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이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3월 첫날부터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프던 머리가 정도를 더하게 된 것은 지난 11일부터였다.
3월 14, 15일 이틀 휴일 동안엔 통증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자다가 깨서 무리하게 글을 썼고 다시 잤다.
점점 심해지는 두통도 전혀 경험 해보지 못한 두통도 발열이나 마비, 구토 등과 함께 나타나는 두통도 아니어서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지난 2013년 MRI를 찍어 이상 없다는 결과를 들은 것이 마음을 놓게 한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4년이란 시간은 암초를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한 물리학자는 질량과 전하(電荷), 스핀을 갖는 존재인 전자를 상상하려면 평소 잠들어 있던 두뇌 부위를 써야 하기에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리언 레더먼 지음 ‘신의 입자’ 268 페이지)
내 경우 머리가 아픈 채로 전자와 그 이웃들에 관한 원고를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고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13일) 일하다 살짝이지만 머리를 부딪혀 통증이 더해졌다. 당연히 그 이후 책 읽기가 어려웠다.
레더먼도 처음 전자나 쿼크, 양자(量子) 등에 대해 배울 때 머리가 아팠을까? 그리고 (읽는지 모르겠지만) 현대 철학을 읽을 때 머리에 쥐가 날까?
읽거나 쓰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다가 지금은 읽거나 쓸 때만 머리가 아파 다행이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5번을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의 이 곡은 특별한 사연을 가진 곡이다. 이 곡의 3악장은 ‘병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바치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라는 별칭을 가졌다.
베토벤은 이 곡의 2악장까지를 쓴 뒤 병으로 누웠다가 건강을 찾은 뒤 3악장을 썼다. 길고 무겁고 약간은 어둡게 시작되는 악장이지만 후반부에서는 활발한 환희감을 느끼게 한다.
나도 베토벤과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