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기쁨 - 세상을 구할 과학자의 8가지 생각법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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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이 과학에도 적용된다(14 페이지)고 주장하는 짐 알칼릴리의 책 ‘과학의 기쁨’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을 정교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양자물리학자이자 BBC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자신의 이전 책인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비전문가를 위해 쓴 책으로 설명한다. 책은 모두 8부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꼭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고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15 페이지)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더욱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들어가며‘에서도 과학에 대한 정의가 등장한다. 예컨대 과학은 생각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27 페이지) 저자는 과학적 방법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와 구분해주는 몇 가지 특성에 대해 논한다. 1) 반증가능성, 2) 반복성, 3) 불확실성의 중요성, 4) 실수를 인정하는 것의 가치 등이 그것들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또 다른 특성은 자기수정적(self  - correcting)이라는 점이다.(34 페이지) 종합하면 과학의 작동 방식은 자기수정적이고, 이미 사실로 확인된 확고한 토대 위에서 구축되고, 정밀조사와 반증 과정을 거치고, 재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39 페이지) 


’들어가며‘에서 우리는 중성미자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2011년 한 실험에서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우주의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르지 못하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어긋나는 예이다. 그런데 중성미자 실험을 수행했던 연구진이 광학케이블 하나가 시간 측정 장치에 부적절하게 부착된 결과임을 알아내고 그 부분을 고쳤더니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32 페이지) 저자는 현실세계의 과학이 전적으로 가치중립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건강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42 페이지) 


1부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에서 저자는 탈진실 시대에 대해 말한다. 앞 부분에서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와 관련지어 말할 수 있는 바가 저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는 저자의 이런 말에서 연유한다. 즉 많은 사람이 과학의 성공에 눈이 멀어 과학이라는 포장지만 쓰고 나오면 그 출처나 위조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기사나 광고를 다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출처도 따져야 하고 충분한 생각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중하게 증거를 기반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은 정치와 달리 이데올로기나 신념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46 페이지)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관찰하고 실험하고 추론하려는 의지의 결합체(47 페이지)이다. 저자도 말했지만 지금은 탈진실 시대다.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동기를 둔 노골적인 거짓 주장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지식을 압도하는 세상을 말한다. 부정(否定)의 몇 가지 유형이 눈에 띈다. 1)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말 그대로의 부정(literal denial), 2) 사실 자체는 받아들이지만 개인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정치적 신념, 종교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하는 해석적 부정(interpretive denial), 3) 기후 변화를 막는 행동에 나서려면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기에 기후 변화 주장을 부정하는 것 같은 함축적 부정(implications denial) 등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 진술이 신념, 감정, 행동,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결정, 우리가 접하고 논란을 벌이는 온갖 주제와 복잡하게 얽히면 단순한 흑백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진술이 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진술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61, 62 페이지)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우리의 지각도 주관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면 결국 사회 전체가 동의하기로 결정하면 무엇이든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기로 결정하는가와 상관없이 참인 우주에 관한 사실은 존재한다.(65 페이지) 과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각각의 주제를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각도를 달리하면서 보기도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69 페이지) 


2부 오컴의 면도날이 무뎌질 때에서 우리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반드시 올바른 설명은 아니며 올바른 설명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설명이 아닌 경우도 많다(76, 77 페이지)는 저자의 설명을 접하게 된다. 단순성은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너무 단순해져도 안 된다. 연구실 실험과 세상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는 인위적이고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특별하게 통제된 조건 아래에서 실험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실제 세상은 어지럽게 뒤엉켜 있고 너무 복잡해서 단순화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80 페이지) 


과학자들은 오컴의 면도날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설명이 복잡한 설명보다 올바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저자는 조금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만큼 보상을 받게 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풍부해지면서 인생관도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말한다.(86 페이지) 


3부 미스터리는 인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에서 저자는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보다 항상 낫다고 말한다.(95 페이지) 4부 이해가 안 된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에서 저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그것을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한다.(105 페이지) 5부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에서 저자는 건강한 증거는 객관적이고, 편향이 없고,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믿음과 일상의 믿음은 의미가 다르다. 과학적 믿음은 이데올로기, 희망사항, 맹목적 믿음을 기반으로 삼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129 페이지) 


다른 전문가가 그렇듯 과학자도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여러 해를 투자해서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130, 131 페이지) 새로운 아이디어나 타인의 관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합리성을 잃을 정도로 그래서는 안 된다.(132 페이지) 6부 타인의 관점을 평가하기 전에 해야 할 일에서 저자는 자연과학은 확증편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자체가 확증편향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수와 범죄 건수 사이에는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둘은 인과관계는 아니다. 둘 다 인구라는 매개변수와 관련되어 있다. 인구가 많아서 교회도 많고 범죄 건수도 많은 것이다. 7부 생각 바꾸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에서 저자는 과학에서는 의심과 불확실성도 중요하지만 확실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없다면 결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다.(159 페이지) 진보는 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수준을 점차 줄여나가는 신중하고 정당한 단계를 거쳐 결론을 확립함으로써 이루어진다.(160 페이지) 


하지만 불확실성은 모든 이론, 관찰, 측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무지가 아니라 확실성의 결여를 뜻한다. 불확실성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161 페이지) 과학에서는 항상 새로운 증거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일관성은 상상력이 없는 자들을 위한 마지막 도피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한다. 일관성과 확실성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8부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에서 저자는 이 세상은 모든 가능한 결과가 다중우주 안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현실은 아원자입자의 세계와 다른 바 우리에게는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우리 모두는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현실세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을 더욱 잘 이해하고 견뎌내는 방법이며 인생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180 페이지) 마무리하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과학을 응용햐는 것 역시 과학이라는 말이다.(183 페이지) 과학은 지식의 창조이고 기술은 그런 지식의 응용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새 정의인 셈이다.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 과학 지식이 인류에게 악행(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의 잠재력을 부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지식 자체가 사악하다거나 그 지식을 몰라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184 페이지) 과학이 없었다면 나날이 늘어나는 전 세계 인구를 먹여살릴 수도 없고, 더 행복하게 장수할 수도 없고, 집 안에 조명과 난방을 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서로 소통하고 세계 여행을 하고 우주로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감각을 넘어,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무지와 약점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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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 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금요일엔 역사책 10
이명제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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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이왕은 그의 아버지 인조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더욱 비운의 주인공으로 여겨온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를 불행에 빠뜨린 운명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소현세자는 8년의 청나라 인질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명제의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는 소현세자에 대한 세간의 평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현세자는 미약한 존재다. 저자에 의하면 백년 전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실패를 설명할 존재로서, 백년 후 대한민국 국민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현세자를 주목했다. 세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소현세자가 세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능양군의 반정 덕이었다.


반정 세력의 명분 중 하나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이 후금에 대한 공격을 제안한 시기에 조선의 신료들이 명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한 것은 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후금이 명을 등 뒤에 두고 조선을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명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위기시 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 결과 요동 지역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밀지설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누르하치와 몰래 연락을 취하도록 했으며 강홍립의 투항도 사전에 조율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광해군은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비밀리에 교섭을 하려고 했다.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1621년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잃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는 1623년이다.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인조 정권이 반정을 온전히 완수하려면 광해군이 폐위 및 인조의 집권에 대한 명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후금 친정(親征) 의지를 강하게 표했다. 무리한 듯 보였지만 이는 친정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명에 보여주어 책봉에 유리한 포석을 깔아두겠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책봉이 이루어진 이후 후금에 대한 선제 타격 논의가 전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점을 방증한다. 반정 당시 대장 김류가 시간이 되어도 집결지에 나타나지 않아 반정군이 동요하자 임시 대장을 맡아 반정을 성공시킨 이괄은 2등 공신으로 결정된 데 이어 사지나 다름 없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난을 일으켰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광해군 - 인조 - 흥안군 - 인조로 집권자가 바뀔 때마다 피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흥안군은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선조의 열 번 째 아들이다. 1626년 명과 후금의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패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을 수는 있으나 명과의 사대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명의 존재로 인한 갈등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후금은 결정적 순간이 되면 조선이 명예 편에 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귀순 사건 이후 후금 내부에서는 명, 몽골과 함께 조선을 적국으로 규정했다. 차하르를 정복하고 전국 옥새를 손에 쥔 홍타이지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후금의 성장 과정에서 복속된 수많은 이방인에게 소속감을 제공했다.


뒤이어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와 몽골, 그리고 항복한 한인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국에서 대청국으로 바꾸었다. 완벽한 진전을 단행한 것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해 삼궤구고두례를 하지 않아 두드려 맞은 뒤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고 귀국하다가 내용을 확인하고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한 나덕헌과 이확은 참람하게 황제를 자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저자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는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은 명을 버리고 청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기에 정묘호란에서 도달했던 합의점을 청이 스스로 깨버린 것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선택이 유연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동이 청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선일 뿐이다. 당대 조선인들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여전히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최선의 선택은 명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은 왜 청의 막강한 군사력을 감안하지 못했을까? 당대의 결정은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려야 하기에 이해되어야 하는가?란 말을 하고 싶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은 300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조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타이지가 도착하기 전에 강화를 맺는 것은 월권이었기에 선봉대는 세자를 인질로 삼아 본대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고자 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건은 무마되었지만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문제는 강화의 조건이었다. 청에서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칭신의 태도를 분명히 할 것, 척화신을 압송할 것, 그리고 조선 국왕 인조를 출성시킬 것 등이었다.


칭신은 조선이 청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명과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청은 황제가 직접 출정한 전쟁인 만큼 조선 국왕이 출성해야 한다며 출성할 수 없다는 조선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세자의 출성 의사에 대해서도 청은 단호히 반대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조는 출성을 결심하고 삼전도로 나가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인조의 맏아들 즉 소현세자와 다른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시했다. 또한 인조가 사망한다면 인질로 보내진 아들 중에서 임금을 세울 것이라 선언했다. 홍타이지의 조치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것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현세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3공 6경 대신들과 자제 혹은 동생이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끌려왔다.


게다가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관원 및 각종 명목의 관료들이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딸린 종인들까지 있었다. 이렇다 보니 처음 심양에 도착했을 때 세자 일행은 500여 명에 달했다. 소현세자 일행은 단순히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세자가 생활했던 심양관은 각종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예컨대 조선의 행정기관은 6조 중 이조와 형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4조를 모방하여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이 설치되었다. 일종의 작은 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세자는 인질 생활임에도 공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고달픈 인생이었다. 세자는 매달 5일, 25일에 열리는 청나라의 조참에 참여해야 했다. 조참은 신하들이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는 동시에 황제가 신하들에게 주요 사안을 공지하는 모임으로 조선이 청이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현세자 역시 참석의 의무가 있었다,


이 밖에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 황실의 혼인이나 제사와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세자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 중에는 사냥도 있었다. 사냥은 청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청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팔기(八旗)가 사냥의 단위였던 니루를 근간으로 하기도 하거니와 전투기술을 습득하고 만주 고유의 기풍을 유지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사냥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피하는 수단이었기에 황제는 지속적으로 대규모의 사냥을 기획하여 만주인의 정체성을 상기시켰다. 황제 홍타이지는 곧잘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왕족에게도 사냥 동참을 명했다.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궁궐 바깥을 나갈 일이 없던 소현세자에게 사냥 참여는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말 타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자는 사냥 중 후미로 뒤쳐지거나 낙마로 부상을 입는 일이 많았다. 이십여 일 이상의 노숙을 동반하는 사냥일 경우 고된 일정으로 병을 얻기도 했다. 사냥도 고됐지만 인질로서의 의무 중 소현세자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전쟁이었던 듯하다.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쟁에 몇 차례 소현세자를 동참시켰다.


이 역시 사냥과 마찬가지로 청의 군세를 과시하여 명의 승리를 믿는 조선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조선의 세자가 청의 편에 서서 명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선전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명의 장수들이 항복할 때마다 소현세자를 대동하고는 심정을 캐묻기도 했다. 세자가 참전했다고 해서 직접 창이나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전쟁터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자가 위치한 청 진영이 항상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항시 존재했을 것이다. 1644년 소현세자는 청이 북경을 점령하는 전쟁에도 동참했다. 자신의 눈으로 명이 멸망하는 현상을 바라봐야만 했으니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1644년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된 이후 북경에서 두 달여를 생활했다.


소현세자가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고 알려진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수행해야 할 의무사항 가운데 징병문제를 포함시켰다. 명과 청이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청에 군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존속이 달린 상황이라 일단 수락했지만 실제로 징병요구가 이루어지자 조선은 난처했다.


공격 대상이 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거나 전투에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등 소극적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청에서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식의 발언들을 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인조와 신하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부자 관계가 정치적 경쟁 관계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세자의 귀국 문제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홍타이지가 죽고 즉위한 여섯 살의 순치제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도로곤은 인질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선 내에 친 도르곤 세력을 조성하려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불충을 의심하던 청에서 인조의 입조(立朝)를 요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자 대책이 논의되었다. 신하들은 고려 충혜왕의 사례가 재연될 것을 우려했다. 충혜왕은 상국인 원나라에 압송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한 고려의 국왕이다. 원 황제에 의해 고려 국왕이 교체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인조는 섬뜩함을 느꼈다. 청에서 정말 조선의 왕위 교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더라도 이는 소현세자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조 입장에서는 소현세자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해 부왕인 인조와 눈물의 재회를 한 후 부왕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큰 실망감에 소현세자는 서연 참석을 점점 게을리했다. 소현세자는 2차 귀국 후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양에서 유생들과 무인들을 모아놓고 과거를 실시했다. 이는 월권이었다.


명은 청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리장성 바깥에서의 상황이었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만리장성은 돌파할 수 없었고 청의 중국 정복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수비하던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열어 청을 이끄는 도르곤에게 항복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과 오삼계의 병력은 이자성의 군사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5월 2일 북경까지 점령했다. 소현세자는 이 모든 역사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도르곤이 전쟁에 소현세자의 동참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그토록 의지했던 명이 붕괴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도르곤은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변수가 제거되자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은 식량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 중 하나였다. 조선 왕족의 일원이었던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 1634년 명,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 책봉을 공인받으면서 훗날 조선의 왕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끝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외받던 소현세자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정교봉포’라는 자료를 입수해 소개했다.‘정교봉포‘ 는 19세 후반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부 황백록이 중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한 서적이다. 이 책에 소현세자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교유가 기록되어 있다.


’정교봉포‘보다 더 신뢰할 만한 자료는 아담 샬이 쓴 ’중국전례보고서‘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1964년 김용덕의 '소현세자연구'라는 책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음을 상기 시키며 소연 세자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파편적이고 편향적으로 작성된 사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현세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소현세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글들이 현재 소현세자 서사의 증거로 쓰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인조 실록에서 소현세자를 비판하느라 안달이 난 이유를 봉림대군에서 찾는다. 소현세자 사후 세자의 자리는 원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실제로 봉림대군이 지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에도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훗날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봉림대군(효종)은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현세자와 그의 아들이 세자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했다. 저자는 심양에서의 경험이 소현세자의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논리라면 함께 심양에서 생활했던 조선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변화가 발생해야 하지만 소현세자 외의 인물에게 그런 변화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은 심양관을 단순히 인질들을 구류시키는 장소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대사관으로 여겼다. 청은 조선의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가 외교관의 역할을 해주기로 기대했다. 조선의 경우 모든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다. 국왕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종친들의 정치 참여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종친이란 국왕의 4대손까지로 이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청의 경우 황족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기는커녕 오히려 권장되었다. 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팔기이다. 청의 황족들은 여덟 개 구사(조직)에 대한 지분을 토대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에게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기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조선과 청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외교관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고초를 겪더라도 절개를 지키며 청의 요구에 맞서는 모습을 연출하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157 페이지) 저자는 소현세자가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는 청의 요구에 대해 매번 세자의 직무는 문안을 여쭙고 수라를 돌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회피한 것을 언급하며 소현세자가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선보일 환경이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양 생활 초기에 식사가 현물로 제공되었으나 상주 인원이 많아 부담을 느낀 청이 돈을 주고 알아서 찬거리를 마련하라고 했다. 문제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게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이 방침은 밭을 떼어줄 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홍타이지는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고 통보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명나라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아 관왕 묘에 사실상 유폐되어 있는 장춘과 위험을 무릅쓰고 마주했음을 지적한다. 소현세자의 행보는 숭명반청의 태도다.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은 본래 명 황제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중국 선교가 중요했지 명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역관들이 흠천감과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천문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는 1648년 이후의 일로 아담 샬은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넣었다. 소현세자는 심각하게 병약했다. 항상 조선을 의심하던 청도 세자의 병약함은 인정했다. 소현세자는 1643년 12월부터 1644년 3월까지 심양에서 한양까지 왕복했고, 심양 도착 2주만에 명과의 전쟁에 동참했다.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갔다가 9월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고 11월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전근대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환한 데다가 산해관을 통과한 이후 북경까지 가는 과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중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군사작전이었다. 소연 세자가 병을 앓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온전한 건강 상태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소현세자는 상당히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귀국했다. 도착한 이유 회복기를 거쳤다 하더라도 재발과 병세 악화로 인한 사망이 그리 어색한 그림이 아니다.


세 명의 의관이 실시간으로 치료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다면 나머지 두 명의 의관이 분명 눈치를 채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세자가 사망할 경우 자신들도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치료 덕분에 3월 14일 이후로는 탕약을 복용하거나 침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소현세자의 증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제1형 당뇨병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소현세자의 당뇨증세는 1640년 하반기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는데 악화의 요인으로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시기는 바로 소현세자가 1차 귀국 이후 일탈을 시작한 시점이다. 저자는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지만 그것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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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체(陵替)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여 윗사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진산군(晉山君) 하륜(河崙)이 종묘(宗廟)가 오히려 오실(五室)에 불과하니 고려 태조 이하는 당연히 오주(五主)만 두어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하자 세종이 경들은 물러가 예전(禮典)을 참작하여 아뢰고 능체(陵替)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능체라는 말은 드물게 쓰였고 능멸이란 말이 많이 쓰였다. 능멸은 凌蔑, 陵蔑이다


전자의 능은 능소화(凌霄花)의 능이다. 능소화의 별칭은 능초(陵苕). ()는 완두 초, 능소화 초이다. 凌苕라고도 하는 듯 하다. 능소화를 자위(紫葳)라고도 한다. ()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인(武人) 박위(朴葳)란 사람의 위다. 위는 둥굴레 위다. 단어들이 이렇듯 미끄럼을 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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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서울사 : 고려편 쉽게 읽는 서울사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 서울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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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2년에 거란이 침략하자 서희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에 반대했다. 그리고 직접 소손녕을 찾아갔다. 거란 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소손녕과 마주 서서 읍한 후에 동편과 서편으로 마주 대하고 앉아서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화의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활약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목종 원년에 57세로 죽었고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고려는 개경 이외에도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지금의 서울)이 더 있었다. 물론 이 세 개의 경은 수도인 개경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도 아니고 항상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경은 삼경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시되었다. 동경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말한다. 태조 18년 경순왕 김부(金傅)가 투항해 오자 나라를 없애고 경주로 개칭했다가 940년에 대도독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성종 6년에 경주를 동경으로 고침에 따라 동경이 설치되었다. 숙종이, 문종이 설치했다가 폐지한 남경을 다시 설치하고 경영한 것도 풍수도참사상을 이용한 왕권 강화정책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대받던 서경은 인종 13년 승려 묘청 등이 천도 운동을 벌이다가 원수 김부식 등이 이끄는 군대에 토벌당한 이후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삼경은 왕 개인 또는 고려라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여러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는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다 오는 순주(巡住) 정도의 역할을 했지만 고려 말에는 천도 대상지로도 자주 거론되었고 실제로 남경으로의 천도가 단행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종의 아들인 숙종 때 부활한 남경은 동쪽으로 대봉, 남쪽으로 산리, 서쪽으로 기봉, 북쪽으로 면악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남쪽 끝인 사리는 한강의 사평나루가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한남대교 부근이고 면악은 북악산이니 남산을 남쪽 끝으로 하는 조선의 한양도성보다 컸다. 정도전은 북 원사신의 영접을 반대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삼각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봉재에서 학문을 가르치니 배우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 한양이라는 명칭은 통일신라 때 처음 서울의 공식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남경은 고려시대에 불렸던 서울의 옛 명칭으로 1308년 한양부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서울의 공식 명칭이었다. 


양주의 중심지는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중구 일대가 아니라 현재의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다. 조선시대의 양주는 한성부와는 다른 고을이었다. 지금도 양주는 경기도에 속해 있으며 서울과는 별개의 지역이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 전기까지 광진은 서울 지역에서 한강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으며 한반도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백제는 광진 남쪽 풍납토성에 초기 도읍을 건설했고 고구려와 신라는 광진 옆 아차산에 산성과 보루 등의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광진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면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역과 연결되었다. 광진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현재 의정부시와 양주를 거쳐서 북쪽 방면으로 개성, 평양 등과 이어졌으며 동북쪽 방면으로는 함경도 방면과 연결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수도 개경과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할 때 광진의 중요성은 여전히 높았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임진강을 건너 파주시 적성면 지역으로 이어진다. 적성 지역의 임진강 나루(파주 적성과 연천 장남을 연결하는 나루; 이재석 글)를 옛 기록에는 장단도 즉 장단 나루라고 칭했다. 일찍이 660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고구려 원정 부대가 이 길을 따라 평양까지 이르렀고 고려 전기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 갈 때에도 이 길을 거쳐 내려갔다. 근래 학계에서는 이 길을 장단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고려 중기 남경을 설치한 이후부터 장단 나룻길의 비중은 약해지고 대신 새로운 교통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임진강 하류와 임진 나루를 건너 현재의 파주와 고양 등을 거쳐 서울 중심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다. 오늘날 이 길을 임진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임진 나룻길을 택하면 한강을 건널 때에도 광진보다 그 하류인 사평도 즉 사평 나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 지역을 건너게 된다. 하천의 하류 지역이 상대적으로 횡단이 불편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활용도가 미진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임진 나룻길을 이용하는 여행객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했다. 임진 나룻길의 이용자 증가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사건 중 하나가 혜음사 설치다. 혜음사는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하며 파주와 고양의 경계에 해당하는 혜음령과 인접해 있다. 남경의 설치는 11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임진 나룻길의 이용을 증가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장단 나룻길 이용이 많았던 고려 전기에는 광진 인근에 양주의 중심지가 위치해 있었다. 당시 광진은 교통면에서나 지방 행정면에서 현재 서울 지역의 중심 입지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개경과 한반도 남방을 오갈 때에는 광진으로 직접 연결되는 장단 나룻길 이용을 선호했다. 


종로구 지역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 나룻길을 통해 개경과 왕래하는 것이 더욱 가깝고 편리했다. 남경의 설치는 기존의 간선 교통로였던 장단 나룻길의 비중을 떨어뜨리고 임진 나룻길을 국가적인 간선 교통로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에도 남경의 중심지에 새 도읍인 한성부가 건설되면서 임진 나룻길의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임진 나룻길은 제1의 국가도로인 의주대로 구간에 편성되어 한양에서 개성, 평양 등을 거쳐 의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핵심 교통로의 기능은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다. 


숙종은 조카(헌종)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도덕적 약점을 강력한 국가적 사업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 창설은 숙종이 추구했던 대표적인 국가 사업이었다. 숙종은 자신이야말로 37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를 번성시켰던 부왕 문종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 했다. 남경 건설 역시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숙종의 할아버지인 제8대 국왕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 신혈사라는 사찰에서 승려로 기거하며 암살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제7대 임금 목종의 어머니인 천주태후가 잠재적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조카 현종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국가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는 등 고려의 기틀을 다친 국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의 자손들은 현종이 어렵게 목숨을 부지했던 삼각산을 현종계 왕실의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삼각산을 행차하면서 현종계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숙종은 현종의 손자로 삼각산 아래에 남경을 설치하여 자신의 새로운 거점을 건설했다. 자신이 진정한 현종과 문종의 후계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집권 과정에서 드러났던 취약한 정당성을 만회하고자 했던 것이다. 숙종과 그 측근들은 경복궁 일대가 한반도의 손꼽히는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선전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하고 남경의 새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일대에 건설된 배경에는 그 같은 정치사의 흐름이 있었다. 숙종의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남경 건설은 삼국시대 이래 천여년간 한강변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던 서울의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남경의 중심지는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했으며 종로구, 중구 일대의 서울 중심 지역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핵심부로 기능하고 있다. 양천허씨세보와 미수 허목의‘기언‘에 의하면 허선문은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과 허왕옥의 후손으로 공암에서 농사에 힘써 많은 곡식을 비축했다. 허선문과 왕건의 인연은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를 공격했을 때 이루어졌다. 후백제를 공격하던 고려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병사와 말들이 매우 피곤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삼국사기에는 897년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한 궁예가 지금의 김포, 강화에 해당하는 검포와 혈구, 그리고 공암 지역을 공격해 격파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이때 공암 지역이 궁예의 세력권으로 들어갔기에 허선문 집안도 궁예에 협조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은 20년간 궁예의 장군 생활을 했다.) 이때 허선문이 곡식을 공급하였고 그 덕분에 기운을 차린 고려의 병사와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고 고려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선문이 왕건에게 항복한 시기는 태조 10년인 927년 9월 공산에서 고려군이 후백제에게 패한 이후로 추정된다. 12세기 숙종부터 의종까지 고려의 국왕들은 화려하게 남경에 행차하고 머물렀으나 무신정변 이후에는 국왕들의 행동반경이 개경 인근으로 제한되면서 남경 순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더욱더 국왕이 남경에 행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국왕이 직접 가는 대신 어의를 남경의 궁궐에 모시는 것으로 국왕의 순주를 대신했다. 원 간섭기에 충선왕은 고려 전기 이래의 경(京)들을 일괄적으로 부(府)로 개편했다. 이는 원(元)의 제도를 기본으로 삼아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려 한 결과다. 풍수에 따르면 사람과 땅은 동기(同氣) 즉 같은 기를 매개로 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다. 풍수는 크게 죽은 자의 공간 즉 무덤을 다루는 음택(陰宅) 풍수와 산 자의 터전을 다루는 양기(陽基) 풍수로 구분한다. 도읍에 대한 풍수론을 국도풍수(國都風水)라 한다. 국도 풍수는 고려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였던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할 때도 있고 왕성해질 때도 있으므로 국왕이 여러 경(京)이나 궁궐을 건설하여 돌아가며 머물러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고려에서는 서경과 남경을 건설하고 여러 차례 국왕이 그곳에 행차하고 머물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기에 대업이 만대 동안 이어질 곳으로 정의하며 국왕이 그곳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안녕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서경이 중시된 것은 그곳이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실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개경과 서경의 양경 체제에 변화가 생긴 것은 12세기에 남경을 건설하면서부터다. 


남경 건설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11세기 중반 문종 때부터였다. 이 무렵은 고려가 건국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수덕을 표방했던 고려사회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6의 배수가 국가의 운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숙종이 지은 남경의 궁궐은 연흥전(延興殿)이다. 12세기 남경의 건설은 여려모로 그 일대의 지역개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기존의 장단 - 광진 - 송파의 도로망에 더하여 임진 - 파주 - 남경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성장했다. 또 삼남지역의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그 연결망이자 개경과 인접한 도시로서 남경이 향후 더욱 더 성장해갔다. 


이는 고려 말 천도 논의가 일었을 때 남경 한양이 주요한 천도지로 부각하는 바탕이 되었다. 몽골과 항쟁했던 시기 강도(江都)로 도읍을 옮긴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 왕실과 고려 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고 원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천도를 시도할 수 없었다. 원에서 천도를 자신들에 대한 적대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원 간섭기 동안 수면 아래에 잠복했던 천도 논의는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 비로소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이에 대한 교서를 반포한 지 이틀 후에 남경의 땅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때에 실제로 국왕이 순주할 별경으로 새롭게 건설된 곳은 장단(長湍) 백악 신경(新京)이었다. 고려 말 순주가 이루어지던 무렵부터 한양은 서경을 넘어서서 지맥의 근본이자 단군과 관련된 장소로 수식되었다. 한양의 주산인 백악은 원래 숙종 때 기록에서는 면악(面岳)으로 불리다가 우왕 무렵부터 백악으로 지칭되었다. 백악은 단군의 사적지였던 아사달의 한자어로 해석된다. 이미 고려인들에 의해 개경을 보완할 배경으로 건설된 만큼 한양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비슷한 지세를 지니고 있었다. 개경과 한양은 풍수적으로 사신사가 모두 갖춰진 지형이었다. 


두 지역은 지세가 서북쪽과 남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여서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나가 수구가 동남쪽에 조성되었다는 점 등이 동일하다. 주산이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주산에 근거하여 궁궐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개경과 한양의 궁궐도 서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같다. 다만 개경이 산 구릉에 궁궐을 조성했다면 한양은 평지에 건설했다는 차이가 있다. 개경과 한양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쉽게 실천 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풍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매우 강력한 반대론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때 지적된 한양의 풍수적 문제는 건방(乾方)이 낮고 돌산이 험하여 명당에 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물이 부족하다는 점은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천도를 반대하는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혈사라 불렸던 은평구 진관사는 8대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유폐되어 있던 사찰이다. 천추태후가 현종을 해치려고 보낸 자객을 피하게 도와준 스님이 진관 스님이어서 진관사라 부르게 되었다. 현종은 천추태후의 핍박을 받아 개성의 숭교사(崇敎寺)로 출가했다가 15살이 된 1006년에 신혈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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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역사 : 한국사편 -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정점’을 위한 쟁투의 기록 숙청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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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바람직한 관계를 알게 해주는 말이 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최경식의 ‘숙청의 역사’를 보며 생각하는 말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진골 세력 및 고구려계 유민들을 냉혹하게 숙청한 군주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문왕이 마주한 현실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공신이 된 진골 귀족들과의 갈등이었다. 무열왕(김춘추) - 문무왕 - 신문왕의 왕위는 3대째 세습된 군주였다. 신문왕은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국인 보덕국(報德國)도 표적으로 삼았다. 


고려 4대 광종도 수성형 군주에 드는 인물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가 그의 치적이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 및 사성(賜姓) 정책은 왕건의 대표적 대(對) 호족 정책이었다. 고려는 사실상 호족 연맹 국가였다. 왕건 사후 권력 투쟁이 빚어졌다. 개경 호족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광종은 재위 7년간은 별 다른 개혁을 보여주지 못했다. 


과거제로 문치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호족 정리 정책이라 할 만하다. 광종에게 과거제 실시를 건의한 인물은 중국 오대십국의 하나였던 후주(後周)의 쌍기였다. 쌍기는 거란 소손녕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은 서희를 선발하기도 한 지공거(知貢擧)였다. 왕건의 천수(天授)에 이어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 등의 연호를 썼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100년간 집권했다. 고려 계급사회의 하층에 있었던 무신이 상층부의 문벌 귀족을 끌어내리고 집권한 사태는 집권 세력의 연결성이 전혀 없는 교체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고려는 무신들이 득세 했다. 통일전쟁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태조 왕건 주변에는 건 국의 일조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른바 공신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4대 광종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 진출 통로인 과거제도 이때 처음 시행되었다.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문신들은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신들의 군 지휘권까지 가져갔다. 문신 출신으로서 무신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은 서희, 강감찬, 윤관 등이다. 문신들이 무신 역할도 겸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제에 있었다. 과거제에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군사 전력에 대한 이해도 요구했다. 자연스레 문신들은 웬만한 무신들보다 탁월한 군사적 지략을 갖출 수 있었다. 무신정변을 촉발한 18대 의종도 집권 초에는 비대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중용했다. 


의종을 감금한 무신들은 김돈중, 김돈시(김부식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처형했다. 그들은 김부식을 부관참시하기까지 했다.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 왕호를 등극시켰다. 19대 왕 명종이다. 무신정권은 1170년에 시작되어 100년만인 1270년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지 않고 즉위했다. 이에 개성 왕씨들을 경계한 이성계는 왕씨 숙청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려가 전 왕조 신라에 대해 보인 태도와 대비된다. 최영은 친원파였다. 그가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항한 것이었다. 


최영은 남아서 자신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따라 대열에서 빠졌다. 이는 최영의 뼈아픈 실수가 되었다. 조민수와 일부 장졸들이 회군은 왕에게 정면 대적하는 것이라 하자 이성계는 왕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왕 옆의 악인인 최영에게 대적하는 것이라 답했다. 위화도까지 하루 10km씩 움직인 이성계 군은 회군은 하루 40km씩 했다. 명은 창왕이 원나라 혈통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창왕 즉위의 주역인 조민수, 이색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때부터 이성계 세력은 역성혁명을 기치로 새로운 왕조 창업을 본격적으로 표방했다.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 간이었다. 공양왕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결혼한 사이였다. 선위해줄 것이라 기대되었던 공양왕은 정몽주와 긴밀히 연대하며 이성계 세력을 견제했다. 정몽주는 창왕 폐위까지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지만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돌아섰다.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등을 유배 보낸 뒤 공양왕에게 이성계 체포, 사사를 재가해 달라고 했으나 공양왕은 역풍을 우려해 주저했다. 


이성계 세력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위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왕대비 안씨(공민왕의 제 4비)를 찾아가 공양왕 폐위의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성계는 감록국사에 봉해졌다. 임시임금이 된 것이다. 선위받지도 않았고 반정을 일으키지도 않은, 신하가 왕을 축출한 어정쩡한 즉위였다. 그는 조선의 왕이 아닌 고려의 왕으로 즉위해 한동안 고려 국호를 썼다. 왕씨여도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려 한 이성계와 달리 신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건은 문하부 참찬 박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따랐던 박위는 공양왕 즉위 후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에 맞섰다. 


정몽주가 피살될 당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으나 살아남은 그는 친지에게 맹인 점쟁이 이흥무를 찾아가 태조 이성계와 공양왕 가운데 누가 더 명운이 좋은지, 왕씨들 중 누가 가장 명운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역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왕씨 일가 숙청에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집요한 주청에 어쩔 수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처가(여흥 민씨)와 며느리 집안(청송 심씨)을 철저하게 도륙했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 관련 업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강상인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병조에 속한 심정이 형 심온(세종의 장인)의 지시를 받아 강상인과 모의했다고 몰아갔다. 심온은 강상인과의 대질을 요구했지만 강상인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세종은 심온을 복권할 경우 부왕 태종이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경계했다. 문종을 본 명나라 사신은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했다. 문종은 자신을 제갈공명에 비유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후자는 오로지 군주 개인의 감정 차원의 폭거였다. 저자는 후자를 희대의 폭군의 무차별적인 학살극으로 규정한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집권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조정의 주류 세력을 형성한 것은 훈구파였다.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세조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한 탓에 훈구파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 편중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할아버지인 태종이 공신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세조 이후에도 훈구파의 권세는 커져만 갔다.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는 사림이라는 반대 세력의 출현을 이끌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았고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중소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며 살아가고 있던 사림에게 훈구파의 권세가 미쳤다.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훈구파 사람들이 낙향한 후 유향소, 경재소 등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며 사림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사림은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성종이 사림을 신진 세력으로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처럼 학문을 좋아했고 경연(經筵)에도 9000회 이상 참여했다. 패도(覇道)적 성향을 보였던 세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노선을 표방했던 만큼 훈구파를 배제하고 사림을 정치 동반자로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사림이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다면 훈구는 사장(詞章)에 기반을 두었다. 사림에게 불행이 빚어졌다. 성종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에 대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고 거짓 보고했다.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는 묘비도 없이 동대문 밖에 묻혔다.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림이 중심이 된 삼사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언을 근거로 격하게 반대했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인 실록청 총책임자인 훈구파 이극돈이 사초를 검수하던 중 김일손이 쓴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글을 발견하고 삭제를 요청했다. 김일손이 거부하자 원한을 품은 이극돈은 복수를 계획했다. 이극돈은 유자광과 함께 김일손은 물론 사림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실록 기사를 찾아냈다. 두 사람의 고변을 들은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 연산군은 삼사 및 신하들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다가 무오사화를 계기로 독단적 왕권행사의 길로 나아갔다. 갑자사화는 유자광과 함께 간신의 대명사인 임사홍의 폐비 윤씨 사건 고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갑자사화는 규모면에서 무오사화를 압도했다. 훈구파 대신들도 희생 당했음에도 사화라 부르는 것은 삼사의 피해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선조를 암군(暗君)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저자는 기축옥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죽임을 당해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선조는 중종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를 해결하며 사림의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조광조 추증 및 남곤의 관직 삭탈이다. 


남곤은 사림 탄압에 앞장 섰던 사람이다. 사림은 중앙무대에서 밀려났지만 근간이 되는 향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도 큰 몫을 했다. 훈구를 비호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선조는 사림 중용 의지를 드러냈다. 선조는 세자 시절 훈구 권신들의 국정농단에 염증과 위협을 느꼈다. 사림의 세상이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 관직이 한정된 탓에 사림 내의 경쟁과 대립이 촉발되었다. 붕당이 형성되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에 있어서 동인,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 불렸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서 우세한 세력은 동인이었다.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맥을 이은 동인은 주리론에 기반했다. 경험적 세계의 현실원리보다 도덕적 원리에 기반한 인식과 실천에 비중을 두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재앙을 맞았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 선비들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호남에선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호남 선비들이 확연히 줄었고 풍류를 즐기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풍조가 생겼다. 


서희는 세자 책봉 문제에서 선조의 미움을 샀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선호했다. 저자는 숙종을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왕으로 꼽는다. 불리한 정치 환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내내 자기 마음대로 정국과 신하들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붕당은 왕보다 신하들에게 유리한 구도로 볼 수 있다. 숙종은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은 집권 세력인 서인과 제2의 세력인 남인이 함께 가는 모양새였다. 논쟁과 대립은 있었지만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붕당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건전한 상호 견제와 비판이 백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 시기에 서인과 남인의 대표적인 논쟁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예송 논쟁이다. 자의대비의 상례 문제에 따른 논쟁이었다. 1659년 일어난 기해예송은 종법과 왕가의례 중 어디에 초점을 두어 효종을 볼 것인지에 관한 예송이었다. 효종은 종법 측면에서는 자의대비의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 계승면에서는 적자였다. 당시 상례를 치를 때 왕가에선 국조 오례의를, 일반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그런데 국조 오례의에 위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졌다.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을 따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예송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둔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전방위적 예송 논쟁으로 성리학적 이념 논쟁이 활성화된 측면도 있지만 예송의 본질이 훼손되고 붕당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적지 않게 드리워진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상술했듯 이때까지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의 붕당정치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효종의 외아들인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 적장자(정실이 낳은 맏아들)는 일곱명이었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단종도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숙종은 온순했던 아버지 현종을 닮지 않고 괄괄했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를 닮았다. 최경식의‘숙청의 한국사’는 여러 시대의 숙청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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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8-31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매니아인지라 이 리뷰가 눈에 제일 먼저 띄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4-08-31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