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쁨은 좋고 슬픔은 나쁜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를 예로 들어 기쁨과 슬픔을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랑의 기쁨은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점이다.

반면 증오의 슬픔은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능동적인 것 즉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 즉 비주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념(情念)이라 정의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양이 이전보다 많아졌는가 적어졌는가, 이다.

그래서 즐거움 속에도 슬픔이 숨어 있고 슬픔 속에도 기쁨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우 시인의 시집 ‘몰락경전’에 실린 시들을 읽다가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유명 시인인 저자에게도 시 쓰기란 쉬운 일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에 예민하다는 사실이다.

“...시의 턱뼈를 잃었다 자꾸 시가 우그러진다 자꾸 뭉그러/ 진다 문법의 발톱도 은유의 꼬리도 썩은 동아줄이 된다 바/ 닥으로 가라앉는다...”(‘다시, 訥’ 중에서),

“...흩어진 자음과 모음의 흰 알갱이들은 천정으로 스며들고/ 그물에 걸린 가시복어처럼/ 새벽안개에 끌려나온 몇 낯 국어들이 떨떠름해 한다...차라리 존엄해라 당당해라/ 결코 문장이 되지 않는 고통이여...”(‘사라진 詩’ 중에서)

시인은 “..난독증 환자가 되기에도/ 아홉 개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가 되기에도/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말한다.(‘슬픔이 부족하다’ 중에서)

‘단풍든다는 것은’에서 시인은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 는 일..”이라 말한다.

‘천수천안’에 표현된 “..슬픔의 늑골 사이로 천천히 발효되는 산제사..”란 구절이 눈에 띈다.

슬픔을 보는 힘으로 천천히 시를 발효시키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 저, 부지런한 슬픔들..”이란 표현(‘부러진 날개’ 중에서), “..매일 빨아 입는 슬픔도, 자주 빨아 입지 못하는 절망..”이란 표현(‘빨래’ 중에서),

슬픔이란 말은 없지만 “..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 되었다..”는 ‘굴절의 전통’과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는 ‘몰락을 읽다’까지..

그리고 “..진리와 동떨어진 슬픔, 그 틈/ 슬픔과 동떨어진 진리, 그 틈..”(‘나팔꽃, 떠내려가다’)까지..

나무가 무수한 몰락으로 자라듯 시인은 슬픔으로 시를 쓰고 “부족한 슬픔”을 염려하고 슬픔이 진리와, 진리가 슬픔과 동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

슬픔들... 힘이 되는 슬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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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독일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의 회화작품을 근거로 삼아 철학으로의 소풍을 시도한 책이다.

호퍼는 미국 출신의 화가로 사실주의 작품을 많이 그렸다.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그림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단순히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철학으로의 소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림질로 빳빳하게 줄을 세운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이마에 깊이 주름살이 팬 얼굴과 긴장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심사숙고하고 있고 등 뒤 침대 겸용 소파에는 반라의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그림이 '철학으로의 소풍'이다.

그림의 남자가 취한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와 비슷하다.

저자가 말했듯 플라톤은 개인이 결코 실망하지 않을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이념을 지향하려면 관능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저자는 소외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은 신과의 보편적 소통과 연결을 추구하는 시대의 뼈저린 아픔이라 말한다.(25 페이지)

철학으로의 소풍은 정확히 실존이 문제가 되는 순간에 일어난다.(27 페이지)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보고 철학적 사색을 펼친 '철학으로의 소풍'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한 챕터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농밀한 사유의 향연이 발휘되는 글들이 빼곡하다. 가령 '쾌락 누리기'란 챕터를 보자.

이 챕터에서 저자는 염려와 쾌락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며 염려 자체는 쾌락의 완전한 향유를 추구한다는 주장을 편다.

쾌락을 이야기한 저자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통의 일시적 자극이 없으면 삶에는 쾌락은커녕 활기조차 없다.(82 페이지)

이 챕터에 다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두 명의 개별자는 각자 자신의 고통에 골몰한다.(93 페이지)

저자는 근본적으로 고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인 방식과 생산적인 방식이 그것이다.

이 두 작용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저자는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죽음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저자는 한계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죽음과 친밀해지는 무엇보다 삶을 위해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가볍게 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05 페이지)

저자의 글은 일상적인 것들 가령 시간 사용하기,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등에 대한 방법을 알리는 글들이다.

그러면서도 철학자들의 사유를 곁들인 글들이기에 품격이 있다. 격정을 다루는 분노의 기술은 또 어떤가.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칸트는 걱정과 열정을 구분한다. 격정은 순식간에 분출하여 주체가 한 순간 완전히 당황하게 된다. 열정은 지속적이어서 주체의 태도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145 페이지)

저자는 분노를 얕잡거나 무시하는 것 모두 실수라 말한다.(154 페이지)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주제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평정이다.

파토스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 가치평가 및 건너편에서의 당당한 마음의 평정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하고 마음의 평정의 요소로서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주장한 사람은 니체이다.(202 페이지)

하이데거는 자연스럽게 극동의 성현의 가르침에 눈에 띌 정도로 접근해 좌선 같은 것에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방법을 찾 기도 했다.(203 페이지)

저자는 마음의 평정은 삶의 기술 철학이 기초 닦기를 촉진하는 새로운 삶의 테크닉에 기여한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저자는 뜻 밖에 행복에 대한 질문은 인간들을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267 페이지) 저자는 아름다움에 이끌리지 않는 삶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묻는다.(284 페이지)

저자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현존재는 심미적인 즉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으로서만 정당하다는 것이다.(29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 페이지) 내가 저자에게서 읽은 바는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 고통을 배제하지 않는 적극적 삶의 자세이다. 열정적 태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의 치밀한 사유를 따라가려면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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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의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to the philosophy)은 낯선 비일상의 그림이다.

등장 인물이 여자와 남자라는 점을 보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여성이 보이는 반라의 상태는 기이하고 더욱 ‘철학으로의 소풍‘이란 제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얼핏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림 제목이 의미하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이거니와 다림질로 빳빳하게 줄을 세운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이마에 깊이 주름살이 팬 얼굴과 긴장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심사숙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놓인 침대 겸용 소파에는 반라의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그림 자체가 비일상적이다.

남자의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닮았다. 문제는 무엇일까?

제목에 철학이란 이름이 들어있기에 하는 말이지만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무렵에 날듯 철학이 논의되는 것은 절망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독일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길게 설명해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경이로운 순간이나 지극히 아름다운 장면들 앞에서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호퍼의 그림을 설명하는 슈미트를 보면 언어의 한계를 느끼는 것도 개인이 가진 역량 차이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이 설명하기 어려운 경이와 극한의 그림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철학자 저자의 내공에 놀란다. 시를 읽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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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03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 찬찬히 보니 흥미롭습니다. 4분의 1만 보여주는 그림액자. 4분의 1만 보여주는 창. 가로무늬 창틀이 마치 눈금 같아서 남자 혹은 이 그림의 초조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배가시켜 줍니다. 모든 피사체들을 조각조각 보게끔 배치했죠. 여자의 맨발과 남자의 구두. 여자의 갈색머리와 남자의 백발. 다양한 채광들. 모서리인데다 중앙에 여자 엉덩이를 둔 배치가 탁월하네요. 또 그 옆에 책이라니ㅎ; 창녀와 책을 비교한 벤야민 생각남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3-0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1/4 이야기는 탁월합니다... 벤야민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더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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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를 붓다와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춰 본 기억이 있다. 남달리 섬세한 마음을 가졌던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문제는 '에티카'의 난해함이다. 이를 쉽게 풀어내는 것이 과제이다.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은 철학 비전공자의 남다른 스피노자 해석이 가해진 책이다.

 

저자는 스피노자라면 언제나 선택은 그 순간 당신이 가진 역량의 전부일 뿐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단언했다.(30 페이지) 저자는 욕망 없는 신체는 단지 기계일 뿐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이란 아예 없고 다만 무의식적 욕망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 말한다.(32 페이지)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는 환상일 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정신적 결단이란 욕망의 명령에 뒤늦게 따라 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나와 욕망의 싸움이 아니라 두 개 이상의 다른 욕망 가운데 큰 것에 의해 우리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이성의 힘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욕망과 이성은 스피노자 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숙한 혜안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용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베르그송은 모든 철학자들에게는 두 가지 철학이 있으니 하나는 자신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라는 말을 했다.(49 페이지)

 

스피노자의 집안은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 상인 집안이었다. 네덜란드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것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선택한 결과이다. 스피노자는 자연을 생산된 자연(소산적 자연)과 생산하는 자연(능산적 자연)으로 나누었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다. 대우주, 대자연 그 자체가 그의 신이다.

 

저자는 생명에게는 각자에 맞는 고유한 완전성이 있다고 말한다.(57 페이지) 저자는 감정을 우리 영혼의 무능력한 파수꾼이라 말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감정을 빼앗기고 감정적으로 너무 쉽게 동요한다. 진정한 강자는 내면이 강한 사람이다.(63 페이지) 저자는 '에티카'가 윤리학인 이우른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해답을 찾기 때문이라 말한다.(64 페이지)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정의했다.(6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공로는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철학사의 뒷골목에 버려졌던 우리의 몸을 부활시켰다는 것, 악의 화신쯤으로 여겨지던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급부상시킨 것이다.(70 페이지)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라고 보았다.(심신일원론 또는 심신평행론)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하나이다.(71 페이지) 니체는 몸을 큰 이성이라 정의했다. 스피노자가 들려준 말은 육체와 정신은 하나라는 것이고 이 세상이야말로 유일한 세계라는 것이다.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자연스럽게 욕망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켰다.(80 페이지) 스피노자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근원적인 것으로 욕망을 들었다.(8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며 이성은 욕망의 조력자이고 감정은 욕망의 표현이다.(81, 82 페이지) 욕망이 우리 영혼의 근원적인 뿌리라면 욕망 자체의 뿌리는 자기본존 욕망(코나투스)이다. 저자에 의하면 삶의 의지는 파괴의 힘과 삶의 힘이 겨루는 천칭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힘겨운 곡예를 넘는다. 그리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로서 표현되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다.(85 페이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피노자는 자기파괴 욕구는 자신 내부의 원인이 아닌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보았다. 물론 스피노자 역시 사람들 관계에는 긍정적 측면과 (공격적 측면과 같은) 부정적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다.(89 페이지)

 

스피노자는 이 세상에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그 자체로 악한 것도 없다고 보았다.(90 페이지) 선악은 관계에 의해서만 가려질 뿐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우리의 몸과 영혼에 동시에 새겨진 흔적으로 생각했다.(10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감정은 외부 대상에 의해 생겨나는 몸의 흔적(반응)이자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정서적 변화(정신적 흔적)이다.(101 페이지)

 

스피노자에 의하면 감정이란 신체의 변화이자 그 변화에 대한 느낌이다.(101 페이지) 스피노자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것으로 나누었다. 물론 두 감정에 모두 세부 감정들이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이 우리 몸에 불어넣는 삶의 의욕은 코나투스(삶에 대한 욕망)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선악의 모든 기준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라 말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선은 나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모든 것이고 악은 슬픔을 안겨주는 모든 것이다.(108 페이지)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의 가치 창조자란 말이다. 스피노자는 기쁨 중의 최고의 기쁨을 사랑이라 말한다.(113 페이지)

 

스피노자에게 모든 감정의 어머니는 사랑이다. 스피노자의 모든 말은 사랑으로 귀결된다.(114 페이지) 저자는 모든 철학의 숨겨진 동기에도 실은 사랑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114 페이지) 저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란 실은 에로스, 아가페, 필로스를 포괄하는 책이라 말한다. 물론 아가페는 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우연이란 의미를 갖기 전의 필연에 붙여진 아름다운 별명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저자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한 마디로 필연성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인다.(126 페이지) 저자는 사랑이라 불리는 상황 중 상당히 많은 경우가 성과 돈의 유혹 앞에서 납작 엎드려 버린 무력한 굴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스피노자는 늘 부분적인 집중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했다. 스피노자는 누누이 올바른 인식이란 부분적인 앎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식임을 강조했다.(141 페이지) 스피노자는 욕정을 저급한 사랑의 한 형태로 낮춰 보았다. 스피노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게 부분적으로만 즐거움을 주고 나 자신 전체에 이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스피노자는 자신 전체에 대한 기쁨을 유쾌함으로, 일부분에만 적용되는 기쁨을 쾌감으로 엄밀히 구분했다.(143 페이지) 저자는 진정한 사랑이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서로를 향한 쌍방향의 공감에 근거한다고 말한다.(146 페이지)

 

스피노자는 의도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런 원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 앞에 당장 주어진 결과만을 받아들여 폭발하는 것이 우리 감정의 주된 특성이라 말한다. 스피노자는 능동적 행동이 결여되어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겪어 나가는 상황을 감정의 노예 상태라 단호히 선언한다.(154 페이지)

 

스피노자는 외부 자극에 수동적으로 시작되는 감정을 정념이라 표현한다.(열정이라는 말을 쓰면 능동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정념은 감정과 같은 말이지만 겪어 나감을 강조한 단어이다.) 우리의 코나투스는 매우 민감하다. 코나투스는 우리 삶의 욕구이자 우리가 느끼는 자존감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161 페이지)

 

저자는 이해는 과정이지 어딘가 정해진 목적지가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도 완전히 모르는 그 사람을 섣불리 규정짓지 말라고 말한다.(164 페이지)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 다양성, 특별성을 가진 누군가를 자신의 편협한 기준 하나로 규정짓는 것은 엄청난 폭력일 수 있다.(165 페이지)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감정인 교만을 논한다.(170 페이지) 스피노자의 감정에서 기쁨은 좋은 것으로, 슬픔은 나쁜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지만 교만은 특이하게도 그 자체로는 자기만족이라는 기쁨이면서 피해야 할 무언가이다.

 

교만 역시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173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능력을 잠재력에 비해 과소평가하여 쉽게 규정해 버리고 스스로 선을 긋는 것, 어쩌면 이런 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멸시가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177 페이지)

 

열등감 역시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한두 가지 기준만으로 자기 자신 전부를 평가해 버리는 오류에 불과하다.(178 페이지) 스스로에 대한 존귀함을 항상 가슴에 품고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워나가고 아직 묻혀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계속 발견해 나갈 때 새롭게 자신을 평가해줄 전혀 새로운 기준은 무한히 생겨날 것이다.(179 페이지)

 

교만은 남들에 대한 자신의 무지의 고백이고 자기 멸시는 자신에 대한 무지의 고백일 뿐이다.(180 페이지) 저자는 마녀사냥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엄격한 신의 시대였던 중세 시대보다 오히려 르네상스 시기, 그것도 그 후반에 해당하는 16세기 이후에 극성을 부렸다고 말한다.(187 페이지)

 

스피노자는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신체적 활동력 뿐 아니라 사유 능력까지 감소된다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친절에 보답하기보다 오히려 복수에 길들여져 있음이 분명하고 인간은 다양하긴 하지만 대체로 질투하며 동정보다는 복수에 기운다는 말을 했다.(191 페이지)

 

저자는 니체가 말했듯 강자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고귀함을 믿고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이 자신의 신념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 책임 지는 사람이라 말한다.(192 페이지) 스피노자는 감정 앞에서 약자인 우리들을 일러 감정에 무능력한 사람들이라 표현했다.

 

우리 약자들의 심리적 기저에는 원한이 서려 있다. 책임을 외부에 전가시키는 것이 약자들의 큰 방어기제 중 하나라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안으며 괴로워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다.(194 페이지) 물론 이 역시 방어 기제 중 하나이다. 스피노자는 후회,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며 그들을 극히 부정적이고 치명적인 감정이라 평했다.

 

저자는 우리의 거의 모든 행동은 어떤 불특정 관객을 염두에 둔 배우들의 동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자아 연출의 사회학'을 쓴 어빙 고프만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더 아파하고 더 불쌍해질수록 그런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저자는 양심의 가책이란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거의 완벽한 위로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양심의 가책은 타인을 향하던 원한이 방향을 선회해 자신을 향하는 복수심의 일종이다.(197 페이지)

 

자신이 느끼는 슬픔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복수심이나 그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양심의 가책은 모두 파괴적 본성의 발로이다.(197 페이지) 우리에게 자유란 가능할까? 이렇게 말하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거론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고 자유는 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의식에서 자유의지가 자유롭게 결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만 가장 큰 욕망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욕망이 결정했다고 해서 선한 행동의 고귀함이 가치를 잃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적 본성으로부터 스스로 넘쳐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할 때만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205 페이지)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유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욕망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자유의지는 없지만 아름다운 자유는 가능하다. 자유란 단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욕망에 의한 능동적 행동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덧붙이면 더 높은 자유를 위해서는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207 페이지) 무언가를 하고 싶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음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나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것이다.(208 페이지)

 

진정한 자유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능동적 행동이고 욕망을 역량으로 실현시키는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나가는 노력이다.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크기가 자유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쁨의 크기만이 그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말해준다.(210 페이지)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를 향한 도정은 기쁨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210 페이지)

 

우리에게는 정념으로부터의 자유와 역량을 향한 자유가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에 환히 빛을 비추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다. 이성은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인력(引力)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 영혼 속에 이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오직 욕망과 무지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217 페이지)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란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고 그 역량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능동적으로 발휘해 나갈 때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218 페이지)

 

그리고 이런 자유를 위해 이성이 필수적이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결코 불결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로 본다. 이성은 욕망을 억제하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새로운 욕망을 잉태시키는 욕망의 창조자이다.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 우리가 상황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고 또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상황을 이끌어갈 새로운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수동적 상황에서 능동적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 스피노자는 결과가 아닌 원인을 직시하라고 말한다.(221 페이지) 스피노자는 수동적 정념이 이성의 인식에 의해 능동으로 변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정념이 아니라 말한다.(225 페이지)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바는 자신이 하는 행동과 처한 상황에 대한 앎이다. 알면 자유인이고 모르면 노예이다.(226 페이지)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작용받던 우리는 스스로 원인으로 참여하면서 외부를 향해 작용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자기만족과 명예심을 엄격히 구분했다. 자기만족은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믿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태도이고 명예심은 남들에게 칭찬과 찬양을 받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같든 다르든 아무런 상관 없이 남들의 기준에 억지로 부합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234 페이지)

 

스피노자는 편견과 선입견들, 어디선가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소문, 풍문,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생각들을 혼란한 생각들이라 불렀다. 스피노자는 부분적이며 혼란스럽고 결과만 놓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탈피해야만 비로소 바른 인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피노자는 그런 파편적이고 그릇되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성을 꼽았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먼저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경험을 통해 이성의 잠을 깨우라고 언명한다.(253 페이지) 저자는 시가 전달해주는 의미가 시의 영혼이라면 시가 가진 운율과 리듬, 시어를 발음할 때 생기는 독특한 뉘앙스는 시의 몸이라는 말로 직접 체험(몸을 사용해 대상과 직접 마주치는 것)과 간접체험(어떤 것에 대한 설명서를 통해 의미를 간접적으로 겪는 것)의 차이를 설명한다.

 

시의 경우 의미를 머리로 떠올리는 것을 넘어 낭송함으로써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시의 육체성을 느낄 수 있다. 낭독은 사라져가고 묵독이 대세를 이루는 현 국면에도 시사적인 말이다. 저자는 몸으로 시작한 교감이 서로의 마음 속에 숨은 작은 공통점을 찾고 마음의 교감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이야기한다.

 

경험을 통해 몸으로 시작된 교감이 영혼에 잠들어 있는 이성을 깨우고 이성은 서로의 영혼에서 공통적으로 공명하는 공감을 발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서로의 신체에서 시작한 교섭과 그로 인해 우리 영혼에 피어나는 공감의 울림을 공통개념(적합한 인식, 2종 인식)이라 표현했다. 공통개념이란 몸의 교감과 영혼의 공감의 다른 표현이다.(257 페이지)

 

마주침을 통한 신체적 교감은 이성을 긴 잠에서 깨우고 그 이성은 서로의 영혼에 공통으로 담겨 있는 공감의 울림을 만들어낸다.(259 페이지) 스피노자는 우리의 수동적 감정 즉 정념도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보았다.(261 페이지) 정념은 원인도 모른 채 결과에만 주목해 우리가 거기에 휩쓸려 다니는 감정이다.

 

수동적 정념을 능동적 감정으로 전환시켜 거기서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내는 힘은 이성이다. 스피노자에게 이성을 통한 인식은 사랑(아가페, 에로스, 필로스 등)을 의미한다. 이해는 공감이고 공감은 사랑이다. 저자는 열정에 이끌려 겉모습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서로 인정하면서 끝내 진정한 하나가 될 때에만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263 페이지)

 

마주침은 수동적인 웅크림에서 유래한 벗어나 능동적인 만남으로 가는 첫발이다. 그리고 마주침을 통한 공감과 이해는 그 사람의 현재를 만든 모든 삶의 역사를 알아 가려는 노력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264 페이지) 오직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저항을 견뎌낸 고된 망치질의 반복만이 빛나는 완성품을 끌어안는 벅찬 감동을 선사해줄 것이다.(266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나에게 기쁜 것은 선이고 슬픈 것은 악이지만 그 경계를 극복한 관용(寬容)은 아마도 선악의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사랑인지도 모른다는.(270 페이지) 스피노자는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271 페이지) 그것은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갔다는 의미이다.

 

자유란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이다.(271 페이지) 스피노자는 더 많은 것에 우리 몸과 마음이 적합해질수록 우리는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이며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모든 목적은 우리가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을 때 생겨나는 오해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284 페이지)

 

우리는 대우주의 질서를 속에 품은 소우주들이다. 우리는 신 즉 자연의 작은 조각들이다.(286 페이지)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는 미리 정해진 목적이란 없다. 어떤 의도 아래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자연이 가진 힘의 표현일 뿐 자연의 힘 역시 아무 목적이 없다. 자연을 움직이는 힘은 목적이 아니라 장대한 자연법칙에 따른 인과관계의 필연성이다.

 

유일하게 영원한 것은 자연의 원리인 인과의 필연성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목적이 먼저 있고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있고 우리의목적이 정해진다.(287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현재의 불안을 미래에 대한 거대한 희망으로 잠재우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미래에 달성될 부러운 나 자신에 대한 찬양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지금의 나를 무시하는 처사인지도 모른다.(291 페이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영원함에 대한 질시도 유한함에 대한 한탄도 아니라 이 순간 순간들에 영원을 새겨넣는 일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순간에 새겨 넣는 영원을 직관지(3종 인식)라 불렀다. 스피노자는 직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지만 이런 순간을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29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는 과정은 늘 자신만의 기쁨을 찾아내는 길이다.(293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상대가 밟아 온 모든 인과 관계의 흐름을 필연으로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를 진정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대우주의 영원한 법칙인 필연성을 모든 순간에 새겨넣을 때 즉 영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순간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 속에 고립된 편협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우주의 거대한 운행과 합일되는 최종적인 기쁨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다.(295 페이지)

 

저자는 인간이라는 유한한 소우주는 무함한 대우주를 자신의 가슴 속에 사랑으로 품을 수 있다고 말한다.(299 페이지) 저자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전한다.

 

나를 떠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대항하십시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는 것은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께 말씀드리니 나를 버리고 부디 당신을 찾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모두가 나를 부인할 때에야 비로소 저는 당신들께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각자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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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지난 수요일 심우장(尋牛莊)에 간 날에도 이 만큼 비가 내렸었다.

만해 백일장 참가를 일주일 앞두고 답사(踏査)차 간 것이었지만 나는 결국 백일장 참가를 내년으로 미루고 말았다.

그래도 준비를 위해 평전을 읽었고 심우장을 둘러싼 성북동의 달동네스러움을 확인했고 몇 건의 댓글을 받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지난 해 12월 29일 해설사 수업 시간에 한양도성 순례를 마치고 혜화문 앞에서 심우장 인근까지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걸어 점심을 먹었었다.

이 기억 때문에 아프다. 왠일일까? 한용운도 나도 모두 정신분석해야 할 사연을 가진 것인가?

만해를 처음부터 정신분석적 대상으로 보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 의사 김종주 박사의 책(‘이청준과 라깡’ 303 페이지)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만해의 성격은 충족되지 못한 의존적 욕구와 무의식에 억압된 적개심으로 표현되는 구강 성격과 항문 성격의 혼합된 형태로 보인다.”는 글이다.

위대한 글을 쓰는 작가는 결국 큰 억압을 이긴 콤플렉스적 존재일까?

내가 받은 댓글 가운데는 “외부는 그토록 전사(戰士)적인데, 시에서는 그토록 아니마적”이기에 독특하다는 글이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글이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평전에서 김삼웅 선생은 만해가 사로잡힌 동학군을 처형하고 혹독하게 취조한 아버지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아버지 콤플렉스가 여성주의적 성향으로 전이되었다는 말을 했다.

되살리기 싫지만 광인(狂人) 왕 영조(英祖)도 친여성적인 만큼 남자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핏 스친다.

어쩌면 내가 스피노자를 탐독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힘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자유(自由)로 보고 적극적 감정인 기쁨을 강조한 그의 철학과 내가 정확히 반대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서툴고 수동적인 정념에 좌우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 위대한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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