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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상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소설을 하나 살까하고 고를 때 이 책 '뿌리'와 요즘 화제라는 일본소설을 비교하며 한참 망설였었다. 가벼우면서도 나름대로 제 몫의 문학적 가치를 한다는 젊은 일본 소설가의 책과,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흑인 남자의 얼굴이 찍혀진 알 수 없는 내용의 책. 내 눈길은 자꾸 일본소설 쪽으로 갔다. 나중에야 '뿌리'가 '앵무새죽이기' 만큼이나 대단했던 화제작이라는 걸 알았지만 살 때는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소 어두운 흑인 저항문학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었다. 하지만 흘깃 본 일본소설의 문체는 가벼움을 넘어 방정맞을 정도여서 결국 이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짧지 않은 분량인 이 책의 상당한 부분은 감비아 주푸레 마을의 소년인 쿤타 킨테의 성장과정으로 채워진다. 이슬람 아프리카인의 마을에서 자라나는 소년과 그의 가족, 친구, 마을 사람들. 아프리카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모든 토속적인 문화가 그렇듯 인상적이다. 건기와 우기가 명확히 나뉘고,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자연은 노동할 수 있다는 것을 신성한 가치로 만든다. 주푸레 마을의 소년은 8살이 되면 공부와 노동을 같이 시작하며, 노동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 그들은 노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자부심을 지니며, 가뭄과 굶주림의 계절을 거치면서 수확과 인생의 어려움을 알아가고, 성인식을 치뤄야 할 소년으로 성숙해간다.
그들의 자연이 척박하고, 그들의 전통이 엄격하기는 하지만 대하소설의 전통사회의 모습은 왜 하나같이 아름다운지! 그 모습이 외부의 침입으로 망가질 그들 삶의 마지막 한때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자부심 강한 소년으로 자라난 쿤타 킨테 또한 백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되면서 아름다웠던 그의 삶의 일막을 끝내게 된다. 그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에게 덤벼들다 죽임을 당한 개와, 그를 잃은 슬픔을 오래도록 간직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뒤에 남겨놓고 납치된 쿤타 킨테는 야만적인 상선에 짐짝처럼 실려 아메리카로 가 노예로 팔리게 된다. 쿤타 킨테로부터 이 책의 저자인 알렉스 헤일리에게로 이어지는 7대 흑인 노예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흑인 가족이라고는 했지만 이들 가족의 아버지 중에는 어머니를 강간해 아이를 낳게 한 백인 농장주도 있었다. 네 번이나 도망가다 발까지 잘린 쿤타 킨테 이후로 자손들은 점점 저항의식이 약해지는데다, 탐욕스런 백인 농장주의 존재는 그들 가족의 정체성에 커다란 위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쿤타 킨테의 딸인 키지가 혼혈아인 갈색 피부의 아이를 낳았을 때 키지는 아이의 피부색을 수치스러워하며 숨기려 한다. 하지만 키지는 결국 아이를 부정하는 대신 아버지 쿤타 킨테로부터 내려오는 아프리카 고향에 대한 기억을 혼혈인 아이에게 전해줌으로써 그들 흑인 가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
'뿌리 뽑힘'은 모든 약자들의 비극이다. 먼 옛날의 전쟁노예나 노비들, 근대의 납치된 흑인노예들, 식민지 이주민들, 도시로 상경한 일용노동자들은 모두 '뿌리 뽑힘'을 낙인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선조로부터,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떨어져 정체성을 상실한 채 부평초가 된다. 쿤타 킨테 가족의 특이한 점은 여러 백인주인들 밑에 납작 엎드려 살았지만 선조의 기억을 후세에 전함으로서 한 아프리카 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화려한 족보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기억에 불과했지만 이름마저 백인 주인이 변할 때마다 갈아야 했던 그들에게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을 것이다. 실제로 쿤타 킨테의 7대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집안에 전해내려온 이야기와 몇 가지 아프리카 단어로 고향을 추적하는 마지막 장의 감동은 압권이다. 어느 흑인 노예 가족이 지켜온 기억의 파편과, 쿤타 킨테가 실종된 후로도 계속 구전으로 전해진 주푸레 마을의 역사가 합쳐지는 순간이라니. 이 책은 알렉스 헤일리의 바램대로 승자의 시각으로 치우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한 몫을 했다. '뿌리'는 드라마틱한 역사이자, 사실적인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