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쁨은 좋고 슬픔은 나쁜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를 예로 들어 기쁨과 슬픔을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랑의 기쁨은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점이다.
반면 증오의 슬픔은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능동적인 것 즉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 즉 비주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념(情念)이라 정의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양이 이전보다 많아졌는가 적어졌는가, 이다.
그래서 즐거움 속에도 슬픔이 숨어 있고 슬픔 속에도 기쁨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우 시인의 시집 ‘몰락경전’에 실린 시들을 읽다가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유명 시인인 저자에게도 시 쓰기란 쉬운 일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에 예민하다는 사실이다.
“...시의 턱뼈를 잃었다 자꾸 시가 우그러진다 자꾸 뭉그러/ 진다 문법의 발톱도 은유의 꼬리도 썩은 동아줄이 된다 바/ 닥으로 가라앉는다...”(‘다시, 訥’ 중에서),
“...흩어진 자음과 모음의 흰 알갱이들은 천정으로 스며들고/ 그물에 걸린 가시복어처럼/ 새벽안개에 끌려나온 몇 낯 국어들이 떨떠름해 한다...차라리 존엄해라 당당해라/ 결코 문장이 되지 않는 고통이여...”(‘사라진 詩’ 중에서)
시인은 “..난독증 환자가 되기에도/ 아홉 개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가 되기에도/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말한다.(‘슬픔이 부족하다’ 중에서)
‘단풍든다는 것은’에서 시인은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 는 일..”이라 말한다.
‘천수천안’에 표현된 “..슬픔의 늑골 사이로 천천히 발효되는 산제사..”란 구절이 눈에 띈다.
슬픔을 보는 힘으로 천천히 시를 발효시키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 저, 부지런한 슬픔들..”이란 표현(‘부러진 날개’ 중에서), “..매일 빨아 입는 슬픔도, 자주 빨아 입지 못하는 절망..”이란 표현(‘빨래’ 중에서),
슬픔이란 말은 없지만 “..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 되었다..”는 ‘굴절의 전통’과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는 ‘몰락을 읽다’까지..
그리고 “..진리와 동떨어진 슬픔, 그 틈/ 슬픔과 동떨어진 진리, 그 틈..”(‘나팔꽃, 떠내려가다’)까지..
나무가 무수한 몰락으로 자라듯 시인은 슬픔으로 시를 쓰고 “부족한 슬픔”을 염려하고 슬픔이 진리와, 진리가 슬픔과 동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
슬픔들... 힘이 되는 슬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