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명의 이해자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아무리 파행적이고, 덜떨어진 짓을 해도 품에 받아줄 한 사람 말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돈키호테에게는 산초 판차가 있었고, 고흐에게는 동생 테오가 있었다. 이 책이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테오가 사고뭉치 형을 연민과 아량으로 받아준 것이 아니라 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테오는 형의 그림 뿐 아니라 편지도 높이 평가해서, 여동생 윌에게 형이 재밌는 편지를 좀 더 자주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고흐의 그림이 독창적인 것과 같이 그의 편지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해 종교에 심취했다 사랑에 빠졌다 결국 그림으로 그 수단을 찾아낸 고흐답게 그의 말은 항상 군더더기 없이 핵심에 근접해 있다. 테오는 이런 면 때문에 형의 편지를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아직 화가로 전업한 지 오래되지 않아 별 특색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테오에게 보낸 편지다. 그리고 우리는 고흐가 결국 그 야망을 이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기 그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고흐의 그림 변천사는 생각보다 변화무쌍하다. 대표작이라고 익히 알려진 것을 그리고 있는 중에도 그의 스타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간중간에도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 아마 그가 천수를 누렸다면 전혀 다른 화풍의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죽을 때까지 발전하는 극소수의 예술가 중 한명이었다.

스타일이나 화풍을 변화시키면서  고흐가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한 가지였다고 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색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고흐에 열광하는 것을 살짝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만, 고흐의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고흐를 좋아하는 화가로 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고흐는 사람들이 자기 그림을 어렵게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그렇게 반응했을 뿐이니.

게으르게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실패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한 이답게 고흐는 죽을 때까지 노력했다. 심지어 정신병원에 있을 때에 그릴 것이 없자 정신병원의 복도와 현관까지 그렸다. 그리고 그 시기를 전후해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걸작들을 남긴다. 광기를 예술가의 옵션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싫지만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시기의 그림들에서는 박력이라 할 정도의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사실이다. 몇년 전 컨디션이 시원찮을 때 이부자리에 누워 고흐의 '붓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엽서 크기의 그림이었지만 꽃이 슬글슬금 움직이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징그러울 정도의 에너지가 압박하는 느낌.

고흐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에너지를 그림에 쏟아 부었지만, 그 그림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검은 까마귀가 어두운 황금빛 밀밭을 나는 그림과 테오에게 부치지 않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권총자살한다. 그리고 형이 죽은 후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된 테오도 6개월 후 병사한다. 고흐는 생전에 별을 무척 좋아해서 별을 제대로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램을 여러 번 피력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이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밤'같은 그림들을 우리에게 남겨줬다. 그리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는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뿌리 - 상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소설을 하나 살까하고 고를 때 이 책 '뿌리'와 요즘 화제라는 일본소설을 비교하며 한참 망설였었다. 가벼우면서도 나름대로 제 몫의 문학적 가치를 한다는 젊은 일본 소설가의 책과,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흑인 남자의 얼굴이 찍혀진 알 수 없는 내용의 책. 내 눈길은 자꾸 일본소설 쪽으로 갔다.  나중에야 '뿌리'가 '앵무새죽이기' 만큼이나 대단했던 화제작이라는 걸 알았지만 살 때는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소 어두운 흑인 저항문학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었다. 하지만 흘깃 본 일본소설의 문체는 가벼움을 넘어 방정맞을 정도여서 결국 이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짧지 않은 분량인 이 책의 상당한 부분은 감비아 주푸레 마을의 소년인 쿤타 킨테의 성장과정으로 채워진다. 이슬람 아프리카인의 마을에서 자라나는 소년과 그의 가족, 친구, 마을 사람들. 아프리카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모든 토속적인 문화가 그렇듯 인상적이다. 건기와 우기가 명확히 나뉘고,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자연은 노동할 수 있다는 것을 신성한 가치로 만든다. 주푸레 마을의 소년은 8살이 되면 공부와 노동을 같이 시작하며, 노동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 그들은 노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자부심을 지니며, 가뭄과 굶주림의 계절을 거치면서 수확과 인생의 어려움을 알아가고, 성인식을 치뤄야 할 소년으로 성숙해간다.

그들의 자연이 척박하고, 그들의 전통이 엄격하기는 하지만 대하소설의 전통사회의 모습은 왜 하나같이 아름다운지! 그 모습이 외부의 침입으로 망가질 그들 삶의 마지막 한때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자부심 강한 소년으로 자라난 쿤타 킨테 또한 백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되면서 아름다웠던 그의 삶의 일막을 끝내게 된다. 그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에게 덤벼들다 죽임을 당한 개와, 그를 잃은 슬픔을 오래도록 간직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뒤에 남겨놓고 납치된 쿤타 킨테는 야만적인 상선에 짐짝처럼 실려 아메리카로 가 노예로 팔리게 된다. 쿤타 킨테로부터 이 책의 저자인 알렉스 헤일리에게로 이어지는 7대 흑인 노예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흑인 가족이라고는 했지만 이들 가족의 아버지 중에는 어머니를 강간해 아이를 낳게 한 백인 농장주도 있었다. 네 번이나 도망가다 발까지 잘린 쿤타 킨테 이후로 자손들은 점점 저항의식이 약해지는데다, 탐욕스런 백인 농장주의 존재는 그들 가족의 정체성에 커다란 위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쿤타 킨테의 딸인 키지가 혼혈아인 갈색 피부의 아이를 낳았을 때 키지는 아이의 피부색을 수치스러워하며 숨기려 한다. 하지만 키지는 결국 아이를 부정하는 대신 아버지 쿤타 킨테로부터 내려오는 아프리카 고향에 대한 기억을 혼혈인 아이에게 전해줌으로써 그들 흑인 가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

'뿌리 뽑힘'은 모든 약자들의 비극이다. 먼 옛날의 전쟁노예나 노비들, 근대의 납치된 흑인노예들, 식민지 이주민들, 도시로 상경한 일용노동자들은 모두 '뿌리 뽑힘'을 낙인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선조로부터,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떨어져 정체성을 상실한 채 부평초가 된다. 쿤타 킨테 가족의 특이한 점은 여러 백인주인들 밑에 납작 엎드려 살았지만  선조의 기억을 후세에 전함으로서 한 아프리카 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화려한 족보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기억에 불과했지만 이름마저 백인 주인이 변할 때마다 갈아야 했던 그들에게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을 것이다. 실제로 쿤타 킨테의 7대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집안에 전해내려온 이야기와 몇 가지 아프리카 단어로 고향을 추적하는 마지막 장의 감동은 압권이다. 어느 흑인 노예 가족이 지켜온 기억의 파편과, 쿤타 킨테가 실종된 후로도 계속 구전으로 전해진 주푸레 마을의 역사가 합쳐지는 순간이라니. 이 책은 알렉스 헤일리의 바램대로 승자의 시각으로 치우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한 몫을 했다. '뿌리'는 드라마틱한 역사이자, 사실적인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가의 우연한 시선 -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최영미 지음 / 돌베개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시각적인 자극에 약한 편이다. 매일 입는 것이니 입는 옷의 색깔에는 신경쓰는 편이나 패션 자체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파리나 뉴욕의 무슨무슨 패션쇼에 나온 옷들을 보고 "예술이군!" 하는 것보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림도 마찬가지여서 회화를 보고 순수한 감동을 느낀 경험은,  안타깝지만 거의 없다. 예컨데 나는 이집트 파라오의 초상을 보고 '진정한 고통을 아는 투명한 권력' 같은 감상을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라는 장르에 끈질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갤리러 페이크' 같은 것을 보면 미술의 세계에 동참해서 나도 함께 그 정열을 느끼고픈 바램이 굴뚝같이 치솟지만 막상 회화를 보면 까막눈의 심정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전문미술해설서보다 이 같은 아마추어의 냄새를 풍기는 안내서가 훨씬 좋았다. 미술사학인가 하는 것을 전공한 최영미를 아마추어라고 하긴 어렵지만 이 책은 긍적적인 의미에서와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시에 아마추어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한 시선'을 던지는 것은 화가보다는 오히려 감상자, 글쓴이를 포함한 독자에 가깝다. 화가라면 모든 기를 다 모아서 소재를 찾고 구도를 정하고 그림을 그리겠지만 감상자에게 그림은 우연히 눈을 강타하는 조우이다. 어떤 그림에 꽂혔다는 것, 그것은 감상자의 취향과, 경험과, 삶의 느낌과, 교양이 어우러진 만남이기 때문이다. 최영미는 거기에 충실하게 그림을 봤고, 해설했고, 독자인 나는 그녀의 소개를 받으며 나의 취향과, 경험과, 삶의 느낌과, 교양에 촉수를 뻗어 내 나름의 미술 감상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책은 글쓴이의 주관성 때문에 비판을 받기 쉽다. 예를 들어 서경식의 '서양미술순례'같은 것.  하지만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전문적인 감상은 할 능력도 안 되거니와 별 관심도 없다. 어떤 예술품이 어떤 사람의 삶과 파장을 일으켜서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 그 느낌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예술품 못지 않게 흥미롭고,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어떤 화가가 그린 '누이의 초상'을 보고 사상범인 형들로 인해 평지풍파가 된 집에서 어렵게 살아온 누이를 떠올릴 때 평범한 소녀의 초상화는 일본의 소녀와 오버랩되면서 생명을 얻는다.

회화 자체보다 그런 것에 더 감동을 받다니, 역시 난 시각적인 데에 약한 것이 사실인가 보다. 아, 이제 '화가의 우연한 시선'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의 문외한도 매혹될 수 있는 그림 이야기. 언젠가는 그림을 보면서 나의 삶에 오버랩해볼 수 있는 날이 올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워낙 합리적인 것을 상식으로 삼는 시대라 상징이나 은유, 숨겨져 있는 의미같은 것을 너무 좋아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싶상이다. 나부터도 점이나 타로카드를 충고나 장난 이상으로 듣고 매달리는 사람은 정상으로 보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더 재밌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신세계의 신선함을 주었으니까. '다빈치 코드'라는 몸떨리게 재미있는 이 책은, 첫장면부터 '상징'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첫장면은 고전적이다. 폐관 후 박물관이라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서 괴한에게 ?기는 남자. 반항을 해보지만 소용없다. 그는 곧 살해당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좀 특이하다. 소니에르라는 루브르 박물관장이 살해당하면서 남긴 것은 살인자에 대한 단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이가 소원했던 손녀에게 전하지 못했던 메세지였다. 손녀 소피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인 다 빈치의 나체 인체도 자세를 취하고, 자신의 주위에 갖가지 교묘한 메세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죽어가는 피해자가 우선적으로 남기는 것은 살인자에 대한 단서라는 경찰과 사람들의 믿음을 완전히 벗어나면서, '다빈치 코드'는 현실에 항상 있었지만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미스테리한 세계로 들어간다. 소니에르가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려면 상식 너머에 있는 상징, 현실 너머에 있는 은유, 세상에 숨겨져 있는 비밀에 눈을 맞춰야 한다.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유는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완벽한 조합 때문이었을 것이다. 젠틀하고 날렵한 남자 주인공, 아름답고 영민한 여자주인공, 다소 음침한 종교단체의 숨겨진 음모, 이들과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또다른 숨겨진 악역들. 아니, 요즘 유행답게 선악이 모호한 악역들. 굉장히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보면 무척이나 즐겁다. 롤로코스터 광이라면, 롤로코스터를 매일 타도 즐겁지 않을까. 거기다 보너스가 있다.

식스센스 뺨치는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그 스토리는 예수탄생 전후라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가 풍부한 시대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성당 기사단, 성배의 향방, 교황과 기사들의 대결, 다 빈치의 회화 등등 유럽 역사의 흥미 만점인 소재들이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이 제시한 상징의 세계는 무척 매력적이어서 적어도 나에게는 킬링 타임용 책은 아니었다 .

내가 집에 있어도 건드리지 않았던 이 책을 꺼내 읽은 것은, 가톨릭계인 우리 학교의 교수신부님이 이 책을 엄청 씹었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 전에는 바티칸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을 금했다는 말도 들었고. 하지만 알고 보니 간접 PR까지 감수하고 구태여 금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마지막에는 오히려 가톨릭을 옹호까지 해주는 온건한 책인데 말이다. 예수의 존재조차 성경 기록의 앞뒤가 안 맞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에는 오히려 예수와 성모마리아, 성경의 존재가치를 반어적으로 강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가톨릭측에서 그렇게 힘빼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이 책에 나온 것이 다 진짜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바티칸과 가톨릭 역사는 숨겨야 할 게 무척 많은가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 개마고원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거세된 희망'은 약자란 이런 것이라는 걸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도 없고, 설사 알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영국사회의 3분의 1이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 주로 용역에 소속되어 있고, 임시직이며, 쉴 새 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볼 틈도 없다는 현실도 폴리 토인비라는 지식인쯤 되는 사람이 말해줘야 귀를 기울인다. 유명한 지식인이 노동현장에 잠입하여 노동을 하며 쓴 책 정도는 되야 사람들의 눈과 손이 가게 만들지, 평생 그렇게 살아온 노동자가 똑같은 책을 쓴다고 한들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이들은 과연 '거세된' 국민,  계층, 게토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을 게토에 묶어놓는 방법은 다양하다. 극빈층은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살며, 노동의 강도에 턱없이 못미치는 열악한 임금을 받고,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으며, 하는 일은 하찮은 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시민들과 부유한 시민들은 이들을 쓸모 없는 사회문제쯤으로 치부해버리고, 극빈층 스스로도 사회에서 최소한의 존재감마저 느끼기 힘들다. 거리에 즐비한 쇼핑몰과 커피숍, 서점, 영화관, 식당들은 그렇잖아도 빈약한 주머니사정을 더 절실히 느끼게 할 뿐이다. 열심히 일하더라도 이들에게 허용된 것은 좁고 누추한 집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저그런 식생활, 빈약한 교육뿐이다.

그렇지만 일반 시민과 부유층에게 이들의 수입을 늘려주는 건 곧 국가경제의 자살로 여겨진다. 최저생계비를 올린다면 곧 연쇄적인 파급효과가 일어나 너도나도 '많은' 수입을 원할 것이고, 인플레가 일어나며, 경제는 마비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는 묻는다. 왜 사회는 간부들의 연봉이 치솟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도 경계도 없으면서 유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왜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는 것은 당연히 여기면서 극빈층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는 것은 공공의 부담으로 여기는가?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노동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들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병원 운반원, 학교 식당의 '밥하는 아줌마', 간병인, 청소, 접시닦이 같은 것들은, 이들이 일하지 않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인데도 유독 중요성이 무시된다. 그들은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저임금뿐이다.

지식인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머리로 지지하는 것과 근육으로 지지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성으로는 결코 상대방의 입장에 서볼 수 없다. 잠시나마 극빈층과 일용직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 저자는 묻는다. 만약 어떤 아이가 하루 종일 물건과 환자를 이쪽저쪽으로 옮기며 뛰어다니는 병원 운반원이 왜 다른 '일반적인' 직업들보다 임금도 낮고 존중도 받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대답도, 정말 아무 대답도 못해줄 것이라고.

사회가 극빈층을 극빈층으로 살게 버려두는 것은, 국가 경제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계층적, 개인적 이기심때문은 아닐까. 국가 경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최저생계비를 늘림으로써 경기불황이 왔다는 상관관계도 증명된 적이 없고, 오히려 실업률이 줄고 노동효율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공기업이 민영으로 넘어가고, 용역이 산업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면서 개별 기업의 간부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의 임금을 깎는 것이 곧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드는 길이 되었다. 여기에 시민들의 막연한 불안감과 이기심이 가세하면서 극빈층은 윤택한 생활을 위한 아무런 사다리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정 기간의 체험을 끝내고 원래의 중산층 생활로 돌아왔을 때 형용하기 어려운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유층이나 일반 시민이나 극빈층,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극빈층은 자신들의 처지에 절망한다. 아무도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하지만, 극빈층이 희망 없는 삶에 지쳐있을 때 손을 내밀지도 않는다. 다만 달콤한 동정심을 보낼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