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봄 처녀라는, 가을에는 가을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던 여학생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모두 외우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라는 말을 한 부산여대 수학과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20년도 더 지나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이런 구절에 감동했으리라 생각한다.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그 수학과 여학생의 ‘사랑의 기술‘에 해당하는 책이 내게는 정신과 의사 한스 요아힘 마즈의 ‘사이코의 섬’이다.
통독 이후 동독 출신 주민들의 피폐한 심리상황을 정신분석한 책으로 아름다움보다 묵직한 사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특히 이런 문장이 마음에 든다.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하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저자는 동독 시민에 대해 쓰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동독 시민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는 말로 자신이 바로 책에서 언급한 관련 당사자 즉 분석대상임을 밝힌다.
지금 그의 ‘릴리스 콤플렉스’를 읽고 있다. 앞에서 프롬이 프로이트의 성 논의를 비판한 글을 언급했는데 이 책에는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근본적이라 할 비판이 제시되어 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는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부모의 죄가 그려져 있는데 사실 이 신화의 내용이 이성 부모에게는 성적인 관심을 느끼고 동성 부모는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콤플렉스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이 책이 말하는 릴리스(Lilith)는 ‘창세기’ 1편에 따라 아담의 첫째 부인으로 불리게 된 여자이다.
유대 역사인 ‘구약’에 의하면 신은 아담을 창조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릴리스를 창조했다.
릴리스는 아담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둘 다 흙으로 빚어졌기에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은 모성애를 마리아상과 동일시하여 형이상학적 위치에 올려놓았고 나치는 모성을 범죄에 악용하였으며 일부 여성 운동가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삶의 방식으로 낙인 찍었지만 실제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적이고 무비판적인 어머니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릴리스 콤플렉스’는 아이보다 어머니에 초점을 둔 책, 이브와 릴리스라는 두 면을 가진 여성에 대한 책,
여성의 동등권을 주장하고 적극적 쾌락을 향유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성을 의미하는 릴리스에 대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