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이다. 경건함으로 채워져야 할 기독교인들의 시간이다. 나는 바흐 성악곡 감상으로 홀로이지만 일정에 동참한다.

요 사이 CD 듣기가 귀찮아 유튜브로 음악을 들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바흐 칸타타 198번을 들었다.

전편이 좋지만 마지막 파트(열한 번째 곡)인 합창곡 ‘Doch Konign! Du stirbest nicht‘가 하이라이트이다.

이상하지만 열정적인 이 부분을 들으면 예수의 수난(受難; Passion)이 생각난다. 당연히 내게 예수 수난의 핵심은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그런데 요즘 예수는 바울에 의해 윤색된 존재로 보인다. 복음서의 예수를 보아야 한다.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주제로 말을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한 정신분석 전문의는 그럴 경우 우리는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한 정보도 얻지만 화자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는다는 말을 했다.

바울도 예수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적과 다른 예수이다. 어제는 바흐 칸타타198번을 들었고 오늘은 마태수난곡을 들을 것이다.

내일은 요한수난곡, 모레는 부활절 오라토리오이다. 그렇다면 내가 순례하는 것은 예수인가? 바흐인가?

바흐 CD 전집을 구입한 지 수년이 지났다. 내가 이 음반들에서 들은 바흐 곡의 비율은 전체의 50퍼센트 정도이다.

많이 들은 장르는 성악곡들, 소홀했던 장르는 평균율을 비롯한 건반 곡들이다.

명리학에서는 우리의 사주에는 오행(목화토금수)이 열 개가 아닌 여덟 개(사주팔자)만 배정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다섯 기운이 조화롭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넘치거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바흐 음악 감상에서 나타나는 편중을 오행과 팔자의 불균형을 보는 시각으로 보고 싶다. 막연하지만 첫 걸음을 떼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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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임무성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수필(隨筆)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이다. 쉽고 편안한 장르라고 해도 비슷 비슷한 수준을 넘어서려면 정성을 다해 새롭게 써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쓴 수필집이다. 저자의 술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필도 공부를 해야 잘 쓸 수 있는 장르이다.

 

본문에는 글쓰기의 탈이 몇 가지 언급되어 있다. 쓰기에 반영할 만한 만큼 생각거리를 주는 글이다. 물론 쉽지 않다. 유의해야 할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수식이 많은 것, 남의 말을 빌어 오는 것, 혼자 아는 듯 아는 체 하는 것, 구체성이 결여된 것, 박학을 자랑하는 것 등...

 

수필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체험이 중요하고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를 건져올려야 한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도 그런 룰에 들어맞는다. 편견일 수 있지만 수필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의 장르인 것 같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갈수록 수필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매너리즘 때문일 수 있고 어느 정도 쓰게 되면 자신이 지닌 단점이 보이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여행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필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색을 찾기 어려운 장르를 튀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개성을 담아 써야 하는 수필은 그 만큼 어렵다.

 

수필은 어떻게 보면 시, 소설 등을 공부하고 나서야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음악 감상도 수필을 풍요롭게 하는 보물일 수 있다. 저자의 글은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성찰의 미덕을 보여준다. 이런 저자의 글을 접하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어렵게 쓰는 것이 단점이고 남의 것에 많이 의존하는 것이 단점이다. 남의 것이란 이론을 말한다. 그러니 이는 결국 어렵게 쓰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의 미덕은 소통에 있다. 어느 장르보다 그런 점이 강한 것이 수필이다.

 

산책도 글의 소재를 길어올리는 데 유용하다. 걷기를 사유 또는 철학과 연결짓는 세태를 떠올릴 만한 대목이다. 표제작인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보자. 다른 글에 비해 분량이 긴 이 글은 친구의 부음에 즈음한 회고조의 글이다. 나는 만일 젊은이가 친구의 죽음을 회고한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하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저자가 67세 되던 해부터 6년간 쓴 글을 모은 책이다. 1년에 열편씩의 글이다. 어느 만큼 써서 어느 정도의 글을 모은 건지 모르지만 하나 하나 정성들여 쓰고 골랐을 것이다.

 

나의 경우 하루에 한 편씩을 쓴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연습의 의미가 강한데 이제 완성도를 유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한다. 왠만한 분들은 긴장을 놓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법한 시기에 글을 쓴다는 자체만으로 칭찬 받기에 족하다.

 

이론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쓴 담담한 글은 쉬운 듯 하지만 누구나 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더구나 멋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두고 두고 옆에 두고 펼쳐볼 책으로 추천한다. 본문에 나오는 수필(隨筆)의 정의는 새겨들을 만하다. 즉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닌 수시(: )로 쓰고 기록한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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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봄 처녀라는, 가을에는 가을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던 여학생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모두 외우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라는 말을 한 부산여대 수학과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20년도 더 지나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이런 구절에 감동했으리라 생각한다.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그 수학과 여학생의 ‘사랑의 기술‘에 해당하는 책이 내게는 정신과 의사 한스 요아힘 마즈의 ‘사이코의 섬’이다.

통독 이후 동독 출신 주민들의 피폐한 심리상황을 정신분석한 책으로 아름다움보다 묵직한 사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특히 이런 문장이 마음에 든다.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하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저자는 동독 시민에 대해 쓰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동독 시민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는 말로 자신이 바로 책에서 언급한 관련 당사자 즉 분석대상임을 밝힌다.

지금 그의 ‘릴리스 콤플렉스’를 읽고 있다. 앞에서 프롬이 프로이트의 성 논의를 비판한 글을 언급했는데 이 책에는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근본적이라 할 비판이 제시되어 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는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부모의 죄가 그려져 있는데 사실 이 신화의 내용이 이성 부모에게는 성적인 관심을 느끼고 동성 부모는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콤플렉스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이 책이 말하는 릴리스(Lilith)는 ‘창세기’ 1편에 따라 아담의 첫째 부인으로 불리게 된 여자이다.

유대 역사인 ‘구약’에 의하면 신은 아담을 창조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릴리스를 창조했다.

릴리스는 아담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둘 다 흙으로 빚어졌기에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은 모성애를 마리아상과 동일시하여 형이상학적 위치에 올려놓았고 나치는 모성을 범죄에 악용하였으며 일부 여성 운동가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삶의 방식으로 낙인 찍었지만 실제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적이고 무비판적인 어머니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릴리스 콤플렉스’는 아이보다 어머니에 초점을 둔 책, 이브와 릴리스라는 두 면을 가진 여성에 대한 책,

여성의 동등권을 주장하고 적극적 쾌락을 향유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성을 의미하는 릴리스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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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이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3월 첫날부터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프던 머리가 정도를 더하게 된 것은 지난 11일부터였다.
3월 14, 15일 이틀 휴일 동안엔 통증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자다가 깨서 무리하게 글을 썼고 다시 잤다.

점점 심해지는 두통도 전혀 경험 해보지 못한 두통도 발열이나 마비, 구토 등과 함께 나타나는 두통도 아니어서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지난 2013년 MRI를 찍어 이상 없다는 결과를 들은 것이 마음을 놓게 한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4년이란 시간은 암초를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한 물리학자는 질량과 전하(電荷), 스핀을 갖는 존재인 전자를 상상하려면 평소 잠들어 있던 두뇌 부위를 써야 하기에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리언 레더먼 지음 ‘신의 입자’ 268 페이지)

내 경우 머리가 아픈 채로 전자와 그 이웃들에 관한 원고를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고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13일) 일하다 살짝이지만 머리를 부딪혀 통증이 더해졌다. 당연히 그 이후 책 읽기가 어려웠다.

레더먼도 처음 전자나 쿼크, 양자(量子) 등에 대해 배울 때 머리가 아팠을까? 그리고 (읽는지 모르겠지만) 현대 철학을 읽을 때 머리에 쥐가 날까?

읽거나 쓰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다가 지금은 읽거나 쓸 때만 머리가 아파 다행이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5번을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의 이 곡은 특별한 사연을 가진 곡이다. 이 곡의 3악장은 ‘병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바치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라는 별칭을 가졌다.

베토벤은 이 곡의 2악장까지를 쓴 뒤 병으로 누웠다가 건강을 찾은 뒤 3악장을 썼다. 길고 무겁고 약간은 어둡게 시작되는 악장이지만 후반부에서는 활발한 환희감을 느끼게 한다.

나도 베토벤과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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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신경과학자 콜린 엘러드의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신경과학과 건축, 그리고 심리학을 접목시킨 심리지리학 분야의 책이다.

인상적인 내용들이 많은데 그 중 하이데거의 철학과 그가 머물렀던 숲 속 집의 상관성을 밝힌 글은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엘러드는 어렵기로 유명한 하이데거의 언어는 그가 평생 머물렀던 숲 속 오두막 주변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산길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또한 하이데거의 책 ‘숲길‘은 독일어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몹시 어렵게 만드는 숲 속의 복잡한 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생각하고 머물고 사람들을 만나는 범위가 좁아 삶이 무미해질 때 낯선 곳을 찾아 새 생각거리들을 찾으면 좋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엘러드의 책은 여행을 꿈꾸도록 부추긴다.

4년 전 여름 강화도 고려산 자락의 적석사(積石寺) 인근의 수행자를 찾은 뒤 산 정상에 올라 무심하게 펼쳐진 서해를 바라본 것이 내가 행한 최근 여행이다.

다시 그 분을 찾아 내 어렵고 힘든 근황을 전하고 조언을 얻은 뒤 강화의 다른 산과 바다들을 찾을까?

아니면 더 멀고 낯선 곳을 찾아 쉼이 아닌 일깨움의 일정을 잡을까?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떤 경우든 새로운 무언가를 일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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