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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 개마고원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거세된 희망'은 약자란 이런 것이라는 걸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도 없고, 설사 알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영국사회의 3분의 1이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 주로 용역에 소속되어 있고, 임시직이며, 쉴 새 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볼 틈도 없다는 현실도 폴리 토인비라는 지식인쯤 되는 사람이 말해줘야 귀를 기울인다. 유명한 지식인이 노동현장에 잠입하여 노동을 하며 쓴 책 정도는 되야 사람들의 눈과 손이 가게 만들지, 평생 그렇게 살아온 노동자가 똑같은 책을 쓴다고 한들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이들은 과연 '거세된' 국민, 계층, 게토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을 게토에 묶어놓는 방법은 다양하다. 극빈층은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살며, 노동의 강도에 턱없이 못미치는 열악한 임금을 받고,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으며, 하는 일은 하찮은 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시민들과 부유한 시민들은 이들을 쓸모 없는 사회문제쯤으로 치부해버리고, 극빈층 스스로도 사회에서 최소한의 존재감마저 느끼기 힘들다. 거리에 즐비한 쇼핑몰과 커피숍, 서점, 영화관, 식당들은 그렇잖아도 빈약한 주머니사정을 더 절실히 느끼게 할 뿐이다. 열심히 일하더라도 이들에게 허용된 것은 좁고 누추한 집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저그런 식생활, 빈약한 교육뿐이다.
그렇지만 일반 시민과 부유층에게 이들의 수입을 늘려주는 건 곧 국가경제의 자살로 여겨진다. 최저생계비를 올린다면 곧 연쇄적인 파급효과가 일어나 너도나도 '많은' 수입을 원할 것이고, 인플레가 일어나며, 경제는 마비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는 묻는다. 왜 사회는 간부들의 연봉이 치솟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도 경계도 없으면서 유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왜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는 것은 당연히 여기면서 극빈층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는 것은 공공의 부담으로 여기는가?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노동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들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병원 운반원, 학교 식당의 '밥하는 아줌마', 간병인, 청소, 접시닦이 같은 것들은, 이들이 일하지 않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인데도 유독 중요성이 무시된다. 그들은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저임금뿐이다.
지식인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머리로 지지하는 것과 근육으로 지지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성으로는 결코 상대방의 입장에 서볼 수 없다. 잠시나마 극빈층과 일용직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 저자는 묻는다. 만약 어떤 아이가 하루 종일 물건과 환자를 이쪽저쪽으로 옮기며 뛰어다니는 병원 운반원이 왜 다른 '일반적인' 직업들보다 임금도 낮고 존중도 받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대답도, 정말 아무 대답도 못해줄 것이라고.
사회가 극빈층을 극빈층으로 살게 버려두는 것은, 국가 경제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계층적, 개인적 이기심때문은 아닐까. 국가 경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최저생계비를 늘림으로써 경기불황이 왔다는 상관관계도 증명된 적이 없고, 오히려 실업률이 줄고 노동효율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공기업이 민영으로 넘어가고, 용역이 산업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면서 개별 기업의 간부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의 임금을 깎는 것이 곧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드는 길이 되었다. 여기에 시민들의 막연한 불안감과 이기심이 가세하면서 극빈층은 윤택한 생활을 위한 아무런 사다리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정 기간의 체험을 끝내고 원래의 중산층 생활로 돌아왔을 때 형용하기 어려운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유층이나 일반 시민이나 극빈층,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극빈층은 자신들의 처지에 절망한다. 아무도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하지만, 극빈층이 희망 없는 삶에 지쳐있을 때 손을 내밀지도 않는다. 다만 달콤한 동정심을 보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