에 따라 유머와 솔직함이 넘치는 편지로 변해갔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정을 쫓아나가다 보면 쉬광핑이 1925년 3월 11일 루쉰선생님께, 라고 써 보낸 편지 한 통은 기적의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서로의 사상을 깊게 이해하고 같은 사회개혁 의지를 지닌 동지이자 누구보다 서로에게 순결한 사랑을 바친 연인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이란 으레 복잡한 내면을 갖고 있어 상대에게 순수하게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와르처럼 평등해도 충실하지 못한 관계가 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루쉰과 쉬광핑의 사랑은 시골 처녀 총각만큼이나 순수했고 반세기를 함께 한 부부만큼이나 충실했다. 루쉰이 이처럼 솔직하게 자기의 내면까지 드러내는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루쉰과 쉬광핑의 편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 책에는 또 한 사람의 글이 있었다. 엮은이 리우푸친의 글이다. 루쉰에게 너무 반해있는 이 엮은이의 해설은 독자의 판단에 맡겨도 좋을 칭찬까지 너무 자주 대신해줘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때도 있지만 루쉰과 쉬광핑 사이의 미묘한 암시와 변화를 생생히 잡아내고, 루쉰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에게 자세한 해석을 해줘 많은 도움이 됐다. 연애편지로서, 사상의 장으로서의 편지의 가치를 모두 살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해준 것이다.

루쉰은 스스로도 말했다시피 어두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두움을 누군가에게 옮기고 싶지 않아할 정도로 사려깊었다. 자기가 희생할지언정 남, 특히 젊은이들이 희생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의 다른 글에도 이런 사려깊음과 따듯함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 그림자만으로도 기가 죽었던 루쉰이란 거인에 대한 거리낌이 없어졌달까. 결과적으로 '연애편지 모음'인 이 책은 루쉰에 대한 입문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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