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서울사 : 고려편 쉽게 읽는 서울사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 서울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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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2년에 거란이 침략하자 서희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에 반대했다. 그리고 직접 소손녕을 찾아갔다. 거란 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소손녕과 마주 서서 읍한 후에 동편과 서편으로 마주 대하고 앉아서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화의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활약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목종 원년에 57세로 죽었고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고려는 개경 이외에도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지금의 서울)이 더 있었다. 물론 이 세 개의 경은 수도인 개경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도 아니고 항상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경은 삼경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시되었다. 동경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말한다. 태조 18년 경순왕 김부(金傅)가 투항해 오자 나라를 없애고 경주로 개칭했다가 940년에 대도독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성종 6년에 경주를 동경으로 고침에 따라 동경이 설치되었다. 숙종이, 문종이 설치했다가 폐지한 남경을 다시 설치하고 경영한 것도 풍수도참사상을 이용한 왕권 강화정책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대받던 서경은 인종 13년 승려 묘청 등이 천도 운동을 벌이다가 원수 김부식 등이 이끄는 군대에 토벌당한 이후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삼경은 왕 개인 또는 고려라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여러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는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다 오는 순주(巡住) 정도의 역할을 했지만 고려 말에는 천도 대상지로도 자주 거론되었고 실제로 남경으로의 천도가 단행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종의 아들인 숙종 때 부활한 남경은 동쪽으로 대봉, 남쪽으로 산리, 서쪽으로 기봉, 북쪽으로 면악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남쪽 끝인 사리는 한강의 사평나루가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한남대교 부근이고 면악은 북악산이니 남산을 남쪽 끝으로 하는 조선의 한양도성보다 컸다. 정도전은 북 원사신의 영접을 반대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삼각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봉재에서 학문을 가르치니 배우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 한양이라는 명칭은 통일신라 때 처음 서울의 공식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남경은 고려시대에 불렸던 서울의 옛 명칭으로 1308년 한양부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서울의 공식 명칭이었다. 


양주의 중심지는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중구 일대가 아니라 현재의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다. 조선시대의 양주는 한성부와는 다른 고을이었다. 지금도 양주는 경기도에 속해 있으며 서울과는 별개의 지역이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 전기까지 광진은 서울 지역에서 한강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으며 한반도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백제는 광진 남쪽 풍납토성에 초기 도읍을 건설했고 고구려와 신라는 광진 옆 아차산에 산성과 보루 등의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광진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면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역과 연결되었다. 광진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현재 의정부시와 양주를 거쳐서 북쪽 방면으로 개성, 평양 등과 이어졌으며 동북쪽 방면으로는 함경도 방면과 연결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수도 개경과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할 때 광진의 중요성은 여전히 높았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임진강을 건너 파주시 적성면 지역으로 이어진다. 적성 지역의 임진강 나루(파주 적성과 연천 장남을 연결하는 나루; 이재석 글)를 옛 기록에는 장단도 즉 장단 나루라고 칭했다. 일찍이 660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고구려 원정 부대가 이 길을 따라 평양까지 이르렀고 고려 전기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 갈 때에도 이 길을 거쳐 내려갔다. 근래 학계에서는 이 길을 장단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고려 중기 남경을 설치한 이후부터 장단 나룻길의 비중은 약해지고 대신 새로운 교통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임진강 하류와 임진 나루를 건너 현재의 파주와 고양 등을 거쳐 서울 중심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다. 오늘날 이 길을 임진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임진 나룻길을 택하면 한강을 건널 때에도 광진보다 그 하류인 사평도 즉 사평 나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 지역을 건너게 된다. 하천의 하류 지역이 상대적으로 횡단이 불편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활용도가 미진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임진 나룻길을 이용하는 여행객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했다. 임진 나룻길의 이용자 증가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사건 중 하나가 혜음사 설치다. 혜음사는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하며 파주와 고양의 경계에 해당하는 혜음령과 인접해 있다. 남경의 설치는 11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임진 나룻길의 이용을 증가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장단 나룻길 이용이 많았던 고려 전기에는 광진 인근에 양주의 중심지가 위치해 있었다. 당시 광진은 교통면에서나 지방 행정면에서 현재 서울 지역의 중심 입지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개경과 한반도 남방을 오갈 때에는 광진으로 직접 연결되는 장단 나룻길 이용을 선호했다. 


종로구 지역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 나룻길을 통해 개경과 왕래하는 것이 더욱 가깝고 편리했다. 남경의 설치는 기존의 간선 교통로였던 장단 나룻길의 비중을 떨어뜨리고 임진 나룻길을 국가적인 간선 교통로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에도 남경의 중심지에 새 도읍인 한성부가 건설되면서 임진 나룻길의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임진 나룻길은 제1의 국가도로인 의주대로 구간에 편성되어 한양에서 개성, 평양 등을 거쳐 의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핵심 교통로의 기능은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다. 


숙종은 조카(헌종)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도덕적 약점을 강력한 국가적 사업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 창설은 숙종이 추구했던 대표적인 국가 사업이었다. 숙종은 자신이야말로 37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를 번성시켰던 부왕 문종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 했다. 남경 건설 역시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숙종의 할아버지인 제8대 국왕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 신혈사라는 사찰에서 승려로 기거하며 암살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제7대 임금 목종의 어머니인 천주태후가 잠재적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조카 현종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국가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는 등 고려의 기틀을 다친 국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의 자손들은 현종이 어렵게 목숨을 부지했던 삼각산을 현종계 왕실의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삼각산을 행차하면서 현종계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숙종은 현종의 손자로 삼각산 아래에 남경을 설치하여 자신의 새로운 거점을 건설했다. 자신이 진정한 현종과 문종의 후계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집권 과정에서 드러났던 취약한 정당성을 만회하고자 했던 것이다. 숙종과 그 측근들은 경복궁 일대가 한반도의 손꼽히는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선전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하고 남경의 새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일대에 건설된 배경에는 그 같은 정치사의 흐름이 있었다. 숙종의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남경 건설은 삼국시대 이래 천여년간 한강변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던 서울의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남경의 중심지는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했으며 종로구, 중구 일대의 서울 중심 지역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핵심부로 기능하고 있다. 양천허씨세보와 미수 허목의‘기언‘에 의하면 허선문은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과 허왕옥의 후손으로 공암에서 농사에 힘써 많은 곡식을 비축했다. 허선문과 왕건의 인연은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를 공격했을 때 이루어졌다. 후백제를 공격하던 고려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병사와 말들이 매우 피곤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삼국사기에는 897년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한 궁예가 지금의 김포, 강화에 해당하는 검포와 혈구, 그리고 공암 지역을 공격해 격파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이때 공암 지역이 궁예의 세력권으로 들어갔기에 허선문 집안도 궁예에 협조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은 20년간 궁예의 장군 생활을 했다.) 이때 허선문이 곡식을 공급하였고 그 덕분에 기운을 차린 고려의 병사와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고 고려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선문이 왕건에게 항복한 시기는 태조 10년인 927년 9월 공산에서 고려군이 후백제에게 패한 이후로 추정된다. 12세기 숙종부터 의종까지 고려의 국왕들은 화려하게 남경에 행차하고 머물렀으나 무신정변 이후에는 국왕들의 행동반경이 개경 인근으로 제한되면서 남경 순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더욱더 국왕이 남경에 행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국왕이 직접 가는 대신 어의를 남경의 궁궐에 모시는 것으로 국왕의 순주를 대신했다. 원 간섭기에 충선왕은 고려 전기 이래의 경(京)들을 일괄적으로 부(府)로 개편했다. 이는 원(元)의 제도를 기본으로 삼아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려 한 결과다. 풍수에 따르면 사람과 땅은 동기(同氣) 즉 같은 기를 매개로 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다. 풍수는 크게 죽은 자의 공간 즉 무덤을 다루는 음택(陰宅) 풍수와 산 자의 터전을 다루는 양기(陽基) 풍수로 구분한다. 도읍에 대한 풍수론을 국도풍수(國都風水)라 한다. 국도 풍수는 고려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였던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할 때도 있고 왕성해질 때도 있으므로 국왕이 여러 경(京)이나 궁궐을 건설하여 돌아가며 머물러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고려에서는 서경과 남경을 건설하고 여러 차례 국왕이 그곳에 행차하고 머물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기에 대업이 만대 동안 이어질 곳으로 정의하며 국왕이 그곳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안녕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서경이 중시된 것은 그곳이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실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개경과 서경의 양경 체제에 변화가 생긴 것은 12세기에 남경을 건설하면서부터다. 


남경 건설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11세기 중반 문종 때부터였다. 이 무렵은 고려가 건국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수덕을 표방했던 고려사회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6의 배수가 국가의 운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숙종이 지은 남경의 궁궐은 연흥전(延興殿)이다. 12세기 남경의 건설은 여려모로 그 일대의 지역개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기존의 장단 - 광진 - 송파의 도로망에 더하여 임진 - 파주 - 남경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성장했다. 또 삼남지역의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그 연결망이자 개경과 인접한 도시로서 남경이 향후 더욱 더 성장해갔다. 


이는 고려 말 천도 논의가 일었을 때 남경 한양이 주요한 천도지로 부각하는 바탕이 되었다. 몽골과 항쟁했던 시기 강도(江都)로 도읍을 옮긴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 왕실과 고려 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고 원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천도를 시도할 수 없었다. 원에서 천도를 자신들에 대한 적대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원 간섭기 동안 수면 아래에 잠복했던 천도 논의는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 비로소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이에 대한 교서를 반포한 지 이틀 후에 남경의 땅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때에 실제로 국왕이 순주할 별경으로 새롭게 건설된 곳은 장단(長湍) 백악 신경(新京)이었다. 고려 말 순주가 이루어지던 무렵부터 한양은 서경을 넘어서서 지맥의 근본이자 단군과 관련된 장소로 수식되었다. 한양의 주산인 백악은 원래 숙종 때 기록에서는 면악(面岳)으로 불리다가 우왕 무렵부터 백악으로 지칭되었다. 백악은 단군의 사적지였던 아사달의 한자어로 해석된다. 이미 고려인들에 의해 개경을 보완할 배경으로 건설된 만큼 한양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비슷한 지세를 지니고 있었다. 개경과 한양은 풍수적으로 사신사가 모두 갖춰진 지형이었다. 


두 지역은 지세가 서북쪽과 남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여서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나가 수구가 동남쪽에 조성되었다는 점 등이 동일하다. 주산이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주산에 근거하여 궁궐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개경과 한양의 궁궐도 서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같다. 다만 개경이 산 구릉에 궁궐을 조성했다면 한양은 평지에 건설했다는 차이가 있다. 개경과 한양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쉽게 실천 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풍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매우 강력한 반대론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때 지적된 한양의 풍수적 문제는 건방(乾方)이 낮고 돌산이 험하여 명당에 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물이 부족하다는 점은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천도를 반대하는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혈사라 불렸던 은평구 진관사는 8대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유폐되어 있던 사찰이다. 천추태후가 현종을 해치려고 보낸 자객을 피하게 도와준 스님이 진관 스님이어서 진관사라 부르게 되었다. 현종은 천추태후의 핍박을 받아 개성의 숭교사(崇敎寺)로 출가했다가 15살이 된 1006년에 신혈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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