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 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금요일엔 역사책 10
이명제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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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이왕은 그의 아버지 인조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더욱 비운의 주인공으로 여겨온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를 불행에 빠뜨린 운명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소현세자는 8년의 청나라 인질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명제의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는 소현세자에 대한 세간의 평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현세자는 미약한 존재다. 저자에 의하면 백년 전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실패를 설명할 존재로서, 백년 후 대한민국 국민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현세자를 주목했다. 세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소현세자가 세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능양군의 반정 덕이었다.


반정 세력의 명분 중 하나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이 후금에 대한 공격을 제안한 시기에 조선의 신료들이 명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한 것은 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후금이 명을 등 뒤에 두고 조선을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명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위기시 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 결과 요동 지역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밀지설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누르하치와 몰래 연락을 취하도록 했으며 강홍립의 투항도 사전에 조율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광해군은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비밀리에 교섭을 하려고 했다.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1621년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잃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는 1623년이다.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인조 정권이 반정을 온전히 완수하려면 광해군이 폐위 및 인조의 집권에 대한 명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후금 친정(親征) 의지를 강하게 표했다. 무리한 듯 보였지만 이는 친정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명에 보여주어 책봉에 유리한 포석을 깔아두겠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책봉이 이루어진 이후 후금에 대한 선제 타격 논의가 전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점을 방증한다. 반정 당시 대장 김류가 시간이 되어도 집결지에 나타나지 않아 반정군이 동요하자 임시 대장을 맡아 반정을 성공시킨 이괄은 2등 공신으로 결정된 데 이어 사지나 다름 없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난을 일으켰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광해군 - 인조 - 흥안군 - 인조로 집권자가 바뀔 때마다 피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흥안군은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선조의 열 번 째 아들이다. 1626년 명과 후금의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패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을 수는 있으나 명과의 사대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명의 존재로 인한 갈등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후금은 결정적 순간이 되면 조선이 명예 편에 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귀순 사건 이후 후금 내부에서는 명, 몽골과 함께 조선을 적국으로 규정했다. 차하르를 정복하고 전국 옥새를 손에 쥔 홍타이지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후금의 성장 과정에서 복속된 수많은 이방인에게 소속감을 제공했다.


뒤이어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와 몽골, 그리고 항복한 한인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국에서 대청국으로 바꾸었다. 완벽한 진전을 단행한 것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해 삼궤구고두례를 하지 않아 두드려 맞은 뒤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고 귀국하다가 내용을 확인하고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한 나덕헌과 이확은 참람하게 황제를 자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저자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는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은 명을 버리고 청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기에 정묘호란에서 도달했던 합의점을 청이 스스로 깨버린 것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선택이 유연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동이 청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선일 뿐이다. 당대 조선인들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여전히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최선의 선택은 명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은 왜 청의 막강한 군사력을 감안하지 못했을까? 당대의 결정은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려야 하기에 이해되어야 하는가?란 말을 하고 싶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은 300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조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타이지가 도착하기 전에 강화를 맺는 것은 월권이었기에 선봉대는 세자를 인질로 삼아 본대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고자 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건은 무마되었지만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문제는 강화의 조건이었다. 청에서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칭신의 태도를 분명히 할 것, 척화신을 압송할 것, 그리고 조선 국왕 인조를 출성시킬 것 등이었다.


칭신은 조선이 청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명과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청은 황제가 직접 출정한 전쟁인 만큼 조선 국왕이 출성해야 한다며 출성할 수 없다는 조선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세자의 출성 의사에 대해서도 청은 단호히 반대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조는 출성을 결심하고 삼전도로 나가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인조의 맏아들 즉 소현세자와 다른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시했다. 또한 인조가 사망한다면 인질로 보내진 아들 중에서 임금을 세울 것이라 선언했다. 홍타이지의 조치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것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현세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3공 6경 대신들과 자제 혹은 동생이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끌려왔다.


게다가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관원 및 각종 명목의 관료들이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딸린 종인들까지 있었다. 이렇다 보니 처음 심양에 도착했을 때 세자 일행은 500여 명에 달했다. 소현세자 일행은 단순히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세자가 생활했던 심양관은 각종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예컨대 조선의 행정기관은 6조 중 이조와 형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4조를 모방하여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이 설치되었다. 일종의 작은 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세자는 인질 생활임에도 공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고달픈 인생이었다. 세자는 매달 5일, 25일에 열리는 청나라의 조참에 참여해야 했다. 조참은 신하들이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는 동시에 황제가 신하들에게 주요 사안을 공지하는 모임으로 조선이 청이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현세자 역시 참석의 의무가 있었다,


이 밖에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 황실의 혼인이나 제사와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세자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 중에는 사냥도 있었다. 사냥은 청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청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팔기(八旗)가 사냥의 단위였던 니루를 근간으로 하기도 하거니와 전투기술을 습득하고 만주 고유의 기풍을 유지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사냥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피하는 수단이었기에 황제는 지속적으로 대규모의 사냥을 기획하여 만주인의 정체성을 상기시켰다. 황제 홍타이지는 곧잘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왕족에게도 사냥 동참을 명했다.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궁궐 바깥을 나갈 일이 없던 소현세자에게 사냥 참여는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말 타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자는 사냥 중 후미로 뒤쳐지거나 낙마로 부상을 입는 일이 많았다. 이십여 일 이상의 노숙을 동반하는 사냥일 경우 고된 일정으로 병을 얻기도 했다. 사냥도 고됐지만 인질로서의 의무 중 소현세자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전쟁이었던 듯하다.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쟁에 몇 차례 소현세자를 동참시켰다.


이 역시 사냥과 마찬가지로 청의 군세를 과시하여 명의 승리를 믿는 조선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조선의 세자가 청의 편에 서서 명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선전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명의 장수들이 항복할 때마다 소현세자를 대동하고는 심정을 캐묻기도 했다. 세자가 참전했다고 해서 직접 창이나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전쟁터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자가 위치한 청 진영이 항상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항시 존재했을 것이다. 1644년 소현세자는 청이 북경을 점령하는 전쟁에도 동참했다. 자신의 눈으로 명이 멸망하는 현상을 바라봐야만 했으니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1644년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된 이후 북경에서 두 달여를 생활했다.


소현세자가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고 알려진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수행해야 할 의무사항 가운데 징병문제를 포함시켰다. 명과 청이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청에 군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존속이 달린 상황이라 일단 수락했지만 실제로 징병요구가 이루어지자 조선은 난처했다.


공격 대상이 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거나 전투에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등 소극적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청에서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식의 발언들을 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인조와 신하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부자 관계가 정치적 경쟁 관계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세자의 귀국 문제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홍타이지가 죽고 즉위한 여섯 살의 순치제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도로곤은 인질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선 내에 친 도르곤 세력을 조성하려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불충을 의심하던 청에서 인조의 입조(立朝)를 요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자 대책이 논의되었다. 신하들은 고려 충혜왕의 사례가 재연될 것을 우려했다. 충혜왕은 상국인 원나라에 압송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한 고려의 국왕이다. 원 황제에 의해 고려 국왕이 교체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인조는 섬뜩함을 느꼈다. 청에서 정말 조선의 왕위 교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더라도 이는 소현세자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조 입장에서는 소현세자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해 부왕인 인조와 눈물의 재회를 한 후 부왕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큰 실망감에 소현세자는 서연 참석을 점점 게을리했다. 소현세자는 2차 귀국 후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양에서 유생들과 무인들을 모아놓고 과거를 실시했다. 이는 월권이었다.


명은 청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리장성 바깥에서의 상황이었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만리장성은 돌파할 수 없었고 청의 중국 정복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수비하던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열어 청을 이끄는 도르곤에게 항복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과 오삼계의 병력은 이자성의 군사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5월 2일 북경까지 점령했다. 소현세자는 이 모든 역사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도르곤이 전쟁에 소현세자의 동참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그토록 의지했던 명이 붕괴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도르곤은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변수가 제거되자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은 식량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 중 하나였다. 조선 왕족의 일원이었던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 1634년 명,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 책봉을 공인받으면서 훗날 조선의 왕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끝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외받던 소현세자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정교봉포’라는 자료를 입수해 소개했다.‘정교봉포‘ 는 19세 후반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부 황백록이 중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한 서적이다. 이 책에 소현세자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교유가 기록되어 있다.


’정교봉포‘보다 더 신뢰할 만한 자료는 아담 샬이 쓴 ’중국전례보고서‘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1964년 김용덕의 '소현세자연구'라는 책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음을 상기 시키며 소연 세자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파편적이고 편향적으로 작성된 사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현세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소현세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글들이 현재 소현세자 서사의 증거로 쓰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인조 실록에서 소현세자를 비판하느라 안달이 난 이유를 봉림대군에서 찾는다. 소현세자 사후 세자의 자리는 원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실제로 봉림대군이 지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에도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훗날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봉림대군(효종)은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현세자와 그의 아들이 세자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했다. 저자는 심양에서의 경험이 소현세자의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논리라면 함께 심양에서 생활했던 조선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변화가 발생해야 하지만 소현세자 외의 인물에게 그런 변화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은 심양관을 단순히 인질들을 구류시키는 장소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대사관으로 여겼다. 청은 조선의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가 외교관의 역할을 해주기로 기대했다. 조선의 경우 모든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다. 국왕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종친들의 정치 참여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종친이란 국왕의 4대손까지로 이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청의 경우 황족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기는커녕 오히려 권장되었다. 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팔기이다. 청의 황족들은 여덟 개 구사(조직)에 대한 지분을 토대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에게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기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조선과 청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외교관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고초를 겪더라도 절개를 지키며 청의 요구에 맞서는 모습을 연출하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157 페이지) 저자는 소현세자가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는 청의 요구에 대해 매번 세자의 직무는 문안을 여쭙고 수라를 돌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회피한 것을 언급하며 소현세자가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선보일 환경이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양 생활 초기에 식사가 현물로 제공되었으나 상주 인원이 많아 부담을 느낀 청이 돈을 주고 알아서 찬거리를 마련하라고 했다. 문제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게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이 방침은 밭을 떼어줄 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홍타이지는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고 통보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명나라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아 관왕 묘에 사실상 유폐되어 있는 장춘과 위험을 무릅쓰고 마주했음을 지적한다. 소현세자의 행보는 숭명반청의 태도다.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은 본래 명 황제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중국 선교가 중요했지 명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역관들이 흠천감과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천문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는 1648년 이후의 일로 아담 샬은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넣었다. 소현세자는 심각하게 병약했다. 항상 조선을 의심하던 청도 세자의 병약함은 인정했다. 소현세자는 1643년 12월부터 1644년 3월까지 심양에서 한양까지 왕복했고, 심양 도착 2주만에 명과의 전쟁에 동참했다.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갔다가 9월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고 11월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전근대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환한 데다가 산해관을 통과한 이후 북경까지 가는 과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중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군사작전이었다. 소연 세자가 병을 앓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온전한 건강 상태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소현세자는 상당히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귀국했다. 도착한 이유 회복기를 거쳤다 하더라도 재발과 병세 악화로 인한 사망이 그리 어색한 그림이 아니다.


세 명의 의관이 실시간으로 치료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다면 나머지 두 명의 의관이 분명 눈치를 채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세자가 사망할 경우 자신들도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치료 덕분에 3월 14일 이후로는 탕약을 복용하거나 침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소현세자의 증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제1형 당뇨병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소현세자의 당뇨증세는 1640년 하반기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는데 악화의 요인으로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시기는 바로 소현세자가 1차 귀국 이후 일탈을 시작한 시점이다. 저자는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지만 그것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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